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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8회 산행일지 : 크고 편안한 원시의 숲
(강원도 인제군 방태산)
등고선
일시 : 2010년 10월 29(금)-30(토)
날씨 : 흐림과 맑음 사이
지리산 둘레길을 찾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었다는데 우리 등고선에도 지리산 바람이 불었다.
9월 추석 연휴 말미에 매송과 내가 1박2일로 종주를 한 뒤 10월 들어 매송은 다시 아들과 2박3일 일정으로 종주하였고 교매는 직장 동료들과 함께 1박2일 일정으로 백무동-장터목-천왕봉-세석-한신계곡을 다녀와서는 각자가 격은 지리산에 대한 감동들을 쏟아내었다.
지리산은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뛰게하는 한국의 기상이자 어머니의 산이다.
가까운 장래에 등고선 회원들과 함께 종주할 기회가 올 것 같다.
두 사람은 장터목 산장에서 하루를 묵었는데 매송은 더워서, 그리고 교매는 추워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교매가 지리산에 오른 날(26일)은 전국이 갑자기 기온이 심하게 떨어진 날이어서 날씨 탓도 있겠거니와 평소의 체질과도 상관이 있을 터였다.
금요일 오후 6시, 매송의 집앞에서 만나기로 하고는 5분 일찍 도착하며 먼저 와 있던 교매와 청죽에게 “피곤한 스타일이라는 소리를 오늘은 안 듣겠다”고 했더니 그것까지 기억하는 것을 보니 “정말 피곤한 스타일이다”라고 또 놀려댄다.
저녁시간이 가깝다고 총무는 오란다 한 봉을 사두었는데 시동을 걸고 바퀴가 구르자마자 사라지고 만다.
남안동IC를 나와 좌측의 주유소 옆 휴게소의 뷔페형 식당에 들었다.
단체 손님으로 왁자한 분위기 가운데 5,000원 하는 뷔페를 천천히 양껏 들었다.
조용한 밤의 중앙고속국도에서 차안은 음악감상실로 변했다.
교매는 형님들을 위하여 7080 가요를 잔뜩 다운받아 왔다.
얼마 전 국민 여행 프로그램 ‘1박2일’에서 ‘가을 음악속으로’라는 기획을 통해 가을 노래를 들으며 여행하는 내용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것 같다.
아뭏튼 따라 부르기도 하고 저마다의 지식과 당시의 추억을 퍼올리며 감상에 젖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도로를 ‘델마와 루이스’의 기분으로 밤길을 달렸다.
참 편안하고 행복한 두어 시간이었다.
홍천IC를 나와 인제방향 44번 국도를 타다가 철정리에서 우측으로 451번 지방도를 갈아탄다.
이 길은 좁기도 하거니와 고개도 많아 시간이 많이 걸린다.
차라리 인제까지 44번 국도로 갔다가 31번 국도를 타고 내린천을 거슬러 올라 방동리로 가는 것이 시간상으로나 밤길의 안전상으로 더욱 좋아 보였다.
상남면에 이르니 거의 10시경이어서 길가의 모텔에 40,000원에 들었다.
새벽에 보니 매송은 방이 더운지 혼자서 발쪽으로 자리를 옮겨 자고 있다.
6시 30분, 기상하여 창밖으로 보이는 안개와 단풍, 연기 그리고 친근한 간판들 등 가을 깊은 마을 풍경이 정감 깊다.
꽁치로 알고 잘못 사온 고등어 찌개를 주메뉴로 총무가 해주는 아침밥을 맛있게 먹었다.
아직도 약 30km의 거리가 남았다.
비틀거리며 오르는 연기, 안개, 내린천, 늦가을의 산들이 짜맞춘듯 조화롭다.
사진을 찍으려 했더니 카메라가 먹통이더니만 매송의 손에만 갔다오면 신통방통하게도 다시 작동한다.
아무래도 전문가의 포스가 있나보다.
방동리 입구부터 적가리골 휴양림의 코앞까지는 펜션 천지다.
환경 좋은 곳을 알아보는 눈은 다들 한가지인가 보다.
입장료를 내고 비포장도로를 휴양관, 야영장을 지나면서 2.5km 올라야 한다.
간혹 이 추위에도 캠핑을 하는 가족의 모습이 부럽고 아름답다.
텅빈 제2주차장에 내리니 ‘와!’ 피톤치드인지 송진 냄새같은 아침의 향기가 확 닿고 늘씬한 낙엽송 무리들이 노랗게 길을 물들이고 있다. 오늘은 2주차장-매봉령-구룡덕봉-주억봉-삼거리-주차장으로의 원점회귀형 산행이다.
단풍의 절정을 기대하고 왔지만 이미 산은 가을에서 겨울로 향하고 있어 단풍잎들은 나무에 매달린 것이 아닌 산뿌리를 가득 덮고 있다.
그러나 아직은 붉은 기운이 남아있는 낙엽 융단 위를 걷는 느낌도 나쁘지 않다.
좌측 적가리골의 물소리가 힘차고 산을 넘어 쏟아지는 햇살은 날선 검처럼 뿌려진다. 축복이다.
400미터 정도를 올라오면 삼거리를 만나는데 좌측이 구룡덕봉 방향으로 탐방로 진입방향 표시가 있다.
곧 적가리골을 건너는데 통나무로 만든 다리의 가벼운 출렁거림이 경쾌하다.
숲체험 갈림길을 지나고 잘 자란 낙엽송 무리, 1km 지점을 지나고 한참동안도 참으로 편안한 구간이 길게 이어진다.
적가리골과 헤어지고 나면 이제사 산은 서서히 고개를 드는데 그래도 그리 힘든 경사는 아니다.
한 시간 가량을 올라 잘 자란 자작나무가 선 작은 언덕받이에서 사과를 먹으며 잠시 숨을 돌린다.
다시 다소 급한 경사길을 무리지은 겨우살이들과 함께 지나며 30여분 오르면 3km지점 이정표를 만나고 곧이어 매봉령 삼거리에 이른다.
방태산은 육산이다. 어머니 품처럼 편안한 흙의 산이다.
능선들이 부드럽게 이어지고 아래에는 초본류들이 무성히 자라고 풍부한 흙의 자양분으로 키를 훌쩍 키운 활엽수들로 꽉 채워진 숲의 생태공원이다.
매봉령에서부터는 산책로 같은 편안한 길로 시작된다.
빽빽한 참나무들 아래로 키낮은 조릿대가 부드러운 곡선의 오솔길을 안내한다. 군데군데 하얀 자작나무들도 꽤 많이 무리를 이루고 있다. 1km 정도를 지나 구룡덕봉 정상인가 하였더니 훤하게 임도가 펼쳐진다.
우리보다 연배의 등산객 일동이 임도를 따라 올라와 우리를 지난다.
임도를 따라 10 여분을 걸으면 구룡덕봉인데 이곳은 1986년 군부대가 철수하면서 복원공사를 해놓은 곳으로 이제 어느 정도 자연스러워진 느낌이다.
통나무로 된 목책이 이채롭고 조망이 좋은 곳에는 멀리 보이는 산에 대한 안내 사진이 놓여있어 조망의 즐거움을 한층 더해준다.
우리가 지나온 능선의 남쪽방향으로 편안하게 보이는 능선은 가까이 개인산으로 이어지고 그 너머 아득한 곳에 응복산, 두로봉, 오대산 비로봉, 계방산이 아스라하다.
자리를 옯겨 북쪽방향으로 눈을 돌리면 지금은 구름에 가려 잘 보이지는 않는 대청봉에서 귀때귀청봉을 지나 대승령으로 이어지는 설악서북릉과 그 앞의 점봉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지금 우리가 선 이곳은 백두대간의 갈전곡봉에서 시작하여 서쪽방향으로 비켜서서 1,300미터 이상인 매봉령-구룡덕봉-주억봉-깃대봉으로 이어지는 방태산의 주능선이고 남쪽의 두로봉-오대산-계방산-운두령으로 이어지는 능선과 북쪽의 설악서북릉과 함께 가히 강원도, 아니 남쪽 한반도의 지붕과 같은 스카이라인을 이루고 있는 듯 하다.
아래쪽으로 내려다보면 이곳은 높은 산능선들이 주위를 에워싼 자궁처럼 편안한 분지같은 지형이 넓게 펼쳐진다.
이 너른 분지의 퇴로는 적가리골을 따라 내린천으로 흘러나가는 방향이 유일하다.
정감록에서는 ‘난을 피해 숨을만한 피난처’로 기록되어 있다는데 아마도 이 분지를 두고 하는 것 같다.
분지 내 작은 구릉들 곳곳에는 구름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빛나고 있다. 주변 조망에 한참이나 취해 있었다.
주억봉으로 향하는 길 역시 편안하다.
약간의 내리막 우측에는 정말이지 살아 천년이나 된 듯한 주목이 관목들 사이에 고고히 서 있다.
삼거리에 도착하여 남쪽방향으로 비켜 앉아 좀 이른 점심을 해결한다.
오늘은 청죽이 가져온 파김치가 인기 품목이다.
구름 탓에 다소 쌀쌀한데 따뜻한 커피까지 들고나니 몸이 좀 풀린다.
약간의 오르막을 10여분 오르면 방태산 주억봉(1,444m)이다.
이 주억봉은 주걱봉과 같은 이름이다.
산림청 자료 등 다른 자료에 보면 방태산의 높이는 1,436m로 나오는데 이것은 주억봉에서 능선을 따라 계속 약 4km를 진행하면서 1,400 혹은 1,300 미터대의 봉우리를 서너 개 지나고 배달은산(1,415.5m)을 지나 만나는 푯대봉(깃대봉)의 높이를 말한다.
높이로는 주억봉이 가장 높으므로 방태산의 주봉이라고 표현하는 것도 틀린 것은 아니다.
모름지기 방태산을 제대로 돌아보려면 매표소에서 시작하여 우리가 코스를 따라 구룡덕봉과 주억봉에 이른 후 계속 진행하여 깃대봉을 경유하여 다시 매표소로 하산하는 코스를 걸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시간을 8시간 정도 예상하여야 넉넉하다.
정상 표식은 나무판이고 옆에는 키높이의 돌탑이 있다. 대청봉을 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구름을 쓰고 있다.
오던 길을 되돌아 하산을 시작하여 삼거리에 다시 닿으니 이제 사람이 제법 많다.
삼거리에서 하산하는 길은 경사가 매우 심하다.
매봉령 방향으로 오를 때는 몰랐던 방태산의 높이가 실감나는 경사이다.
이 코스로 ‘해오름 산악회’의 수십 명이 길게 줄을 이어 오르고 있는데 힘들어 한다.
입구에서도 탐방로 방향표시를 따랐으면 산행이 훨씬 편안했을 텐데 주억봉에 이르는 가까운 길을 택한 이상 힘을 들여야 한다.
한참을 내려와도 일행이 끝이 없다. 일부 여성 회원들은 중턱 즈음에서 ‘이만 돌아가자’며 의견을 모은다.
2km 이상을 내려와야 치맛자락을 내려놓은 듯 경사를 낮추며 편안해지고 좌측으로는 지당골의 물줄기를 만난다.
이제 산은 회색의 겨울에서 붉고 노란 색이 남아있는 늦가을로 시간을 되돌아오고 조금 더 내려서면 곧 물줄기는 적가리골로 합수되어 방태의 품을 벗어나 내린천을 경유 소양댐에 머물렀다가 북한강을 따라 서해로 가는 먼 길을 나선다.
2시 30분, 출발에서부터 약 6시간 후에 도착한 주차장에는 차들이 아주 많다.
먼저 도착한 매송과 교매가 장난기로 출발하는 탓에 편안한 길을 뒤따라 걸어가는 청죽과 나도 그리 나쁘진 않다.
야영장에서 차로 옮겨 비포장도로를 내려 오는데 교매가 “돈도 많은데 포장을 좀 해놓지”한다.
방태산은 천혜의 생태공원인데 이곳 적가리골에 97년 휴양림을 지으며 그 원시성의 생태를 파괴하였다고 소리를 높이는 사람도 많은데 도로의 포장유무와 자연을 보존하는 일이 상관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방태산은 점봉산과 함께 미치도록 아름다운 산임에 틀림없다.
기회가 닿으면 남쪽의 개인산장 방면에서도 올라보고 싶다.
오는 길은 인제를 경유하여 잘 포장된 국도를 따랐는데 시간이 빠르다.
4시 경 총무가 미리 조사해 둔 가리산 입구의 가리산 막국수에 들러 이른 시간이지만 막국수 둘과 민물새우수제비 둘로 맛있게 나누고 저녁 노을이 아름다운 고속도로를 경유 안동에서 쉬었다가 8시경 출발지에 이르렀다. 마음껏 행복했던 26시간.
登苦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