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전명(作戰命 ) “여우사냥” 과 에조보고서
2010년 9월 25일
복원을 마친 경복궁의 광화문 (2010년 9월 23일 紫 淸 權 丁 植 作)
추석(秋夕)은 백의민족(白衣民族) 대대로 이어온 대 명절이다.
여염(閭閻)집은 물론 왕실(王室)에서도 추석 절에는 군신(君臣) 간에 선물을 주고받으며 기쁨으로 가득 차 있을 때이다.
왕실의 그 들 떤 분위기와는 반대로 새로 부임해 온 미우라 일본 공사는 좌선(坐禪)을 핑계로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한가위 달이 하현(下弦)으로 기울기 시작할 즈음인 음력 8월 20일 새벽, 일단의 낭인(浪人)들이 대원군을 앞세우고 경복궁의 광화문을 거쳐 건천궁(乾淸宮)으로 들이 닥친다.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을미사변(乙未事變)의 시작이다.
경회루(2010년 9월 23일)
그들은 고종(高宗)의 침전(寢殿)인 곤녕전(坤寧殿)에 난입, 왕비(王妃)를 찾았으나 보이지 않자. 고종의 어깨를 눌러 주저앉히는 무례를 범하고는 왕비의 침전인 옥호루(玉壺樓)로 달려갔다.
건청궁의 옥호루
곧이어 여인들의 비명소리가 새벽 하늘에 울려 퍼졌다.아리따운 여인 4명의 피 묻은 시신이 방바닥에 뒹굴었다.
낭인들은 궁녀와 세자 척(拓=뒷날 순조)을 다그쳐 왕비의 시신을 확인하였고 다시 미우라 공사가 제 눈으로 재확인 한 후에 녹산(鹿山)에서 장작을 쌓고 석유 불에 태워 버렸다.
건청궁의 곤녕합
그 시간, 대원군은 강녕전(康寧殿)에서 훈련대 군인들의 추대로 권력이 제 손에 굴러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며느리가 처참하게 죽어간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런 연유로 사건직후, 일본은 대원군과 민비사이에 일어난 조선의 내부 문제라고 둘러 댔으나 현장을 지켜 본 쏘련인 사바틴, 미군사고문 다이대위의 폭로로 시해사건 전말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마지못해 일본은 관련자들을 히로시마 법정에 세웠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모두 풀려났다.
그것으로 을미사변의 뒤처리가 종결 된 것이다.
그러나 1966년, 시해사건 후 70여 년간 그 존재조차 모르게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던 “에조 보고서”가 세상에 알려 지면서 일본인의 야만적 행위가 일본인 스스로 얼굴을 들 수 없게 만들었다.
이시즈카 에조(石塚英載)는 조선정부 내부 고문직에 있으면서 미우라 공사를 거치지 않고 자국 법제국장에게 극비 보고서 한통을 보낸다.
에조는 20대의 젊은 낭인으로 민비 유해 곁에 있었다.
“특히 무리들은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왕비(王妃)를 끌어내어 두세 군데 칼로 상처를 입혔다.
나아가 왕비를 발가벗긴 후 국부검사(局部檢査)를 실시했다.
그러고는 마지막으로 기름을 부어 소실시키는 등 차마 이를 글로 옮기기조차 어렵도다.“(daum백과사전)
新納 소좌의 극비보고서(자료)
일부 학자들은 보고서 내용으로 보아 시신능욕(屍身凌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런 일이 인간 세상에 있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조선 측이 가담한 훈련대 군인 중에는 제2대대장 우범선(禹範善)과 그를 따르는 구연수도 포함된다.
그들은 고종이 아관(俄館)으로 파천(播遷)한 후 일본으로 도망쳤다.
일본에서는 사카이라는 자매와 각각 결혼하여 동서(同壻)가 되었다.
우범선은 아들 둘을 두고 구레에서 자객에게 살해당했으나, 구연수는 미우라의 보호아래 귀국하여 조선총독부에서 경찰 고위직을 받았고, 후일 중추원 참의로 송병준과 사돈을 맺었다.
훗날 한은 초대 총제와 제1공화국 상공부 장관을 지낸 구용서(具容書)는 송병준의 외손자다.
건청궁 앞 향원정(2010년 9월 23일 紫 淸 權 丁 植 作)
여기서 내가 굳이 송병준 일가를 끌어들인 것은 우리 동네 미군기지 캠프마켓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시가 3000억 원으로 평가 받는 켐프마켓은 미국정부로 부터 우리정부에 환속되었으나 송씨(宋氏)일가가 연고권을 들어 소송을 제기해 현재 대법원에 계류 중인데 전 인천 시민이 그 판결에 주목 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좌파들의 목소리만 있을 뿐, 우파들 중 누구하나 친일 재산권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없어 지켜보는 나로서는 참으로 답답하다.
우파에게는 뜨거운 머리만 있을 뿐 따뜻한 가슴은 없는 것인가?
오대산 사고지(史庫址) (2010년 9월 15일 紫 淸 權 丁 植 作)
오대산 사고지를 다녀와서 “명성황후 국장도감 의궤” 반환소식에 을미사변을 생각하면서 경복궁의 현장을 답사하였다.
추석명절의 고궁 매표소는 표를 사려는 인파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