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을 아침에 번 호 1 글쓴이 김용신(아나운서) 날 짜 2004-10-14 오후 3:13:03
조 회 736 추 천 16 첨 부
cbs건물 뒷문으로 나가면 고층건물에 둘러싸인 작은 광장느낌의 공간을 만나게 되는데 이 공간의 한 가운데에 서서 몸이 휘어질 것처럼 목을 뒤로 제껴 하늘을 바라보는 일만큼 요즘 환상적인 일은 없다. 오늘 고층건물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그야말로 크레파스 하늘색인데 차가운 공기에 잔뜩 팽팽해진 내 얼굴 위로 뚝뚝 파아란 국물이 떨어져 물들 것 같다. 방송 끝내고 아침 먹으러 이 광장으로 나서면서 아직은 사람들로 북적이지 않은 이 공간의 중심에 서서 모든 하늘과 바람과 계절의 기를 쏙쏙 흡수하는 일이야말로 내 하루를 생생하게 하는 비결이라고 할까.
눈 가느다랗게 뜨고 얼굴 쑥 내밀면서 햇살을 맞으면서도 바람에 쓸리는 옷깃을 자꾸 여미게 되는 맑고 차가운 날. 느닷없이 샘솟는 의욕이 참으로 사랑스러운 가을 아침.
[제목] : 춤에 대하여 번 호 2 글쓴이 김용신(아나운서) 날 짜 2004-10-26 오전 10:50:10
조 회 664 추 천 18 첨 부
무도회장은 언제나 나에게 두려움의 장소이다. 내가 그곳을 찾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물론 무도에 능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춤을 추기 싫어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난 무지 춤을 추고 싶다. 하지만 내 뜻과 상관없이 나타나는 몸 동작에 적잖이 충격을 받고 나면, 그리고 내 주위사람들을 적잖이 충격 받게 하고 나면,, 또다시 그곳에 발길을 옮기는 일은 웬만한 강심장이 아닌 나로서는 도저히...
아침방송 2시간 중에는 진행하는 나까지 들썩이게 하는 신나는 곡들이 있다. 마음은 창 밖으로 보이는 구름 못지 않게 두둥실인데 본드 붙은 양 의자에 딱 들러붙은 내 몸이 영 마음을 못 따라간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이자 최선의 움직임이란 게 고개 까닥, 발가락 꿈틀거리는 것뿐이니,,, 맘껏 신나게 움직여보라는 나의 멘트가 무색해지는 순간.
내가 춤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 해보게 된 계기는 몇 년 전 읽은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을 생각하면서다. 이 책 속 주인공은 불치의 병을 앓으면서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 그 상황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다는 거라고 말한다. 이 교수는 학생들이랑 춤을 추는 것을 너무도 즐거워하던 사람이었는데 더 이상 춤을 출 수 없는 것이 그를 가장 슬프게 한다는 거다. 춤이야말로 본능이고 더할 나위없는 자유의 절정이라는 것. 가장 잃기 싫고 놓치기 싫은 본능. 이 본능을 억제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가장 안타깝다는.
세상에~~~~
아,,,근데 왜 나는 춤을 추면서 부자유함을 느껴왔을까. 그건 내가 넘들의 시선을 너무 의식했기 때문이 아닐까. 춤이란 것이 자유로운 자기표현임에도 어떠어떠한 기준과 형식으로 춤을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내가 상상하기로는 이 책의 주인공 교수도 뭐,,그리 ,,,세련되고 현란하며 섹슈얼한 춤을 추지는 않았을 거 같다.
또 하나,,,춤에 대한 나의 생각이 바뀐 것은, 아이들이 추는 춤 때문이다. 나의 변변치 못한 춤에 대한 변명은 나는 원래 춤 추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둥, 춤을 춰본 일이 별로 없다는 둥 뭐 그런거다. 헌데,,춤을 가르쳐주지도 않았고 춤이 나오는 비디오나 텔레비젼을 보여주지 않았을때 아이들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정말 춤은 본능일지도 모른다. 이 땅의 모든 아이들에게 이 본능이 나처럼 사회적 기준에 눌려서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라고 춤에 대해 앞으로도 맘껏 자유롭기를 바랄 뿐.
언제쯤이면 경직된 나의 몸이 춤에 대한 본능을 되찾을 수 있을까?
[제목] : 커피와 빠다코코낫 번 호 3 글쓴이 김용신(아나운서) 날 짜 2004-10-28 오후 4:42:05
조 회 1184 추 천 25 첨 부
아주 어린 시절 동그랗고 긴 투명한 병에 담긴 빨간 뚜껑의 멕스웰하우스를 기억하는지. 외할머니 댁에 가면 할머니는 아주 정성스레 이 빨간 뚜껑을 열어 까만 가루를 쏟아내 커피를 타 내셨다. 잊혀지지 않는 장면은 할머니가 밥 먹는 숟가락으로 두 숟가락씩 하얀 설탕을 그 까만 물에 집어 넣었다는 것.
그러다가 멕스웰하우스는 맥심으로 대세가 바뀌어지는데 은근하게 각이 선 작은 맥심 용기에 김치를 담아서 도시락 싸오는 친구들이 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는 엄마가 외제시장에서 커피 한 통씩을 사오시곤 하셨는데 한글이 하나도 써있지 않은 그래서 뭔가 귀한 듯한 느낌이 그 당시 들었던 커피가 바로 초이스다. 분말이 아닌 독특한 알갱이가 뭔가 심상치 않은 고급스러움을 드러냈고 그 알갱이들이 마치 꼬리를 빼듯이 살살 녹는 그 순간 기다렸다는 듯이 하이얀 프리마를 넣어주어 적당한 갈색을 만들어주면 된다.
그래도 그 당시 내가 보았던 가장 근사한 커피는 비엔나커피였다. 엄마 친구들 모임에 따라가서 처음 본 그 비엔나 커피는 커피위에 한 덩이의 하이얀 크림이 덮여져 있었고 마치 백작들이나 먹는 것처럼 호사스럽기 짝이 없었는데 뭔가 좀 있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이라면 주로 비엔나커피를 시켰던 것 같다. 어떤 다방에서는 생크림이 아닌 아이스크림을 띄워주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난 이건 진짜 비엔나커피가 아니라고 꽤 아는 척 했던 것도 기억한다.
그 이후에도 커피는 나름대로 발전에 발전을 더하여서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쯤에는 자뎅을 선두로 하는 체인커피전문점들이 들어섰고,자뎅이나 왈츠 같은 커피전문점에서 분위기있게 커피 한번 마셔보는 것이 철창같은 학원에서 자판기커피로 잠을 쫒던 내 재수시절의 소망 중 하나였다.
이제는 스타벅스를 필두로 하여 여기저기 근사한 커피점들도 많고 꽤 분위기잡고 커피 한잔 마셔도 될 법 한데 어째 내가 먹는 대부분의 커피는 늘상 방송국 자판기 출신이거나 사무실에서 내가 직접 타 먹는 커피 하나, 설탕 둘, 프림 둘의 영락없는 다방커피다. 예나 지금이나 단지 졸음을 쫒기 위해서가 대부분의 커피마시는 이유가 되는 게 갑자기 서글퍼져서 오늘은 큰맘먹고 빠.다.코.코.낫 비스킷을 샀다. 사면서도 어째 별로 세련돼보이지 않는 비스켓 제목이 맘에 걸린다. 빠다는 너무 노골적이다. 코코낫은 또 어떤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엄마가 좋아해서 늘 사다먹은 기억을 떠올리면 20년은 족히 넘어가는 역사가 이 비스켓 제목에 녹아있다. 웬만하면 포장도 바뀌고 이름도 바뀌었을 법 한데 여전한 은색포장에 빠다코코낫이 뭔가. 버터도 아니고 코코넛도 아니고. 궁시렁 거리면서도 오랜만에 이 과자 생각이 난 이유는 커피속에 찍어먹으면 참 고소하고 부드러웠던 옛 기억이 떠올라. 설마했는데 아직도 편의점 한편에 떡 자리잡고 있으니 놀랍기도 하고 이름이 바뀌지 않았으니 맛도 여전하겠지 싶어 집는 손에도 믿음이 간다.
잠깐 짬내서 커피한잔과 쿠키 한조각을 나눠먹은 오후.. 아,,,부드럽다...
[제목] : 아프지 말자 번 호 4 글쓴이 김용신(아나운서) 날 짜 2004-11-18 오후 2:48:50
조 회 2127 추 천 19 첨 부
아팠다. 어릴적엔 몸이 아파서 울어본 기억이 내겐 별로 없는데 이렇게 다 커서 몸 아프다고 울긴 첨이다. 몸 아프니까 맘이 아팠고, 아니 사실은 몸보다 이렇게 여기저기 아픈 몸을 바라보는 마음이 더 아프고 서러워서 그래서 눈물을 쏟을만큼 슬퍼졌는지도 모른다.
문득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리면서 살고 있는 건 아닌가 생각했다.
몸이 아프니까 맘이 참 가난해진다. 버둥대며 잡으려했던 것들의 가치를 다시한번 산정해보게 되고 내 삶의 우선 순위도 재 점검해보게 되고. 안 아플땐,, 남의 도움 절대 안 빌리고 살 것처럼 남한테 아쉬운 소리 절대 안하고 살 것처럼 했는데 "힘들어요" " 도와줘요" 자존심 누르고 이런 말들이 종종 입에서 나오기도 하고.
응급실에 몇 시간 누워있으니 알 것 같다. 가는 호스를 온 몸에 꽂고 솜뭉치처럼 마르고 가벼워져서 누워있는 사람들. 한 침대가 막막하게 비고 또 다른 환자가 새로 들어오는 그 슬픈 시간들을 눈여겨보면 이렇게 낯선 풍경들이 그 지루하고 평온한 우리들 일상의 바로 옆 얼굴이라는 걸 우리는 얼마나 잊고 사는지.
건강을 잃고 보니 참 소중한 축복이었구나 싶다.
씩씩하고 건강할땐 잘 몰랐던 마음들을 요즘 만나고 있다. 이것도 내 성장에 도움이 되겠지.
아프지 말자.
[제목] : 데드라인이 있다는 건... 번 호 5 글쓴이 김용신(아나운서) 날 짜 2005-09-27 오후 9:26:24
조 회 1330 추 천 3 첨 부
하루에도 몇 번씩 제가 읽는 뉴스의 기사속에서 죽음을 접합니다. 죽음...이라는 소식을 접하는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은 참 당혹스럽고 불편하죠.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몰고오는 죽음이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 누구의 아버지가, 누구의 어머니가 누구의 남편이 죽고 그러다가, 내 가까운 누군가의 죽음을 대하고... 절대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사건이 내 곁에서 아주 가깝게 일어날때, 그때서야 죽음이라는 사건이 나라고 해서 예외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충격적으로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오늘 새벽, 함께 일하던 선배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목소리가 걸걸하면서도 유독 컸던 장난스럽게 툭툭 말걸기 좋아하던 장난기 많은 선배였습니다. 휴일이나 주일이면 흰줄 두 줄 박힌 자주색 츄리닝과 슬리퍼차림으로 스튜디오 밖에서 뉴스진행을 봐주곤 했더랬습니다. 특별한 친분은 아니었어도 제 회사 생활 10년에 하루 한번은 그 선배가 쓴 뉴스기사를 읽었을테고 넉달에 한번 정도는 그 선배의 진행 아래 뉴스를 했을 겁니다.
그리 오래지않은 얼마전, 몸이 안좋다고 검사를 받고 수술을 받는다더니, 온 몸에 퍼져버린 암세포가 이렇게 빨리 건강했던 사람을 데려갈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죽음이라는 데드라인이 있는 거였어요. 데드라인이 있다는 거. 언제까지 마감해야하는 그 마감일이 있다는 건 일에 있어서 상당한 스트레가 되기도 하고 죽음을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한편으로는 더욱더 밀도 있는 작업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누구나 인간은 시한부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삶도 더욱더 꽉차지겠죠. 사랑하지 않을 것이 없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 없고 행복하고 감사하지 않을 것이 없고... 우리가 사는 것이 이렇게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때는 정작 그 죽음이라는 데드라인 앞에 섰을 때 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