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거장 이응노 화백과
어린 제자였던 오경덕
- 그들의 작품은 당대를 고중한 역사적 증언이다 -
오경덕미술관
작가 오경덕이 미술관 건립 이야기를 꺼냈을 때 당연히 시립미술관이려니 했다. 내 심중을 읽은 그가 "제 개인 미술관입니다."라고 말하며 자랑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니 어떻게?". 외할아버지께서 남겨주신 땅이 있었습니다.", "그랬구나. 하늘이 도우신거야." 진정 나는 기뻤다. 감성이 풍족하고 감각이 뛰어난 오경덕의 작품은 경향성의 색채가 너무도 분명했다.
지푸라기 재료의 가로수, 자연 풍경 등의 서정성은 슈베르트의 <세레나데>를 듣는 기분이다. 낭만적이고 속세에서 벗어난 매처학자(梅妻鶴子)적 작품을 두고 누가 감히 인류를 지배하는 거대한 권력과 폭력에 분노하며 그 부조리를 질타하는 저항적 작품(강자의 군림 등)의 작가라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산성화의 우려가 없는 오경덕 예술의 영토가 깊고 방대한 것은 천부적인 영향도 있었겠지만, 이응노 화백에게서 감수된 인간의 도리와 예술, 그리고 삶의 의미가 가랑비에 옷 젖듯 그렇게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목(25.7cm x 18cm),오경덕 군무(41cm x 32cm),오경덕
귀로(72.5cm x 60.5cm),오경덕 나무(65cm x 53cm,오경덕
ART MAGAZINE 2006년 12월호, '지푸라기 화가' 오경덕 평면 설치전을 소개한 내 글에서 한 줄 따오겠다.
"이응노 화백의 통일 염원과 비슷한 분위기 이지만, 오경덕의 작품에는 개도 춤을 추고 새도 춤을 춘다. 전 우주가 이 민족의 화합을 영광으로 노래하고 있음을 응변하고 있는 것이다."
오경덕은 스승 이응노 화백의 고귀한 역사의식에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하여 스승의 통일 염원을 살려 낸 겄이다. 사실 젊은 세대들은 이응노가 누구인지 잘 알지 못한다. 역사교육은 학교나 교과서로만 배우는 게 아니다. 다음의 내 증언을 읽어주기 바란다.
약육강식(41cm x 32cm), 오경덕 오리(53cm x 45.5cm), 오경덕
이응노(李鷹魯1904~1989)화백의 예술을 승계할 중견작가 오경덕
미국 뉴욕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에는 이응노 화백의 작품만을 취급하는 전속 갤러리가 있다. 그 주인은 재미 한국 교포가 아니고 파리에서 건너 온 프랑스인이었다.
1967년이었던가, 작곡가 윤이상과 이응노 화백이 졸지에 '동백림 간첩' 신세가 되었다. "북한에 간 것은 가족을 만나기 위함이었을 뿐인데 이건 너무하지 않느냐!"며 공안 당국을 향한 비난이 비등했다. 국제사회의 이목과 여론에 떠밀려 다국은 이응노, 윤이상을 풀어주기는 했으나 그들에 대한 국내 출입은 막았다. 출입 금지령이 떨어지기 직전, 그러니까 유신체제 돌입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이응노 화백은 서울에서 전시회를 갖게 되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아내 윤정희(배우)가 안내를 하는 등 꽤 호사스러운 전시였고, 관람객의 관심도 대단했다. 그런데 전시 작품 중에 불온한 내용이 담겨 있다며 문교 당국이 시비를 걸어왔다. 작가의 임의의 표현을 국가가 관리하겠다는 것이다. 지목된 작품을 철거하거나 아예 전시회 자체를 불허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나는 서둘러 전시 작품을 꼼꼼히 둘러보았다. 벅차오르는 감동과 함께 나는 웃임이 터져 나왔다.
*[남북 노동자 대회] - 당국이 미간을 찌푸릴만한 내용이기는 했지만, 눈이 번쩍 뜨이게 독특한 작품이었다. 한글 활자의 기호적 외양에 먹물을 듬뿍 찍어 일구월심 통일의 갈망을 소원한 붓놀림의 회화성은 가히 용사비등(龍蛇飛騰)이었다.
*작품의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바탕 화면에 한반도 지도도 있었다. 전 공간에 새들이 기운차게 날개를 치며 일제히 북쪽을 향해 날아간다. 그곳에는 우주를 비추는 붉은 태양이 의젓하게 떠있다. 작품 앞에서 나는 웃음이 싹 가셧다. 이건 작품이라기보다는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다가 간첩으로 몰아 족치는 유신 정국에 내민 이응노 화백의 '분노의 도전장'이라 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작업을 통해 예술인들은 합법적으로 할 말 다 한다.그런 예술인들을 어찌 속임수와 위장이 무기인 간첩으로 몰아 지옥의 고통을 겪게 하였단 말인가. 그뿐인가. 민족적 손실은 또 어떠한가. 포스트모더니즘 이래 프랑스 파리에서 생산해 내는 온갖 유행과전위적 요소들이 빠르게 뉴욕 이스트 빌리지로 이동 중이었다. 문화예술의 국제적 조류에 민감한 화랑 운영자들이 국제적 미술시장에 명성이 자자한 한국의 화가 이응노에 대한 소문을 놓칠 리가 없다. '아방가르드의 메카' 이스트 빌리지에는 동양의 역사와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이응노 작품의 공급처이자 개인 화랑이 있다. '동양의 얼굴, 동양의 향취, 동양의 철학'을 음미하고자 이응노의 작품을 찾는 뉴요커들의 발길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명동에 있는 공연장이 국립극장이었던가(1970년~1980년). 그곡에서 윤이상의 음악을 들었다. 나는 윤이상이 유럽 음악 애호가들을 황홀하게 하는 그 동양적 신비의 선율이 어디서 발원한 것인지 그 악기 편성이 몹시 궁금했다. 한국에 진정 교육이 있고 문화가 있다면 이들을 고향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빗장을 채웠을까, 윤이상, 이응노 이들에게 금족령만 내리지 않았어도 그 분들이 배출한 제자들이 국제 사회에 진출하여 한국의 멋을 전달 할수 있지 않았을까. 예술이건 과학이건 전문성이 끊긴다는 것은 국가적, 민족적 손실이다. 그나마 미술에서는 오경덕이 이응노가 이루지 못한 탑을 쌓아 올리고 있다. 윤이상 음악은 이어지고 있는지... 추모 음악회만으로는... 글쎄다.
오경덕은 내게 스마트폰을 열어보였다.'과연 귀재구나'. 천여 평 미술관 부지와 주변의 산과숲, 도로를 감안한 설계였음이 즉각 감지되었다. 민속마을이라고 해서 옛날 대감들의 기와집을 수집하여놓고, 역사적 현장성을 배제한 채 관광객들에게 한국전통을 운운하는 오늘의 관광선업을 생각해 보라. 만일 미술관이 한국 전통을 고집하기 위해 기와를 얹은 콘크리트 건물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오경덕 미술관은 인적이 없어 무겁게 가라앉은 시골의 잿빛공간을 단번에 바꿔 놓았다. 오경덕 미술관에서는 왁자지껄 젊은이들의 건강한 움직임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고, 그 건축이 우리를 만든다'. 이 말은 2014년 3월 27일 경향신문에 실린 건축가 승효상의 칼럼 제목이다. 많은 지식인들이 동의하는 이 명언은 윈스턴 처칠이 1943년 10월, 폭격으로 폐허가 된 영국의회 의사당 제건을 약속하며 한 연설의 한 부분이었음을 승효상은 밝혔다.
관광산업은 이벤트 산업이기도 하다. 일 년에 한두 번 쯤 네모반듯한 벽에 광목을 치고, 세계에서 가장 큰 캔버스로 홍보를 하여 당진시 순성면을 애드벌룬처럼 높이 띄우면 어떨까. 재벌들의 독점 영역이던 미술관 건립과 운영에 뛰어든 화가 오경덕의 과감한 용단은 전국의 미술인들에게 미래와 회망을 보여주는 상징성의 현시라고 여겨진다. 미술관 갱관에 임한 충만한 기쁨의 선물을 오경덕의 '25회 초대 개인전'의 대표작 [춤]을 접한 놀라움을 토로 하는 것으로 화환을 대신하겠다.
춤(53cm x 45.5cm), 오경덕
[춤]
우주에 존재하는 유기체와 무기체가 혼연 일체가 되어 또 하나의 우주를 탄생시킨 '고조된 승리감'과 창조주의 절대성을 희롱하는 몸짓으로 여겨지는 '표정의 실재감'에서 우리는 이 작가가 화가로서만이 아닌 인문사회과학적 영역에까지 확장된 전문성을 연마하고 있음을 감지하게 된다.
괴기스러운 인체의 팔, 다리 등 각 부위 즉, 사람의 뼈와 내장 속에서 활동하고 있는 동물 곤충은 생명체의 공존을 의미한다. 두 인체를 구성하고 있는 선을 따라가 보면[춤]을 구성하고 있는 인체는 2인이 아니다. 상체가 거꾸로 되어 머리통이 사타구니를 탐하고 있음을 보여준 두 인체말고도, 머리통이 다리에 붙고 사람을 삼키려고 입을 벌리고 있는 식인어족의 일부 혹은 해체된 인체의 한 부위와 같다.
분명 이것은 교란이요, 재앙이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예사로 죽이고, 내연 남녀가 서로를 죽이는 세상. 배설의 욕구가 팽배하여 아무데서 바지를 까 내리며 직위 고하를 불문하고 섹스가 난무 하는 세상, 인체를 에워싼 공간에는 고서를 찢어 붙인 한문 쪽지들이 흩어져 있고, 주변에는 사람들이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오브제는 윤리 도덕성 문화의 유실을 강조한 것이다. 오늘의 환란을 이슈로 다룬 오경덕의 작품[춤]은 먼 훗날 왕후장상이 아닌 서민의 역사로 기록되어 후대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글 - 김제영(소설가,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