2014년 8월 2일.
오늘은 풍천 상리와 하리의 전의이씨, 예안이씨 종택과 그 언저리를 돌아보기로 한 날입니다.
예년에도 8월 답사는 휴가 기간과 한더위 탓인지 회원이 많이 참여하지 않는 답사가 되곤 했습니다.
민해님 전언에 의하면 임교수님과 그의 일본인 친구분이 답사에 함께할 계획이라 하네요. 하필 참여 회원이 적을 것 같은 이번 답사에 함께 한다니 우리 모임이 초라해 보일 것 같은 생각이 스칩니다. 복주여중 운동장 벤치에 앉아 회원들을 기다리다가 하늘을 봅니다.
태풍 나크리의 여운인지 바람이 불고 나뭇가지가 춤을 추는 것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무사히 다녀오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이 사진은 조리개 닫고 셔트 스피드를 느리게 하여 찍으면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표현하기에 좋았을텐데... 요즘 사진공부를 안하다보니 자꾸 감이 떨어집니다.
오늘은 연두님, 안동사랑님, 저이리님, 민해님, 임교수님, 하시모토상 그리고 나 이렇게 7명이 답사에 참여합니다.
안동사랑님께서 상주에서 깻잎을 공수해 와서 회원분들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이런 말이 생각나네요.
“복(福)!
베풀어야 스스로 찾아온다.
구(求)해서 얻음이 아니다.”
안동사랑님은 지난 달 답사에도 출장을 다녀오는 길로 피곤한 몸을 이끌고 참여하였고, 오늘도 상주에서 오느라 점심을 못 드셨다합니다.
이런 마음들이 모여 작지만 힘있는 우리가 되는 것 같습니다.
안동사랑님께 감사드립니다.
연두님 차에는 슈렉, 저이리, 안동사랑, 민해님 차에는 임교수님, 하시모토상 이렇게 분승하여 풍산을 향해 달립니다.
체화정은 대부분 가 본 장소이므로 시간이 되면 마지막에 들르기로 하고 먼저 상리 예안이씨 종택으로 갑니다.
이 건물은 예안 이씨 7세손 이훈(1489-1552)의 종택으로 조선 중종 20년(1525) 무렵에 세워졌으며, 그는 연산군 10년(1504) 생원시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1519)의 참혹함을 보고 나서 벼슬의 뜻을 버리고 낙향하여 이 집을 짓고 살았다 합니다.
오늘의 해설을 맡으신 연두님께서 전의 이씨와 예안 이씨 세계도를 배부하고 자세한 설명을 해 주었습니다.
다음 찾아간 곳은 하리에 있는 모전삼층석탑입니다.
석탑이라 했으니 석재를 써서 만든 탑이고요, 모전이란 전탑 모양을 본떠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전탑의 모양을 한 석탑이라고 이름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임교수님 말씀은 그냥 석탑으로 보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임교수님께서 탑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셨으며, 안동지역에서는 안동옥동삼층석탑이 조형미가 뛰어나다고 하였습니다. 일전에 서각작품 칠작업으로 진명학교에 갔다가 대문 앞에서 훔쳐보았는데, 한 번 자세히 보러 가야겠습니다.
탑에서 탑신 위에 지붕 모양으로 덮는 돌을 옥개석(屋蓋石)이라 하는데, 옥개석이 한 덩어리로 되어 있습니다. 영양 봉감동모전석탑의 경우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서 전탑모양으로 만들었습니다. 탑신도 옥개석도 모두 벽돌모양의 석재를 쌓아 만들었는데 이것이 제대로 된 모전석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우 전탑이 많은 것은 아마도 그 지역이 석재가 부족하여 벽돌을 구워 전탑을 많이 조성했나 봅니다.
이곳 일대를 안동에서는 풍산 우렁골(芋洞)이라 합니다. 芋는 토란 우字입니다.
하리동 일성당으로 올라갑니다.
이 건물은 조선 숙종 6년(1680) 경에 이문한이 지은 것입니다. 집의 이름은 이곳에서 하루(日)를 반성(反省)한다는 뜻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현판에 마음을 빼앗겨 건물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일성당] 원래 있던 현판 같습니다.
[일성당] 서예가이신 일중 김충현 선생의 글씨입니다.
[산호벽루]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입니다.
편액은 처음 사진처럼 틀을 만들어 넣는 것이 전통이나 요즈음은 아래의 두 개처럼 틀을 만들지 않고 거는 것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용마루 아래에 접시 2개를 붙여 놓았습니다. 하시모토상은 신기하다며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도 따라 찍었습니다. 하시모토상이 궁금해 하니까 누군가가 도깨비의 눈이라며 사악한 기운을 방비하는 벽사의 의미인 것 같다고 하네요.
보통 ㅁ자집을 지울 때에는 앞쪽에 사랑채, 안쪽에 정침 그리고 그 사이를 양쪽으로 연결하여 짓는데 이 일성당 건물은 그렇지 않고 반대로 지어졌다고 합니다. 묘한 구조를 하고 있네요.
일성당 옆의 종산정사에 올랐습니다.
이 현판에는 종산정이란 당호를 지은 내력이 적혀 있는데, 한문이 짧아 자세히 알 수 없네요. ㅎㅎ
이곳은 어필영정각입니다. 御자를 높여 쓴 이유는 아시겠지요.
난졸재 이산두의 영정을 모셔놓은 집입니다.
영조는 기사(耆社)에 들어온 사람의 초상을 그리도록 명하고, 기사의 여러 당상들을 불러 연회 때 영남인으로 나이 90여세된 이산두(李山斗)란 자가 있었는지를 묻고, 화사(畵師)에게 그 초상을 가져오도록 명하고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가 함께 기사에 들어갔는데, 그 얼굴을 미쳐 보지 못하여 마음속으로 항상 생각하였다.'고 하였다. 화공이 풍산에 와서 그림을 그려가지고 갔고, 영조가 원손을 시켜 '九十世像'이란 4글자를 쓰게 하였다. 풍암서원에 제향되고 영정도 그곳에 있었으나 서원이 대원군 때 철폐되면서 어필영정각을 지어 영정을 옮겼다.
잠겨 있어서 볼 수 없었습니다.
앞의 건물이 어필영정각이고요, 뒤에 보이는 건물이 침류정입니다.
"돌로 베게 삼아 눕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는 생활을 하고싶다."는 枕石漱流(침석수류)에서 따온 이름입니다.
침류정을 찾지 못하고 내려왔는데, 임교수님이 내려오지 않아서 연락하던 중 침류정 가는 길을 찾았다고 다시 올라오라 하여 찾아갔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여기서 간식 타임입니다.
임교수님이 침류정에서 내다보는 경치가 정말 아름다워서 되돌아오라고 했다는군요.
사진으로는 크게 느낄 수 없으나 가을 날이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침류정 건물에 있는 문양인데요. 독특해서 찍었습니다. 태극이나 이런 도교적 냄새 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언덕 너머에 기와지붕이 보여 계획에 없지만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연두님이 언덕을 내려가면서 물이 있어 괜찮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나는 시멘트 포장이 되어 있어 괜찮을 거라고 답했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오른쪽 언덕의 뽕나무(?) 베어 놓은 것을 피하려 핸들을 왼쪽으로 틀었더니 차가 도로를 벗어나 앞바퀴가 밭 옆의 물고랑으로 빠졌습니다.
난감합니다.
미안하기도 하고요.
저이리님, 하시모토상, 나 셋이서 앞을 들고 후진하는 방법을 몇 번 시도해 보았으나 실패했습니다. 차가 무게가 있고, 전륜구동방식이라.
할 수 없이 보험사에 연락하고 견인차를 기다립니다.
다른 분들은 걸어서 그 궁금타던 문제의 와가에 가고,
차주이신 연두님은 걱정말라며 이것도 추억거리라며 이야기 했지만
나는 마음이 쓰여 사고 현장에서 연두님과 함께 견인차를 기다렸습니다.
30분쯤 지나 우여곡절 끝에 견인차를 마중하여 현장에 도착했습니다.
견인기사는 차량에 문제는 없는 것 같다고 하며, 카센타에 가서 한 번 점검해보라고 합니다.
민해님의 차는 충효당으로 먼저 가고, 우리는 차를 완전히 빼서 돌린 후 뒤따라 갑니다.
시간 상 충효당은 거르고 곡강정에 도착하였습니다.
곡강정은 조선후기에 건립한 정자로 이름은 이호(李瑚)의 호인 곡강(曲江)에서 따온 것으로, 이호의 조부는 예안 이씨 안동 입향조인 근제공 이전(李筌)입니다. 이호는 종사랑(從仕郞) 벼슬을 지냈으며 서애 류성룡의 문인으로 필법이 힘차고 뛰어나 병산서원을 창건할 때 당실문(堂室門)의 편액을 모두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풍산 만운리에 모선루를 지어 근제공 이전의 유덕을 추모하였습니다. 마음이 산란하여 곡강정의 사진도 찍지 못했네요.
마을 분들께 길을 물어 예안이씨 사직공파 구택을 찾아갑니다.
조선 중종 때 부사직(副司直)을 지낸 이필간의 아들 이영(李英)이 중종 14년 기묘사화(1519)를 피하여 고향으로 내려와 중종 20년(1525) 경에 세운 집입니다. 비교적 원형이 잘 보존된 집이나 집안이 쇠락한 탓인지 지금은 다른 사람의 소유로 되어 있다고 합니다.
마지막 찾아간 곳은 하리동 3층석탑입니다.
상륜부가 없으며 임교수님 말씀에 의하면 처음에 보았을 땐 기단부도 땅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합니다.
탑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임교수님이 운영하시는 “유안사랑”에 가서 김복영님의 사진전을 관람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이조아(총무)님이 유안사랑 앞에서 합류했습니다. 이번에 우리 회원인 가수 myth님이 교감 발령이 날 것 같다는 기쁜 소식을 전해주네요.
유안사랑에서 김복영님의 사진을 보니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습니다. 사진을 찍고 싶다는 옛 병이 살짝 도집니다.
임교수님께서는 오늘처럼 여러 곳을 다니는 답사도 좋지만 한 곳에 온종일 머물며 밀도있게 답사하는 것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충효당이 참 아름다워 기억에 남는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문화와 사진을 접목한 답사도 좋을 거라고 했습니다.
교수님께서 친구분인 하시모토상과 저녁식사를 하신다 하여 두 분은 빼고 식당에 갔습니다.
오늘은 거하게 먹습니다.
갈비!
뭐, 회원이 적게 참여할 때에는 예전부터 이런 일탈이 있어왔습니다.
심상하면 답사에 많이 참여해주세요. ㅎㅎ
9월 답사는 추석 관계로 2주 토요일(13)에 갑니다.
다음 만날 때까지 잘 지내시고 웃는 얼굴로 만나요.
첫댓글 역시 회장님 답사기, 좋습니다. 여러 가지 일신상 문제로 마음이 안 편하실 텐데 답사기까지 올려 주시고 감사 감사!
회장님의 사진도 역시 좋습니다. 그러니까 다들 나름의 자신의 멋이 있습니다.
민해님의 답사기는 민해님의 맛이, 회장님의 답사기는 회장님의 맛이!
옴메,, 전 기죽어요 ㅎㅎ
이러시면 제가 오랜만에 답사기 쓴 것 후회하게 됩니다! 앞으로 운전 담당 그만 두고 답사기 담당으로 임명합니다. - 회장-
전 욕심이 많아 다 할래요 ~~~ 메 ~~~~
회장님 내용중에 교수님께서 아름답다고 말씀하신 탑은 평화동 삼층 석탑이라하신것 같은데요 ??
그리고 마지막 사직공파구택은 남의 소유라기보다 제 친구집이 여전한데요 ??
제 친구는 여전히 추석때 성묘하러오거나하면 그집에서 잔데요..
다시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
종손이 지키지 못한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제가 본 글에도 그랬지만, 그날 사직공파구택을 물어봤을 때 가르쳐 준 동네 어른도 그랬습니다, 말씀하시는 어투가 종손은 아니지만 예안이씨 사직공파 후손 같던데.
마을 분께서 "우리 형님이 지키지 못해...남에게 넘겼다"고~~
평화동 진명학교 앞에 있는 탑은 공식 명칭이 옥동삼층석탑 아닌가요? 문화재청에서 이름을 바꾸었나???
헐. 제가 말하는건 안기동 탑인가봐요.안기동 대로 안쪽에 작은탑하나 있잖아요.
그 탑이 아름답다는 소리를 듣고 그 탑으로 착각을 했네요.
제가 말하는 탑 아시죠 ?
그리고 사직공파 구택에 대해 친구랑 통화를 했답니다.
자기는 충효당 후손인데 할아버지 대에서 맏집을 샀다네요.그래서 지금 둘째집 충효당과 셋째집 상리종택에서 제 친구로부터 다시 사들여 맏집이 종택이 없으니 다시 줄려고 하는데 제 친구는 팔 생각이 없다네요. 노후에 다시 여기 들어와 산데요 ㅠ ᆞ ㅠ
소유주가 다행히 전혀 남이 아니여서 고맙긴 한데 객관적으로 봤을땐 다시 맏집 종택으로 남았으면 하나 제 친구도 물려받았고 어린시절 살았던 소중한 공간이라 뭐라할순 없네요 ㅠᆞㅠ
@Shrek-김명 맞습니다. 지금은 그 동네가 평화동이구요.
@이철숙(민해) 네 알아요. 그 탑 아니고 지금은 평화동, 진명학교 근처에 있는 탑을 말한 것으로 전 그때 들었는데요.
제가 말하고 있는건 진명학교 앞에 있는 탑이 아니예요. 거기 말고 작은 탑하나가 있는데 그 탑이 앙증맞게 이쁘다는 거예요.
ㅎㅎ
이제 제가 말하고 있는 탑 아시겠어요 ?
이 탑 모르시나 ?
회장님 답사기는 늘 참 감동입니다. 앞으로도 쭈욱 부탁해요 ~~~~
차가 빠졌을 때 답사기 쓴다고 약속해서 꾸물대다가 이제야 썼어요. ㅎㅎ
어필영정각에 보관되어 있던 이산두 영정은 지금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 보관하고 있다고 하네요.
그럼 현재는 영정각만 있는 셈이네요?
진품은 보통 국학진흥원에있고 복사본 정도는 가져다 놓지 않나요 ??
복사본이 있는 지는 모르겠구요. 다른 곳(경주)에 사는 문화재 관심 있는 분이 문화재 등록이 되어야 하는데 안 된 것을 조사해서 등록 신청하려다 보니 몇 개가 벌써 등록이 되었다고 목록이 나왔는데 그 중 하나가 이 영정이에요. 벌써 문화재로 등록도 되어 있고 한국국학진흥원에 위탁되어 있다고 써 놓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