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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국의 길, 그 지난(至難)한 여정
♣ 1947년, 대전환
미국에 도착한 이승만은 특유의 왕성한 활동력을 발휘했다. 하지의 정책을 비판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 그는 언론과 미국 정치계, 특히 한국 문제를 취급하는 국무부를 대상으로 집요하고 열정적인 설득 작업에 나섰다. 국무부에 제출한 건의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우리의 독립 요망은 즉시 성취되어야 하며 만약 그렇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한국인의 인내는 최후 단계에 달하고 있으며 한국인의 정당한 요구는 즉시 허용되어야 한다. 즉 자유롭고 민주주의적인 한국의 탄생이야말로 극동의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전 세계에서 회피하고자하는 새로운 전쟁이 야기될 것이다."
미국에 한국을 알리는데 혁혁한 공로를 세웠던 올리버가 1943년에 쓴 책의 제목은 "잊혀진 나라 한국"이었다. 제목 그대로 한국은 미국에게 잊혀진 나라였다. 하지만 특급 외교가 이승만의 활약은 잊혀진 나라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이승만을 통해서 <뉴욕타임즈> 등 주요 언론매체들은 "한국은 내란의 위기 직전에 있다.", "북괴군 50만이 남침을 준비 중이다.", "하지(John R. Hodge)는 한국을 소련에 팔아넘기려고 한다.", "미국은 즉시 독립을 주던가 아니면 소련과 함께 물러가라.", "30일 내지 60일 이내에 남한에 군정을 인계할 과도 독립 정부가 수립될 것"이라는 등의 흥미진진한 기사를 보도하였다. 워싱턴 정가에서 '코리아 돌풍'을 일으킨 것이다.
독립 운동가 시절, 국무부는 이승만에게 적대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들도 이승만을 한국 국민들의 지도자로 대했다. 국무부 피점령국 담당 차관보 존 힐드링(John Hilldring) 장군은 맥아더와 절친했으며, 평소 이승만을 존경하고 있었다. 이승만과 힐드링의 회담은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2차 대전 이후로 이승만이 가졌던 오랜 불안은 한국을 흥정의 대상으로 삼아 소련에 넘겨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워싱턴을 방문하고 힐드링을 만나면서, 이승만의 불안은 사라졌다. 이제 그의 관심은 한국인들이 자치 능력이 없다는 구실 아래 독립이 지연될 것이라는 생각에 쏠려있었다.
그때 또 한번 세계 정세의 타이밍이 이승만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오랫동안 소련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공산주의에 대해 협력적인 태도를 취해왔던 미국의 정책이 하루아침에 뒤집어져버린 것이다. 발단은 그리스와 터키였다. 소련의 지원을 받은 공산 세력은 그리스의 합법적인 정부를 무너뜨리려고 했다. 소련은 터키에 해군 기지를 설치하여 서방 국가들을 위협하려고 하고 있었다.
트루먼은 소련의 팽창주의에 맞서는 보다 근본적인 정책을 세우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불과 2년 전까지만 해도 독일 및 일본과의 전쟁에서 같은 편에 선 동맹국이었던 소련을 주적(主敵)으로 설정하는 전략상의 일대 변화였다.
'트루먼 독트린'(The Truman Doctine)으로 역사에 남은 연설은 1947년 3월 12일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18분 동안 이어졌다. 트루먼은 그리스와 터키를 도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뒤 이렇게 말하였다.
"세계 역사의 현 단계에서 거의 모든 나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양자택일(兩者擇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나는 다수의 뜻에 따르는 체제로서 사람들은 자유로운 제도, 대의(代議) 정부, 자유선거, 개인의 자유, 언론과 종교의 자유, 그리고 정치적 압제로부터의 자유를 누린다. 다른 하나는 소수가 다수에 강제(强制)한 삶의 양식인 바, 테러와 압제를 동원하여 신문과 라디오를 통제하고 선거를 조작하며 개인적 자유를 탄압한다.
나는 무장된 소수나 외부 세력이 자유민들을 복속시키겠다고 달려들때 이에 저항하는 그들을 돕는 것이 미국의 정책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자유민들을 도와서 그들이 그들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해나가도록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곧 공산주의와의 대결 선언이었다. 어설프고 성과도 없이 이용만 당했던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하고 정면 대결로 나간다는 방향 전환이었다. <뉴스워크>는 이 역사적인 연설에 대하여 이렇게 논평했다. "만약 말(言)이 국가들의 미래를 결정한다면 이 연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은 정확한 예측이었다. 트루먼의 연설 이후로 인류의 역사가 다시 쓰여 졌다. 미주리주의 농촌 출신으로 순박하고 솔직하며 용감한 품성을 지녔던 트루먼은 자신의 연설대로 신속하게 움직였다.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창설하여 서유럽과 미국의 집단 안보를 강화하고, 마셜 플랜(Marshall Plan)으로 유럽의 전후(戰後) 복구를 도왔다.
트루먼 독트린은 적과 동지를 뒤집어 놓은 결과를 초래했다. 2차 대전의 동료였던 소련은 적군이 되었고 적이었던 독일은 일본은 아군(我軍)이 되었다. 미국은 독일과 일본을 민주화하여 경제를 부흥시키면서 이 두 나라가 서방 세계 편에 서도록 유도한다.
트루먼 독트린이 1947년이니, 1917년 공산 혁명 이후 30년만이다. 미국이 소련의 실체를 직면하고 대결을 선언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이승만은 1917년 무렵부터 확고한 반공을 선언했다. 이승만이 미국보다 30년을 앞서간 것이다. 30년을 기다리느라고,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해야 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트루먼 독트린은 대한민국의 운명에도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미국은 한반도에서 되지도 않을 좌우합작이나 소련과의 합의에 매달리는 정책을 점차 포기한다. 따라서 좌우합작에 반대하고 소련의 위협에 대항하는 단독 정부 수립을 추진한 이승만의 입지가 강화된다. 이승만은 트루먼 독트린이라는 세계사의 대세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기에서 역사의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트루먼 독트린은 뜻밖에도 남한으로부터의 미군 철수를 재촉하게 된다. 유럽에 들어가는 경비가 큰 폭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극도의 빈곤이 공산당의 기반을 만들어 준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마셜 플랜이라는 원조 계획을 세우고 모든 재력을 유럽에 쏟아 붓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경비를 더욱 삭감하여야 했다. 결과적으로 1947년 가을부터 미국은 한국으로부터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철군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명예를 지키면서 한반도에서 손을 떼는 방법은 유엔이었다. 미국은 소련과의 합의가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리고 한국 문제를 유엔에 상정했다. 1947년 11월 14일, 유엔 총회는 독립 정부 수립을 위해 한반도에서 유엔 감시 하에 자유선거를 실시하는 안건을 표결에 붙였다. 결과는 43대 0, 만장일치였다.
결국 1947년은 이승만의 미국 방문으로 시작하여 한반도에서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 독립 정부를 수립한다는 유엔의 결의로 끝났다. 이로써 한반도에 대한 강대국들의 신탁 통치는 무호가 되어버렸다.
이승만을 만났던 힐드링은 국무부의 피점령 국가 담당 차관보에서 은퇴한 뒤인 1949년 1월 6일 이 문제에 관하여 중요한 증언을 남겼다.
"소련의 비위를 건드릴까 두려워서 신탁 통치 협정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지 못했던 미국의 관리나 언론인들을 한 사람씩 차례로 설득해나간 것은 이승만, 올리버, 그리고 임병직의 끈질기고도 참을성 있는 노력이었다. 그들은 한국 문제를 정직하게 처리하고자 했다.
그것은 하나의 위대한 십자군 운동이었다. 지금도 치를 떨떤 반대자들의 주장을 뒤집어 엎던 기억이 즐거움과 기쁨으로 나를 채운다. 이승만과 그의 참모들은 미국으로 하여금 강대국 소련을 다루는 편법적인 방법을 버리고 약소국 한국에 대해 정당하고도 의로운 태도를 취하도록 일에 매달렸다. 이승만 박사는 그 일을 해냈고 미국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브루스 커밍스의 표현처럼, 1947년은 대전환의 해였다.
♣ 우리 역사 최초의 자유선거, 5. 10 총선
유엔의 결의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필리핀, 인도, 시리아의 8개국 대표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결성했다. 유엔 위원단은 1948년 1월 8일 한국에 입국했다. 그들의 목적은 남한과 북한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한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정권이 수립되어있던 북한은 유엔 위원단의 방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2월 26일 유엔 소총회는 유엔의 감시가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실시하도록 결의했다. 이 결의에 따라 5월 10일, 우리 역사상 최초의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총선거를 위한 선거법에는 특이한 조항이 있었다. 친일파 배제 조항이다. 제2조는 1)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은자 2)일본 제국의회의 의원이 되었던 자 등은 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제3조는 1)일제시대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 및 헌병보 또는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및 그 밀정행위를 한 자 2)일제시대에 중추원의 부의장 고문 또는 참의가 되었던 자 3)일제시대에 부 또는 도의 자문 혹은 결의기관의 의원이 되었던 자 4)일제시대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던 자 또는 훈 7등 이상을 받은 자(단 기술관 및 교육자는 제외함) 등은 피선거권이 없다고 규정했다. 이에 따라 친일파들은 아예 선거에 출마조차 할 수 없었다. 대한민국을 친일파가 세운 나라라고 폄하하는 흑색선전의 허구성이 여기에서도 증명된다.
수준 높은 서예가였던 이승만은 5. 10 총선거를 앞두고 붓을 들었다. 그가 남긴 휘호는 "방구명신(邦舊命新)", 나라는 오래지만 명은 새롭다는 뜻이다. 유영익은 여기에서 명이란 기독교적인 새로운 하늘의 명(천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기독교라는 새로운 토대 위에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자 했던, 한성 감옥의 꿈이 오십여 년이 지난 뒤에 열매로 맺어진 것이다.
좌익들의 격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한국인들은 오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투표를 거쳐서 지도자를 선출하는 역사적인 행위에 참가했다. 대부분의 미국 언론들도 90%가 넘는 투표율을 들어 성공적이었다고 평가했다.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은 5. 10 총선거에 대한 보고서를 다음과 같이 작성했다. "언론, 출판, 결사의 민주적 자유권이 보장된 합당한 수준의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실시된 이번 선거는 전체 한국 인구의 약 3분의 2가 거주하며 감시 위원단의 접근이 허용된 지역 유권자들의 자유의사가 정확히 표현된 것이다."
대한민국의 건국에 앞서 첫 번째 선거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북한의 선거와 비교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흔히 민주주의에 대한 정의로 링컨의 게티스버그 연설을 꼽는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이다.
그중에서도 핵심은 "국민에 의한" 정치이다. 국민이 참여하지 못하게 해놓고 국민의 정치 혹은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하면 말이 안 된다. 국민에 의한 정치의 가장 중요한 요건은 투표이다. 국민이 스스로의 자유 의사에 따라 통치자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투표이되 자유 투표여야하고 비밀 투표여야 한다.
이 점은 민주주의 역사를 들추어보아도 분명히 확이된다. 그리스가 민주주의의 발상지로 알려진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도편추방제"에 있다.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의 이름을 도자기에 적어 비밀로 투표하게 한 것이다.
이처럼 민주주의의 핵심은 자유 투표와 비밀 투표로 이루어지는 선거이다. 이 원칙으로 볼 때 소위 '북조선 인민 민주주의 공화국'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 1946년 11월 3일에 북한에서도 도/시/군 인민 위원 선거가 치러졌다. 이주영은 이 선거의 추억을 회고한다.
"어린 시절 북한에서 마당에서 노는데 사람들이 와르르 수십 명 대문 안으로 들어왔다. 검은 통과 흔 통을 들고 왔다. 그날 어머니가 동생을 낳았다. 선거 날 산모가 투표하러 가지 못하자, 투표함을 들고 집으로 찾아 온 것이다 ...
국회의원 200명을 뽑는다면 당연히 한 지역구에서 여러 후보가 나서서 경쟁한다. 그것이 자유선거이다. 그런데 북한에서는 인민위원 200명을 뽑는다면 200명 명단을 적고 다 받아들일 것이냐, 안 받아들일 것이냐를 투표하게 한다.
찬성하면 희 통에, 반대하면 검은 통에 표를 넣는다. 당시 무서운 상황에서도 기독교인들이 검은 통에 표를 넣었다. 지금은 투표함이 아예 하나이다. 찬성하면 흰 통에다 넣고 반대하면 가서 따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을 민주주의라는 범주에 넣고 이야기하면 말이 안 된다."
5.10 총선거의 선진성은 다른 나라들과의 비교에서도 나타난다. 우리의 첫 번째 선거는 남녀, 재산의 차별 없이 일정 연령 이상의 성인이 모두가 참여하는 보통 선거였다. 지금에야 당연한 사실이지만, 오늘날 당연한 것이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는 점에 역사의 의미가 있다.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 불리는 영국에서 1754년 800만의 국민 가운데 투표권을 가진 귀족들은 3.5%에 불과했다. 민주주의의 발전 과정은 투표권의 확대 과정이었다. 1884년 세금을 내는 모든 남자가 투표권을 획득했다. 1918년에는 세금과 관계없이 모든 남자의 투표권의 보장되었다. 1928년에야 비로소 여자에게 투표권이 주어졌다. 전 국민이 차별 없이 투표권을 갖게 되기까지 무려 170여년이 걸린 것이다.
프랑스의 경우에도 여성의 투표권은 1945년에야 주어졌다. 민주주의의 선두주자로 알려진 미국에서 흑인들이 실제적으로 투표권을 가진 것은 1965년이었다. 스위스에서는 여성이 1971년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948년 당시 세계 최빈국 수준이었던 우리나라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선진국이었던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캐나다에서도 보통 선거권에 제약이 붙어있었다.
영국에서 170년 걸리고 미국에서도 190여년 걸린, 차별 없는 보통 선거권을 우리는 건국할 때부터 행사했다. 1948년을 기점으로 하면 프랑스와 비슷하고 오스트레일리아, 벨기에, 캐나다, 미국, 스위스보다 앞선 수준이었다. 이는 후발 주자로서 단숨에 선발 주자들을 따라잡은 '압축 민주화'의 사례였다.
물론 다른 나라가 오랫동안 차곡차곡 쌓아올린 과정을 '한방에' 해결해 버린 데서 오는 부작용도 있었다. 그러나 그네들의 시행착오를 그대로 반복할 필요는 없다. 부작용을 없애려고 영국만큼 시간이 걸리게 되면 2120년쯤에 겨우 보통선거를 할 수 있다.
5.10 선거를 통해서 200명이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그중에서 국회 의장을 선출해야할 때, 하지는 엉뚱한 제안을 했다. 투표 없이 최고령인 78세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지명하자는 것이었다. 다분히 이승만을 의식한 제안이었다. 물론, 이 어이없는 제안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31일의 투표 결과 189대 8로, 이 나라 초대 국회는 이승만을 국회의장으로 선출했다.
이승만 국회의장은 마지막까지 자신을 배제하려고 했던 하지를 제일 먼저 소개했다.
"누구보다 치하의 말을 들어야할 사람이 있다면 하지 장군일 것입니다. 그가 이 축하의 자리에 동참한 것을 진심으로 환영하는 바입니다. 여기 많은 미국 친구들을 모시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가장 어려운 시간을 우리와 함께 했습니다. 간혹 오해를 하거나 부당하게 비난받은 적도 있지만 한 가지 위대한 사실은 역사에 길이 빛날 것입니다. 바로 여러분들은 우리가 독립을 되찾는 것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와서 훌륭하게 그 임무를 완수했다는 점입니다. 우리 국민들은 깊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점을 자손 대대로 기억할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외교적인 수사(修辭)만은 아니었다. 이승만은 오랫동안 미국을 상대했고 관료들과 부딪혀왔다. 미국의 정책이 작용하는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한국에 관한 정책은 국무부에서 결정하고 국방부에서 집행하도록 되어 있었다. 하지는 미국의 방침에 충실히 따라야 했다.
이승만과 대립한 것은 "미국의 정책을 실행해야하는 하지"였지, "인간 존 하지"가 아니었다. 이승만이 싸운 것은 "미국의 잘못된 한반도 정책"이었지, "미국"도 아니었고 "미국인 하지"는 더더욱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이승만은 미국을 설득했고 미국과 이승만은 한편이 되었다.
미국이 진주(進駐)한 남한은 자유 민주국가가 되었고 소련이 점령한 북한은 공산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중간 과정에서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이 있었다고 해도, 미국과 하지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은 나름대로의 진심이었을 것이다.
차상철은 이승만과 하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군정 3년간 이승만과 하지는 그야말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견원의 동반자였다 ... 이승만과 하지, 그들은 서로 그토록 싫어했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대안이 없는 불가피한 동반자임을 인정해야 했다."
♣ 기도로 시작한 나라, 대한민국
우리의 건국은 수많은 성도들의 눈물어린 기도의 결과였다. 건국의 과정에서도 우리의 선조들은 고비마다 기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신탁 통치가 결정된 직후인 1946년 1월에는 새해를 맞이하는 삼일동안 전국의 교회가 금식을 하며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기도했다.
이승만은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에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했다. 1946년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3·1 기념행사에서는 "한민족이 하나님의 인도 하에 영원히 자유 독립의 위대한 민족으로써 정의와 평화와 협조의 복을 누리도록 노력하자"라고 연설했다.
드디어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가 개회되었다. 사회자인 국회 의장 이승만이 입을 열었다. 오천년 우리 역사에 첫 번째 맞이하는 국회에서 이승만의 첫마디는 신앙고백이었다.
"대한민국 독립 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종교 사상에 무엇을 가지고 있든지 누구나 오늘을 당해 가지고 사람의 힘으로만 된 것이라고 우리가 자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에게 우리가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간단한 말씀으로 하나님에게 기도를 올려주시기 바랍니다."
이승만에 의해서 지목된 이윤영은 감리교 목사로 서울의 종로에서 당선된 국회의원이었다. 국회에서의 기도는 회순에 없는 순서였다. 198명 국회의원 전원이 기립한 가운데 이윤영은 대표 기도를 드렸다.
"이 우주의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을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고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에 정시(呈示 : 꺼내 보임)하신 것으로 저희는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信寃 : 원통한 일을 풂)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원치 아니한 민생의 토탄은 길면 길수록 이 땅에 악마의 권세가 확대되나 하나님의 거룩하신 영광은 이 땅에 오지 않을 수 없을 줄을 저희들은 생각하나이다. 원하옵건데, 우리 조선 독립과 함께 남북통일을 주시옵고, 또한 우리 민생의 복락과 아울러 세계평화를 허락하여 주시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뜻에 의지하여 저희들은 성스럽게 택함을 입어 가지고 글자 그대로 민족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그러하오나 우리들의 책임이 중차대한 것을 저희들은 느끼고, 우리 자신이 진실로 무력한 것을 생각할 때 지(智)와 인(仁)과 용(勇)과 모든 덕(德)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 앞에 이러한 요소를 저희들이 간구하나이다.
이제 이로부터 국회가 성립이 되어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되는, 세계만방이 주시하고 기다리는 우리의 모든 문제가 원만히 해결되며, 또한 이로부터 우리의 완전 자주독립이 이 땅에 오며, 자손만대에 빛나고 푸르른 역사를 저희들이 정하는 이 사명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이 이 회의를 사회하시는 의장으로부터 모든 우리 의원 일동에게 건강을 주시옵고, 또한 여기서 양심의 정의와 위심을 가지고 이 업무를 완수하게 도와주시옵기를 기도하나이다. 역사의 첫걸음을 걷는 오늘의 우리의 환희와 우리의 감격에 넘치는 이 민족적 기쁨을 다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올리나이다.
이 모든 말씀을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하나이다. 아멘"
이승만의 공개적인 신앙 고백은 계속되었다. 그것은 천신만고 끝에 되찾은 조국을 하나님의 은혜 위에 세우려는 건국 대통령의 노력이었다. 이승만은 국회의장 자격의 <맹세문>에서 '하나님과 애국선열과 삼천만 동포 앞에' 선서했으며, <국회개원식 축사>에서는 '하나님과 삼천만 동포 앞에서' 국가 발전에 분투할 것을 맹약했다.
기도로 시작된 제헌 국회는 7월 20일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7월 24일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연설을 한다. 그 첫마디도 역시 신앙의 고백이었다.
"여러 번 죽었던 이 몸이, 하나님의 은혜와 동포의 애호로 지금까지 살아 있다가, 오늘에 이와 같이 영광스러운 추대를 받는 나로서는 일변 감격한 마음과 일변 감당키 어려운 책임을 지고 두려운 생각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기쁨이 극하면 웃음이 변하여 눈물이 된다'는 것을 글에서 보고 말로 들었던 것입니다.
요즈음 나에게 치하하러 오는 남녀 동포가 모두 눈물을 씻으며 고개를 돌립니다. 각처에서 축전 오는 것을 보면, 모두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나는 본래 나의 감상으로 남에게 촉감(觸感)될 말을 하지 않기로 매양 힘쓰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목석간장이 아닌 만치 나도 뼈에 사무치는 눈물을 금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40년 전에 잃었던 나라를 다시 찾은 것이오, 죽었던 민족이 다시 사는 것이 오늘 이에서 표명되는 까닭입니다.
오늘 대통령 선서하는 이 자리에서, 하나님과 동포 앞에서 나의 직책을 다하기로 한층 더 결심하며 맹세합니다. 따라서 여러 동포들도 오늘 한층 더 분발해서, 각각 자기의 몸을 잊어버리고, 민족 전체의 행복을 위하여, 대한민국의 시민이 된 영광스럽고 신성한 직책을 다하도록 마음으로 맹세하기를 바랍니다."
대한민국의 최고 지도자로 선출된 이승만의 연설들은 "하나님과 동포들 앞에서"를 반복한다. 일평생 그가 추구했던 신앙과 애국이 그대로 드러난 표현이다. 대통령 취임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건설하는 데는 새로운 헌법과 새로운 정부가 다 필요하지마는, 새로운 백성이 아니고는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부패한 백성으로 신성한 국가를 이루지 못하나니, 이 민족이 날로 새로운 정신과 새로운 행동으로, 구습을 버리고 새 길을 찾아서 날로 분발 전진하여야, 지난 40년 동안 잊어버린 세월을 다시 회복해서, 세계 문명국에 경쟁할 것이니, 나의 사랑하는 3천만 남녀는 이날부터 더욱 분투용진해서, 날로 새로운 백성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만년 반석 위에 세우기로 결심합시다."
'새로운 백성'을 강조한 대목은 한성 감옥에서 집필한 「독립정신」을 떠올리게 한다. 정치 제도를 뜯어고치는 혁명을 꿈꾸던 풍운아 이승만은 역적으로 몰렸다. 생지옥 같은 한성 감옥에서 그는 살아계신 예수를 만났다.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그에게는 새로운 애국의 지평이 열렸다. 그것은 백성들을 새롭게 해야한다는 깨달음이었다. 정치의 변화나 제도의 혁명은 사람이 바뀌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것은 기독교였고 복음이었고 성서였고 그리스도였다.
그로부터 반백년, 스물네 살의 사형수는 일흔 셋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가 이끌어야할 나라는 가난과 공산 세력의 위협과 무지에 둘러싸여 있었다. 생존 여부가 불투명한 조국을 바라보며, 이승만은 오십 년을 견지해 왔던 신앙과 애국을 말했다. 파란만장한 세월 동안 그를 지켜왔고 그의 영혼이 품어왔고 그가 씨슴하며 추구해왔던 신앙과 애국, 그것으로 새 나라를 세우고자 했다. 길고 오랜 투쟁 끝에 찾아온, 장엄한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