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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행일/집결장소 : 2017. 10.28(토) / 2,9호선 종합운동장역 2번출구 (07시10분)
▣ 참석자 : 6명
▣ 산행코스 : 주차장-가야사지-쉬흔길바위-옥양봉-석문봉-쉼터-상가저수지-뒤풀이장소-남연군묘-주차장
▣ 동반시 : "가을날" / 김현성
▣ 뒤풀이 : 파전, 도토리묵, 동태찌개에 막걸리 / "밤나무숲속"<예산군 덕산면, 010-9421-1573>
시산회 321회의 산행은 재경광주고총산악회 가을산행 행사와 함께 하기로 하였다. 우리 20회는 2009년 12월 9일(일), 124회의 산행때에 12명이 다녀온 때문인지(?) 6명만이 참가하였다.
총산악회의 참가인원은 120여 명인데, 2회 2분, 8회 6분, 10회 20분 등 38회까지 17개의 기수에서 참가하였다. 16회는 30여 분이 참가를 했는데, 15분은 광주에서 합류를 하였다고 한다.
지난 주에 졸업 50주년 행사를 했던 감격이 계속된 탓인지, 그 때 단체복을 그대로 입고 참가했다. 잠실종합운동장역에서 07시30분에 출발한 버스가 예정된 시간에 맞추어 10시경에 "가야산"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약 30여 분에 걸쳐서 행사를 마치고, 10시30분 부터 산행이 시작되었다. 상큼한 바람이 서울과 멀어졌음을 저절로 느끼게 해 준다.
금번 등산길은 두 번째이고, 그 기간이 1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예전과 같은 코스를 가는데도 과거 행적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함께 했던 종화 친구는 총명하게도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으니 부럽지 않을 수 없다.
오직 기억나는 것은 남연군묘 뿐이다. 역사책에서 보았던 도굴미수사건 때문에 기억하는가 보다. 고종 5년(1868년) 5월, 독일 유대계 상인 오페르트와 조선인 2명을 포함한 140명의 도굴단이 도굴을 시도했으나 묘광이 견고하여 실패했다고 기억한다.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이 강화되는 결과만 초래하여 망국의 길로 이어졌으니 새삼 과거 역사를 되새기게 한다. 등산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날씨이다. 옥양봉까지는 꽤 가파른 산길이어서 선배님들은 힘들어 하면서도 우리보다 앞서 오른다.
옥양봉에 올라 바라보니 사면이 넓은 평야지대이다. 영암 월출산에 올라 바라보는 풍경과 비슷하다. 옥양봉에서 석문봉까지의 능선길은 높낮이가 거의 없는 평탄길로 이어져 있다. 석문봉 부근의 평탄한 곳에 자리를 잡고 간식타임을 가졌다. 그리고 동반시 김현성 시인의 "가을날"을 내가 낭송하였다.
"가을날" / 김현성
가을 햇살이 좋은 오후
내 사랑은 한때 여름 햇살 같았던 날이 있었네
푸르던 날이 물드는 날
나는 붉은물이 든 잎사귀가 되어
뜨거운 마음으로 사랑을 해야지
그대 오는 길목에서
불 붙은 산이 되어야지
그래서 다 타 버릴 때까지
햇살이 걷는 오후를 살아야지
그렇게 맹세하던 날들이 있었네
그런 맹세만으로
나는 가을 노을이 되었네
그 노을이 지는 것을 아무도 보지 않았네
하산하여 도착한 식당은 비닐하우스였으나 120여명을 수용할 수 있을만큼 널찍하다. 동태찌게와 햇쌀밥이 입맛을 다시게 하며, 시원한 동동주가 일품이다. 먼 곳까지 가서 즐거운 산행을 하고, 우리 시산회의 등산시 보다 빨리 귀가할 수 있도록 수고해 준 집행부에 감사드린다.
2017년 11월 8일 한양기 씀.
※ 김현성 시인
1984년 서울예전 방송연예과를 졸업, 1991년 1집 음반 '타래밭' 성음사 발매, 1999년 봄, 김현성씨는 시노래 모임 '나팔꽃' 결성, 가수이자 시인이다.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 작곡자, 시집 "그대 어서와 그리움 나누고 싶다" 등이 있다.
우리에게 잊혀져 가는 노래에 음을 붙여 곡을 만들기도 하는데, 우리의 역사가 기록된 시들을 잊어가고 대중음악만을 찾는 현대인들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것 같기도 하다. 한국의 음유시인이라고 말한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주제가 이였고, 김광석이 불렀던 "이등병의 편지", 윤도현의 "가을 우체국 앞에서"의 노래 등을 작곡한 음악가 이다. 그가 전국 최초의 군 단위 노래패라고 말하는 "종이연"을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유명스타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20살 남짓의 윤도현도 있었다.
종이연이 해체한 후에는 따로 또 같이 활동하는 일종의 연합 형태의 노래모임인 "혜화동 푸른 섬"을 만들어 후배들과 음악을 공감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그는 운동권의 노래를 주로 불렀던 일명 노래패 집단에서는 거목으로 칭하지만, 그는 운동권의 노래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노래를 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 후로도 문학과 음악을 접목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왔는데, 한국의 시를 포크 음악에 담아 많은 음반을 발표했으며 세 권의 시집과 산문집도 출간했다. 그런 그에게 시노래 모임 '나팔꽃'은 음악인생의 마지막 모임이다.
'나팔꽃'은 음악지기인 백창우 씨와 함께 "바위섬"을 부른~ 김원중 씨의 3집 음반을 프로듀싱 하면서 시작됐다. 그 음반에 담긴 노래들이 대부분 시를 가사로 만든 것이었고, 이번에 시노래 모임을 만들자고 세 명이 의기투합 했다.
백창우 씨가 평소 잘 알던 도종환 선생을 끌어들였고, 김원중 씨는 친하게 지내던 안도현 시인에게 참여를 제안했다. 그러자 안도현 시인은 "용택이도 해야 되는데" 하며, 김용택 시인을 끌어 들였다. 그렇게 1999년 3월 "나팔꽃"이 태동하였다. 처음에 8명으로 시작했던 동인은 어느새 16명으로 늘었다.
정일근 시인이 만든 울산 시노래 모임 "푸른 고래", 한보리 씨가 주도하는 광주의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 같은 지역 조직도 생겼다. 나팔꽃의 슬로건은 "작게, 낮게, 느리게". 그는 올림픽 정신과 반대 라며 한쪽에 댄스가요가 있다면, 다른 쪽에는 시노래도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취지를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