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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이름נןַח(한나)의 뜻은 “풍성한 은혜 또는 은총”입니다. “간청하다, 호의를 보이다, 은혜를 베풀다” 등의 뜻을 가진 동사ָנהָּח(하난)로부터 유래했습니다. 히브리 사회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사용되고 있었던 이름입니다. 안타깝게도 그녀에게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들은 아들을 자신의 미래로 여겼습니다. 면류관으로 여겼습니다. 곧 영광으로 여겼습니다.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반면, 아들이 없는 것은 여호와께 저주 또는 징계를 받은 결정적 증거라고 여겼습니다. 인간의 의지로는 돌이킬 수 없는 절대 부끄러움으로 여겼습니다.
아들이 있으면 복을 받았고, 아들이 없으면 저주를 받았다고 여겼습니다. 당신의 창세전 작정을 이루시기 위하여 때로는 태의 문을 여시고, 때로는 태의 문을 닫아두시는 여호와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었습니다. 가진 자들이 자신의 가졌음을 자랑하기 위해서, 가진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갖지 못한 자들 위에 군림하기 위해서 스스로 그렇게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진 자들의 지극히 이기적이고 저속하며 불신앙적인 판단에 비춰볼 때, 99세까지도 아들을 얻지 못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저주를 받은 자에 불과했습니다. 징계를 받은 자에 불과했습니다.
복과 저주와는 어떤 상관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타락한 시대의 뒤틀려진 통념通念에 불과합니다. 성경과도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민 이스라엘의 마음속에는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었습니다. 아들을 가진 어머니들은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있었습니다. 아들을 갖지 못한 어머니들은 고개를 들고 다닐 수 없었습니다. 특히, 성경은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한 아내의 이름은 한나였고, 다른 아내의 이름은 브닌나였다. 브닌나에게는 자녀들이 있었지만, 한나에게는 자녀가 없었다.”(삼상1:2)라고 증거 합니다.
한나는 조강지처입니다. 브닌나는 후처입니다. 당연히 형님뻘인 한나가 먼저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구절은 다릅니다. 브닌나가 먼저 소개되고 있습니다. 아들의 있고 없음에 따라서 위계 곧 서열이 뒤바뀌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한나는 브닌나가 조강지처 행세를 해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현실도 다르지 않습니다. 있음은 복으로, 없음은 저주로 여깁니다. 있고 없음에 따라서 믿음의 성숙도는 물론 은밀하게 감추어져 있는 인격까지도 마음대로 재단합니다. 가진 것이 많으면 인정해 줍니다. 가진 것이 없으면 무시합니다.
당연히 결혼한 여인들은 하나같이 아들 갖기를 간절히 바랐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에게는 아들은 고사하고 딸 한 명 없었습니다. “실로에서는 엘리의 아들인 홉니와 비느하스가 여호와의 제사장으로 일하고 있었다.”(삼상1:3b)라는 증거에 따르면, 자신의 직분을 완전히 망각한 상태에서 여호와보다 자식을 더 소중하게 여겼던 타락한 대제사장에게는, 여호와를 무시하는 것은 물론 여호와께 드려야할 제물을 중간에 가로챌 정도로 제사 규례마저도 깨뜨리는 망나니 같은 아들들을 두었던 대제사장에게는 둘씩이나 있는 자식이 한나에게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편, 여기서 우리는 성경의 구조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머리와 꼬리가 쌍을 이루는 수미상관首尾相觀 구조입니다. A-B-A' 또는 A-B-C-D-C'-B'-A' 등으로 이어지는 구조입니다. 정 가운데 부분에 자리를 잡고 있는 B와 D가 강조되어 있습니다.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없어야할 후처에게는 복수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정작 있어야할 그녀에게는 아들이 없었습니다. 없어야 마땅한 타락한 대제사장 역시 아들을 둘씩이나 두고 있었습니다. 있어야할 자식이 없었던 그녀가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다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남편의 뜨겁고, 변함없으며, 진실한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지만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없어야할 아들을 가진 후처는 속을 태우고 있던 그녀를 수시로 괴롭혔습니다. 마음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아프게 만들었습니다. 매년 실로에 있는 여호와의 장막으로 올라갈 때마다 반복되었습니다. 그녀는 억장이 무너졌습니다. 복장이 터졌습니다. 얼마나 괴롭고 슬프고 절망스러운지 눈물이 홍수처럼 흘렀습니다. 아무 것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열 명의 아들을 가진 것보다 더 낫지 않소?”(삼상1:8b)라는 남편의 위로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이름의 뜻과는 180도 다른 고통스러운 나날을 힘겹게 살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마음이 아파서 흐느껴 울며 여호와께 애원하였다.”(삼상1:10)라는 증거에 따르면, 감사하게도 그녀는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과 고통을 기도로 승화시켰습니다. 자신이 술에 취한 줄 알고 꾸짖는 대제사장에게는 “아닙니다. 저는 정신이 말짱합니다. 포도주나 소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저는 여호와께 제 속을 털어놓고 있었습니다....이 계집종을 악한 여자로 오해하지 말아주십시오. 저는 너무 서럽고 괴로워서 이제껏 기도하고 있었습니다.”(삼상1:15-16)라고 대답했습니다.
속이 시원해질 될 때까지, 여호와와 마음이 통할 때까지, 자신의 마음이 여호와께 전달되었다는 확신이 주어질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있었다고 대답했습니다. 특히, 그녀는 여호와께 “이 계집종의 가련한 모습을 굽어 살펴 주십시오. 이 계집종을 저버리지 마시고 사내 아이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는 그 아이를 여호와께 바치겠습니다. 평생 그의 머리를 깎지 않도록 하겠습니다.”(삼상1:11)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아들이 없을 때는 물론 아들이 있을 때도 자신의 미래와 영광과 자랑은 오직 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믿음의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여자들은 아들을 하나님처럼 섬기고 있지만, 자신에게는 아들이 아니라 여호와가 유일하게 섬길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물체는 자신의 운동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는 성질이 있습니다. 정지한 물체는 계속 정지해 있으려합니다. 운동하는 물체는 원래의 속도와 방향을 그대로 유지하려고합니다. 물리학에서는 이렇게 물체가 외부의 힘을 받지 않는 한 정지하거나 동일한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경향을 일컬어서 “관성慣性”이라고 부릅니다. 이를 저와 여러분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면 오랫동안 반복된 상태에서 굳어져버린 버릇 또는 습관이 됩니다.
평소 여호와를 찾지 않던 사람이 문제를 만났다고 여호와를 찾기는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던 사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두고 기도하기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는 신학생이었습니다. 불과 23세 살의 나이에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암이었습니다.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는 치료를 위해 어떤 행위도 하지 않았습니다. 통원 치료를 받지도, 금식하지도, 기도원으로 올라가 부르짖어 기도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사형선고를 받은 직후 지방에 있는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두문불출했습니다. 집으로 찾아가서는 위로도 해보고. 격려도 해보았지만 무엇이든 해보겠다는 의욕을 아예 보이지 않았습니다. 과연 자신이 믿고 의지하는 치료자 하나님을 전하려고 작정했었던 신학생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기력하게 죽어갔습니다. 이렇게 평소에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문제를 만났다고 해서 작정하고 기도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워낙 다급한 상황에서는 지푸라기 한 올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호와를 찾고 또 간절히 기도할 수는 있겠지만 문제가 사라지고 나면 십중팔구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선생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눅17:13a)라고 부르짖었던 열 명의 문등병자들 가운데, 단 한 명만 돌아와서 깨끗하게 나은 자신의 몸을 예수 그리스도께 보여드리며 감사와 영광을 돌린 것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달랐습니다. 괴로움과 고통 속에서 여호와를 찾았습니다. 마음에 확신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평소 자신의 미래와 영광과 자랑으로 여기고 있던 여호와께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부르짖어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하나의 관성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지극히 바람직하고 긍정적인 습관이었습니다.
본 받아 마땅한 버릇이었습니다. 비록 타락하기는 했지만, 구하는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는 대제사장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그녀는 더 이상 근심하지 않았습니다.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때보다도 밝은 얼굴로 가족들에게 돌아갔습니다. 완전히 끊어버렸던 음식을 먹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녀를 마음에 두시어 임신하게 해주셨다.”(삼상1:19b-20a)라는 증거대로, 여호와께서 당신 한 분만 믿고 의지하는 그녀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당신 한 분만 자신의 유일한 미래와 영광과 자랑으로 여기는 그녀에게 아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녀가 간절하게 부르짖어 기도했었던 내용 그대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기도하는 습관이, 관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스스로는 해결할 수 없는 힘겨운 문제를 만났을 때, 과연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자신도 모르게 하나의 관성처럼 튀어나오는 삶의 버릇과 습관은 과연 무엇입니까? 본문은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 새 수소 세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와 포도주 한 가죽 부대를 가지고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 아이가 어리더라.”(삼상1:24)라고 시작됩니다.
그녀는 여호와께서 허락해 주신 아들을 지극한 정성을 쏟아 부으며 양육했습니다. 젖을 떼자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습니다. 둘러댈 수 있는 핑계를 대지도 않았습니다. 지체하지도 않았습니다. 즉시 수소 세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한 마리는 아들을 여호와께 바치고 평생 성전에서 봉사케 하는 의식과 관련된 번제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한 마리는 가족이 매년 드리던 제사를 위한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머지 한 마리는 자신이 서원한 대로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 여호와의 은혜에 감사하는 제물로 사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녀는 또 “번제Burnt Offering로나 서원을 갚는 제사로나 화목제Peace Offering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 소제Meat Offering로 고운 가루 십 분의 삼 에바에 기름 반 힌을 섞어서 그 수송아지와 함께 드리고 전제Drink Offering로 포도주 반 힌을 드려서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화제를 삼으라.”(민15:8-10)라는 규례대로, 희생 제물을 드릴 때마다 사용하기 위해서 밀가루 한 에바를 준비했습니다. 여호와께 드릴 제사에 쓰일 제물을 준비하되 대충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서 풍성하게 준비했습니다.
여호와께 드릴 제물은 자신이 준비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언제나 최선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넘치도록 풍성해야 합니다. 본문은 “그들이 수소를 잡고 아이를 데리고 엘리에게 가서 한나가 이르되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 나는 여기서 내 주 당신 곁에 서서 여호와께 기도하던 여자라”(삼상1:25-26)라고 이어집니다. “내 주여 당신의 사심으로 맹세하나이다.”라는 표현은, 주로 사무엘과 열왕기 서에서 발견되는 독특한 맹세의 여러 방식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맹세하는 사람이 언급하게 될 고백이 진실하다는 사실을 강조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그대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하게 호소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아들을 받아주기를 바라는 그녀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었습니다. 제물 준비를 마친 그녀는 아들과 함께 실로에 있던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풍성하게 준비한 제물을 여호와께 올려드렸습니다. 대제사장을 찾아갔습니다. 술 취한 듯 간절하게 기도하던 여인이라고 자신을 소개했습니다. 함께 데리고 올라간 아들을 보여주었습니다. 성전에서 자랄 수 있도록 받아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막 젖을 뗀 아들을 맡겨야했던 여인의 마음은 과연 어땠을까요?
드디어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홀가분했을까요? 맡아달라는 말은 과연 청산유수처럼 쉽게 흘러나왔을까요? 맡기기 전부터 눈에 밟히는 아이를 놓고 과연 쉽게 돌아설 수 있었을까요? 굳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달 동안이나 배안에서 키웠습니다. 쉽지 않은 산통을 견디며 낳았습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4년 동안 직접 젖을 먹였습니다. 지극한 정성으로 양육했습니다. 이제 막 겨우 젖을 뗐습니다. 어미의 관성慣性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이에게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여호와께 드린 서원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이제는 내려놓아야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피눈물이 흘렀습니다. 수없이 다짐하고 또 다짐했지만 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미래요 영광이며 자랑인 아이를 포기하고 여호와께 드리겠다고 결단하는 것도 분명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아직은 자신의 돌봄이 더 필요한 어린아이를 실제로 맡기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아이를 향한 당신의 창세전 작정을 이루어주시기 위해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나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나는 사도들 가운데 어느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고전15:10)라는 사도의 고백대로, 여호와께서 결코 과소평가할 수 없는 그녀의 보이지 않던 믿음의 결단이 현실 속에서 실상이 되어 드러날 수 있도록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한 은혜를 넘치도록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은혜가 없이는 누구도 자신의 믿음과 결단을 실제 행동으로 옮길 수 없습니다.
여호와께서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본래의 자신이 될 수 없습니다. 본문은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구하여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나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삼상1:27-28)라고 마무리됩니다. “구하였다.”(1:20), “기도하였다.”(1:27), “드렸다.”(1:28) 등의 표현은 하나의 히브리어 단어אלַש(솨알)의 다른 번역들입니다. 아이에 대한 설명입니다. 아이는 여호와께 기도하여 얻은 아들인 동시에 이미 여호와께 드려진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아이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여호와와 마음이 통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는 관성을 가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어머니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자신의 전부 곧 미래와 영광과 자랑을 여호와께 온전히 맡기는 관성을 가진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여호와와 아들을 위해서라면 피눈물을 흘리면서도 자신의 미래와 영광과 자랑을 기꺼이 포기하는 어머니 모습을 지켜보며 자랐습니다. 백성들에게 “나도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리라. 기도하지 않는 죄를 여호와께 짓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삼상12:23a)라고 약속했습니다.
실제로, 평생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자신의 내일과 영광과 자랑을 기꺼이 내려놓았습니다. 여호와께 온전히 맡겼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과 맡겨주신 백성들을 섬겼습니다.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만을 위하는 관성을 지켜내며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나라와 민족을 패망敗亡의 위기로부터 구원하는 탁월한 지도자로 우뚝 세워주셨습니다. 종교적으로는 성민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지막 사사, 대제사장, 선지자로 우뚝 세워주셨습니다. 정치적으로는 당시의 왕이었던 사울을 대신하는 왕으로 우뚝 세워주셨습니다.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창5:32), “셈은 백 세 곧 홍수 후 이 년에 아르박삿을 낳았다.”(창11:10b)라는 증거에 따르면, 노아는 이미 오백 살이 넘은 상태에서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신만의 독특한 관성을 가지기에는 충분한 나이였습니다. 이는 이미 몸과 마음 깊이 새겨진 관성을 포기하기에는 결코 쉽지 않은 나이였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특히 그는, 여호와께로부터 홍수로 세상을 완전히 쓸어버리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이야기였습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거기다 땅과 그 가운데 호흡하는 모든 것들을 완전히 쓸어버릴 대홍수는, 그가 오백 살이 넘어서 낳은 아들 셈이 98세가 되던 해에 벌어지게 될 일이었습니다. 그의 나이 육백 살이 훌쩍 넘어서야 볼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산꼭대기에 방주를 지어서 그 때를 대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명령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는 것입니까? 마른하늘로부터 세상을 완전히 뒤덮을 만큼의 많은 물이 쏟아지게 된다니요? 그런 일이 정말로 가능하기는 한 것입니까?”라고 반문하며 따질 수밖에 없는 희한한 명령이었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들에 대하여 하나님의 경고를 받고 그분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체 없이 배를 만들어 홍수 때 가족을 구원해 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죄가 있음을 선언하였고 믿음에 의한 의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히11:7)라는 사도의 외침에 따르면, 놀랍게도 그는 여호와를 경외했습니다. 자신의 마음과 몸에 배어있는 관성을 철저히 포기했습니다.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백 년이 넘는 오랜 시간동안, 백성들의 조롱과 비웃음과 멸시를 받으면서 평생 듣도 보도 못했던 홍수를 대비해서 방주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소중한 가족을 구원해 냈습니다. 죄에 찌들어 있는 세상을 정죄했습니다. 홍수로 인해 끊어져버린 세대를 잇는 의의 상속자로 우뚝 섰습니다. 인류의 새로운 조상으로 우뚝 섰습니다. “내가 오늘 너에게 많은 민족과 나라를 다스리며 그들을 뽑고 파괴하고 파멸시키고 넘어뜨리고 건설하며 심는 권한을 주겠다.”(렘1:10)라는 선지자의 증거대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장하고 있던 무지하고 타락한 불신앙적인 관성을 송두리째 뿌리 뽑아버렸습니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파괴해 버렸습니다. 파멸시켜버렸습니다. 다시는 일어설 수 없도록 고꾸라뜨려 버렸습니다.
그들이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던 가치 판단의 기준들과 우선순위 역시 완전히 뒤집어 엎어버렸습니다. 동시에 그를 통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경외하고 또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섬기는 새로운 믿음의 공동체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저와 여러분 안에는 태어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관성이 자리를 잡았습니다. 무려 오백년 동안에 걸쳐서 형성된 노아의 관성에 비하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포기하기 또한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아니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반드시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어떤 관성을 갖느냐의 여부에 따라서 저와 여러분의 삶이 결정된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무수히 많은 고난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여호와를 찾는 관성을 가졌습니다. 그의 삶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푸른 풀밭에 누워 놀게 하시고 물가로 이끌어 쉬게 하시니 지쳤던 몸에 생기가 넘친다.”(시23:1-3a), “한평생 은혜와 복에 겨워 사는 이 몸, 영원히 주의 집에 거하리라.”(시23:6)라고 고백할 수 있는, 크고 놀라운 은혜로 채워졌습니다. 그를 미워하여 죽이려고 안달했었던 사울은 달랐습니다.
더욱 더 여호와를 찾고 의지해야 하는 위기의 순간 여호와를 붙잡기는커녕 오히려 놓아버리는 불신앙적인 관성을 드러냈습니다. 그의 삶은 사랑하는 아들은 물론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불행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YWAM의 남미 책임자인 그Alejandro Rodriguez는 “한계 너머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자신의 책을 통해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소금이 아니라 교회의 설탕처럼 이 시대를 살고 있다. 교회 울타리 안에서는 몸집 큰 사자처럼 용맹과 담대함을 자랑하고 있지만 울타리를 벗어나는 순간 곧바로 조그만 강아지로 변해 버린다.”라고 고발했습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빛과 소금이라는 위대한 사명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고발했습니다. 모험과 고난이 기다리는 현장으로 나가려 하기보다는 본성적으로 내적 평안과 만족과 즐거움을 누리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아직 경험해 보지 못한 하나님의 신비한 축복으로 채워져 있는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려고 하기보다는 얼마든지 예측 가능한 현재의 안정된 삶을 계속 유지하려는 욕구가 너무나 강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익숙한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있고 싶은 영적 관성 법칙 때문입니다.
그 결과 세상을 향해서 우렁차게 포효咆哮하는 위대한 사자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입 한 번 제대로 뻥끗하지 못하는 하룻강아지처럼 초라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따르겠다고 작정한 사람들을 향해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매일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한다.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목숨을 잃거나 망해 버린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눅9:23b-2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민하고 슬퍼 하사...내 마음이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7b-39)라는 말씀에 따르면,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는 육신의 관성으로 인해 초죽음이 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당신과 함께 깨어 있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께는 당신에게 주어진 잔을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해달라고 세 번씩이나 간구하셨습니다.
마침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관성을 물리치셨습니다. 당신을 향한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기를 구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단번에 (당신의) 몸을 바치셨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게 되었습니다.”(히10:10)라는 사도의 외침대로, 당신의 거룩한 몸을 희생 제물로 단번에 바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곧 저와 여러분의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예를 통해 자신을 향한 여호와의 창세전 작정을 어떻게 해서든지 대적하는 타락한 관성을 깨뜨리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되어서 적당한 환경과 조건이 마련되기만 하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언제든지 튀어나오는 타락한 관성 곧 삶의 자세와 습관을 내려놓을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죽을 만큼 힘들지라도 자신의 관성과는 전혀 다른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자신만을 위해서 창세전부터 예비 되어 있었던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맛볼 수 있을 뿐 아니라 여호와의 뜻을 대적하는 타락한 세상의 불신앙적인 관성을 여지없이 뽑아내고 파괴하며 파멸시키고 또 고꾸라뜨리는 것은 물론 오직 여호와 한 분만 경외하고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극진히 섬기는 새로운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