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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따르미의 길-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
김문음
왜 사냐건 웃는 언님들
나는 개신교 안에 독신여성들의 수도공동체가 있는 줄 몰랐었다. 천주교 수녀의 모습이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개신교 쪽에? 일단, 호기심이 일었다.
천안 모원의 언님들
그러나, 충남 천안의〈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모원과 전남 무안의 분원〈한산촌〉, 그리고 목포 지역에 펼쳐진 봉사활동을 취재하면서, 나는 결코 이 자매들의 참모습을 담아낼 수 없으리라는 아득함에 휩싸였다.
이 언님들은 어떤 상투성에도 빠져 있지 않았다. 아니, 모든 상투적인 것들과 '아무렇지 않게' 어울리고 있었다.
천안군 병천의 산중턱에 있는 모원 '영성과 평화의 집'에 가 보자. '영성', '수도공동체', 숲 속에 있는 '십자가의 길' 등에 취해, 속세를 초월한 고고한 한 말씀이라도 들을라치면, 김정란 언님은 "아이고, 영성, 영성, 그놈의 영성... 너무들 그러는데, '생활' 속에 들어와 있어야지!"하고 일갈한다.
가장 힘들었던 일이 뭐였냐고 물으면, '성질 제각각인 고집쟁이들이 모여 마음을 합하는 일'이 가장 어려웠노라고 토로한다. (내가 정식으로 인터뷰를 할 때, 외출하지 않은 자매들은 다 와서 둥글게 둘러앉았다. 누구, 대표 한 사람과 얘기할 줄 알았던 나는 잠시 당황했다.)
중증 환자를 돌보며,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의료봉사의 현장에선 신비 체험도 하지만, 이들은 어떤 형태로든 자신들이 미화되기를 원치 않았다.
"좋아서 하는 일인 걸요, 뭐."
한편으로는 이 자매들의 궤적을 좇아갈수록, 한국 개신교 풍토에서 이 디아코니아 공동체가 가지는 의미가 소중하고, 삶 자체가 입체적이고, 활동 내용이 풍성해서, 감탄스러웠다.
디아코니아 자매회는 초교파 여성공동체다.
어깨를 기댈 교단이나 교파 없이, 천주교와 같은 조직이나, 카리스마를 지닌 일인 지도자 없이, 아무런 전통 없이, 여성으로서, 주체적 '수도공동체'를 일궈간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과정이었을까?
언님들은 웃음이 많다. 빙그레 미소짓기도 하지만, 다 함께 표정을 무너뜨리며 폭소를 터뜨리는 경우가 많다. 섣불리 자기 믿음이나 생각을 강조하지도 않는다. 자발적으로 일어나, '오직 주님만 섬기는' 이들의 자유로움이 바람처럼 전해 올 뿐이다.
"취재... 안 했으면 좋겠는데, 이 먼 데까지 와서 어떡하나?... 그냥 기도나 하러 오지..."
언님들의 그 연민 속으로, 나는 한 귀퉁이 비집고 들어섰다.
취재 후... 그저 나의 솔직한 고백은, "고맙습니다. 당신들이 그곳에 계셔 주어서. 기독교인으로서, 여성으로서, 등뼈가 단단해짐을 느낍니다.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의 존재가 참으로 고맙고 귀합니다..."하는 것이다.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의 태동
지금부터 25년 전인 1977년, 산업사회 속에서 예수의 제자로서, 특히 여성 제자로서 건강한 삶을 이어가는 데 한계를 느낀 10여 명의 미혼 여성들과 민중신학자였던 고 안병무 박사(전 한신대 교수)는, 서울 서대문 선교교육원에서 '공동체'에 관한 세미나를 가졌다. 제도권에서 소외된 이, 아픈 이들과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이후, 예수 정신으로 함께 일하며 공동체 삶을 이루고자 하는 열망은 몇 차례 준비모임으로 이어졌고, 1980년 1월, 서울 영등포에서 4명의 자매가 3개월간 공동생활을 한 끝에, 진정한 공동체 삶을 위해서는 함께 사는 '공간' 뿐 아니라, 각자의 '일과 삶'이 하나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고 '출가'를 결심했다.
이때, 안병무 박사와 그의 절친한 친구요, 목포 지역에서 의료봉사의 삶을 살고 있던 여성숙 선생이 큰 힘이 됐다.
무안 한산촌(옛 숙소)
1980년 5월 1일. 전남 무안군 삼향면. 여성숙 선생이 있던 한산촌 결핵 요양소의 여자병동을 숙소로 만들고, 김옥태, 김정란, 노영순, 이영숙, 한은숙 다섯 자매를 주축으로 헌신예배를 드렸다.〈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가 출범하는 순간이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없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 병든 이, 눌린 이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내어줌으로써 이웃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고난받으며 그들과 더불어 사는 사람이 참 이웃임을 믿습니다. 그러기에 고통 당하는 이들의 참된 이웃으로 살아가는 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디아코니아(DIAKONIA)의 삶임을 믿습니다. 아멘. ―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 '우리의 신조' 중에서
디아코니아(diakonia)란 '시중들다', '봉사하다'는 의미를 가진 디아코네인이라는 동사에서 온 말로 봉사, 구제, 혹은 섬기는 일을 의미한다. 실제로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한 목적이다. 교회의 3대 목적을 케리그마, 디아코니아, 코이노니아라고 하는데, 케리그마의 내적 기운이 코이노니아라면, 외적 작용은 디아코니아다. 즉 케리그마는 디아코니아와 코이노니아에서 완성된다, "교회가 있는 곳에 디아코니아가 있다."고 할 만큼 디아코니아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며 교회의 목적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디아코니아로 집중해야 하며... 미래 교회는 자기중심적 교회관에서 타자에 대한 관심으로 그 중심이 이동할 것이다. ― 이성희,『미래 사회와 미래 교회』중에서
원래, 개신교의 디아코니아 운동은 1836년, 독일의 라인 강변에 있는 카이저져스베르트 지방에서 시작됐다. 산업의 발달로 도시로 몰려든 청소년, 가난한 이들을 위해 사회봉사에 관심이 없었던 당시의 교회제도 안에서, 개신교 목회자인 프리드너 목사가 '돌보는 일'을 시작했고, 젊은 여성들이 이 섬김과 봉사의 삶에 뛰어들었다. 1946년 이후 설립된 세계 디아코니아 연맹에는 현재 33개국, 65개 단체가 가입되어 있다.
독일 유학 중 '구라파에서 교회는 죽었다'고 절망하고 있던 안병무 박사는, 이 디아코니아 여자공동체의 활동에서 희망을 보았다. ('디아코니아'가 외래어인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지만, 70년대 후반 당시는 '공동체'라는 단어를 쓰기도 조심스러운 시국이었다. 약간의 보호막이 필요하기도 했다.)〈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는 1982년 독일 카이저베르트 디아코니아 연맹에 가입, 83년에는 세계 디아코니아 연맹에도 가입했다.
천안 모원의 기도실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들은 서로를 '언님'이라고 부른다. '언'이란, 한자 어질 인(仁)에 해당하는 순 우리말이다. '어진', '덕이 있는', '착한'이라는 뜻을 가졌으니 '언님'은 '어진 님'이 되는 셈이다. 남녀노소 구별 없이 부를 수 있는 호칭. 원래는 '언다'라는 말도 있었다는데, 사전을 찾아보니 '언짢다'라는 부정적 의미의 말만 남아 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쨌거나, 디아코니아 '언님'들은 그 '어진 삶'을 살려내려 애쓰고 있는 것이다.
초교파 독신 여성 공동체, 새 길의 기적...
대부분이 30대 전후였던 디아코니아 언님들은 1982년, 평생을 독신으로 살겠다는 종신서원을 드린다. 특별히 독신주의자도 아니었던 여성들이 왜 굳이 종신서원을 드렸을까?
"안병무 선생님도 공동체 삶을 시도하셨지요. 하지만 가정이 있으면서 연합한다는 것은 한계가 많았습니다. 남자들끼리 밤새 토론한 끝에 정한 약속이, 다음날 집에 갔다오면 깨어지든가 분란이 잦았다고 해요. 물론 여성을 토론에서 배제시킨 행위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겠습니다만, '가족 이기주의'를 극복하기란 쉽지 않지요."
"남성의 경우도 어려운데, 여성의 경우는 더 어렵지요. 가정을 가지고 주의 일을 한다는 것. ― 더구나 한국의 경우, 그리고 20여 년 전에... 유교적 영향이 지금보다 훨씬 강하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가족주의를 넘어서 이기심을 버리고,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온전히 예수의 제자로 '나'와 '너'를 넘어선 '우리'의 삶을 이루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했습니다."
언님들은 그렇게 종신 수도공동체의 삶을 결단하고, 자신들이 머무는 곳 ― 한산촌 결핵 요양소를 운영하면서 1983년부터는 농촌 보건 및 지역사회 개발사업을 병행했다. 무의촌에 가서 보건진료소를 짓고, 의료봉사를 하고, 마을 목욕탕, 어린이 집을 만들고, 신용협동조합을 만들어 오지를 '자립 마을'로 키워 가는 일은 고생한만큼 성과와 보람도 컸다.
언님 자신들도 '경제 자립'을 위해서 안 해 본 일이 없다고 한다.
"도시에서 그 나름대로 인정받고 살았지, 험한 육체노동이라고는 안 해 보다가... 여기 내려와서 고생 억수로 했지요. 닭도 키우고 꿩, 칠면조도 키우고, 벌도 쳐 보고, 아, 돼지도 키워 봤지요. 그러다가 우린 동물하고는 안 맞아, 식물을 키우면 잘 할 거야 싶어서(웃음) 동양란, 알로에, 신성초, 온갖 약초들을 키우는데... 어찌어찌 키워낸다 해도 파는 재주가 없는 거예요. 난 같은 경우는 외양이 그럴 듯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저 양심껏 튼튼하게만 키워서는 화려한 난들 사이에서 '우리 건 뿌리가 튼튼해요...' 하고 설명하는데, 어찌나 처량하던지..." (김 언님)
(농약을 일체 쓰지 않고 가꾸는 소철, 군자란, 동양란, 어성초 등은 지금도 디아코니아 자매회의 주요 수입원이다.)
무안 한산촌의 언님들
어려운 고비 때마다, 특정 교단으로 들어오라는 유혹을 받았지만, 언님들은 초교파의 원칙을 지켜냈다.
"교파, 성장 환경, 출신학교가 각각 다른 언님들이 모였는데, 민주주의 한답시고 모든 결정을 '가족회의'를 거쳐서 하려니, 의견은 왜 그렇게 각각이고, 다들 그 나름대로 지도적 역할을 감당하던 이들이라 자기 확신은 어쩜 그리도 강한지... 그렇게 부딪히면서 주님만 바라보고, 서로를 받아들이고, 자기의 성격을 발견해 가는 과정에서 신앙적으로도 많이 성장했지요."
언님들은 이제 다시 시작하라면 정말 잘 할 것 같다며 다시 웃었다.
의견이나 성격이 신기하리만큼 제각각이었다는 언님들, 그러나 천안과 무안의 언님들은 한결같이 "기적이란 다른 게 아니고,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가 중간에 깨어지지 않고, 20여 년 동안 살아남아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쁨으로 예수의 지체가 되어 - 전남 무안, 목포 등지의 봉사 활동
디아코니아 정식 언님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될까.
지원기 1년, 수련기 3년, 기간 회원기 2년 도합 6년의 훈련을 받은 후 종신서원을 드린다.
현재 정식 언님은 모두 11명. 20여 년 동안 여섯 명의 언님이 늘었다. 물론 수련을 받았던 이들의 숫자는 훨씬 더 많다.
"우리가 시집 많이 보냈지..." 언님들이 또 웃는다.
이곳에서 수련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이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이 자신에게 합당한지에 대해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다. 어찌 보면, 세상에서 어영부영 살다가 독신으로 세월을 보냈을지 모르는 자매들이, 오히려 이곳에서 '평생 독신으로 주를 섬길 수 있을 것인가'하는 화두 앞에서 제 갈 길을 확실히 파악하고 결혼을 결정짓게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훈련 과정이 처음엔 힘들지만, 일정 단계를 거치면 기쁨도 크지요. 제 경우에는 여기 오기 전에 부엌에 들어가는 게 영 자신 없었는데, 이젠 두렵지 않아요. 무서울 게 없어지더라구요. 생활 훈련, 기도 훈련, 함께 사는 훈련 등을 받지요."
"처음엔 훈련받던 자매가 나가면 섭섭했는데, 이젠 그렇지 않아요. 여기서 어떻게 살아갈지를 배우니까, 나가서도 건전한 예수의 여성 제자로서 살게 되지요. 그것도 좋은 일이겠지요."(박 언님)
취재하면서 발견한 것은, 종신서원까지 드리느냐, 중도에서 포기하고 나가느냐 하는 부분이 겉보기와는 다르다는 것, 그리고 종신서원하는 이들은 대개 충만한 기쁨 속에서 선택하게 ― 언님들은 '선택 당했다고 표현한다 ― 된다는 것.
무안 분원의 기도실
"저는 전혀 독신주의자가 아니예요.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처음 디아코니아에 올 때, '종신서원을 하겠다'는 생각도 없었어요. 그저, 주님을 더 잘 섬기고 싶었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고 싶어서 온 거죠. 그러다 막상 종신서원을 할 때. 아! 이제 정말 내가 내 집에 왔구나, 하나님이 날 선택해 주셨구나 하는 안도감이 들면서 너무 기쁘고 감격스러워서 눈물이 나더라구요." (안 언님)
"'주님, 저에게 뭘 원하십니까?' 모임 참석 후 1년 동안 제 갈길을 놓고 기도 드렸지요. 집안에서는 오빠가 정한 남자를 만나보든지, 디아코니아로 가든지 선택을 하라면서 며칠 시간을 주더군요.
저로서는 출가하여 주님의 일을 하겠는지, 확실한 답을 줘야 하는데 그 시간이 다 가도록 답이 안 오는 거예요. '주님, 뭘 원하세요?' 끝없이 물었죠. 사실, 마더 테레사가 계셨던 곳처럼 체계가 잡힌 것도 아니고, 당시 개신교엔 여성 수도공동체 전통이 없었기 때문에 미래가 불투명했죠. 3일 금식 후, 오빠 방으로 부를 때까지도 아무 생각이 안 났어요. '이를 어떡하나'... 그런데 오빠가 묻자, 저도 모르게 '디아코니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거예요. 어찌나 기쁘던지. '하나님이 날 택해 주셨구나!' 짐을 싸면서도 덩실덩실 기쁘고, 차를 타고 내려가는데, 그 기쁨을 주체할 길 없어 창을 열고 막 찬양을 했죠. 아마 남들은 절 좀 이상하게 봤을 거예요... 낙심될 때마다, 그 때의 그 감격을 떠올리곤 하지요." (이 언님)
현재 천안 모원에 7명, 무안 분원에 4명의 언님들이 기거하며 활동하고 있다. 그런데 이 언님들의 활동 내역을 보면, 도대체 이 적은 인원으로 그 많은 일들을 총괄해왔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현재에는,
·무의탁 만성 결핵환자들 자활의 집 운영
·98년부터 목포시에서 위탁받은, 영세 어르신을 위한〈행복노인복지관〉운영. (이곳에선 매일 점심을 제공하고 밑반찬을 싸주는데, 150명∼200명 정도의 노인이 모여든다.)
·재가 복지사업: 목포시 전 지역에 거주하는 영세가정, 환자, 소년소녀 가장, 독거노인 등을 대상으로 생계비, 의료비 지원과 가정방문, 상담 등을 하고 있다.
특히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은 영세 가정 자녀들을 위한 장학사업이다.
"중, 고등학교 6년을 돌보게 되는데, 무작정 가출한 아이를 찾으러 밤마다 오락실로 찾으러 다니고, 철마다 유적지 탐방 등 프로그램을 통해 애를 써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곤 하지요. 그러던 아이들이 청년기가 되어 어느 날 기술을 배우고, 밤마다 오락실로 자기 동생들 찾으러 다니며, 우리가 가르치던 얘기를 할 때, 아, 거름 준 게 헛되지 않았구나 하고 감사하게 되지요." (한 언님)
"노인 분들, 우리 복지관에 며칠 다니시면 얼굴이 환해지셔요. 몸도 불편하신 할아버지가 꼬박 2시간을 걸어오셔서는, '밥이 문제가 아니어라. 수녀님이 친정어머니처럼 보고 싶어서 왔소'하실 때, 말할 수 없이 행복하지요."
언님들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는 할머니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의 봉사현장에서 또 두드러지는 점은,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협조 체계가 잘 구축되어 있다는 것.〈행복노인복지관〉의 주방 벽에도 당번 표가 붙어 있는데, 기독교의 다양한 교파 교회의 이름들이 빼곡이 적혀 있다. 그 교회의 자원봉사자들이 맡은 날 소임을 다하러 온다.
"얼마 전엔 저희 디아코니아 역사상 처음으로 바자회를 했는데, 목포 시내의 다양한 종파의 봉사단체가 자진 출동해서 저희를 도와주었지요. 우리가 참 많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끼고 감사했습니다."
20여 년 동안 신뢰를 쌓아 온〈디아코니아 자매회〉는 다양한 종파와 교파를 아우르며 자원봉사자 활동 사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영혼의 맑은 샘 - 충남 천안의 디아코니아 모원
목포 행복노인복지관
주의 삶을 온전히 살게 하는 영적 에너지는, 주님과의 '영적 교제'에서 온다. 묵상과 기도를 통해, 한 호흡 한 호흡, 마음의 거울을 닦고, 하나님과의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아야, 주의 영이 나를 통해 역사하게 되는 것이다.
디아코니아 언님들이 충남 천안시 병천면에 디아코니아 모원을 세우게 된 것은 1998년의 일이다. 언님들은 '비로소 살 것 같았다'며 안도의 한숨을 감추지 않는다.
예수께서도 병자들을 고치신 후엔 물러나 기도하셨다지 않는가. 봉사활동과 물러나 기도하는 영성 생활이 균형을 이루어야 하는데, 언제 위기상황이 돌출할지 모르는 현장이 바로 곁에 있는 무안, 한 장소에서 '일과 충전'을 동시에 해내기가 늘 버거웠었다.
안병무 박사의〈한국신학연구소〉가 있던 자리에 수련원을 지은 후, 디아코니아 자매들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삶'을 더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됐다.
디아코니아 자매회 천안 모원
수도원 전통이 없는 개신교에서, 영성 운동의 젖줄이 되기로 결단한 디아코니아 자매회는, 태동 초기, 스위스 그랑샤 마을의 여성공동체 지도자를 초청해, 6개월간 지도를 받는 등, 숱한 교육 과정과 영적 수련을 거치지 않았던가.
더구나, 갈수록 영적 고갈이 심각해지는 현대사회 속에서, 내적 평화와 영혼의 충만함을 갈구하는 많은 교회와 개인에게, 천안 디아코니아 모원의 존재는 맑은 샘과도 같은 영적 고향이 되어줄 것이다.
모원은 '영성과 평화의 집'을 비롯한 각종 시설을 갖추고 있어, 조용한 기도(피정)나 교회수련회를 원하는 이들에게 프로그램과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노동과 학습, 방문객을 돌보는 일도 녹록치 않다. 디아코니아 자매회 언님들의 하루 일과는, 06:00 묵상기도, 06:30 아침 기도회, 07:00 산책, 운동, 08:00 아침식사, 09:00 각자 소임에 따라, 그리고 12:00 정오 기도회, 12:30 점심식사, 14:30 노동, 18:30 저녁식사, 20:00 저녁 기도회, 21:00 영적 독서, 22:30 취침 등으로 이루어지며, 함께 살기 원하는 관심 자매를 기다리고 있다.
매월 셋째 주 토요일 오후 4시 주일예배 동안, 관심 자매를 위한 모임을 가진다.
모든 피조물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 로마서 8: 9
지금 여기에
디아코니아 언님들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땐 '정성'이 문제지, 필요한 만큼은 늘 채워 주신다고 고백한다. 언님들은 스스로를 순결하고 충직한 '도구'로 내어놓을 뿐이다.
목포병원에서 평생 의료봉사를 해오다 최근에 은퇴한, 역시 독신 여성으로서 디아코니아 자매회가 출범할 때 한산촌의 땅을 선뜻 내주었던 여성숙 선생. 모든 재산을 디아코니아에 헌납하고, 지금은 개인의 방 한 칸도 없이 한산촌 근처〈한 삶의 집〉에서 혼자 기거하고 계셔서 만나 보았으나, 끝내 사진 촬영과 취재를 사양했다. 말씀이 언님들과 똑 같았다.
"내가 좋아서 했는데 무슨 말을 하라구."
디아코니아 자매들은 여선생을 곁에서 모시기 위해, 한산촌 안에 작은 숙소를 짓고 있다.
한편으로는 만성 결핵환자들의 거처가 너무 낡아 보수공사를 벌이고 있다. 공사비가 많이 들자, 바자회를 열어 일부 충당했으나, 숙소에서 식당으로 오는 통로를 만들고는 지붕을 덮지 못했다. 이 환자들에게는 감기가 치명적이다. '더 추워지기 전에 지붕을 얹어야 하는데...' 언님들이 당면해 있는 과제다.
식당으로 이어지는 통로
나는 최근에, 성탄절을 앞두고, 만나는 이들에게 "예수님이 어디 있다고 생각하세요?" 하고 묻고 다닌다. 사람들 대답은 대개 비슷하다.
'낮은 곳에', '가장 소외된 이들 곁에', '말구유, 누추한 곳에'....
나는 한국 디아코니아의 언님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예수님이 어디 계실까요?"
언님은 빙긋이 웃으며, 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키며 말했다.
"지금, 여기에!" (2005.8.31.i새길)
[출처] [공유] 한국 디아코니아 자매회-예수 따르미의 길|작성자 빛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