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교구 > 치명자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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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도그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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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가는 길 | ||
▣ 서울 방면 - 전주 IC에서 직진, 남원방향(외곽도로)으로 18km지점(전주역을 지남) 색장동 삼거리에서 우회전(전주시청방향)하여 3.3km지점 오른쪽 다리를 건너면 됨(호남제일문, 기린로를 통과할 경우, 시청(기린로 10km)과 리베라 호텔을 지나 남원 방향으로1~2km지점 신호등에서 좌회전하여 다리(승암교)를 건너면 성지에 도착 ▣ 대구, 부산방면 - 88고속도로나 통영 대전간 고속도로를 통해 남원을 거쳐 전주 시청쪽으로 진입, 전주천(전주시내입구)우측산 밑 다리를 건너면 됨.(전주시 입구에서 약5km) ▣ 여수, 순천방면 - 남원을 거쳐 전주 시청 방향으로 진입하면 전주천 우측 산밑에 안내판이 보이며 신호등에서 다리(승암교)를 건너면 성지에 도착. ▣ 목포, 광주방면 - 호남고속 서전주 IC로 진입, 진북터널까지 직진하여 기린로로 진입, 전주시청, 리베라호텔을 지나 남원방향으로 1~2km지점 좌회전, 다리(승암교)를 건너면 됨. |
순교자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1756-1801년)
1756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전라도 지역 최초의 신자가 된 것이다.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아들이고, 그 다음해에 순교한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며느리, 유중성(마태오)은 그의 조카이다.
아우구스티노에게 교리를 가르쳐 준 사람은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이었다. 그는 권일신의 집에서 주요 교리를 배우는 동안 이를 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이내 이승훈(베드로)에게서 세례를 받은 뒤 고향으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가족과 친척은 물론 그의 집에 있던 종들도 모두 그의 전교 대상이 되었다.
이제 아우구스티노에게는 빈부귀천이 따로 없었다. 그는 교회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면서 모두에게 모범을 보여주었으며, 가난한 이웃은 물론 자신의 종들에게도 애긍과 희사를 베풀었다.
1786년 봄에 이승훈을 비롯하여 지도층 신자들이 모임을 갖고 임의로 성직자를 임명하였을 때, 아우구스티노도 전라도 지역의 신부로 임명되었음이 거의 확실하다. 이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거나 그들을 모아놓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그러나 얼마 뒤에 지도층 신자들은 이러한 행위가 독성죄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따라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성무 활동을 중단하였다.
지도층 신자들은 이때부터 북경에 밀사를 파견하는 데 몰두하였다. 아우구스티노 역시 이 계획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1789년 말 밀사 윤유일(바오로)을 북경에 파견하는 데 필요한 비용을 헌납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아우구스티노는 신주를 땅에 묻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 그러나 이듬해 이종사촌 윤지충(바오로)이 제사를 폐지한 죄로 체포된 후, 일시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다가 전주 감영에 자수하여 형식적으로 배교를 선언하고는 석방되었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자, 아우구스티노는 아우 유관검을 신부에게 보내 전라도 순방을 요청하였다. 그때 마침 조정에서 신부 체포령을 내리자, 주 신부는 이를 피해 지방 순회에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경기도와 충청도를 거쳐 전주 아우구스티노의 집을 방문하여 인근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였다.
주문모 신부는 이후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선교사를 태운 서양 선박을 조선에 파견해 주도록 요청하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우구스티노가 앞장서서 이 계획을 도왔다. 그러나 이러한 계획은 오랫동안 결실을 맺지 못하였고, 그러던 차에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에 앞서 아우구스티노는 자신의 장남 유중철과 이윤하(마태오)의 딸 이순이가 동정 부부 서약을 하고 혼인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유항검 아우구스티노는 전라도 교회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가장 일찍 체포되었다. 이어 그는 전주에서 한양으로 압송되었으며, 포도청과 형조, 의금부를 차례로 거치면서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때 박해자들은 선교사와 서양 선박 요청 계획의 주동자로 아우구스티노를 지목하고 모든 것을 실토하라고 강요하였다. 그러나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그는 결코 신자들을 밀고하거나 교회에 해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다.
박해자들은 결국 아우구스티노로부터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이에 그들은 그에게 모반죄를 적용하여 처형하도록 하였고, 이러한 판결에 따라 아우구스티노는 전주로 옮겨져 10월 24일(음력 9월 17일) 남문 밖에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성 다블뤼(St. 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훗날 그가 배교한 것 같다는 추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유항검이 배교하였다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부정되므로, 그는 하느님 앞에서 다른 순교자들의 팔마가지를 받으리라 믿는다.”
신희(申喜, ?-1802년)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 유항검(柳恒儉)의 처. 1801년 봄 남편과 큰 아들 유중철(柳重哲)이 신유(辛酉)박해로 체포되어 이해 10월 순교한 후 곧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이듬해 1월 31일(음 1801년 12월 28일) 전주(全州) 숲정이에서 며느리 이순이(李順伊), 시숙(媤叔) 유익검(柳益儉)의 아들 유중성(柳重誠), 동서(同壻) 이육희(李六喜) 등과 함께 참수당해 순교하였다.
이육희(李六喜, ?-1802년)
순교자. 세례명은 미상(未詳). 순교자 유관검(柳關儉)의 처. 1801년 신유(辛酉)박해 때 시집 식구들과 함께 체포되어 1802년 1월 31일(음 1801년 12월 28일) 아들 유중성(柳重誠), 동서 신희(申喜), 이순이(李順伊) 등과 함께 전주(全州) 숲정이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출처 : 한국가톨릭대사전]
유문석(柳文碩) 요한(1784-1801년)
‘문철’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문석 요한은 전라도 전주의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거주하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1784년에 태어났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유중철(요한)은 그의 형이며, 이순이(누갈다)는 그의 형수가 된다.
유문석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부친 유항검이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어릴 때부터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초남이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요한의 나이는 12살이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그의 형 유중철과 이순이가 동정 부부가 되기를 서약하고 혼인을 하였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났을 때, 초남이에서는 요한의 부친 유항검이 가장 먼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었고, 이어 유중철과 친척들이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이때 요한은 다행히 체포되지 않았으므로 여름 내내 전주 옥을 오가며 형에게 음식을 전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 해 9월 중순 무렵에는 유문석 요한도 남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는 이때 가족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는데, 그 내용은 그의 형수 이순이가 옥중에서 쓴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요한과 그의 가족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요한은 11월 14일(음력 10월 9일)에 옥에서 끌려나와 형 유중철과 함께 교수형을 받았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7살이었다. 이때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유중성(柳重誠) 마태오(?-1802년)
‘완석’(完碩)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성 마태오는 전라도 전주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그가 아주 어렸을 때 집안의 장남이던 부친이 35살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에 있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에서 자라게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 순교자 유중철(요한)과 유문석(요한)은 그의 사촌 형제들이다.
마태오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데는 작은 아버지 유항검과 그 가족들의 영향이 컸다. 실제로 유항검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여 신앙 공동체를 이루고 살았다.
1801년 박해가 일어나자 마태오의 집안에서는 유항검과 유중철이 제일 먼저 체포되었고, 그는 9월 중순 무렵에 어머니를 비롯하여 다른 친척들과 함께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혔다. 그의 어머니는 체포된 지 얼마 안 되어 석방되었다. 그러나 유중성 마태오는 다른 친척들과 함께 순교를 약속하면서 굳게 마음을 다졌다. 다음은 그와 함께 갇혀 있던 사혼 형수 이순이(루갈다)가 옥중에서 쓴 편지 내용이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님를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님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이어 전주 관장은 마태오와 그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마태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 회령으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마태오가 사촌 형수 이순이와 함께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태오는 친척들과 유배지로 가는 동안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관장이 국법에 따라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지 않고 유배를 보냈다”고 외쳤다. 그러자 전주 감사는 그들을 다시 잡아오도록 하여 옥에 가두었다. 이후 마태오는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고, 다음과 같은 자신의 사형 선고문에 서명을 하였다.
“천주교는 집안에서 전해오던 신앙입니다. 유항검 등 삼촌들이 영광스럽게 죽었으므로 그들과 같이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더 이상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왔다. 이에 따라 마태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의 나이는 약 18세였다. 당시까지 그는 결혼을 하지 않았었다.
유중철(柳重哲) 요한(1779-1801년)
‘종석’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유중철 요한은 1779년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의 부유한 양반 집안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1801년에 순교한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은 그의 부친이고, 이순이(루갈다)는 그의 아내이며, 유문석(요한)은 그의 동생이다.
유중철 요한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된 것은,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부친 유항검이 경기도 양근에 살던 인척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면서였다. 이후 부친은 가족과 친지들에게 널리 교리를 전하였고, 그의 집은 전라도 신앙 공동체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환경으로 인해 요한은 일찍 세례를 받고 신앙 안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또 그는 한정흠(스타니슬라오)으로부터 오랫동안 글을 배워 어느 정도 학식도 갖추게 되었다.
“유중철은 성실하고 솔직한 신심, 굳은 신앙과 열렬한 애덕을 갖추고 있었다. 본분에 충실하고 올바른 생활을 하며, 세속의 모든 허영을 업신여겼으므로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점잖고 진중한 어른 대접을 받았다.”
요한은 16세가 되던 1795년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초남 마을을 방문하였을 때 첫 영성체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때 ‘동정 생활을 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주 신부와 부친 앞에서 털어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주문모 신부는 한양에 살던 이순이 루갈다로부터 동정을 지키도록 도와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되었다. 이에 신부는 전주에 사는 요한을 생각하고는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고, 그 결과 1797년 10월 요한과 루갈다의 혼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다음해 9월 요한은 아내 루갈다와 함께 부모님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이후 유중철 요한은 동정 서약을 어길 마음이 생길 때마다 루갈다와 함께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고, 함께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다가 1801년 봄 신유박해로 체포되어 전주 옥에 갇히게 되었다.
요한이 갇히게 되자, 동생 유문석이 줄곧 전주를 오가면서 음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의복만은 전해줄 수 없었으므로 한여름에도 겨울옷을 그대로 입고 지내야만 하였다. 그는 밤낮으로 목에 칼을 쓰고 있어야만 하였으며, 옥중의 고통은 그에게 진정한 형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자신의 신앙을 보존하였다.
9월 중순에는 요한의 아내 루갈다를 비롯하여 동생과 다른 가족들도 체포되었다. 그리고 20여 일 후 포졸들은 유문석을 가족들에게서 떼어내 형인 유중철 요한에게로 데려왔다. 그런 다음 관장의 명에 따라 그 둘을 교수형에 처하였으니, 그때가 1801년 11월 14일(음력 10월 9일)로, 당시 요한의 나이는 22세였다.
요한이 순교한 뒤, 옥중에 있던 아내 루갈다는 그가 끝까지 신앙을 지키고 순교하였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마침내 편지 한 장이 집에서 왔습니다. 그 편지에는 이러한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요한의 옷 안에서 자기 누이(즉 아내 루갈다)에게 보내는 쪽지가 발견되었는데, 그 쪽지에는 ‘나는 누이를 격려하고 권고하며 위로하오.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라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순이(李順伊) 루갈다(1782-1802년)
‘유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이순이 루갈다는 1782년 한양의 유명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경도(가롤로)와 1827년에 순교한 이경언(바오로)은 그녀와 남매간이고, 1801년에 순교한 유중철(요한)은 그녀의 남편이다.
루갈다의 부친 이윤하(마태오)는 당대의 학자 이익의 외손으로, 그의 학문을 이어오고 있었다. 또 처남인 권철신(암브로시오)과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이승훈(베드로) 등과 어울리다가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러한 분위기 안에서 루갈다의 모친도 자연스럽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으며, 자신이 배운 교리를 어린 그녀에게 가르쳐 주었다. 뿐만 아니라 루갈다는 일찍부터 어머니에게서 글도 배웠다.
1793년 아버지가 사망한 후, 루갈다는 어머니와 함께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가면서 오로지 영혼을 구하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리고 1795년에는 주문모(야고보) 신부로부터 첫영성체를 하였다. 이를 위해 그녀는 나흘 동안을 집안에 들어앉아 영성체를 받기 위한 교리를 준비하였다고 한다.
이때부터 루갈다는 오로지 성체를 보존하고 덕행을 쌓는 데만 마음을 쏟았다. 그리고 천상배필을 위해 동정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하였다. 그러나 조선 사회 안에서는 처녀가 혼인을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15세가 되던 1797년 어느 날, 루갈다는 어머니에게 동정을 지키기로 결심해 왔다는 사실을 고백하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는 매우 놀랐지만 딸의 선택을 허락해 주었고, 주 신부와 이 문제에 대해 의논하였다. 그때 신부는 동정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 전주 유중철이 머리에 떠올랐으며, 이에 즉시 사람을 보내 둘의 혼인을 주선하였다.
다음해 9월 루갈다는 남편의 고향 전주 초남(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으로 가서 남편과 함께 시부모 앞에서 동정 서약을 하고 오누이처럼 일생을 살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이후로는 남편 요한이 동정 서약을 어기려고 할 때마다 기도와 묵상으로 이를 극복하도록 도와주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발생한 지 얼마 안 되어 루갈다가 살던 초남에도 포졸들이 들이닥쳤다. 이때 그들은 루갈다의 시아버지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을 가장 먼저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하였고, 이어 그녀의 남편 유중철도 체포하여 전주로 끌고 갔다.
이순이 루갈다는 그해 9월 중순경에 나머지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전주로 끌려간 그녀는 함께 갇혀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며 순교의 길로 나가자고 권면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루갈다가 옥중에서 언니들에게 보낸 서한에 들어 있다.
“우리 다섯 사람은 모두 이구동성으로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자고 언약하고, 철석같이 굳은 결심을 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를 한 결과 우리의 원의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므로 … 자연히 온갖 후회와 근심 걱정이 잊혀졌습니다. 날이 갈수록 천주님의 은혜와 은총은 쌓이고, 우리 마음에는 신락(神樂)이 더해지며, 아무 걱정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후 전주 관장은 루갈다와 그녀의 친척에 대한 판결을 조정에 요청하였고, 조정에서는 즉시 이를 담당할 관리를 전주로 파견하였다. 그 결과 루갈다는 유배형을 받고 함경도로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녀가 친척들을 대표하여 ‘법에 따라 처형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루갈다가 친척들과 함께 유배지로 떠난 지 얼마 안 되어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쫓아와 그들을 다시 체포하였다. 그러자 그녀는 ‘이제 순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다시 감사 앞으로 끌려 나간 루갈다는 사형 선고를 받은 다음 매를 맞고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갈다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않았으며, 4~5일 뒤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말끔하게 나았다고 한다.
감사는 결국 조정에 사형 판결을 요청하였고, 얼마 뒤에는 임금의 윤허가 내려오게 되었다. 이에 따라 루갈다는 1802년 1월 31일(음력 1801년 12월 28일) 친척들과 함께 숲정이라고 불리는 전주 형장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 그녀의 나이는 20세였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
▲ 전주교구는 이순이ㆍ유중철 동정부부의 삶과 신앙을 본받고자 매년 치명자산 성지에서 요한ㆍ루갈다제를 열고 있다. 사진은 요한ㆍ루갈다제의 한 장면.
위]
전주 치명자산 성지개발 사업 최종 보고회
“세계적 성지로 발전 충분”
전주교구 치명자산 성지가 전주시가 추진하고 있는 전통문화 관광도시 사업과 연계해 개발하면 지역민과 함께하는 성지, 지역문화와 조화를 이루는 성지, 세계인과 함께하는 성지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런 연구결과는 작년 9월 전주시와 전주교구로부터 용역을 의뢰받아 연구를 수행한 전주역사 박물관(책임연구원 이동희 전주역사 박물관장)이 10월 17일 박물관 체험실에서 가진 ‘전주 치명자산 성지개발 사업 타당성 및 기본계획 최종 보고회’에서 밝혀졌다. 이날 최종 보고회에는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날 발표를 담당한 문윤걸 연구원(예원예술대 교수)은 “치명자산은 천주교 성지로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동시에 인근에 경기전과 한옥마을, 후백제 견훤성, 조선 건국의 역사적 장소인 오목대와 이목대 등 역사문화, 종교문화, 자연자원 등이 풍부하다”며 “치명자산을 특화된 인프라를 갖춘 성지로 개발·육성한다면 순례자들은 물론, 전주 역사·문화 관광객들에게 보다 편안한 휴식처와 문화관광 콘텐츠를 제공하고 지역발전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최종 보고회의 구체적인 결론으로는 △성지 명소화를 위한 공간 및 환경 조성 △종교·문화 체험 편의시설 조성 △독특한 종교·전통문화 체험 프로그램 구축 △요안 루갈다 제의 세계화 △치명자산 성지의 브랜드화 등의 사업과 추진 주체로는 교회와 지역주민, 지자체가 협의체를 구성해 추진하는 것으로 제시됐다.
교구장 이병호 주교는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타당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일에 자문역할 이외는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며 “이곳에 묻혀 있는 분들이 언젠가 성인품에 오르면 세계적으로 공적경배 할 수 있는 인물이 되는 것을 의미함으로 이 성지는 자연적으로 세계화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톨릭신문, 2006년 10월 29일, 이관영 전주지사장]
전주 치명자산성지 옹기가마 경당 새벽미사 봉헌
박해시대 선조들 깊은 신앙 체험
(사진설명)
치명자산성지 옹기가마 경당에서 새벽 미사에 참례하고 있는 신자들(위)과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옹기가마 경당 바깥 모습.
전주 치명자산성지(책임 김봉희 신부)에는 옹기가마 경당이 있다.
성지 주차장 인근에 있는 이 옹기가마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속에 숨어 옹기를 구워 팔면서 신앙생활을 했던 조상들의 깊은 신앙을 체험토록 하기 위해 만든 작은 경당이다.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려야 들어갈 수 있는 옹기가마 경당에선 평소 매주 한 차례 미사가 봉헌되지만, 사순시기를 맞아 요즘에는 매일 새벽 5시30분에 미사가 봉헌된다.
18일 새벽에도 봄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지만 50여명의 신자들이 옹기가마 경당을 찾아 윤양호(교구 사무처장) 신부가 집전한 미사에 참례해 순교 선조들의 깊은 신앙을 되새기며 주님 사랑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한 여성 신자는 "옹기가마에서 봉헌하기 때문인지 느낌이 다르다"면서 사제가 되고 싶은 중학교 1학년 아들과 함께 매일 새벽 이 미사에 참례한다고 말했다.
옹기가마 경당에서 자주 새벽 미사를 집전하는 윤양호 신부는 "새벽 5시30분이라는 이른 시각에 미사가 봉헌되지만 미사 때마다 50명 이상 참례한다"면서 "새벽 4시 반부터 치명자산성지에 오르는 산길에 조성된 14처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친 후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도 있다"고 전했다.
[평화신문, 제864호(2006-03-26), 이창훈 기자]
전주 치명자산 성지 개발을 위한 국제세미나
전주 전통문화와 함께 국제성지화
(사진설명)
1. 전주 성심여고에서 열린 치명자산 성지 개발을 위한 국제세미나에서 발제자와 토론자들이 함께 질의 응답 시간을 갖고 있다.
2. 국제세미나에 앞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을 봉안한 경기전 앞에서 설명을 듣고 있는 답사 체험자들. 오른쪽 뒷 둥근 지붕 건물이 전동성당이다.
3. 치명자산 정상에 합장된 유항검 일가 무덤.
전주교구가 전주시 등의 후원으로 18일 개최한 치명자산 치명자성지 개발을 위한 국제 세미나는 정부의 국토종합발전계획에 따라 시를 전통문화 중심도시로 추진하려는 전주시와 치명자산성지를 국제적 성지로 가꾸려는 교구의 협력 가능성을 학술적으로 모색하는 첫 자리였다.
치명자산성지가 국제성지로 개발돼 세계 도처의 가톨릭 신자들이 전주를 찾는다면 전주교구뿐 아니라 시를 전통문화중심지로 육성하려는 전주시에도 엄청난 파급 효과를 미칠 게 분명하다. 치명자산성지를 통해 전주교구는 물론 한국 가톨릭교회가 세계 가톨릭 성지순례 문화의 한 축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할 수 있고, 전주시 또한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에 널리 알림은 물론 전통 문화 중심 도시로서 굳게 자리매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치명자산성지를 국제성지화하고 한옥마을 등 전통문화와 연계할 충분한 타당성이 있느냐는 것으로, 이날 세미나는 그 가능성과 과제를 함께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 가능성
우선 가능성과 관련해서 김진소 신부는 '치명자산의 종교적 의미와 역사 문화적 의의'라는 발제를 통해 "유항검 일가가 묻힌 치명자산은 순교자들의 거룩한 삶을 사색함으로써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게 하는 축복의 공간"이라고 그 의의를 제시했다. 김 신부는 또 치명자산이 '가족 사랑을 생각하게 하고 부부사랑을 반성하게 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한다고 강조했다.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희의 삶을 사색하게 하는 치명자산은 갈수록 가족과 부부 사랑의 소중함이 퇴색해가는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생산적이고 교훈적 의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조광 교수도 '치명자산의 성지 명소화 비전 및 방안'이라는 발제에서 치명자산은 지난 2001년 이후 요한ㆍ루갈다제(祭) 개최지로서 '문화의 영성화와 영성의 문화화'를 지향하는 중심이 되고 있다면서 치명자산의 빼어난 자연 경관과 주변의 풍부한 문화유산 또한 국제 성지화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 가능성은 전날부터 이뤄진 전문가 답사 체험에서도 확인됐다. 치명자산을 비롯해 숲정이, 서천교, 초록바위 등 전주 시내 순교성지들과 유항검 생가터가 있는 초남이성지, 그리고 이성계의 어진(御眞, 초상)을 모신 경기전(慶基殿)과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이 순교한 자리에 세워진 전동성당, 전통문화 중심지 한옥마을 일대를 둘러본 참가자들은 치명자산성지와 연계한 발전 계획이 추진된다면 큰 상승효과를 낼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 과제
이번 국제세미나를 위해 프랑스에서 온 쟝 미쉘 퀴니(파리외방전교회 원장, 파리외방전교회 순교자관 건립자) 신부는 세계적 성지로 각광받고 있는 루르드를 중심으로 유럽 지역 성지개발에서 교회와 정부나 민간단체들의 협력상황을 소개하면서 치명자산이 국제적 성지로 가꿔져 많은 프랑스인들도 이곳에서 동정 부부의 삶에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게 되기를 희망했다.
이번 국제 세미나는 과제 또한 확인한 자리였다. 첫째는 치명자산이 지닌 가치를 신자들에게만 아니라 비신자를 포함해 오늘을 사는 일반인들에게 새롭게 제시해야 하는 일이다. 조광 교수는 이와 관련, 순결의 의미, 가정의 중요성과 부부간 신뢰와 같은 보편적 가치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조 교수는 이와 함께 치명자산을 국제적 성지로 만들려면 치명자산 주위에 산재해 있는 문화적 자산들을 충분히 활용해 문화벨트를 형성함으로써 가톨릭 신자들만의 성지로 만들지 말아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순례객 또는 관광객들이 인근의 후백제 유적지를 비롯해 고려와 조선의 문화를 그리스도교 문화와 함께 접하면서 치명자산이 지니고 있는 현대적 의미를 음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울러 치명자산과 인근 성지들을 연계시켜 개발하고 표지석 설치를 비롯해 각종 시설물들을 재단장하고 국제성지로서 갖춰야 할 제반 여건들(숙박시설, 체험 프로그램, 전시실 등)을 조성하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라고 조 교수는 제안했다.
치명자산의 국제성지화를 위해서는 좀더 원론적 측면에서 도출해내야 할 과제들도 있음이 설득력있게 부각됐다.
'전라북도 및 전주시 지역 발전 전략과 치명자산 성지조성 사업의 연계 전략'에 관해 발제한 문윤걸 교수는 전주시가 정부 지원으로 추진 계획을 세우고 있는 전통문화 중심도시 조성사업의 일환으로 치명자산의 국제성지화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사업이 성사되려면 "치명자산 역사의 주인인 천주교회뿐 아니라 지자체, 지역 주민 등이 함께 논의해 그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말하자면 치명자산 국제성지화를 위한 가톨릭교회의 지향점이 지역 지자체, 지역 주민을 포함한 지역 사회의 지향점과 공감대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은 이날 세미나에서 토론자로 참석한 학자들 및 지역 문화 관계자들의 공통된 주문이었다.
▨ 전망
이날 국제 세미나는 이런 몇 가지 과제들을 조율해 나간다면 치명자산이 전주시의 문화중심도시 발전 전략에 부응하는 국제성지로 충분히 자리매김할 수 있음을 확인했다. 이 가능성은 현재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진, 치명자산의 신앙적, 역사ㆍ문화적 가치 식별 작업이 일차 마무리되면 더욱 구체성을 띠게 될 전망이다. 여기에 치명자산 순교자들의 시복시성이 이뤄진다면 국제성지화 작업이 순풍에 돛 단듯이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전주교구장 이병호 주교는 이날 인삿말에서 "한국 교회 초기 순교자들의 시성이 이뤄지면 이분들의 발자취가 물씬 풍기는 치명자산과 이 일대는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찾는 순례지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라고 전망했다.
치명자산은
전주시 완산구 대성동 산 11-1에 있는 치명자산성지는 '호남의 사도'라고 불리는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756~1801년) 일가 순교자 7위의 합동묘가 있는 전주교구 내 대표적 성지다.
이 묘지에는 유항검을 비롯해 그의 처 신희, 제수 이육희, 동정부부로 유명한 큰 아들 중철(요한)과 며느리 이순희(루갈다) 부부, 아들 유문석(요한)과 조카 유중성(마태오)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이들은 유항검 고향 초남이(현 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 초남리) 건너편 재남리에 모셔져 있다가 1914년 4월19일 치명자산 정상 현재 위치로 이장됐다.
치명자산은 1907년쯤 전동성당 건축에 사용할 목재를 마련키 위해 전동성당 주임 보두네 신부가 매입한 해발 300m 산이다.
산 이름은 원래 승암산(또는 중바위산)이었으나 순교자들 유해가 옮겨진 이후 치명자산 이라고 불리기 시작해 오늘날에는 원래 이름보다는 치명자산으로 전주 시민들에게도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지방 기념물 68호로 지정된 산 정상 순교자 묘 바로 밑에는 순교정신을 기리고자 1994년 5월 9일 암벽 사이에 건립된 기념 성당이 있다.
또 기념성당과 묘지로 오르는 왼쪽 언덕에는 가파른 산길을 걸으며 예수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십자가의 길 14처가 있고 오른쪽에는 교구 성직자 묘지가 조성돼 있어, 지역 신자들에게는 믿음의 고향이자 기도 공원으로 사랑받는 한국의 몽마르트르(순교자 언덕)로 사랑받고 있다.
치명자산성지 인근에는 견훤이 후백제를 건설할 때 도읍으로 삼았던 성터가 있다. 또 전주시 전통문화 중심지인 한옥마을과 경기전(慶基殿, 조선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봉안한 사적지), 한국 최초의 순교지인 풍납문 및 전동성당 등도 성지 입구에서 걸어서 한 시간 이내 거리에 있다.
치명자산에 모셔진 7위 가운데 유항검을 비롯해 유중철ㆍ이순희 동정부부, 유문석과 유종성은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시복시성 작업이 진행 중이며, 한국 교회 첫 순교자들로 역시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돼 시복시성 작업이 진행 중인 윤지충(바오로)과 권상연(야고보)은 전주 남문 밖(현재 전동성당 자리)에서 순교했다.
[평화신문, 제864호(2006-03-26), 이창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