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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안녕하십니까, 여러분?
새해 첫날은 잘 맞이하셨습니까?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며 문득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넷째 왕의 전설’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에 기억하는 예수님께 경배를 드린 동방박사는 세 분인데, 원래 처음 예수님께 경배하려고 출발
한 동방박사는 네 분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알타반이라는 네 번째의 왕은 가스팔, 멜키올 그리고 발타살과 함께 밤하늘에 새로
떠오른 별을 바라보면서 새로운 왕이 탄생하였음을 알아차리게 되었고, 그 넷은 새로 난 별을 따라 새로 태어난 왕을 경배하러
가기로 약속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알타반이라는 네 번째 동방박사도 왕에게 드릴 선물로 값비싼 사파이어, 루비 그리고 진주
를 가지고 함께 길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별을 따라가는 길에 알타반은 열병에 걸린 환자를 만납니다. 그는 시간이 없으면서도 그 환우와 함께 머물면서 그 환우
를 도와 병을 낫게 하느라고, 혼자가 되고 맙니다. 그는 친구들과 그리고 대상들과도 떨어졌기 때문에 사막을 넘는 것을 도와줄
낙타와 인부들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는 병든 사람을 도와주고 새로운 길잡이를 구하느라고, 자신이 예수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사파이어를 팔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렇게 그는 예수님께 가는 길에 여러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함께하느라고 예수님께
드릴 보석들을 하나둘 다 소비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빈손이 되었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경배하려고 팔레스티나의 베들레헴
에 도착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아마 성 요셉과 성 마리아가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집트로 피신한 뒤여서 만날 수 없었습니
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그때 아기 예수를 없애기 위하여 세 살 이하의 어린아이를 학살하라는 헤로데 대왕의 명령을 실행하기
위해 병사들이 왔습니다. 알타반은 어린아이가 있는 어느 집에 숙박하게 되었고, 그 어린아이가 무척 귀여웠습니다. 병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알타반은 그들에게 예수님께 드리려고 가지고 왔던 보석 중의 하나인 루비를 주고 매수하여, 대신 아이를 구했
습니다. 그 어린아이는 구사일생으로 살아나게 되었고 어머니는 기뻐하였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그는 새로운 왕을 찾아 헤매느라 30년이라는 세월을 다 소비한 후 예루살렘을 다시 찾게 됩니다. 그런데 그날
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는 날이었습니다. 알타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있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이상하
게도 그가 혹시 자신이 찾아다녔던 왕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골고타로 가면서, 그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보석 중에 가장 아름다운 진주로 왕의 생명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며 서둘러 길을 가고
있을 때, 병사들에게 쫓기는 소녀 하나와 마주치게 됩니다. 소녀는 알타반에게 매달려 "제 아버지가 빚을 졌습니다. 그들은 빚
을 갚기 위해 나를 잡아 노예로 팔려고 합니다. 살려 주십시오." 하며 애원하였습니다. 알타반은 주저하였으나, 곧 예수님을
살리려고 협상할 진주를 끄집어내어 병사들에게 주면서, 소녀의 자유를 삽니다. 소녀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하늘이 깜깜해지면서 지진이 일어나 기왓장 하나가 날아와서 알타반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그는 반쯤 의식을 잃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소녀가 쓰러진 그를 부축하려 할 때, 갑자기 그의 입술이 움직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닙니다. 주님, 언제
제가 당신이 굶주린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습니까? 저는 33년간 당신을 찾아 헤매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얼굴을 뵙
지도 못하였고 저의 왕이 되시는 당신을 섬긴 일도 없습니다." 그러자 아주 멀리서 속삭이는 듯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습니
다. "내가 진실히 이르거니와 너희가 여기 있는 내 형제 중 가장 작은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알타반은
미소를 지으며 주님과 함께 지상 생애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왕이 자신의 선물을 받아 주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알타반이라는 넷째 왕은 우리가 오늘 기념하는 세 명의 동방박사에 끼지 못했습니다. 이 첫째 가스팔, 둘째 멜키올, 셋쌔 발타살의
이름은 오늘 우리에게 전달될 만큼 커다란 칭송과 존경을 받습니다. 그들은 하늘의 별을 보고 새로운 왕이 태어났음을 제일
먼저
알아낸 외국인이었고, 갖은 역경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찾아와 경배하고 선물을 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우리 모두가 알타반과 같은 넷째 왕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우리가 오늘 기억하고 기념하
는 세 분의 동방박사처럼, 세상에 이름이 알려질 정도로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 특출한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서 유명해지지도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우리 본당의 주보이신 103위 한국순교성인처럼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사회에서 박해받고 순교할 정도의 삶을 살지도 못했습니다.
우리는 동방박사처럼 예수님을 자발적으로 깨닫고, 예수님의 사랑을 체험하자마자 다른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만을 직접적
이고 곧바로 찾아 나서지는 못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다하여 주님을 우리 생애의 최고로 생각하고 예수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며 직접적으로 온전히 다 실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살면서 방법과 정도는 다르지만, 나름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네 번째 동방박사라고 전해지는 알타반처럼, 우리는 우리 생애의 언저리를 이리저리 다 돌고 돌아서 뒤늦게 주님을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알고 나서도 우리 인생에 주어진 여러 사람과 여러 사건과 어려 상황들과 마주치면서, 마치
유혹에 빠지는 것처럼 이리저리 시행착오를 거치며 허송세월과도 같은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그런 인생의 궤적들을 차곡차곡
쌓아놓으며 하나하나 다 거친 다음 주 예수님을 만나 내 생애의 첫째 자리에 모시게 되었습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을 맞이하는 지금, 이 순간에 다시금 우리 인생을 되새겨 봅니다.
그동안 내가 최고로 중시하고 추구하던 꿈은 무엇이었습니까?
내 인생의 어느 순간에 어떻게 예수님이 내 생애의 첫 번째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까?
오늘 인생의 경험과 신비들을 나름 다 알고 있는듯한 동방박사들이 새로 나신 예수 아기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경배하는 모습
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가 예수님 안에서 무엇을 발견합니까?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 대전에 나아와 내일의 나를 어디로 어떻게 향하게 하겠습니까?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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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신자 여러분, 성탄 잘 맞으셨습니까?
지난 주,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 축일에, ‘예수 아기의 탄생은 과연 그 가족과 동시대 사람들에게 기쁜소식이었을까?’ 라는
주제로 묵상을 하면서, 예수 아기의 탄생이라는 하느님의 개입은 믿는 이들에게나 기쁜 소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 아기의 탄생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축하하도록 선택받은 이들은 목자들이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왜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 목자들이 제일 먼저 예수 아기의 탄생을 알아차리도록 하셨을까?’
그 당시 목자들은 다른 이들이 다 잠을 자는 시간까지도 깨어 밤 늦게까지 양을 치는 이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탄광의
광부들이나 외항선원들을 막바지에 택하는 직업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어쩌면 유다 근동지방의 목자들도 사회적으로
각광받고, 대우받는 직업이 아니라, 사회에서 밀리고 밀려서 자리잡는 일이었나 봅니다. 주위 다른 이들에게, 마치 부랑아나
도둑, 또는 어딘지 모르게 피해를 줄 것 같다고 느껴서 피하게 되는 그런 사람들로 사회에서 낙인 찍힌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 하느님의 천사는 왕궁이나, 부잣집이나, 학자들이나, 종교인들에게 예수 아기의 탄생을 알리지 않고, 목자들에게
알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루카 2,10-12) 그리고 루카 복음사가는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13-14절) 라고 기록합
니다.
과연 평화를 간직할 수 있을 정도로 주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천사들이 하늘로 떠나가자 목자들은 서로 말하였다.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 주신 그 일,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봅시다.’”(15절) 라고 말하고는, “서둘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운 아기를 찾아냈다.”(16절) 라고 합니다. 만일
목자들이 아니라 권세가나 가진 것이 많은 이들에게 천사가 나타나서 말했다면, 그들이 그렇게 서둘러서 찾아갔을까? 검증되
지 않은 소식, 확인되지 않은 소식을 듣고 그들이 움직였을까? 그것도 한 밤에? 왕궁이거나 재벌가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 몸
누일 곳조차 없어서 마구간에서 난 아기를 보러?! 아기 하나가 새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뭐 그렇게 대수로운 일이라고 찾아갔겠
는가? 그야말로 뭐가 아쉬워서?!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17절) 라고 합니다. 목자들이 아기를 보고 나서, 사람들
에게 무슨 이야기를 전하였을까? 자신들이 본 아기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목자들은 남들 앞에서 이렇다하게 드러낼 수 없는
처지여서 그런지, 어떤 새로운 사실에 다소 위축되고 기가 죽어 있었는지 모릅니다. 어딘지 모르게, 주역이라기 보다는 관찰자
요 방관자의 역할로서 남았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 아기의 탄생을 보며 기뻐하면서, 다른 이들에게 알리고 하느님
을 찬양하고 찬미했다고 합니다. “목자들은 천사가 자기들에게 말한 대로 듣고 본 모든 것에 대하여 하느님을 찬양하고 찬미하
며 돌아갔다.”(20절)
목자들은 아마 자신들의 처지보다 더 헐벗고 비루하게 태어난 아기를 보고 정말 안쓰럽고 처절하게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범접할 수 없는 부와 권력이 아닌, 친근하고 오히려 더 다가가 만져주고 싶고,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자신들보다 더 비참한 조건으로 태어난 아가 예수님이 그들에겐 더 큰 귀여움과 사랑의 마음이 동하였으리라 짐작됩
니다. 거기다 천사의 알림이 범상치 않았음도 그들에게는 신비한 사건이었습니다. “목자들은 아기를 보고 나서, 그 아기에 관하
여 들은 말을 알려 주었다. 그것을 들은 이들은 모두 목자들이 자기들에게 전한 말에 놀라워하였다.”(17-18절) 최고의 영예로운
자리였어야 할 구세주의 탄생이 허름하고 남루한 탄생이라는 다소 상반된 상황에도 불구하고, 가련한 예수 아기의 탄생이 목자
들에게는 그런 의미에서 위로와 희망이 되었습니다
.
예수 아기는 이렇게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 기쁜 소식으로 오신 구세주이십니다.
그리고 오늘 두 번째, 예수 아기는 동방에서 온 박사들에게 드러납니다. 나름 박사들이라고 할 때는 자신들의 나라에서 이렇다
할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분들일 터인데, 별이라는 작은 상징 하나를 발견하고 먼 길을 마다하고 국경을 넘어 찾아옵니다. 구세
주의 탄생을 가리키는 별이 그만큼의 의미와 가치가 있었기에 찾아 나섰겠지요.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의 수도 예루살렘에까지 와서 왕에게 묻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그러자 “이 말을 듣고 헤로데 임금을 비롯하여 온 예
루살렘이 깜짝 놀랐다.”(3절) 라고 합니다. 유다인들은 정작 그들의 임금이 탄생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오히려 구원
에서 제외되었다고 하는 이방인들이 와서 임금의 탄생을 알리고 찾자 당황한 것입니다.
유다인들도 모르지 않았습니다. 헤로데 왕이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메시아가 날 곳이 어디인지 물어보니, “유다
베들레헴입니다. 사실 예언자가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5절) 그렇게 써 있기까지 했건만, 왜 그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지 못했을까? 하지만 그들은 엉뚱한 영역에서, 엉뚱한 신분으로 오실 분만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왕궁의 새로운 후계자로 탄생하실 분, 재벌가의 새로운 오너로 부각될 분,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끼칠 정도의 명예를 거머쥐고
태어날 분, 경제사회적으로 뭔가 큰 영향을 끼쳐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실 만한 능력을 가진 분들 중의 한 분에게서 나실 것이
라고 여겼기에, 그들 가운데에서만 찾았던 것입니다. 유다인 어느 누구도 중간계층에 해당하는 목수와 그 아내에게서 구세주가
날 지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도 자기 몸 하나 뉘일 곳이 없어서 마구간의 말 구유에 누워 계신 분을 구세주라고 알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목자들이나 동방박사들에게 나타나신 공현 기사에서 드러났듯이, 이스라엘의 지도층들은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릴 수 없었습
니다. 아니, 단적으로 말해 어느 혹자에게는 섭섭하게 들릴지는 몰라도, 처음부터 구세주는 나름 가졌다고 하는 이들을 위해
탄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설사 구세주의 탄생을 알아차리고 찾았다고 해도, 동방박사들처럼 찬미와 경배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현세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박해하고 제거하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자신의 왕권 유지에 위협이 된다고 여긴 헤로데가 박사들에
게 구세주 탄생의 시기와 장소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자,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여버렸던 것처럼(마태 2,16 참조).
목동들과 동방박사들 앞에 나타나신 구세주 예수 아기의 탄생은 오늘 이 시대에도 재현됩니다.
우리는 어디서 어떤 형태의 구세주 탄생을 기대하고 추구하는가?
구세주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해 주실 것이라고 기대하는 그것이, 나와 우리의 현세적인 입신양명과 물질적 풍요를
기대하고 추구하는 것이라면,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고 신화와 동화에서 나오는 과거의 이야기 거리로 그
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신앙의 본질인 주 하느님께 오늘 우리의 삶에 대해 찬미와 감사를 올려 드리며, 예수님의 말씀과 교회 전
승에 드러난 주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우리의 삶에 적용하고자 한다면, 구세주 예수님은 오늘 내게 탄생하실 것이고,
나를 탄생의 기쁨으로 초대할 것입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마태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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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 I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께서는 지난 2015년 6월 18일(목), 회칙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를 반포하셨습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회칙 역사상 최초로 환경 문제, 특별히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의 위기를 다룬 문헌입니다. 교황님은 지구생태계의 위기에
경종을 울리시며, 이에 대처하기 위해 가톨릭 신자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류가 새로운 삶으로 변화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교황
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 삶의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의 일과 모든 노력의 목표는 무엇인가? 지구가 우리에게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환경에 대해서 성찰하도록 초대하십니다. 또한 여전히 인류는 힘을 합쳐 우리 공동의 보금자리를
건설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강조하십니다.
“찬미받으소서(Laudato Si’)”라는 제목은 프란치스코 성인의 ‘태양의 찬가’의 후렴인 “나의 주님, 찬미받으소서”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이 찬가는 우리 공동의 집인 지구가 우리의 삶을 나누는 누이와도 같고, 우리를 안아주기 위해 팔을 벌리는 어머니와
도 같다는 점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 회칙은, 가난한 사람들과 지구의 약함 사이의 긴밀한 관계, 세상의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확신, 새로운 패러다임들과
기술로부터 유래한 힘의 형태들에 대한 비판, 경제와 발전을 이해하는 다른 방식들을 찾으라는 요청, 각각의 피조물이 갖는 진
정한 가치, 생태의 인간적 의미, 기탄없고 솔직한 토론의 필요, 국제적·지역적 정책의 엄숙한 책임, 쓰고 버리는 문화 그리고 새
로운 생활양식에 대한 제안으로, 총 여섯 개의 장, 246항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제1장 더불어 사는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17-61항)에서 교황님은 환경에 대한 최근의 과학적 발견을 피조물들
의 외침에 귀를 기울이는 방법으로 제시합니다. 이는 “세상에 벌어지는 일들을 통렬하게 자각하고 기꺼이 우리 자신의 고통으
로 삼아 우리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19항) 이 장은 “현재의 생태적 위기의 여러 측면들”을 다루고 있습니
다.
제1장 더불어 사는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I. 오염, 쓰레기, 버리는 문화(20-26항)
오염은 사람들의 건강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며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영향을 미쳐 수많은 사람들이 일찍 죽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20항). “우리의 집인 지구가 점점 더 엄청난 쓰레기 더미처럼 보이기 시작합니다.”(21항) 이 상황은 ‘버리는 문화’에서 기
인하므로, 우리는 재사용과 재활용을 바탕으로 하는 생산 방식을 도입하고 재생이 가능하지 않은 자원 사용을 제한하여 이러한
문화에 맞서야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점에서 제한된 진척만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22항)
공공재인 기후
“기후 변화는 세계적 차원의 문제로 환경, 사회, 경제, 정치, 재화 분배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25항) 기후 변화
는 모든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며 이주의 원인 가운데 하나이지만 “더 많은 자원과 경제적 정치적 힘을 지닌 이들은 대부분 문
제를 호도하거나 문제의 증상들을 감추는 데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26항) 또한 “우리의 형제자매가 관련된 이
비극에 대한 우리의 부족한 대응은 모든 시민 사회의 기초인, 우리 이웃에 대한 책임감의 상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25항) 기
후를 보전하는 것은 “오늘날 인류가 당면한 중요한 도전 과제입니다.”(25항)
II. 물 문제(27-31항]
모든 인간, 특히 어린이들이 오염된 물로 병들어 죽어 가고 있으며, 대수층은 공장과 도시의 폐수로 끊임없이 오염되고 있습니
다. 교황님께서는 “안전하게 마실 수 있는 물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는 보편적인 기본 인권입니다. 물은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
인 것이며, 바로 그래서 다른 인권들을 행사하는 데에 전제 조건이 됩니다.”(30항) 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이 물에 접
근할 권리를 박탈하는 것은 “그들의 침해할 수 없는 존엄에 맞갖은 생명권을 부인하는 것”(30항)입니다.
III. 생물 다양성의 감소(32-42항)
인간이 초래한 식물과 동물의 멸종은 생태계를 변화시키고 앞으로 나타날 결과들을 예측할 수 없게 합니다. “해마다 우리는 수
천 종의 동물과 식물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들은 영원히 사라져 버려서 우리가 전혀 모르게 되고 우리 후손들은
전혀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33항) 이것들은 그저 착취할 수 있는 “자원”이 아니라 고유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가치
는 인간을 위하여 작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피조물은 관련되어 있습니다. …… 살아 있는 피조물인 우리는 모두 서로 의존
하기 때문입니다.”(42항) 풍부하고 다양한 생물이 있는 지역을 보호하는 것은 생태계 균형과 생명의 균형을 이루는 데에 반드
시 필요합니다. 종종 초국가적인 경제 이익은 이러한 보호를 저해합니다(38항).
IV. 인간 삶의 질의 저하와 사회 붕괴(43-47항)
현재 개발의 모습은 인류 대부분의 삶의 질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며, 이는 “지난 두 세기의 성장은 늘 온전한 발전을 이끌지 못
하였다는 것”(46항)을 보여줍니다. “많은 도시들은 거대하며 비효율적인 체계를 갖고 있으며 에너지와 물을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습니다.”(44항) 그리하여 건강의 측면에서 살아갈 수 없는 곳이 되고 일부 특권층을 위하여 보존된 지역을 제외하고는 자연
과의 접촉이 제한됩니다(45항).
V. 세계적 불평등(48-52항)
“환경과 사회의 훼손은 지구에 살고 있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가장 취약한 이들에게 영향을 미칩니다”(48항). 국제적인
정치 경제 토론에서 이러한 이들은 “단순한 부수적 피해자들”(49항)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참된 생태학적 접근은 언제나 사회
적 접근이 됩니다. …… 그리하여 지구와 가난한 이들의 외침을 모두 듣는 것입니다.”(49항) 해결책은 출생률 감소가 아니라 세
계 인구의 일부에 해당되는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50항)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VI. 미약한 반응과 다양한 의견(53-61항)
이러한 주요 주제들에 관한 차이점을 인식하시며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의 비극에 대한 미약한 반응에 깊이 충
격을 받으셨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비록 긍정적인 예들이 없지는 않지만(58항), “자기만족과 커다란 부주의”가 팽배해져 있습
니다(59항). 문화와 적절한 통솔력뿐만 아니라 생활 양식과 생산과 소비 형태를 기꺼이 바꾸려는 마음이 부족합니다(59항). 그
러하기에 “생태계를 보존할 수 있는 법적 틀”을 시급히 마련하여야 합니다.
오늘 날 벌어지고 있는 자연의 자원 사용과 그로 인한 환경 파괴를 가져오는 이기적 소비주의의 경향 속에서 이 회칙은 우리에
게 세상을 살아가는 신선한 접근 방법을 제시해 준다고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가진 것을 고스란히 다 소유한 상태에서
하나라도 더 얻으려고 노력합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아울러 자연을 선물로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우리에게 주신 선물을 지나친 선택적 소비주의와 자기만족과
커다란 부주의에서 비롯된 버리는 문화에서 벗어나, 아끼고 재 사용하고 재활용하여, 우리 모두에게 내려주신 생태 자원을 미
래 세대에까지 잘 유지 보존하기로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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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공현 대축일
수색 예수성심 성당 박재성 부제님 강론
+찬미예수님
저는 얼마 전 TV를 보며, 어느 김치찌개 집을 알았습니다. 정릉시장 안에 있는 1인분에 3000원 짜리 김치찌개를 파는 식당입니
다. 저렴한 값에 밥과 샐러드, 국물을 무제한 제공해서 시장 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당입니다. 그 가게의 주인은 44세가 되신
신부님입니다. 신부님이 김치찌개 집을 한다? 신부님이 왜 식당을 하실까 보니, 2015년 고시원에서 굶어 죽은 청년의 이야기를
듣고 밥 한 끼가 절실한 청년에게 집밥을 차려줘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합니다. 처음엔 월세, 주방장 월급, 재료비 등을 감당하기
가 어려웠고, 또 주변 상인들이 시세의 절반 가격으로 김치찌개를 팔며 손님을 뺏어간다면서 눈총을 많이 받아 힘드셨다고 합
니다.
하지만 신부님이, 3000원이란 싼 가격에, 김치찌개라는 메뉴로, 결국 ‘왜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지’가 점차 알려지자, 주변에서
같이 동참하고자 하는 이들이 재료나 후원금을 지원해 주셨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식당 때문에 시장에 오는 사람들
이 늘면서 상인들의 인식도 바뀌어 이제 상인들은 덕분에 청년들이 시장을 찾아와 시장 분위기가 밝아졌다면서 신부님을 응원
한다고 합니다. 한 사제가 가난으로 희망을 잃고 죽어간 청년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하고 식당을 차렸습니다. 그 시작은 청년의
절망이었고, 사제의 슬픔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절망과 슬픔을 ‘함께 견뎌 보자’고 외치는 이들이 모였습니다. 작은 도움의 손길
이 모여 이제는 주위를 밝히는 희망의 소식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이는 동쪽의 박사, 세 사람이 아기 예수님을 경배하러 왔던 일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공현’이라는 단어에 무슨 한자를 쓸까 찾아보았더니, 공평할 공(公)에, 나타날 현(現)을 씁니다. ‘공평할 공’은 우리가 ‘공과 사를
구분한다’고 할 때 쓰는 ‘공’자입니다. ‘공적이다.’는 의미는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여기에 관련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그렇기에 ‘공현’이라는 말을 통해서 우리는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개인
적인 일이 아니라, 여러 사람과 관련된 일이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의 박사들이 별을 보며 예수님을 찾아 왔다고 합니다. 별은 반짝반짝 빛나면서, 더 큰 빛이신 예수님에게로
동방박사들을 이끕니다. 김치찌개 신부님을 보며, 동방박사를 이끈 별이 밝게 빛났던 것처럼 신부님의 주위도 참 밝았겠구나하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웃 사랑이라는 빛은 우리를 하느님 사랑으로 이끌어 줄 수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결코
떨어지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확인해 볼 때,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외국의 동방박사
들에게도 기쁨이 되었다는 사실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천년 전 예수님의 탄생이 나라도 다르고, 종교도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이 되었던
것처럼,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와 나라가 다르고 종교가 다른 이들에게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교회 안에 머
물고 있는 이들에게만 기쁜 소식이 아니라,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기쁜 소식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의 정수, 핵심을
잘 담고 계신 분들을 ‘교부’라고 합니다. 그 교부들이 모여 ‘오늘날 현대인들이 교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지’,
‘교회의 나아가야할 방향은 무엇인지’ 회의를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현대인들, 특히 가난하고
고통 받는 모든 사람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는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이며 슬픔과 고뇌이다.”(사목헌장 1항)
가난한 이들의 기쁨을 보고 내가 웃을 수 있고, 고통 받는 사람의 슬픔을 보고 나도 같이 눈물이 나는 모습이 바로 오늘날
그리스도를 따르는 우리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내가 기쁠 때 같이 웃어주고, 내가 슬플 때 같이 울어준다면, 그보다 더 나를
위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으면, 그는 몇몇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큰 재산입니다. 우리를 보며 같이
울고, 같이 웃고 계신 예수님은 인류 공동체 전체의 재산입니다. 그렇기에 바오로 사도는 다음같이 말씀하십니다. “다른 민족
들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복음을 통하여,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의 지체가 되며 약속의 공동 수혜자가 된다는 것입니다.”(에페 3,6)
이웃 사랑의 기쁨이 우리 안에서 올라오면, 그 자체로 빛이 납니다. 실제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쁘게 봉사하는 이들의 얼굴에
서는 빛이 납니다. 그러한 기쁨의 빛은 동방박사를 예수님께로 이끈 별빛처럼 오늘날도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이끌 것입니다.
교회가 그런 역할을 한다면, 바로 이것이 선교가 됩니다. 가난한 청년이 굶어 죽었다는 사실을 접하고 식당을 시작한 신부님의
시작의 마음은 슬픔 때문이었지만, 가난한 청년에게 희망을 만들어주고자 마음이 모인 그곳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기쁨을 보고, 후원자들, 시장상인들이 모였고, 그들의 얼굴에서 나오는 별빛은 또 다시 동방박사를 이끈 빛나는 별처럼 빛이
납니다. 이웃사랑을 통해 세상에 드러나는 빛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계속되길 희망합니다. 교회에서 그 빛을 내면, 그 빛을
보고온 사람들을 위로할 것이고, 예비신자들에게 희망과 기쁨이 될 것입니다.
주님 공현 대축일인 오늘 우리 주위의 약하고 작은 존재들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 인류의 빛이시며, 모든 민족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으로 맞이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매일 성당에 나오시도록 안내하는 선교노력과 함께 복음을 실현하면서 복음에서
일러주는 이웃사랑을 통해서도 선교할 수 있도록 합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주위의 약한 존재들이 예비신자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우리가 예비신자들을 맞이할 때 성탄의 의미가 실현될 것이며, 예비신자들이 성당에 들어올 때 주님 공현의
의미가실현될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공현의 의미를 되살리며, 희망찬 선교의 한 주간, 같이 웃을 수 있는 기쁨의 한 주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었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주님 공현 대축일
얼마 전에 한 번 동창 신부님들과 이야기를 하다가 새로 바뀐 미사경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성찬례
에서 성혈을 축성할 때 왜 ‘모든 이를 위하여’에서 ‘많은 이를 위하여’로 바뀐 것에 대해 갑론을박을 한 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죄를 사해주고 살리기 위해 돌아가셨지만,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구명을 위한 죽음으로 받아들이
지 않고 거부하는 이들에게는 그 효력이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과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는 죄를 용서해 주려고 많은 사람을 위
하여 흘리는 내 계약의 피다.”(마태 26,28; 마르 14,24) 라고 말씀하셨다는 내용의 답이 나왔습니다.
그 뜻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우리네 신앙 역사가 짧아 우리 부모님과 조상님들 그리고 아직도 가족 중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닌 이도 있는 현실에서 조금 더 많이 포함되기를 비는 마음 간절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많은 이들이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인 하느님 신앙에 대해 왈가불가 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믿거나 안 믿
거나 현실을 살아가는데 특별한 손해나 이득이 되지 않으며, 그렇다고 내적 믿음을 확인할 수도 없습니다. 믿는다고 해서 특별
히 다른 이들과 달리 더 거룩해 보이지도 않는 신앙을 왜 가져야만 하는지 의문과 반감을 표현하는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표현
하는 예수님의 대한 안내와 증거가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현이겠습니다.
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간디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예수는 좋지만 교회는 싫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삶은 믿고 따를
만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신자들의 말과 행동은 싫다는 입장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고자 했
던 인도인의 입장에서,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영국인 신자들은 만민의 평등과 박애와 구원을 주창합니다. 실제로는 다른 나라를
강제로 침범하고 통치하며, 식민지 백성들을 압박하고 차별하며 수탈해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다르다고 느꼈기에 그렇게 반발
했으리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
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그러자 헤로데 임금과 예루살렘이 술렁거립니다. 헤로데는 학자
들에게 메시아가 어디에서 태어나기로 기록되어 있는지 물어봅니다. 그렇다면 동방에서 찾아온 박사들의 비중이나 헤로데와
예루살렘 백성들이 술렁거릴 정도로 받아들인 아기의 탄생이 그냥 여염집 아기가 아니라 ‘메시아’의 탄생이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학자들은 “유다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의 주요 고을 가운데 결코 가장 작은 고을이 아니다. 너에게서 통치자가
나와 내 백성 이스라엘을 보살피리라.”(미카 5,1; 2사무 5,2) 라는 예언을 찾아내 보고합니다.
그래도 헤로데와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경배하러 가지 않습니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간절히 원하던 메시아가 태어났고 그
장소도 드러났건만, 그들은 진정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인지에 대한 정확한 확인이 필요했는지, “박사들을 몰래 불러 별이 나타
난 시간을 정확히 알아내고서는”(7절) 즉시 움직이지 않습니다. 다만 겉으로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8절) 라고만 말합니다.
박사들은 헤로데의 말을 듣고 길을 떠납니다. 박사들은 ‘이 시대에 메시아가 탄생했다는 감을 잡아서, 자신들이 이스라엘까지
오도록 했던 표징’을 다시 한 번 자기들 나름대로 확인하게 되어 기뻐합니다. 복음서에는 동방박사들이 감잡은 표징이 ‘메시아
별’이라고 기록합니다. 박사들은 왕에게 바치는 ‘황금’과 하늘에 바치는 예배의 분향제로 쓰는 ‘유향’과 죽을 때 사체에 바르는
‘몰약’을 예물로 바칩니다(11절). 이 선물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라는 예수 아기의 미래를 미리 엿보게 해줍니다. 곧 하느님께 바
치는 희생 제사의 제물로 탄생하신 하느님의 아들 왕 그리스도.
헤로데는 학자들을 동원하면서까지 알아낸 메시아 탄생지를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뒤로는 박사들에게 메시아의 표징이
나타난 시간을 몰래 캐물어 알아내고는 경배가 아니라 제거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우리는 매년 12월 28일, 성탄 8부
축제 중 제4일에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을 봉헌합니다. 메시아가 될 수 있을만한 아기들이 죽어간 날을 기억합니다. “그
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
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16)
왜,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메시아가 그 백성들에게 버림을 받고 제거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이율배반적인 아이러니를 태어
나자 마자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다.”(12절)
우리는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 복음을 읽으며 이런 생각을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 박사들이 굳이 찾아와서까지 묻는 메시아의 탄생 내용을 이스라엘은 몰라서 경배하지 않았던가? 그들은
알면서도 실제로 그 예언이 이루어질지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아니 믿으면서도 실제로 이루어질 줄은 몰랐던 것입니다. 어쩌
면 그들은 처절한 현세를 살면서 희망을 잃은 것입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그들은 단순히 희망은 죽어
서야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일 뿐, 현실에서는 그냥 돈과 권력과 명예만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결이요 행복의 지표라고 여겼던 것
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박물관이나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것이지 현실에서는 살아있지 않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러한 유대교의 삶이었으
니, 아무도 유대교가 표방하는 믿음을 따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믿음보다는 로마의 식민지가 된 후에서야, 자신들의 구체적인
삶에 이해득실이 확실히 드러날 때에만 믿음이 자신들의 이기주의를 챙겨주는 하나의 슬로건이 되었지, 하느님의 구원이라고
하는 믿음의 핵심은 안중에 없는 삶이었습니다.
1800년대를 살다 간 러시아의 그리스 정교회 신자인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는 “만일 누군가 내 앞에서 그리스
도가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나는 진리를 버리고 그리스도의 편에 서겠다.” 라는 말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고리타분하게(?) 신앙을 증거한 그가 쓴 소설 중에 이런 예화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당대 사회에 또 다시 재림하
니까 그분을 맞이하는 종교인들이 “예수님 없이도 저희가 다 알아서 잘 하는데, 왜 굳이 여기까지 또 오셨습니까?” 하면서 “그
만 돌아가시라!” 고 했다는 장면입니다.
교회 공동체를 향한 19세기 작가의 지적이 오늘의 우리에게도 향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진정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일러주시고 펼쳐주시는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믿고 추구하고 있는지? 아니면 우리 현실의 심리적인 위로나 안식을 찾고, 속으
로는 분노와 갈등과 긴장을 간지하고 있으면서도 임시적이며 표면적이며 허구적인 평화를 갈구하며,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복
락과 평안과 안위를 얻고 또 유지하기 위하여 주님 대전에 다다르고 있는지?
구세주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한 희생제사의 효과가 ‘많은 이’에게서 ‘모든 이’로 확산되기 위하여, 오늘 우리가 믿는 믿음을
우리의 일상에서 실현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우리의 꿈과 희망이 박물관과 책의 기록으로만 머무르지 않고. 내세의 구원을 향
한 우리의 현세적인 행복추구가 이율배반으로 깨지지 않으며, 어느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다같이 기뻐하며 희망할 수 있는 공
동체 전체의 온전한 구원이기를 빕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1코린 6,19) 라는 다
음 주 독서의 말씀이 기다려집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마태 2,2)
주님 공현 대축일
제가 24년 전에 5년반만의 보좌신부 생활을 마치고, 본당 주임사제로 사목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영혼을 돌보는 사목이
라는 것이 제가 일일이 직접 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도 아니고, 제가 안 한다고 해서 누가 대신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닌 상황이
었습니다. 하자니 불완전하고 그렇다고 또 안 하자니 마음이 불편하고 만족스럽지 못해 안타까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
다.
그런 상황에서 제가 주임사제로서 영혼의 목자요 아버지라고 하는데, 저 혼자서는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정말 아버
지같이 다 돌보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저에게 맡겨진 그 신자들이 어디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되지 않는 한 언제 어디서 어떤 일
이 생겼는지 그 사정과 형편을 잘 알지도 못하고, 또 어떤 분은 안 좋은 상황이 알려지는 것을 꺼려하기도 하여, ‘내가 말로만
주임사제지, 책임만 많고 아무 일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구나!’ 하는 혼란과 자괴감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말 기도하지 않고서는 하루도 살 수가 없구나!’ 고백하며 주님께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주임사제로서 신자들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신자들을 위해 매일 미사를 봉헌하며 성무를 집행하고, 주님께서 몸소 우리
신자들을 지켜주시고 돌봐주시기를 기도하며 청하는 일이 제가 최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이구나 하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서 예전 본당에 함께 살던 선배 주임사제분들이 어떻게 했던가를 되돌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신
부님은 한 달에 반은 밖으로 다니시며 이 일 저 일을 하시는데도, 본당에 뭐 큰 일이 생기거나 신자들에게 큰 사고도 없이 잘
돌아가고 있던 상황이 떠올랐습니다.
‘그 신부님의 사목 비결 무엇인가?’
그 때 그 신부님은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 성체 앞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저는 한 창 젊을 때라 같이 일어나긴 했어도 그 옆에서
졸기가 일쑤였는데, 그 신부님은 주임사제라 그러신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막중함 때문인지, 매일 일찍 일어나 주님께 기도
하셨습니다. 제가 볼 때는 그 신부님이 매일 아침 주님께 본당과 본당 신자들의 안위를 맡기고 청하신 결과로 그 본당이 평화
스러웠지 않았는가 하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본당 주임 사제이던, 보좌 신부이던, 아버지던, 어머니던, 가장이던, 사회에서 무슨 책임을 어떻게 지고 있던지, 우리가
하는 일이 다 결실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위의 환경과 조건에 잘 맞아떨어지기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열심과 노력
만으로 다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낀 다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주님께서 허락하시고 돌봐주시지 않으면 아
무 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자각이며, 그러기에 우리는 주님께 끊임없이 기도드립니다.
평소에 우리에게 닥쳐올 새로운 환경과 뜻하지도 않고 바라지도 않는 일들이 생겨나지 않기를 청하며, 생겨나더라도 원만히 해
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주님께 매일 기도를 바칩니다.
또한 우리가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하여 방황하고, 잘 안 풀려서 어둠 속에 갇힌 것마냥 헤매 일 때,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주십
사 하고 청하며, 주님의 이끄심에 우리를 맡기고 따릅니다.
그리고 우리가 나름 하느라고 하면서도 다 하지 못하는 부분을 주님께서 몸소 채워주시고, 마침내 주님의 뜻 안에서 열매 맺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주님께서 제게 베풀어주신 모든 것들에 대해 감사드리고 주님께 찬미와 영광을 돌려드리며, 주님의 위로를 받으며 평화로이 쉬
면서, 주님의 영을 통해 우리 삶을 펼쳐나갈 힘을 받아 새롭게 일어서는 것이 기도 중에 우리가 누리는 은총입니다.
특별히 혼란과 어둠 속에 있을 때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 그 혼란과 어둠 속에 빠져 헤매게 됩니다. 바쁘고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일 때문에 기도하지 못하겠다고 여긴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내미는 손길을 아쉽게도 거절하는 셈이 될 것이며, 주
님과 함께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은총의 힘으로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을 홀로 고집스럽게 그 일을 풀어나가기 위한 외로운 씨름
을 계속하여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수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며 그분께 경배드리러 찾아옵니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
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이 질문은 마치 ‘어디에
있는 누구에게 가면 구원의 길을 찾을 것인지?’를 갈구하는 우리의 인생과도 처지가 같아 보입니다.
그 질문을 듣고 당대 통치자 헤로데는 종교학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들은 헤로데에게 성경에 나온 힌트들을 합하여 답을 알려줍
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8절)
그러나 헤로데와 당대 종교학자들은 함께 가지 않습니다. 그는 그 대신 훗날 자신의 정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 별이
나타난 시기를 박사들에게 묻습니다. 이어지는 마태오 복음 2장 16절을 보면, 헤로데는 박사들이 일러준 별이 가리키는 아기가
태어난 시기를 전후하여 2살 이하의 모든 사내 아이를 죽여버립니다. 이것이 매년 12월 28일 우리가 예수 아기의 성탄을 기념
하여 함께 기억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내용입니다.
헤로데의 말을 듣고 베틀레헴을 향해 걷던 박사들은 “동방에서 본 별이 그들을 앞서 가다가, 아기가 있는 곳 위에 이르러 멈추
었다. 그들은 그 집에 들어가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9-11절) 라고 합니다.
예수 아기의 탄생이라는 한 사건을 두고, 누구는 구원의 지도자가 탄생하셨다는 것을 발견하고 경배하러 오고, 누구는 자신의
치부라도 숨기려는 듯 진리로 나신 분을 죽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성당을 처음 찾아오신 예비신자 여러분 환영합니다. 여러분은 여러 가지 연유로 인해 이 곳에 오셨지만, 여러분은
‘동방에서 주님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드리러 온 동방박사들’과도 같은 분들이십니다. 여러분은 오늘부터 지루하다면 지루하
고, 짧다면 짧은 예비신자 교리교육 과정을 받게 됩니다. 이 교과 과정을 통해 여러분은 우리 생의 주님이신 예수님과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영이신 성령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통해 여러분은 주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간직하고 성숙시키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날로 자라나기
위하여, 삼위일체이신 우리 하느님께서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직접 나타나, 여러분이 하느님을 알고 굳게 믿게 되기를 우리
수색 예수성심 성당 공동체 모두가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예비 신자 여러분, 신앙은 우리 생명, 우리 생애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난 일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총이라는 것을 스스
로 자각하는 체험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또한 신앙을 키우는 방법은 우리가 은총으로 받은 깨달음을 바탕으로 주님의 말씀을 실
천해 나갈 때, 우리가 실천하는 그 만큼 성숙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교리시간에 들은 주님의 말씀과 가르침을 여러분의 일상에
서 실현하며 좋은 신자로 다시 태어나시길 기대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이번 화요일부터 삼주간에 걸쳐 우리는 ‘성체조배의 이론과 실습’을 통해 공동체 기도를 시작하게 됩니다. 우리 삶이 지금 생기
도 기쁨도 평화도 없이 무미 건조하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 의미를 실어내지 못하고 무료함을 느끼고 있거나,
내 힘만으로는 헤쳐나가기 힘든 세상에 맞서 버거운 인생의 짐을 지고 허덕이고 있다면, 주님 안에서 풀어나가십시오.
어떻게 기도 안에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지친 나날에 대한 위로를 받으며, 주님께서 비춰주시는 새 길을
걸어갈 수 있는지? 주님께서 기도안에서 우리에게 나타나셔서 새 생명의 말씀을 일러주시고, 그 사랑의 길을 걸어나갈 수 있도
록 이끌어주시기를 간구합시다.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주님 공현 대축일
얼마 전 우연한 기회에 길을 걷는 사람들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연말연시를 맞이한 그분들의 얼굴이 하나같이 기
\쁨과 설렘으로 들떠있는 모습이 아니라, 어딘지 모르게 지치고 뭔가에 쫓기는 듯한 힘들어 보이는 얼굴이었습니다. 요즘 세상
\살기가 힘들다고들 하더니 정말 힘들긴 힘든가 보다 하는 안쓰러운 마음이 들고, 왠지 모르게 기쁨도 여유도 없이 다람쥐 챗
바퀴처럼 꽉 짜인 세상사에 인생을 내맡기고 끌려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지난 대림절 성탄 예고 복음기사에서, 천사는 요셉의 꿈에 나타나 성령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해 알려주었습니다. “마리아가 아
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그리고 구세주가 아기
로 오시리라는 예정은 이미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22절) 이라고 알려줍니다. 직접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하여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이사 7,14) 하신 말씀을 실례로 들어줍니다.
복음 사가는 친절하게 임마누엘의 뜻마저 번역하여 알려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23절)
모두다 힘들다고 하는 세상에 아무런 힘도 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 그분은 과연 인간과 무엇을 어떻게 함께하시는
가? 주 하느님께서 일찍이 유다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고 있을 때 모세를 시켜 탈출시켜 주셨던 것과는 달리, 예수님
은 로마의 식민지에서 구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예전에 유다인들이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할 때 먹고 살라
고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주셨지만, 주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을 믿도록 하기 위해 가끔 빵의 기적을 베푸실 뿐, 사람
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직장과 사회에 나가 이 꼴 저 꼴 다 당하며 비굴하게 사는 모습을 다 아시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도록 먹을 것을 내려 주시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럼 과연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아무런 변화도 가져다 주는 것도 없이 그저 함
께한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철학자 하이데거는 인간은 이 험난한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 말대로라면, 이 무한경쟁의 세계 속에 홀로 내팽개
쳐지기라도 한 듯한 기분이 들 텐데, 이 냉혹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까? ‘힘들다. 힘들다!’ 하는 이 세상의 풍파 속에서 자기 혼
자 다 풀어나가야 하고, 자기 혼자 일해서 가족과 일가를 책임져야 한다고 자각하게 되면, 얼마나 인생이 고달프고 더 힘겨울까
싶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인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이 거친 세상에 나 홀
로만 내 던져진 것이 아니고, 어느 누구의 도움도 없이 나 혼자 헤쳐나가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나를 도와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자각하게 되면 힘이 샘솟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살면서 어려움이 닥쳐도
주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믿기에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않고 꿋꿋이 지켜 나갑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
시면서 우리를 도와주시고 지켜주시고 축복해주시며 이끌어주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얼마나 인생이
고달프고 무겁기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단순히 심리적이고 의식적인 인식의 변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진 것이 아주 많지 않아도, 지금 당장 굶어 죽지 않기에 주님께서 내려주시는 축복과 은총의 힘으로 살아나갈 수 있
습니다. 우리는 인간 사회가 아주 좋지 않아도, 주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무한한 자비가 있기에 서로 용서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
다. 우리는 스스로 세상 최고가 아니어도, 주님께서 위로해 주시기에 오늘 여유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우리는 우리가 몸담고 있
는 사회가 불완전하기에 만족할 수 없고, 나 스스로도 부족하고 나약하기에 답답하고 자신감이 없어지고, 심지어는 죄마저 짓
고 살지만,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시면서 사랑해 주시기에, 현실에서 안분자족하며 미래에 다가올 하느님 나라에 대한 희망으
로 기쁨마저 간직하고 살아갑니다.
동방박사들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을 찾아 나선 공현 축일을 기념하는 오늘, 우리가 보기 좋고, 가지고 싶고, 하고 싶은 것
을 뿔뿔이 찾아나서는 외로움과 공허함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우리와 함께하시기 위해 우리를 찾아 오신 예수
님을 향한 우리의 인식과 의미를 믿음 안에서 되새기고 충만해져 풍요로워지기를 기대합니다.
교구장님께서는 올 1월 1일 신년사에서 “희망은 믿음에서 비롯된다.”고 하시며, “올 한 해도 내외적으로 여러 가지의 어려움이
있겠지만 자비로운 하느님 안에서 희망을 지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병인박해 150주년인 새해에, “순교자들이 온전히 하느
님을 공경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여기며, “우리도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더 잘 돌보며 사랑하는 삶을 살”자고 제안하셨습니다.
올 2016년 새해에 여러분 모두가 주 하느님께서 펼쳐주시고 이끌어주시며 함께해주고 계심을 믿기 때문에, 어려운 현세를 꿋
꿋이 살아내고, 새롭게 펼쳐주시는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희망으로 기쁘게 살아가시기를 빕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얼마나 높고, 얼마나 좋은 조건에 놓여있느냐에 따라서가 아니라, 주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고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여러분의 가정이 화목하고 평안 하시기를 빕니다.
우리 공동체가 사회에서 능력 있고 가진 것이 많은 신자들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와 은총을 가득 받아 우리
공동체의 마음 속에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하여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의 부족한 점을 채워주며, 서로 힘을 북돋아주기 때문에
신앙으로 풍요하게 되기를 바라며, 실제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합시다.
그래서 우리 공동체 신자들이 서로가 서로를 보고 싶어하고, 함께하고 싶어하고, 나누고 싶어하여 우리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
랍니다. 또 그렇기에 사람들이 함께하고 싶어하고, 같이 살고 싶어하고, 기대고 싶어하는 좋은 사람들이 모인 신자 공동체가
되도록 기대하고 노력합시다.
사랑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 아버지와 은총을 가득히 내려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두를 불러모아
하나의 교회 안에서 주 하느님과 신자들 사이에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주님 공현 대축일
지난 연말에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가 수많은 폭죽에 둘러싸이기를 좋아한다.”고 하시면서도 “이는 분명 아름답지만 실제
로는 아주 짧은 시간밖에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도 태어나는 때가 있고 죽는 때가 있다며, 새해는 생의 유
한함과 인생행로의 끝을 돌아보는 시간이기도 하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한 때 크리스마스 캐롤이 사라진 도시를 언급하던 우리 사회는 새해 첫 날부터 해돋이 행사와 제야의 종소리 등의 화려함으로
뒤 덥혔습니다. 그 화려함 뒤에는 정말 교황님이 자주 말씀하시던 바와 같이 비참한 가난이 광대하게 우리 주변에 펼쳐져 있습
니다. 한 사람 두 사람의 안부를 묻다 보면, 우리 주변에는 환우와 가난 등으로 힘겹게 인생을 살아가는 이들이 그야말로 널려
있다고 말할 만큼 자주 눈에 띄고 또 그분들의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자신들이 확인하기조차 명확하지 않은 별을 향해 먼 길을 떠납니다. 그 별이 유다인들의 임금을
가리키고는 있지만, 정확히 어느 곳을 향하는지도 모른 채 동방박사들은 길을 떠나옵니다. 그래서 헤로데 임금에게 와 묻습니
다.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마태
2,2) 이 질문이 헤로데와 당시 집권자들에게 커다란 파장을 가져옵니다. 자신들의 집권이 평생을 가리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갑자기 자신들의 안위를 걱정해야만 하는 사건이 생겨나기라도 하듯이 그들은 “깜짝 놀랐다.”(3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어쩌
면 그들이 만일 백성들의 안위를 위해 일해왔다면 그렇게까지 놀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그 소식에 흥분하여 기쁨에
넘쳤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유다인들의 새 임금이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 분이 어디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예언자들이 언급했는지를
확인하고서도 정작 함께 찾아 나서지는 않습니다. 그보다 동방박사들에게 그 정보를 알려주며, 베틀레헴으로 보내면서 말합니
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6절) 훗날 동
방박사들이 떠난 후, 헤로데가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16절)는 후속
기사를 통해, 헤로데의 주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됩니다.
헤로데와 집권자들은 자신들의 앉아있는 자리가 자신들에게 요구하는 주관심과 주업무라고 할 수 있는 백성들의 안위를 추구
하기 보다, 자신들의 안위와 집권유지에 더 애썼거나, 백성들이 원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펼치고 싶은 것들을 권좌에 앉아 추구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가끔 우리 눈에 별처럼 화려하게 보이는 빛들은 우리를 사로잡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빛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그 빛을 얻고
자 나아갑니다. 그 빛을 실제로 얻을 때까지, 우리는 여러 가지 난관을 거치고, 무수한 노고와 시간을 쏟아 부어야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얻고자 하는 그 별을 움켜 잡았을 때, 그 별은 우리에게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화려함과 최고의
부와 명예와 권력을 가져다 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우리가 그 빛을 통해 얻고자 하는 평화와 안녕은 주지 못할 듯싶습니다.
그런가 하면, 처음엔 모두 빛의 의미를 찾아 구하지만, 정작 빛을 받고 나서는 그 빛을 받고 그 빛을 계속 받는 데만 관심을
기울이고, 그 빛을 비추어야 할 곳에는 관심이 줄어들게 되나 봅니다. 그런가 하면 또 그 자리에서 처리해야만 하는 일에 파묻
혀, 정작 그 일을 통해 돌보고 지켜주어야 할 미약자들과 가난한 이들에 대해서는 미처 손을 쓰지 못하게도 되나 봅니다. 교황
님께서는 이 번에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점차 우리의 관심과 행동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다.”라고 하시면서 우리의 관심
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일깨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꿈과 소망이 있는지?
그 꿈과 소망은 무엇인지?
왜 그 꿈과 소망을 이루고 싶은지?
그 꿈과 소망을 이룬다면, 그 때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런지?
그런가 하면, 우리는 지금 어떤 별을 바라보고 있는지?
그 별이 우리의 꿈과 소망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그 별이 우리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줄 수 있는지?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은 “꿈에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지시를 받고, 다른 길로 자기 고장에 돌아갔다.”(마태 2,12)고
전합니다.
우리 각자가 추구하고 있는 꿈과 소망들을 다 합친 궁극적인 희망으로서의 하느님 나라와 우리가 현세에서 바라보는 별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며 우리의 길과 인격을 다듬어 갑시다. 올 한 해 새롭게 펼쳐지는 매일을 맞아 형제자매들과 함께 우리 삶과
활동에 새로운 열정과 새로운 방법, 새로운 표현을 고민하고 적용하여 새로운 복음화의 별을 걸고 그 빛을 비춰나갑시다.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 또 보물 상자를 열고 아기에게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
주님 공현 대축일
제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 부모님께서는 제가 법관이 되길 바라셨습니다. 그 후 중학생이 되었을 때는 의사가 되라고 하셨습니
다. 고등학생 때는 경영학과를 가라고 하셨습니다. 직업에는 귀천이 없지만, 각 세대와 시대에 따라 사람들이 각 직업에 대해
기대하고 평가하는 가치가 다르고 그에 따른 꿈도 다릅니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와 아울러 왜 그것을 가지고 싶고, 왜 그 자리에 앉고 싶은가도 중요한 묵상거리입니다. 그리고 무엇을 위해
내 한 생을 바칠 것인가 하는 것도 우리의 관심사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것을 생업으로 하고 어떤 것을 취미로 할 것인지도 선
택의 요소입니다. 어릴 때 그리고 중요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청년 시절뿐만 아니라, 나이가 들어가면서 무엇을 어떻게 하면서
내 생애를 살아갈 것인지도 우리 스스로 결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남은 여생을 어떻게 펼쳐나갈 것인지에 대한 우리의 숙고도
우리 인생의 결론에 관련된 부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러 옵니다. 복음은 예수님의 탄생에 즈음하여 “동방에서 박사들이 예루살렘
에 와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나신 분이 어디 계십니까? 우리는 동방에서 그분의 별을 보고 그분께 경배하러 왔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2,1-2) 라고 전합니다.
그분들이 어떤 분이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는 없어도, 박사라는 칭호를 쓴 것을 보면, 그분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적절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고 나름대로 인정받고 있는 사람들이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그런 사람들은 새로
운 어떤 것에 대해 민감하게 움직이기 보다는 자신이 그 동안 배워왔고 몸담아 왔던 지식이나 체제 등에 더 비중을 두는 사람
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무엇을 찾으러 움직였을까?
우리는 반드시 뭐가 모자라고 아쉬워서라기 보다는 가끔 기존의 틀에 박힌 삶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
심이 들기도 하고, 내세나 영적 세계에 대한 갈망이나 간절함 등을 가슴 속에 품기도 합니다.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라고 하는 요즈음, 사람들은 진리를 상대화 시킴으로써 절대적인 가치를 무시하고 잊어버리게 되자, 거꾸
로 뭔가 눈에 보이고 느껴지는 어떤 것이나 현상들 속에서 무엇인가를 확인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교와 예술, 도덕을 개인의 신념 차원으로 격하시키고, 과학적 이성을 기초로 한 경제와 정치 발전만을 중요한 것으로 추진해
왔던 근대주의가 세계 제2차 대전으로 몰락하고, 인간 이성의 부작용과 폐해를 겪으면서 탈근대주의가 생성했습니다. 탈근대
주의는 오히려 과거에 배척했던 기적은 물론이요 미신마저 그리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과학적 이성주의를 의심하는 대신 뱀파
이어, 외계인, 환상, 마술 등 불가사의 하고 초자연적이며 기이한 현상에 심취하고 있습니다. ‘해리 포터’, ‘다빈치 코드’ 등도 이
새로운 현상에 포함됩니다.
세계 각국, 각처, 각 민족에게서 문화적 신조나 관습으로 구체화되던 전통 문화가 허물어지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정신적으로
딱히 의지할 데가 없고, 장차 일어날 사태에 대한 두려움마저 간직하고 있습니다. 구체화하자니 너무 심각하고 마주하기엔 공
포스럽습니다.
어떤 이들은 이 불안스런 상황을 피해 술과 약물에 빠져들거나 자살하기도 하고, 재물과 소유를 통해 안정을 얻으려고도 하고,
스포츠나 오락, 섹스에 빠져 삶의 근심을 외면해 보려고도 합니다. 이렇게 탈근대화 세계의 불확실성에 대처하는 현대인들의
공통적인 행동 방식 중의 하나는 과거로 되돌아가려는 움직임입니다. 안전하고 마음 놓을 수 있었던 과거의 원칙, 관습과 관례,
신념이나 정체감으로 돌아가고 싶은 신보수주의나 종교적 근본주의도 생겨납니다.
불확실성과 불안이 점증하는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정신, 문화세계 그리고 종교계에서도 신비주의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납니다. 서구에서는 ‘요가’ 등의 동양의 수행과 명상 등의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교회 내에서는 고대 그리
스도교 명상 전통을 대중화했다고 하는 ‘향심기도’(centering prayer)가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을 만났다고
하는 성 프란치스코, 성녀 대 데레사, 십자가의 성 요한, 성 이냐시오 로욜라 등 과거 신비가들에 대해 심취합니다. 사람들은 신
비주의를 통해 행복하고, 즐겁고, 자신만만하고, 겸손하고, 사랑스럽고, 자유롭고, 편안해지고 싶어합니다.
그런가 하면, 육체적 질병을 포함한 심리 치료를 위해 삼담 치유사를 찾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치유사들에게서 내적 평화와
활력, 온전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교회에 다니면서도 세속에서 영성을 찾고자 하는 ‘뉴에이지’ 운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며,
단순한 영적 통찰 작업도 진행되고 있습니다.
최근 프랑스의 교회 일치 수도원이자 피정 센터로 일년 내내 젊은이들이 수천 명씩 찾아와 일주일간 머물고 가는 ‘떼제 공동
체’의 놀라운 성공의 비결은 ‘자유로움’에 있다고 합니다. 떼제 공동체는 어떤 교리나 교의를 강제하지 않습니다. 떼제 공동체는
전례를 길게 진행할 뿐 설교는 없습니다. 젊은이들은 동아리나 끼리끼리 모여 영성이나 성경이나 자신들이 원하는 주제를 가지
고 토론합니다. 오랫동안 침묵하고, 단순하고 고요하게 기도와 노래와 찬양만을 반복합니다. 가르침이나 원칙, 규정이나 기준도
없이, 그저 참가자들의 개인적인 느낌과 자기 이해 그리고 자유로운 선택만이 있는 우리 시대의 징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여러분은 요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디서 무엇을 찾고 어떤 면에 심취하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 맞는 것
같은 기도 방법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에게 호감이 가고 편안한 신심행위는 무엇입니까?
여러 민족과 여러 종족이 교회를 이루듯이 교회 내에는 각자에게 맞는 여러 가지 기도 방법과 신심 행위, 신앙 생활 방식이 있
습니다. 여러 가지 기도 방식이나 성경공부 프로그램 그리고 신앙 실천 방법들은 결국 우리 각자에게 맞는 방법을 통해 주님께
나아가도록 하기 위한 그리스도교 영성의 심화 과정입니다.
과거에는 예수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유다 이스라엘까지 가야만 했습니다. 이러 저러한 성경 공부 프로그램, 이러 저러
한 기도방법을 찾아 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에게 맞고 유익하다고 여기는 이것 저것을 찾아 여기 저기를 다니는 것
이 아니라, 우리를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바라보며, 우리가 마주치는 매일 매일의 순간에 주님의 말씀을 통해 드러난 주님의
뜻을 실현하며, 스스로를 성화시켜 나가기로 합시다.
“그들은 그 별을 보고 더없이 기뻐하였다.”(마태 2,10)
주님 공현 대축일
오늘은 주님 공현 대축일입니다. 동방에서 가스팔, 발타살, 멜키올 세명의 왕이 별을 보고 구세주가 탄생했다는 것을 알고, 별을
따라 예수님을 찾아와서 경배하고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린 사건을 기리는 날입니다.
이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성탄 날 밤 밤을 새워가면서 일해야 하는 가장 가난한 노동자들인 목동들에게 나타나시고,
오늘 동방의 세 박사 또는 세 왕에게 나타나심으로써 유다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까지 구원의 기쁜 소식으로 자신을
드러내신 날임을 기념합니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이 바친 선물의 상징적인 의미를 통해, 예수님께서 황금을 받으실 왕으로서 세상을 구하시기 위해, 죽은
이의 사체에 바르는 몰약을 받으시고 자신의 생명을 바쳐 죽으심으로써 아버지께 유향연기처럼 희생제사를 바치시리라는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 공현 대축일과 연관하여 러시아에는 ‘넷째 왕의 전설’이란 민담이 있습니다.
이 민담은 예수님을 찾아 나선 동방박사들이 원래는 네 명이라는 이야기에서 출발합니다. 이 네 번째 알타반이라는 왕은
나머지 세 명의 왕들과 함께 예수님을 찾아서 별을 따라 가다가 갑자기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불쌍한 아기, 미망인과
고아들 등 불쌍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 예수님께 드리고 싶었던 보석을 다 나눠줘 버리고 때도 놓쳐서 결국 예수님을 뵙지
못해서 나머지 세 명의 왕들만 예수님께 경배드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아기가 우리를 위해 희생제사를 지내시고 부활하여 하느님 오른쪽에 앉으셔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리라는 것을 우리
가 믿는 지금 이 시점에서 이 넷째왕의 전설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갖은 역경을 다 헤치고 예수님께 가서 경배를 드린 세 명의 왕은 길이 역사에 남겨 칭찬받고 그 사건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
음을 전해주신 주님을 찬미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경배드리러 가다가 자기의 도움을 필요로한 사람들을 도와준 이 네 번째 왕은 유혹에 걸려 넘어져버린 낙
오자인가?
이 네 명의 왕 중에 어느 누구 한 왕은 도움을 주기 위해 남아있었어야 했지 않았겠는가?
이 네 번째 왕이 자기에게 도움을 청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베풀지 않았다면, 나머지 세 왕이 예수님께 가서 죄스럽게 인사드
릴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그리고 정작 그랬다면 그런 왕들을 예수님께서 기쁘게 맞이하시지 못하셨지 않았겠는가?
기회나 때를 자기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을 때도 있지 않은가? 우리말에도 ‘아무리 자식이 많아도 임종을 보는 자식은 따로
있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그 때 그 기회를 놓쳤다고 내가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주님을 뵈올 기회를
주님의 말씀을 실현해야하기 때문에 놓치게 된다면, 주님께서는 언젠가 다시 그 기회를 주실 것이고, 더 한층 축복해 주실 것
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께 찬미와 경배를 드린 세 왕들뿐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삶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한 이 네 번째 왕
의 삶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 생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생각해 보면, 이 네 번째 왕은 아니 세 명 이외에도 예수님을 찾아 나선 또 다른 네 번째의 다른 많은
왕들은, 아니 오늘도 예수님께 나아가려고 하지만, 실제로 성당에 오지 못하고 여러 가지 이유로 신앙생활을 하지는 못하지
만 그래도 마음속으로 예수님을 그리고 청하며 예수님께 나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북한에 살거나 가족이나 기타 다른 여러
가지 이유로 겉으로 신앙을 드러낼 수 없는 조건 속에 살고는 있지만, 그리고 또 드러나게 영예를 드리지는 못하지만 마음속
으로는 진정 주님을 갈망하며 그 갈망을 선하고 아름다운 인생으로 녹여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들 모두를 축복해 주실 것이며, 겉으로 드러나게 활동하고 노력하는 좋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기도밖에 할 수
없는 어려운 조건과 상황에 처한 사람들의 숨은 노고와 갈망을 다 합쳐서 주님의 나라를 이루실 것입니다.
다른 면에서 볼 때, 그럼 겉으로 드러나게 활동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 특별한 은총과 영예가 주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예수님께 경배한 세 명의 왕들에게 무슨 특권이나 특은이 주어졌는가? 그저 경배한 것뿐이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구하러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예를 드렸을 뿐이고 그것이 다다.
단지 우리 각자가 처한 기회와 조건이 다르고 상황이 다를 뿐이지 누가 앞이고 뒤도 없으며, 누가 위고 아래도 없으며 우리는
모두 하느님께 나아가는 같은 형제들입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가 처한 상황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주님께 찬미와 감
사를 드리며, 주님의 일을 할 뿐입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을 바라보고 평가하는 유혹에 빠져 스스로 포기하고 반항하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애를 살면서 루카 복음에서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듯이, “저희는 보잘것없는 종입니다.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루카 17,10)라고 할 뿐입니다. 어떤 상을 언제 어떻게 주시는가는 주님의 몫이지 우리가 알 수도
없고 요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진정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상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뵈옵고,
주님을 모시고 경배드리며 주님과 함께할 수 있다는 것뿐입니다. 아니 그것이 다며 전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으로써, 아니 우리가 주님과 함께하면서 주님의 일을 한다는 그것이 우리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이며 기쁨입니다.
넷째왕의 전설이라는 소설은 넷째왕에게 이런 기회를 선사합니다.
넷째왕이 가진 것을 다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주고 그래도 모자라 노예를 풀어주고 자신이 대신 노예까지 되어 고생하고 있
던 어느날 꿈에 누군가 자기를 흔들어 깨워 달려가보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때였고 그 때 넷째왕이 예수
님을 뵈오며 경배드리자, 주님께서 그에게 눈길을 돌리시며 “너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
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5-36) 라는 말씀을 해주시고 그에게 주님의 피를 적셔
주시며 축복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나선 동방박사들이라는 관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우리는 도움을 필요로하는 사람들을 도왔던 네 번째 왕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서서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하느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따름입니다.”(1역대 29,14) 라고 스스로를 희
생하며 복음을 살아야 할 것이며,
먼저 가 영예를 누리게 된 세 왕처럼 현세에서 주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았다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할 것
입니다. “도대체 아폴로는 무엇이고 바울로는 무엇입니까? 아폴로나 나나 다 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
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1고린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