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LTIC AND RANGERS,
OR RANGERS AND CELTIC
스코틀랜드:셀틱과 레인저스인가, 레인저스와 셀틱인가
글래스고 레인저스(신교)와 글래스고 셀틱(구교)이 벌이는 체면 싸움은 축구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문화적 충돌을 반영한다. 각 클럽의 지지자들은 클럽의 성격에 따라 각자의 공동체적 유대관계를 새롭게 맺는다. 스코틀랜드의 축구사에서는 축구 경기가 작은 종교전쟁으로 변질된 사례를 여러 차례 발견할 수 있다.--알프레드 바알(Alfred Wahl),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역자가 축구의 역사 에서 가져왔다.
글래스고에서 셀틱(Celtic)과 레인저스(Rangers)가 경기를 하고 있었다. 나는 북아일랜드를 경유해 그곳으로 갔다.
나는 그 시합을 취재하기 위해 여러 달을 준비했다. 한 번은 프랑스에서 열차를 탔는데 우연히도 정말 드문 신교도 셀틱 팬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낯선 사람의 종교를 확인하는 글래스고 전래의 관습은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의 말이다. "요즘은 '신교도세요, 구교도세요?' 하고 묻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빌리(Billy)냐, 댄(Dan)이냐?[각각의 민족을 대변하는 특징적 이름]' 하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죠. 대신 이렇게 묻습니다. '어느 팀을 응원하세요?' 그러면 전 항상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파틱 시슬[Partick Thistle, 글래스고 연고의 또다른 팀. 90년대 들어 셀틱과 레인저스 두 클럽에 실망한 축구팬들의 지지가 늘고 있다. Partick은 글래스고 내의 한 지구, thistle은 엉겅퀴로 스코틀랜드 국화].' 그러면 사람들이 웃고 가버리죠." 만일 내가 팀의 성격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시도하려 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그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대화는 고사하고 험한 소리만 듣게 될 겁니다." 나는 팀 성격에 대해 자세한 얘기를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또 취재를 위한 사전 작업으로 셀틱과 레인저스의 팬소식지를 여러 권 읽었다. 여행 기간 내내 모스크바에서, 카메룬에서, 그리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에서는 머무는 집의 욕조에서도 잡지를 손에서 떼지 않았다. 밖을 내다보면 테이블마운틴(Table Mountain)이 보였다. 또 파티오[patio, 스페인식 집의 안뜰]를 내다보면 같이 지내던 사람들과도 자주 눈을 마주쳐야 했다. 그곳은 차분하게 잡지를 읽을 수 있는 장소는 아니었다. 여하간 나는 그것들을 읽으면서 유고슬라비아 전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다음의 인용문은 레인저스의 팬소식지 팔로, 팔로 Follow, Follow 에서 가져온 것이다. 다음 사실들을 염두에 두기 바란다. 레인저스는 신교, 셀틱은 구교, '프라드(Prod)'는 신교도, '팀(Tim)'은 셀틱 팬, 혹은 단순히 구교도다.
히틀러의 똘마니들중 신교도는 한 사람밖에 없다. 외무성 장관이었던 폰 리벤 트로프(von Ribbentrop)뿐이다. 3명의 가장 중요한 비유태계 반나치 저항자 들인 라울 발렌베르크(Raoul Wallenberg), 디트리히 본호퍼(Dietrich Bonnhoffer), 파스토르 니몰러(Pastor Niemoller)는 모두 신교도다. 히틀러가 팀 (Tim)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팔로, 팔로 는 발행부수가 1만부나 되며, 글래스고에서 영향력도 상당하다.
레인저스와 셀틱의 팬들이야말로 어쩌면 진짜 세계에 살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일 수도 있다. 분명 그들은 우리와는 다소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두 팀의 경쟁 관계와 연계될 때에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2차대전이 발발했을 때조차도 그들의 경기가 여러 차례 폭동으로 끝난 걸 보면 우리의 세계는 정말 그들에게는 아무런 중요성도 갖지 못하는 것 같다. 1975년에 열린 한 올드 펌[Old Firm, 셀틱과 레인저스의 경기를 말한다] 경기는 2건의 살인 미수, 2건의 칼을 이용한 공격, 1건의 도끼 사용 공격, 9건의 송곳 사용 습격, 35건의 폭력 행위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한편으로 클럽들은 고귀한 사랑을 고무하기도 한다. 레인저스는 이제 더이상 죽은 팬들의 유해를 아이브록스[Ibrox, 레인저스 홈구장] 그라운드에 뿌리는 걸 허용하지 않는다. 레인저스의 선수이자 감독이었던 존 그레이그(John Greig)의 말마따나, "우리는 장례식을 너무 많이 치렀습니다. 한여름 땡볕에도 견장과 휘장이 덕지덕지 붙은 정복을 착용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 했기 때문이지요." 글래스고에서 발행되는 소설치고 그 올드 펌 경기를 소재로 다뤄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알바니아를 제외하면 유럽에서 축구 시합을 가장 많이 관전하는 나라가 스코틀랜드인데, 그것은 바로 레인저스와 셀틱 팬들 덕분이다. 이 현상은 스코틀랜드보다 알바니아에 일자리가 더 적음을 암시하고 있다.
나는 셀틱은 구교고 레인저스는 신교라고 말했다. 사실 이 명제는 자세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셀틱은 계속해서 신교도 선수들을 기용해 왔다. 그래서 버티 피칵(Bertie Peacock)과 같은 선수들은 심지어 오렌지 오더(Orange Order)파 사람들이라는 소문에까지 시달려야 했다. 오렌지 오더파는 신교 중에서도 과격파로 분류된다. 레인저스에서는 상황이 또 달랐다.
펑크 그룹 포프 폴 앤 더 로만스(Pope Paul and the Romans, 볼락 브라더스(Bollock Brothers)라고도 불린다)가 <왜 레인저스는 구교도와 계약하지 않는가?>란 노래를 부른 적이 있다. 사실 레인저스의 관리자들도 자신들의 솔직한 심정을 가끔 드러냈다. "우리의 전통 때문이죠." 1967년 캐나다에서 맷 테일러(Matt Taylor)가 한 말이다. "우리는 1873년에 장로교회의 청소년 클럽으로 창립되었습니다. 이제 와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면 우리는 상당한 지지를 잃게 될 겁니다." 장로교회 신문인 부시 Bush 는 1978년에 창간되었는데, 그 동안 발행부수가 1,3000부에서 8000부로 감소했다. 그 신문은 곧 폐간했다. 오늘날에도 아이브록스에 있는 탁구와 스누커[당구의 일종] 테이블은 모두 파란색으로 칠해져 있다. 1989년 레인저스는 드디어 구교도 스트라이커 모리스 존스턴(Maurice Johnston)과 계약했다.
셀틱의 팬소식지 낫 더 뷰 Not the View 가 "레인저스, 1백 년 전통을 깨고 충격 속에서 한 미남 선수와 계약하다"라는 제목을 뽑으며 이 소식을 특종으로 알렸다. 사실 존스턴이 레인저스에서 뛰는 최초의 구교도 선수는 아니었다. 1차대전 이후 클럽이 공개적으로 계약한 최초의 구교도 선수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의 양아버지가 신교도에다 레인저스 팬이긴 했지만 말이다.) 레인저스 팬들에게는 존스턴이야말로 최악의 구교도였다. 그가 1986년 스콜컵(Skol Cup) 결승전에서 레인저스의 스튜어트 먼로(Stuart Munro)를 머리로 받아버린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는 퇴장당하면서도 레인저스 팬들을 '향해' 십자가 마크를 그려 보이며 그들을 조롱했다. 레인저스에 입단하기 직전까지도 그는 셀틱과 계약할 것처럼 보였다. 그가 갑자기 돌아서자 레인저스 서포터 클럽의 펠파스트 지부인 섕킬[Shankill, 벨파스트의 한 지구이기도 하다]이 항의 시위를 벌였다. 셀틱 팬들 역시 그가 프랑스에서 잠시 뛰었다는 것에 착안하여 그를 '프티트 메르드'[La petite merde, 너저분한 놈이라는 뜻]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스코틀랜드 온 선데이 Scotland on Sunday 는 존스턴을 "스코틀랜드 축구계의 샐먼 루시디"[Salman Rushdie, 그의 소설 악마의 시 로 이슬람의 반감을 샀다]라고 불렀다. 그가 근본주의자 2개파를 동시에 자극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루시디처럼 은둔해야 했다. 그는 글래스고가 아니라 에든버러에 집을 마련했다. 그의 집은 계속해서 셀틱 팬들의 화염병 공격을 받았다. 그는 24시간 대기하는 경호요원을 고용해야 했다. 셀틱 팬들은 그의 아버지마저 공격했다.
그가 레인저스에서 뛰는 동안 팔로, 팔로 기자들은 이 의심스러운 작자가 과연 팀을 위해 최선을 다 하고 있는지를 놓고 설전을 벌였다. 그는 팬들을 위해 분명 최선을 다 하고 있었다. 그가 한 서포터 클럽 댄스파티에서 신교 노래인 <더 새쉬 The Sash>를 불렀다는 소식도 보도되었고 몇 년 전에 그가 셀틱 문장에 침을 뱉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첫 시즌을 마치고 나자 고번 R.S.C.[Govan R.S.C., 고번은 글래스고의 한 지구]가 그를 올해의 선수로 선정했다. 그러나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지 1년 만에 그는 레인저스를 떠났다. 그가 레인저스를 구교 클럽으로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레인저스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도 계약할 수 있습니다. 그런다고 클럽의 성격이 바뀌겠어요." 윌리엄 잉글리시(William English)가 내게 해준 말이다.
잉글리시는 영국 체신공사에 근무하는 젊은 노동자로 아이브록스의 정규회원이다. 그는 동료 축구팬들의 일부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내가 팔로, 팔로 에 광고를 내자 그가 내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얘기하고 싶어했고, 우리는 글래스고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그가 내게 말했다. "모(Mo, 모리스 존스턴을 말함)가 득점을 해도 그 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경기 결과가 1대0이면 그들은 0대0 무승부로 간주했죠. 모 존스턴을 응원한다는 이유로 시합 중에 사람들이 주먹다짐을 하는 경우도 여러 차례 목격했습니다. 이상한 것은 야유가 멈추면 모가 더 형편없어진다는 거였죠." 존스턴은 정말 괴짜다.
이제는 레인저스의 최전방 공격수인 마크 헤이틀리(Mark Hateley)가 구교도라는 소문에 시달리고 있다. 잉글리시가 말했다. "헤이틀리가 경기에 나서면 사람들이 이렇게 외칩니다. '힘내라, 우리의 10명!' '11명'이라고는 절대로 말하지 않죠. 그들이 헤이틀리를 팀의 일원으로 간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전에는 트레버 프랜시스(Trevor Francis, 자식들을 카톨릭 학교에 보냈다는 말이 나돌았다)와 마크 폴코(Mark Falco, 신교도였는데 성호를 긋는 버릇이 있었다)가 의심을 받았다. 심지어는 잉글랜드 출신이 테리 부처(Terry Butcher, 그는 이렇게 말하기까지 했다. "셀틱, 당신들은 레인저스를 너무나 증오하는군요.")마저도 결국에 가서는 자신이 구교도가 아니라고 공개적으로 부인해야만 했다.
헤이틀리도 보통 때는 묵인 하에 그냥 지낼 수 있다고 잉글리시가 알려주었다. "그러나, 그가 몇 차례 좋은 득점 기회를 놓치면 팬들이 즉시 이렇게 나오죠. '저 자식 페니언[Fenian, 아일랜드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결사] 아냐?'" 내가 물었다. "그가 연속으로 3경기 정도 망칠 수도 있을까요?" 잉글리시의 대답. "그건 말하고 싶지 않군요." 나는 헤이틀리가 구교도라는 걸 모두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헤이틀리의 아내가 구교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두가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지는 나도 모르겠어요." 헤이틀리가 구교도라고 잉글리시도 생각했을까? "섣불리 얘기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죠. 하지만 그가 구교도처럼 보이지는 않아요." 이게 무슨 말일까? "글쎄요, 뭐랄까, 이렇게 말하고 싶군요. 구교도라면 짙은 검은 색 머리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많죠. 피부를 태우는 일은 생각도 할 수 없구요. 또 그 밖에도 밝은 빨간 색 머리칼도 있습니다." 그가 카페 한 쪽에 있는 사람들의 무리를 가리켰다. "예를 들어볼까요. 저 네 사람은 구교도인 것 같지는 않군요."
"한 주 전에 시즌 티켓을 구입했는데, 아 글쎄, 그 다음 주에 클럽이 모 존스턴하고 계약을 해버리더군요." 대니 휴스턴(Danny Houston)이 내게 씁쓸하게 회고했다. 휴스턴은 오렌지 오더파 글래스고 스코틀랜드 지부(Orange Lodge in Glasgow and Scotland)의 명예 부본부장이었는데, 존스턴 시절의 레인저스 경기를 보이콧했다. 나는 그를 집으로 방문했다. 그는 보온복을 입고 있었다.
오렌지 오더파(Orange Order)는 1795년에 창설된 아일랜드계 신교파 집단으로 스코틀랜드와 얼스터에서 가장 강력한 교세를 자랑하고 있다. 오더파는 매년 여름 오렌지 행진 행사(Orange Marches)를 개최한다. 이 행사는 자주 구교도와 충돌을 빚으면서 끝난다. "우리는 성실하고 충성스러운 노동계급 민중이죠." 휴스턴의 정의에 의하면 이렇다. "오렌지파 사람들은 온갖 종류의 스포츠 팀들을 응원합니다. 에어드리(Airdrie) 서포터스, 폴커크(Falkirk) 서포터스[각각 스코틀랜드 2 1부리그 축구팀] 등 많죠. ." 그러나 이들 중에도 정기적으로 파크헤드[Parkhead, 셀틱의 홈구장. Celtic Park라고도 한다]를 찾는 사람은 거의 없다. 대다수가 레인저스를 응원하기 때문이다. 셀틱 셔츠를 입고서 오렌지 행진 행사에 참여했던 한 사람은 평화를 파괴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다.
휴스턴은 레인저스가 외국 출신 구교도와 계약하는 것에 대해 이견을 제시할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교는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서는 아일랜드 공화주의와 동의어로 쓰입니다." 그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경계 문구였다. 레알 소시에다드(Real Sociedad)는 바스크족하고만 계약을 하고, 독일 리그에도 전쟁 전에는 마카비(Maccabi)라는 유태인 클럽이 있었다(이후 나치의 박해로 금지당했다)고 그가 말했다. "왜 모두가 다 나치처럼 행동하는 겁니까? 왜 스코틀랜드는 레인저스가 신교도 팀이라는 사실에 고민하는 걸까요? 셀틱팀에는 현재 스코틀랜드 태생의 신교도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과연 지금까지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언급한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습니까?"
존스턴과 계약한 레인저스의 감독 그레이엄 수니스(Graeme Souness)에게도 휴스턴과 같은 팬들에게 변명할 말은 있었다. 존스턴을 영입하기 전에 수니스는 웨일스 출신의 구교도 선수 이안 러시(Ian Rush)를 유벤투스(Juventus)에서 데려오려고 최선을 다 했다. (러시가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생존 인물이 교황이다.) 그는 또 구교도들인 레이 휴턴(Ray Houghton)과 존 셰리단(John Sheridan)과도 계약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클럽 운영 정책의 변화 역시 레인저스 회장 데이빗 머레이(David Murray)에게는 시급한 문제였다.
1967년의 맷 테일러는 팬들을 잃는 문제를 염려했다. 그러나 1989년의 머레이는 후원기업을 끌어들이는 데 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축구는 이제 밥벌이나 겨우 해주는 스포츠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그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말이었다. 팬들(또는 그들의 일부)은 레인저스가 신교도 클럽으로 남아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후원기업들은 그렇지 않다. 머레이는 팬들을 배신하고 후원기업들 품에 안겼으며, 그들도 이를 환영했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는 신교도와 구교도가 함께 사는 곳에서는 신교도가 더 부유한 경향을 보인다는 유명한 사실을 관찰했다. 글래스고에서도 과거에는 이런 식의 부의 편중 현상이 목격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레인저스 팬들은 자신들이 셀틱 팬들만큼이나 가난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널리 인정되는 사실이다. 그러나 레인저스 F.C.는 부유하고, 셀틱 F.C.는 가난하다. 신교도들은 올드 펌 경기가 벌어지면 이런 구호를 외친다. "돈 한 푼 없는 거렁뱅이 팀 녀석들." 켈리(Kelly)와 화이트(White) 가문은, 머레이가 레인저스를 운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느슨하게 셀틱을 운영한다. 그렇다고 머레이에게 전폭적인 신뢰를 보낸다면 그것 역시 잘못이다. 그도 셀틱에서라면 레인저스에서 취했던 조치들을 결코 적용하지 못했을 것이다. 글래스고에서 실업가들의 대다수는 신교도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파크헤드에서 5코스 정식을 먹느라고 75파운드를 지출하거나 호화로운 특등 관람석을 사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콜린 글래스(Colin Glass)는 글래스고의 유명한 보험 중개인이자 레인저스 팬이다. 그는 던디(Dundee)에서 자랐지만 18살 때 글래스고로 이사와 지금의 레인저스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는 플로리다에 집을 가지고 있는데, 레인저스만 아니라면 벌써 그곳으로 이사갔을 것이라고 말한다. "종교 때문에 레인저스 팬이 된 건 아닙니다. 빨강 흰색 파랑의 팀 색깔이 마음에 들어서 팬이 된 겁니다." 그의 말이다.
"그런데, 레인저스는 언론에는 종교적으로 완고한 집단으로 비치는 게 사실입니다! 클럽이 존스턴과 계약했을 때 수천 명의 레인저스 팬들이 시즌 티켓을 반환한 이야기를 아세요? 그러니까, 나는 레인저스의 시즌 티켓 담당자를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요, 글쎄, 몇 장이나 환불되었는지 아십니까? 딱 한 장이래요!" 그렇다. 다른 축구팬들은 아이브록스 앞에서 자신들의 시즌 티켓을 불태워버렸다. "언론의 이목을 끌기 위한 행동이었죠."
셀틱 팬들도 언론이 자신들에 대해 편견을 갖고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고 내가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구교도에 대한 차별이 존재한다는 일종의 피해망상증을 전반적으로 갖고 있더군요." 잠시 후 그의 말이 계속되었다. "구교도에 대한 차별이 존재합니다. 다만 그게 언론에서 충분히 다뤄지지 않고 있을 뿐이죠. 스코틀랜드 서부의 많은 사업체들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구교도들은 일자리를 구하기가 무척 힘듭니다. 그래서 말하자면, 심판의 판정이 완전히 적법한 규정에 의해 적용된다고 해도 그들은 강박적 피해망상을 보이는 것입니다. 구교도인 내 친구 한 명이 내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신부가 축구 심판을 예로 들면서 모두가 구교도를 박해하는 상황에 대해 언급하자 자신은 참을 수 없어 곧바로 예배 집회를 나와버렸다구요."
직업 차별에 관해 얘기하자 글래스는 업무상 경험한 일이 있었던지 강한 주장을 펼쳤다. 나는 그에게 증거 제시를 요구했다. "당신이 상공회의소와 같은 곳들을 둘러보고 거기서 인사를 나누는 실력자들을 한 번 확인해보세요. 경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경찰서장 퇴임식에서 들었던 퇴임사가 생각나는군요. 그 서장이라는 자가 구교도에 대해 이렇게 말했죠. '나는 구교도를 두 명 진급시켰습니다. 여러분도 모두 아시다시피, 그 중 하나는 나쁘지 않았죠!' 이 작자는 자신이 하는 말에 대해서 완전히 개념이 없었습니다!"
글래스는 자신이 거느리고 있는 부지배인 4명 중 3명이 셀틱 팬이라고 내게 말해주었다. 그러나, "누군가가 패트릭 오리어리[Patrick O'Leary, 아일랜드 또는 구교도의 냄새가 물씬 나는 이름임]를 기용할 것을 요구한다고 해도 평범한 사업가들과 상담하는 직위에 그를 임명하지는 못할 겁니다. 왜냐하면 그가 전화를 해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는 순간 그들은 분명 '노(No)'라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죠." 구교도들은 더욱더 본심을 가리고 시치미를 떼어야 한다고 그가 말했다. "그들은 자녀들에게 브리짓 테레사(Bridget Teresa)나 뭐 그 비슷한 이름들을 지어주죠.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도 나도 사람들의 편견을 바꿀 만한 힘이 없는 이 상황에서 그들이 자녀들에게 왜 그와 같은 핸디캡을 주느냐 하는 겁니다." 그가 구교도와 신교도를 구별할 수 있었을까? "구교도들은 말하는 게 약간 다릅니다. 여기 경찰은 이렇게 묻습니다. '용의자가 정확히 어떻게 발음했지?' 'stair'를 예로 들어볼까요. 우리는 'steer'라고 하고, 그들은 'stayer'라고 하죠."
"세계 최악의 클럽 경기죠.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단정하게 깎은 회색 머리칼의 짐 크레이그(Jim Craig)는 현재 글래스고에서 치과의사로 일하고 있는데, 그 올드 펌 경기에 관해 이렇게 진단했다. 그 경기에서 실제 선수로 뛰는 것은 어땠을까? "난 정말 좋았습니다! 나는 전사 계급[warrior class, 수비수라는 말이다. 수비수는 거친 도급 노동자의 이미지로 단순하고 투기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인상을 준다. 반면 공격수는 전문인의 이미지로 창조적이고 건설적인 일을 한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입니다. 전사는 싸우는 법을 배우죠. 시합 내내 건설적인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안 하는데도 경기가 끝나면 잘 했다는 칭찬을 들었답니다."
크레이그는 셀틱의 오른쪽 수비수였는데, 레인저스와의 경기에서 직접 골을 넣기도 했다. "23년이나 지났는데 아직까지도 사람들이 내게 그 얘기를 한답니다. 그렇게 대단한 골도 아니었어요. 사실 골문을 향해 대충 찬 건데, 골포스트 안쪽을 맞고 들어가버리더라구요. 몇 년 전에 테리 부처가 대포알 같은 강슛으로 골을 기록하며 셀틱의 승리에 기여했죠. 측면에서 공이 날아오자 그가 논스톱으로 강하게 공을 굴절시켰고, 쌩 하는 소리와 함께 골네트가 흔들렸죠. 나는 그에게 이런 편지를 썼습니다. '과거 1970년 올드 펌 경기에서 평범한 골을 기록한 나도 아직까지 회자(膾炙)되는데, 그 골 때문에라도 자네는 영원히 기억될 거네!'"
"쇼비니즘적 지지자들은 경기 일정이 바뀌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정말 중요한 날이거든요. 경기장에 가 상대방을 마음껏 증오할 수 있으니까요. [만원으로 입장할 수 없게 된 사람들은 경기장 밖에서 양편으로 갈려 외쳐대겠죠.] 나는 열렬한 사람이 아니어서 이런 사태가 힘이 듭니다. 이건 선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올드 펌 경기에서 어떻게 하느냐로 시즌 전체를 판단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팬들의 그런 태도를 개탄했다. 잠시 후 크레이그가 다시 말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당신은 여름휴가를 얻고 나도 그러겠지만, 그들에게 여름휴가라는 건 없습니다." 그는 1970년대에 얼스터에서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간다는 한 사람을 만났다고 했다. "그 아들이라는 사람이 내게, 와서 자기 아버지를 한 번만 만나달라고 간청하더군요. 아버지가 셀틱 팬이라고 했죠. 그래서 그를 한 차례 방문했습니다. 삼각기와 휘장도 기념 삼아 몇 개 들고 갔었죠. 그러고나서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고, 사실 그 일은 깨끗이 잊어먹고 있었습니다. 그 해 11월인가, 아들이라는 사람한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그의 아버지가 예상보다 훨씬 더 오래 사셨으며, 마지막 6개월 동안은 온통 자기를 찾아준 셀틱 선수 얘기뿐이었다고 전하더군요. '짐 크레이그'가 아니라 그냥 셀틱 선수였습니다. 감독과의 불화 부상 부상 중 출장 부상 회복, 이런 과정은 선수들도 감당하기 힘든 정말 두려운 일이죠. 축구에 이런 무시무시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켈트인[Celts, 웨일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고지에 산다. Celtic이란 말도 어원이 같다]은 족 스틴(Jock Stein)이 이끌었던 '리스본의 사자들(Lisbon Lions)'일 것이다. 1967년에 그들은 영국 최초로 유럽클럽챔피언컵을 쟁취한 팀이 되었다. 리스본에서 벌어진 결승전에서 그들은 엘레니오 에레라(Helenio Herrera)의 인터 밀라노(Inter Milan)를 2대1로 격파했다. 크레이그도 '리스본의 사자'로, 나는 당시 경기에 관해 물었다. "항상 그 질문을 받죠. 나는 아직도 그게 페널티킥을 줄 정도였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나는 수비에서 내가 뚫리는 일은 없게 하겠다고 단단히 마음을 먹었죠.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상대 선수와 부딪친다고 해도 이 정도 무대의 경기라면 심판이 페널티킥을 주지는 않을 거야.' 제가 얼마나 어리석었던지요." 그러나 이 득점에 자극받은 글래스고 셀틱은 곧이어 타미 젬멜(Tommy Gemmell)이 동점골을 성공시켰고, 연이어 찰머스(Chalmers)가 결승골을 넣었다. 경기가 끝나고 벌어진 연회에서 셀틱의 코치들이 에레라를 매도했다. 3년 후에 크레이그는 벤치에 앉아 셀틱이 두번째 진출한 유럽클럽챔피언컵 결승전에서 페예노르트(Feyenoord)에게 무릎을 꿇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다. 무엇이 잘못 되었던 걸까? 그는 두 팀 선수들의 바이오리듬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축구 선수를 하다가 치과의사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지 않느냐고 내가 물었다. "이젠 구교도들 중에도 법조계나 의료 분야로 진출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40년 전만 해도 상황이 완전 딴판이었죠. 이 사람들이 사회의 차별에 맞서 싸우고 있었던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족(Jock)이 나타나 갑작스럽게 셀틱이 두각을 나타냈고, 이것이 이 사람들에게는 경이로운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나는 그에게 내 책 얘기를 했다. 그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래스고 이외의 사람들이 이 문제를 이해하기란 아주 어렵습니다. 이곳은 정말 불가해한 도시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요전날 밤 시내를 걷다가 국방성에서 막 새로 구입한 어떤 건물을 지나치게 되었습니다. 안에서 불빛이 새어나오길래 뭐가 있나 하고 난간으로 기어올라가 안을 들여다보았죠. 어떤 녀석이 내 쪽으로 오더니 나를 보고 다짜고짜 욕지거리를 해대는 거예요. '야 이 개자식아! 너 거기서 뭐하는 거야?'"
올드 펌은 스코틀랜드인을 미국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 걸쳐 분열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얼스터(Ulster)의 분열이 가장 심각하다. 한 마디로 말해 그 지역은 통제를 벋어난 올드 펌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도 올드 펌 경기가 벌어지면 긴장은 더욱더 고조된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파크헤드 경기가 벌어지기 1주일 전에 나는 얼스터로 갔다.
나는 에이레의 수도 더블린에서 출발했다. "나는 아일랜드인이면서 동시에 아일랜드인이 아닙니다." 한 더블린 주민이 자기가 셀틱을 응원하는 이유를 설명하면서 내게 써준 말이다. 그 이유도 들어보자. "아일랜드에서는 아주 어려서부터 아버지들이 글래스고 셀틱이라는 단어를 아이의 마음에 깊이 새겨 주시죠. 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클럽을 소개받은 것에 대해 아이들은 감사할 겁니다. 그리고 이 경험은 아마도 아이들이 어린 시절에 아버지의 명령을 자발적으로 따르는 유일한 사건일 겁니다."
더블린에서 나는 버스를 타고 얼스터의 데리(Derry)로 올라갔다. 최근에 데리에 사는 한 가족은 레인저스 구장의 육상 트랙에 친척의 유해를 뿌렸다가 경기장 관리인들이 곧바로 그 과거의 팬을 깨끗이 치워버리는 것을 목격해야 했다. 데리에서 나는 다시 버스를 타고 리마바디(Limavady)라는 소도시에 도착했다. 그 도시의 황량한 중심가에서 데이빗 브루스터(David Brewster)가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내 배낭을 접수계에 좀 맞겨놓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직접 가지고 다니시는 게 더 좋을 겁니다." 그의 대답이었다. 얼스터의 정치인들은 조심스러운 사람들이다.
브루스터는 파란 색 풀로퍼(pullover)를 입고 있었다. 그는 미래의 하원의원으로 점쳐지는 인물로, 얼스터 통일당(Ulster Unionist) 당원이며, 따라서 당연히 레인저스 팬이다. 그는 내가 처음으로 만난 투철한 올드 펌 팬이었다. 그가 눈 주위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글래스고에서 가서 받은 선물이라고 할 수 있죠. 글래스고에 가서는 거기 머무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원하는 만큼 편협해질 수 있습니다. 당하게 되는 최악의 상황이라야 얻어맞는 게 고작이죠. 얼스터에서 여러 달 동안 억눌러 왔던 그 모든 분노를 경기 시간 90분 동안 마음껏 발산할 수 있어요. 경기장에서는 사태가 더욱 긴박감 있게 돌아가죠. 그렇다고 총 맞아 죽는 일은 없습니다." 올드 펌 팬들이 얼스터에서는 차분하고 조용하게 지낸다고 그가 전했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셔츠는 그냥 단순한 분리주의의 상징일 뿐이라고 여겨진다. "팻 라이스(Pat Rice)라는 사람은 구교도였는데, 1971년엔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능이 좀 떨어지는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레인저스 스카프를 하고 펠파스트에서도 가장 거칠고 폭력적인 동네를 쏘다녔다나요. 당연히 그곳 사람들의 신경을 자극했고 경고도 여러 번 받았겠죠. 그러다가 결국 살해당했답니다. 이런 면에서 보면 올드 펌이 그렇게 쇼비니즘적이라고 할 수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얼스터에서는 셀틱과 레인저스 팬들 사이에 거리의 폭력 같은 게 전혀 없었단 말인가? 상대방을 자극하는 행위도, 주먹질이 오가는 몸싸움도? "펠파스트에서는, 같은 직장에 다니는 신교도와 구교도는 종교적인 주제를 화제로 삼는 법이 없습니다. 이런 경구가 있습니다. '아무 얘기나 하지만 결코 아무 것도 말하지 말라.' 예를 들어 당신이 여론 조사라고 하면서 여기 사람들에게 뭔가를 질문한다면 그들은 자신의 견해를 드러내는 데 있어 아주 방어적으로 행동할 겁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에 존재하는 모든 클럽의 종교적 우호관계, 적어도 감지되는 종교적 우호관계를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곧바로 데리로 갔다. 거기서 펠파스트행 버스를 탔고, 목요일 날 밤 늦게 도착했다.
펠파스트도 한때 올드 펌 경기가 열렸던 곳이다. 글래스고 셀틱의 복제품이라고 할 수 있는 펠파스트 셀틱(Belfast Celtic)은 1891년에 창설되었다. 그들이 신교도 클럽과 갖는 시합들은 섬뜩할 정도로 위험이 가득한 행사였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린필드(Linfield)와 맞선 경기에서는 총격 사건이 난무했다. 그리고 결국 1949년, 팬들이 운동장에 난입해 한 선수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사건이 발생하고 나서 펠파스트 셀틱은 결국 클럽 문을 닫아야 했다.
나중에 펠파스트에서는 클리프턴빌(Cliftonville)이라는 소규모 클럽이 구교도들을 다시 팬으로 모으기 시작했다. 그들의 홈구장 살리튜드(Solitude)가 그저 구교도 거주 지역 근처에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클리프턴빌과 신교도 팀들의 시합은 상당한 폭력 행위를 야기시키고 있다. 레인저스 팬이자 퀸스 대학(Queen's University) 정치학 강사인 그레이엄 워커(Graham Walker)는 신교도 팬들이 폭탄을 투척하는 일까지 목격했다고 전한다. "스피언코프가(Spion Kop街) 뒤쪽에서 폭발이 있었습니다. 클리프턴빌 팬들이 거기 모여 있었거든요. 스피언 코프가 뒤쪽으로는 폴스가(Falls 街)가 이어지죠. 레인저스 팬들이 '또 한 번 승리했다'고 외치면서 노래하더군요. 그들은 폭탄 테러가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 중의 하나라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클리프턴빌은 아주 작은 클럽에 지나지 않는다. 펠파스트의 구교도들은 자신들의 축구 열망을 글래스고로 보내고 있다.
나는 퀸스 대학에 머물렀다. 그 대학에는 셀틱과 레인저스의 서포터스 클럽이 있다. 그 해 퀸스 대학 R.S.C.의 모든 위원들은 통일당 당원이기도 했다. 금요일 아침 R.S.C. 회장인 리 레이널즈(Lee Reynolds)를 찾아갔더니, 그가 머무는 방에 유니언 잭이 걸려 있는 게 아닌가. 그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얼스터에 있는 신교도 가정치고 레인저스 스카프나 머그잔, 또는 다른 상징물이 없는 집은 거의 없죠." 나는 셀틱 서포터스 클럽 회장과도 만나고 싶다고 얘기했다. "예, 좋습니다. D.J.라. 우리가 한 번 알아봐드리죠." 우리는 학생조합 건물 밖에서 토마스 'D.J.' 머코믹(Thomas 'D.J.' McCormick)을 만났다. 그는 셀틱 스카프를 걸치고 있었다. 리가 우리 두 사람을 서로 소개해주었다. 두 사람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예의를 차렸는데, 내게는 전쟁 중인 두 국가의 외교관들이 국제연합(UN) 회의에서 어색한 만남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D.J.가 다음날 열릴 시합에 나를 데려가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나에게 기자석에 앉지 말고 입석으로 셀틱 팬들과 함께 경기를 관전해보는 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그 금요일 날 늦게 나는 또다른 변호사 마이클 피어런(Michael Fearon)을 만나러 갔다. 그는 구교도로 그 도시의 신교도 지역 한켠에 고립돼 있는 구교도 거리에서 일하고 있었다. 펠파스트의 거리를 걷다보면 폭탄 테러를 생각하게 된다. 피어런의 사무실을 출입하는 행위는 자신이 구교도라는 것을 내외에 천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결국 보는 사람이 관심을 가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행스럽게도 거리는 인적이 드물었다. 그러나 나는 퀸스 대학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지 않으려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나는 피어런에게 얼스터에서 레인저스와 셀틱이 얼마나 대단하냐고 물었다. "셀틱과 레인저스죠." 그가 내 말을 고쳤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가장 열광적인 팬들은 바로 이곳 6개 카운티(county)에서 나옵니다." 그도 이들 중의 한 명이었다. "나는 어깨 위로 삼색기[Tricolour, 녹 백 주황이 세로로 분할된 아일랜드 삼색기를 말함]를 묶고 교황 사진이 프린트된 스카프를 두르고 노래를 합니다. '여왕은 물러가라.' 나 같은 사람들이 수천 명이나 됩니다." 왜일까? "나는 짓밟힌 민족주의자입니다. 당신이 파크헤드의 일반 관중석에 서서 장내를 살펴보면 우리를 계속해서 짓밟은 민족을 보게 될 겁니다." 그러나 글래스고 여행은 얼스터의 첨예한 긴장으로부터 한 발 멀어지는 것을 의미했다. "이 나라의 정치는, 양측 모두 비타협적 투쟁으로 일관하므로 전적으로, 완벽하게 예측이 가능합니다. 이곳에는 부동성(浮動性) 투표자와 같은 그런 이상한 집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올드 펌 경기를 통해 단 하루라도 신교도의 지배를 벗어날 가능성을 꿈꾸는 것은 아니겠느냐고 내가 넌지시 말했다. 그도 동의하며, 모리스 존스턴에 관한 기사를 서랍에서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나는 그에게 레인저스 팬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묘사해 달라고 주문했다. "머키완스(McEwans) 셔츠를 걸친 배불뚝이들이죠. 그들은 매일 밤 TV 방송시간이 끝나기 전에 나오는 영국 국가에 기립을 하는 놈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이런 모습이 사실은 나와 아주 흡사하다는 겁니다."
D.J.와 나는 기차를 타고 그의 부모님의 집이 있는 란[Larne, 북아일랜드의 항구 도시]으로 갔다. 이 항구 도시는 스트랜레이어사[Stranraer 社, 축구팀도 소유하고 있다]가 정기 페리를 운항하는 곳이다. 다음날 아침 일찍 우리는 배를 타러 갔다. 꽤나 쌀쌀한 날씨였다. 나는 경기를 관전하고 나서는 계속 글래스고에 머물렀다. 그러나 D.J.는 최소 70파운드의 비용이 들어가는 22시간 소요의 왕복여행을 계속했다. 실제로 얼스터의 올드 펌 팬들은 영국에서도 가장 충성스러운 서포터들이다. 글래스고 대학교수인 레이먼드 보일(Raymond Boyle)이 펠파스트에 거주하는 셀틱 팬들을 실지조사하고 다음과 갈은 사실을 정리했다.
-그들 중 50% 이하가 전일제로 근무했다.
-매 시즌 80%가 모두 16차례의 단체 응원여행을 파크헤드로 다녀왔다.
-49%가 셀틱 관련 비용으로 1년에 500파운드 이상 지출했다. 보일이 세목을 더 자세히 분류했다면 지출 비용이 1000파운드 이상으로 치솟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설문지의 정치 관련 부분을 채운 사람의 80%가 신 페인[Sinn Fein, 아일랜드 민족주의 정당. IRA와 유대가 깊다] 지지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설문에 응한 사람의 40%가 정치 분야란을 빈칸으로 남겨놓았다.
우리가 탄 배는 셀틱 팬들 일색이었다. 레인저스와 셀틱 팬들은 따로 배를 타고 간다고 한다. 그 배 위에는 사람들이 '리바(Reeva)'라고 부르는 얼굴 표정을 계속해서 바꾸는 이상한 친구가 타고 있었다. 그는 아마도 셀틱 팬들의 선상 적재물 앞에 있는 테이블로 뛰어올라가 "레인저스의 노래 소리가 들립니까?" 하고 외칠 수 있는 세계에서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승객들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리바는 란 사람들이 다 아는 유명한 바보였다. 그는 내 책에 자기가 한 말을 있는 그대로 인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계속해서 나를 괴롭혔다. 그는 그날 결국 그 시합에 가지 못했다. 기마 경관의 말하고 시비를 벌이다가 경기장에도 못 가보고 글래스고 시내에서 체포된 것이었다. "북아일랜드에서는 이쪽 편 아니면 저쪽 편에 속해야 합니다." 란 관리임용위원회(Larne C.S.C.) 회장 폴 해밀(Paul Hamill)이 내게 말했다.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내가 오늘밤 돌아가는 배를 타지 못하면 잠자리와 약간의 경비를 제공받게 되죠. 전부터 그랬어요. 셀틱은 하나의 커다란 가족이라 할 수 있죠. 근본적으로 셀틱은 아일랜드 클럽입니다. 외국 리그에서 뛰고 있는 아일랜드 클럽이라 할 수 있죠." 레인저스 팬들 중에도 이에 동의하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셀틱 선수들이 스코틀랜드를 위해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아일랜드인이라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관중석에는 이런 문구가 쓰인 현수막이 내걸려 있었다. "그들은 파란색 셔츠보다는 초록색 셔츠를 입고 있다[파란 색은 스코틀랜드의 상징색, 초록색은 아일랜드의 상징색]."
우리가 탄 버스가 마침내 글래스고의 이스트엔드(East End)에 도착했다. D.J.가 내게 셀틱 스카프를 준 것은 안전을 위해서였다. 우리는 레인저스 팬들 곁을 지나가면서 눈길을 돌렸고 그것은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한데 나는 잠까지 쏟아졌다. 거기다 셀틱과 한편인 것처럼 느낀다는 게 쉽지도 않았다. 나 빼고 일체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파크헤드는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팔로, 팔로 는 사전에 깃발을 가져올 것을 주문했고, 그래서 레인저스 응원석 쪽은 마치 왕실 결혼식에 모인 군중처럼 보였다. 글래스고에서는 유니언잭이 구교도를 자극하는 도발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그래서 경찰이 정기적으로 이를 수거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팔로, 팔로 의 다음과 같은 지적처럼 유니언잭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누가 뭐래도, 유니언잭은 영국 국기다."
가장 헌신적이다는 외국의 축구팬들도 영국 축구팬들의 문화에 찬탄을 금치 못한다. 유럽 각지에서 올드 펌 경기를 관전하려고 사람들이 글래스고를 방문한다. 스위스에서는 레인저스 팬소식지가 레인저스를 연구하는 이방인들 Strangers on Rangers 이라는 제목으로 발행되기까지 한다. 일부 외국인들은 영국을 모방하고 있다. 유니언잭이 전유럽의 경기장, 특히 동유럽의 경기장 관중석에 나부끼는 걸 보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응원가도 영국에서 빌려간다. 오버런 워프[Auberon Waugh, 영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가 노동자 계급의 국가라고 명명한 <히어 위 고(Here We Go, 우리 여기 왔노라)>가 새로운 인터내셔날가로 급부상하고 있다. 영국 축구팬들의 레퍼토리는 끝이 없다. 전세계에 축구팬들이 있다고 하지만 새로 나온 응원가 음반 딕스 아웃! Dicks Out! 이 영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발매될 수 있었다는 사실이 정말 믿기지 않는다. 아마 아르헨티나인 듯하다.
영국 축구팬들은 독특하다. 영국에서 축구 그 자체는 문화를 살찌우는 부차적인 요소이다. 세계적으로 다른 나라의 어떤 팬들보다 더 많은 영국의 팬들은 스스로를 열성적인 애호가로 인식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수 겉모습 성격 등에 관해 많은 고민을 한다. 맨체스터의 축구팬들은 자기들이 최초로 공기 주입식 바나나 풍선을 흔들었다고 주장한다. 리버풀의 축구팬들은 자신들이 훌륭한 유머 감각을 가졌다고 믿는다. 리즈의 축구팬들은 인종주의적이다. 영국 축구팬들의 가장 중요한 미덕은 헌신이다. 이런 이유로 레인저스의 팬소식지 아이 레디 Aye Ready 가 "셀틱 팬들은 필비(Philby) 버지스(Burgess) 머클린(Maclean)[세 명 모두 영국 방첩 업무에 종사했던 자들로 냉전시대 소련의 이중 첩자로 활동했다]이 대영제국에 충성을 바쳤던 것처럼 자신의 팀에 충성스럽다"고 쓸 수 있는 것이다.
(적어도) 영국 남자라면 누구나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있다. 축구의 다른 어떤 요소도 그에게 이만 한 중요성을 갖지는 못한다. 로치데일(Rochdale)의 팬이라면 가자(Gazza)와 데이빗 플랫(David Platt)에 관한 소식을 읽고 싶어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가 알고자 하는 것은 바로 로치데일 그 자체다. 네덜란드와 독일에 있는 내 친구들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축구를 더 좋아했다. 그러나 그들이 보이는 이러한 일체감은 미약할 뿐더러 변하기도 쉬웠다. 여러 해 동안 나는 나 자신이 중립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약스 암스테르담(Ajax Amsterdam)이 질 때마다 가볍게 상심하는 나를 발견하고 그게 아니란 걸 알았다. 영국에 와서 나는, 직접 공을 차보겠다는 생각은 털끝만치도 없으면서도 형편없는 축구를 한다고 생각하는 팀들에 헌신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은 매주 자기가 응원하는 팀의 경기를 보러 갔다.
물론 한 팀에만 헌신하는 축구팬들이 외국에 있는 것도 일부 사실이다. 그러나 그들조차도 영국의 축구팬들과는 다르다. 네덜란드, 또는 이탈리아나 카메룬에서 축구팬이 된다고 하는 것은 다소 수동적인 일에 속한다. 아마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응원하는 팀을 아주 좋아하고 또 경기장에 가서 응원가를 부르고 구호도 외칠 것이다. 그리고 여러분이 특별히 아주 헌신적이라면 같은 팀을 응원하는 다른 축구팬들과 어울려 많은 시간을 보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팬이 된다는 것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을 것이다. 달리 말해 여러분은 여러분이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기만을 바랄 뿐, 상대팀 팬들이 여러분을 깃발로 압도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팔로, 팔로 는 이 점에서 여러분과 달랐다. 깃발을 보고서 "다음에 아이브록스에 갈 때는 삼색기로 스탠드를 가득 채워버리겠다"며 흥분했던 D.J.도 마찬가지였다.
영국의 축구팬들은 역사가들이다. 영국 팀끼리 서로 경기를 하게 되면 그들의 역사 또한 서로 격돌한다. 이것은 글래스고에서 특별히 진실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셀틱팬들이라면 연령에 상관없이 모두 '리스본의 사자들'에 관해 몇 날 며칠이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다. 또 올드 펌 팬이라면 누구나 다 1931년 레인저스의 포워드 샘 잉글리시(Sam English)가 우발적으로 셀틱의 골키퍼 존 톰슨(John Thomson)의 머리를 걷어차버린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 결과 '파이프 출신의 멋진 청년(Bonnie Lad from Fife)' 톰슨이 죽었다는 사실까지도 말이다. 셀틱의 단가(團歌)가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몸 바쳐 싸워야 할 위엄 있는 팀,
가치를 이해해야 할 기품 있는 팀,
그리고 역사를 안다면,
심장의 고동이 맥박치는 팀
(레인저스 팬들은 <가진 거라곤 역사밖에 없는 놈들 And all you've got is your history>이란 노래를 부르며 이에 응수한다.)
다른 나라들에는 역사가 없다. 독일 축구팬들은 나치의 십자기장과 히틀러식 거수경례가 담겨 있는 낡은 사진 없이는 1930년대의 경기들을 이야기할 수 없다. 러시아에서는 볼셰비키 혁명 이후 많은 클럽들이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스탈린은 CSKA 모스크바(CSKA Moscow)를 한때 해산하기까지 했다(우발적이긴 했지만 그것은 또다른 이야기이다). 어떤 나라들은 전통을 가질 시간마저 갖지 못한다. 네덜란드에서 가장 영광스런 과거를 지닌 클럽 아약스는 1990년대 후반에 암스테르담시 외곽의 새 스타디움으로 이사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 이전 계획에 관심을 보이는 아약스 팬은 한 사람도 없는 것 같다. 영국인들이 과거에 애착을 갖는 습성은 축구의 영역을 넘어선다. 우리의 의회를 예로 들어보자. 보수당이 1993년에 선거공약을 깨고 연료에 세금을 부과하면서 마이클 헤즐틴[Michael Heseltine, 보수당 정치인]은 해럴드 윌슨[Harold Wilson, 영국의 노동당 정치가. 노동당 집권기의 상당 기간 동안 총리를 역임했다. 여기서는 1974년 산업 불안정기의 연료 위기를 말한다] 내각도 약속을 어기고 세금을 올렸던 사례를 언급했다. 30년 전의 일이 여전히 의미 있게 다가왔던 것은 셀틱과 마찬가지로 노동당도 역사와 전통을 가진 단체이기 때문이다. 노동당이 토리당과 경합을 하면 그들의 역사 또한 서로 경합을 하는 것이다. 마가릿 새처(Margaret Thatcher)는 윈스턴 처칠을 인용하기를 좋아했다. 토리당은 1979년에 결코 지칠 줄 모르고 토론했다[1979년 토리당이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었다. 이후 80년대 내내 새처가 강요한 신자유주의가 노동자 계급을 공격했다]. 한편 노동당에서는 토니 벤(Tony Benn)과 피터 쇼어(Peter Shore)가 노동당이 당의 전통에서 이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존 멋슨[John Motson, BBC TV 평론가]이 "이 양 팀이 마지막으로 1954년 컵 대회에서 격돌해, 로버(Rovers)가 31분경 터진 자살골로 1대0으로 승리했다"고 우리에게 말했을 때, 그는 아주 영국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의 축구팬들은 팬의 문화를 즐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맞수 팀을 증오하는 것을 즐긴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팬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그들의 경쟁 관계는 아마도 여전히 글래스고의 실제적 종교 갈등에 기초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분열 상태가 올드 펌 경기를 그토록 대단한 사회 현상으로 만들 만큼 강력한 것인지 묻고 싶다. 결혼을 하는 구교도의 40% 이상이 현재 신교도와 짝을 이룬다. 그리고 백 번 양보해 셀틱과 레인저스가 정말로 이 도시의 양 극단을 대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사실이 글래스고 정치 무대에서는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다. 셀틱과 레인저스의 팬들은 모두 노동당에 투표한다. 그것은 아마도 글래스고의 정치적 분립--노동당, 보수당, 스코틀랜드 민족당--이 웨스트민스터의 정치적 분립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일 것이다.
노동당이 1992년 선거에 승리했다면 스코틀랜드 의회가 새로 탄생했을 것이다. 더불어 진정으로 스코틀랜드적인 정당들이 등장해 노동당과 보수당을 대체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신당들은 어떤 성향을 갖게 될까? 올드 펌의 경쟁 관계가 적어도 스코틀랜드 서부 지역에서는 창당의 기본조건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 그리하여 독립 스코틀랜드에서는 좌익적이고 공화적이며 구교도적인 정당이 중도좌파적 통일주의 신교 정당과 대결하는 양상이 전개될 것이다.
올드 펌의 경쟁관계가 종교적 증오심보다 오래 살아남지 못했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그것이 사태의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팬들이 경쟁 관계를 즐기기 때문에 올드 펌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서 살아남은 것이다. 그들이 더이상 신을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과거의 전통과 결별하는 것은 아니다.
그날 발행된 셀틱 뷰 Celtic View (팬들에게는 진실을 알리는 기관지로 통한다)는 올드 펌에 관한 퀴즈를 제공하고 있었다. "OX문제-레인저스가 셀틱을 상대로 처음으로 승리하기까지 거의 5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퀴즈는 이렇게 간단한 문제로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 쪽에서 아일랜드공화군(IRA)의 단식투쟁을 기리는 노래를 불렀다.
바비 샌즈
바비 샌즈
아일랜드의 깃발 아래 충성을 다짐하겠는가?
기꺼이 검은 베레(black beret)를 쓰겠는가?
IRA와 함께 하겠는가?
기꺼이 그러겠다면,
당신은 진정한 영웅이다,
바비 샌즈, 만세!
[Bobby Sands, 1980년대 초 정치범의 지위를 요구하며 감옥에서 단식투쟁을 벌이다 숨진 IRA 투사]
연이어 <겟 더 브리츠, 겟 더 브리츠, 겟 더 브리츠 아웃 나우! (get the Brits, get the Brits, get the Brits out NOW! '이제 영국놈들은 나가라!'는 뜻)>와 훨씬 더 노골적으로 IRA를 찬양하는 노래 <우 아 업 더 라, 세이 우 아 업 더 라! Ooh aah up the Ra, say ooh aah up the Ra!>가 울려퍼졌다. 바로 그날 오후 워링턴(Warrington)에서는 IRA의 폭탄 테러로 어린이 두 명이 숨졌다.
레인저스의 팬들도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울음소리는 굴복이 아니었어,
항복하라, 너흴 기다리는 건 죽음뿐
손에 네놈들의 심장을 들고
우리는 데리(Derry)의 방벽을 지키리
또, <노오오오오 포프 어브 롬!(Nooooo Pope of Rome! '로마 교황 반대!')>도 들려왔다.
정말 나로서는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다. 열광자들 사이에서 공평무사하게 있는 것도 지루하고 지치는 일이다. 내가 정말 그날 아침 얼스터를 떠나왔던 것일까? 이곳이 정말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일부분이란 말인가?
90분간의 증오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내 귀에 대고 이런저런 얘기를 속삭이던 그 친구가 단 한 경기 동안 "오렌지파 개자식들, 엿이나 먹어라!" 하고 외친 천만 번째 사람쯤 될 것이다. 셀틱이 득점을 하자 30~40명의 관중이 스탠드 아래쪽 내 뒤로 자기 몸을 날렸다. 그 사이 레인저스가 동점골을 넣을 뻔했다. 셀틱의 임원진이 나중에 밝힌 것처럼 셀틱 선수들이 아직 골을 자축하고 있는데도 레인저스가 킥오프로 공격을 속개했고, 그리하여 셀틱의 골이 터진 지 정확히 12초 후에 스튜어트 머콜(Stuart McCall)의 슛이 나왔던 것이다. 주심이 오렌지파 교도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나중에 셀틱이 다시 득점에 성공했다.
경기는 형편없었다. 사실 올드 펌 경기는 항상 그렇다. 이를 빗댄 글래스고의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의 한가운데서 축구 경기가 벌어진단 말씀이야!" 전통적으로 셀틱이 레인저스보다 더 세련된 경기 스타일을 보여준다. 그러나 나는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거칠게 이리저리 움직이는 두 팀만을 보았을 뿐이다. 사실 선수의 절반은 운동 셔츠를 입은 팬들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격앙된 감정으로 경기에 참여한다. 셀틱의 피터 그랜트(Peter Grant)는 레인저스 팬들에게 '라스푸친[Rasputin, 러시아 정교회 수도사로 황제 일가를 미혹한 괴승]' '미친 수도사' '미친 사제'로 통한다. 또 개리 리네커(Gary Lineker)에 의하면 테리 부처는 잉글랜드팀 탈의실에서 레인저스 응원가를 자주 불렀다고 한다.
마침내 경기가 끝났고 셀틱이 2대1로 승리했다. 그러나 헤이틀리가 레인저스의 골을 넣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의 스코어를 2대0으로 간주했다. 나는 받았던 스카프를 D.J.에게 돌려주고 왼쪽으로 돌아서 런던가(London Road)로 접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실수였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나와 같은 진로를 선택하지 않았다. 레인저스의 팬들이 길을 따라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올드 펌 경기가 열리는 날은 두 클럽 팬들이 서로 다른 행진로를 이용하는 것이다. 앞서 오던 사람들이 내게 무자비한 시선을 던졌다. 또 배너를 들고 가던 사람이 내게 박치기 흉내('글래스고식 키스'라고 한다)를 내고는 지나가버렸다. 진짜 흉내만 낸 것이었다. 나는 내 코 앞 1인치 앞까지 그의 머리가 접근하고서야 겨우 눈치 챌 수 있었다. 나는 못 본 체하며 계속 걸었다.
B&B[본래는 bed and breakfast의 약자로 이것을 상호로 한 숙박시설]의 내 방은 아주 추웠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마저 정리하려고 TV가 있는 방으로 갔다. 그곳 기온도 외투를 두 개 정도 걸쳐야 겨우 견딜 수 있을 정도로 춥기는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한 사람은 꽁지머리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군인 콧수염을 하고 있었다--이 병채로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그들은 나에게도 좀 마시겠느냐고 했지만 나는 거절했다. 꽁지머리를 한 사람이 자기 외투에서 신문 기사를 하나 꺼내 내게 보여주었다.
한 1년쯤 된 선 Sun 에서 뜯어낸 그 기사에는 그가 자동차길에서 마차를 몰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 사람 사진이 페이지에서 유난히 도드라져 보였다. 그가 내게 말했다. "그게 내가 하는 일이죠. 난 집시거든." 몇 초가 멀다 하고 그는 계속해서 나에게 술을 권했고, 나는 그때마다 매번 거절해야 했다. 나는 군인 콧수염을 한 사람에게 하는 일이 뭐냐고 물어보았다. "나한테 물어봐야지! 내가 사장인데." 꽁지머리가 참견했다. 콧수염 친구는 아무 말도 안 했다. "이 분은 무슨 일을 하시나요?" 내가 다시 묻자, "이 친구는 내 밑에서 일하지". 그의 대답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레인저스와 셀틱 중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팀에도 관심이 없다고 대답했다.
그때쯤 나의 태도가 꽁지머리에게 거슬렸던 것 같다. 그가 위스키 병으로 내 머리통을 박살내버리겠다고 위협했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피해야 했다. 그가 나를 쏘아보며 경멸적인 말을 내뱉었다. "야 이 멍청한 놈아, 네가 멍청하다는 거나 아냐? 이 무식한 놈아." 나는 돌아와 곧 잠자리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