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바람나고 싶다!”
새봄을 맞은 대학로 거리에서 칠순의 여배우가 마치 연극 대사처럼 말했다.
튀는 젊음들, 연녹색 생명이 두런거리고 벚꽃이 하늘거리는 황홀한 계절에 바치는 배우다운 헌사였다.
단발머리에 블루 톤 원피스와 레깅스, 상큼한 로퍼슈즈로 멋을 낸 연극배우 손숙(72)은 금방이라도 로맨스에 빠질 듯 감성 충만 열정 충만, 그렇게 환하게 웃으며 영화 <귀향>으로부터 돌아왔다.
취재 박미경 리포터 miso4555@naeil.com 사진 전호성
편집부가 독자에게 ...
젊음보다 멋진 노배우의 소신
올해 오스카상 시상식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디캐프리오의 수상 소감은 특별했습니다. 지구온난화를 비롯한 지구 생태계 위기에 대한 소신은 환경운동가나 생태학자의 연설이 아니었기에 더 감동적이고 파급효과도 컸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저런 배우 하나쯤 있다면 하는 부러움이 있었지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시나리오를 읽고 죄스러움에 펑펑 울었다는 배우 손숙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노 개런티 출연으로 영화 <귀향>을 더 의미있게 만든 그는 배우로서 사회문제, 환경문제에 관한 소신 발언을 해왔습니다. 젊음보다 빛나는 노년의 배우가 우리 곁에도 있었습니다.
_박미경 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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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사람만이 역사를 바꾼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소녀의 실화를 그린 영화 <귀향>이 우리 사회에 미친 울림은 컸다. 머리로만 알고 있던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실상을 가슴으로 받아들였고 그들의 아픈 영혼에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통감하게 된 것. 무엇보다 이 영화를 만들기 위해 14년을 고군분투한 조정래 감독과 7만여 명이 넘는 시민 후원자가 보여준 감동도 있었다. 또한 주인공 영옥의 노역(老役)으로 분한 배우 손숙의 노 개런티 출연 역시 많은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배우로서의 사회적 사명감을 보여주셨다. 거창하게 사명감이라기보다 배우가 세상이 나아지도록 기여할 수 있다면 그건 작품을 통해서라고 생각한다. 무작정 받아 든 시나리오를 보고 눈물을 흘렸던 건 처음이었다. 해방이 20년만 늦어졌어도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방치했다는 죄스러움이 출연을 결심하게 했다.
<귀향> 제작과 상영까지를 기적이라고 표현하셨다. 미친 사람이 없으면 역사도 가려진다는 걸 알았다. 조정래 감독은 미쳤었다. 부부가 영화를 위해 14년 동안 아이도 갖지 않았다. 6천만 원 전세금만 남겨 양수리로 들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화 안 될 거라는 소리만 들었다. 한·일 협상 시기와 맞물려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루머까지 돌았지만 7만 여 명의 후원자들을 위한 시사회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이 입소문과 SNS를 탔고 미국 상원의원의 초청을 받으면서 국내에서도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한·일협상이 오히려 영화에 불을 지폈고 예매율 1위에 오르는 기적이 일어났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영혼이 도와주신 거라 굳게 믿는다.
자녀들과 <귀향>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을까? 불편한 영화지만 불편하기 때문에 더 보아야 하고 아이들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영화는 인권의 문제, 전쟁이 인간을 얼마나 황폐하게 만드는 가에 대해 말하고 있다. 관람객 중에 초등 6학년인데 영화를 세 번 봤다는 아이도 있었다. 자신의 또래가 겪은 참상이기에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고 하더라. “역사에 신이 있다” 고 말씀하신 고대 재학 시절 김준엽 총장님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역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부모의 균형 잡힌 지도가 꼭 필요하다.
내가 만난 무대의 여인들이 바로 ‘나’
인생을 연극 7막 7장에 비유하기도 한다. 52년이란 세월을 배우로 살아온 그녀의 삶 역시 희로애락과 애증, 복병과의 투쟁이었다. 그녀는 경남 밀양의 안동 손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열여섯에 시집와 자식 셋을 낳았고, 아버지는 가족을 돌보지 않은 채 거의 평생을 일본에서 지냈다. 사춘기 무렵의 그녀에게 “아버지는 미칠 것 같은 증오의 대상”이었다. 손숙이 연기했던 ‘그녀들’ 또한 상처 입고 운명에 휘둘리며 고통 받던 순탄치 못한 인생의 주인공들이었다. 그동안 출연한 150여 편의 연극들 <어머니>, <셜리 발렌타인>, <위기의 여자>, <굿나잇 마더>를 비롯해 최근에 공연하는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 등의 수많은 그녀들은 결국 손숙 자신인 동시에 우리들의 자화상인지도 모른다.
운명이 되어버린 연극배우의 삶을 예측하셨나? 어릴 때의 꿈이 버스 차장이었다.(웃음) 가족을 외면하고 신여성과 살림을 차린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가 어디론가 떠나고픈 열망으로 싹튼 것 같다. 엄마 따라 국극을 보러 가서 막 사이로 구두가 보일 때면 그 안의 세계가 궁금해 가슴이 벌렁벌렁했고, 서커스가 들어와 트럼펫이 울릴 때마다 두근거리던 어린 가슴은 아마도 운명이었을 것이다.
여성으로 살아온 삶을 돌아보는 감회는 어떠신가? 어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대학 재학 중에 연극반 선배와 결행했던 결혼이 몇 해 안 가서 뿌리째 흔들렸다. 남편의 사업 실패와 빚더미, 복병처럼 몰려온 가난이 세상의 한복판으로 나를 밀어냈다. 그때부터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연극과 방송에 몰입하는 것뿐이었다. 나를 닮은 숱한 ‘그녀들’을 열연하면서 속으로 울고 또 울었다. <여성시대> 등 라디오 방송을 하면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도 생겼다. 결과적으로 행복한 가정을 잃은 대신 배우로서의 삶을 되찾았다.
출연하신 연극들이 대부분 페미니즘과 연관된다. 그간의 변천을 어떻게 보시나? 연극은 사회와 같이 가는 것이다. 영향력도 크다. 80년대만 해도 여성 인권 자체가 무시되었다. 가정 폭력, 고부 갈등, 성폭력의 장벽 앞에서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도망가거나 견디는 것뿐이었다. 요즘에는 남성들이 오히려 역차별을 호소할 정도로 페미니즘의 엄청난 변화를 실감한다. 여성들도 홀로 서기에 당당하고 자기 성취에 올인 한다. 젠더로서의 성 역할이 강화되었다고 본다.
연극 등 문화 예술이 한 나라의 수준을 가늠하는 척도라고 할 때 우리나라는 어디쯤 와 있다고 보나? 국민 수준은 높아졌지만 정치인들의 문화 의식은 거의 빵점이다. 문화적으로 후퇴한 느낌이다. 국회의원 비례대표 선출도 여·야를 불문하고 문화계는 한 자리도 없다. 문화융성위원회를 만들어 놓고도 유명무실하다. 예술은 인공지능 알파고가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분야다. 앞으로 문화정책에 적극적인 지원과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엄마, 왜 다른 엄마들하고 똑같아?
가치관이 혼재하고 가족 공동체 의식마저 희미해져 가는 시대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이름, 구원처럼 떠오르는 이름이 있다면 ‘어머니’일 것이다. 배우 손숙의 대표작 연극 <어머니>는 16년째 공연을 해오며 우리 시대 어머니의 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4월 9일부터 세 번째 무대에 올리는 <아버지와 나와 홍매와>도 간암 말기의 아버지를 돌보는 가족의 이야기를 풀어내며 가족의 존재와 가치에 대해 질문한다.
무대를 통해 가족, 어머니로 살아가는 의미를 어떻게 보는가? 가족 내에서 엄마로서의 희생과 헌신은 아름답고 소중한 일이지만, 일방적이고 지나친 희생은 원망이나 서러움, 집착으로 이어지기 쉽다. 너무 잘하려 하고, 주변과 비교하고, 지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괴롭히면 가족에게도 자신에게도 불행한 일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엄마로서 자존감을 찾고 자신을 사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시간과 좋아하는 일을 갖는 것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기본자세다.
자녀 교육에 어떤 원칙을 뒀나? 어떤 것이 옳은 교육인지 잘 모르겠다. 세 딸을 키우는 동안 숙제해라, 공부해라, 학원가라, 잔소리하지는 않았다. 다정한 엄마도 아니었다. 하고 싶다면 하게하고 싫다면 관두게 했다.
하루는 고3 딸이 걱정돼 과외를 권유했더니 “엄마, 왜 다른 엄마들하고 똑같아?” 하고 반항하더라. 그래서 안 시켰는데 알아서 제 갈 길 다 잘 갔다. 딸들은 엄마가 성공한 배우라서, 유명한 누구라서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한 사람으로 지켜봤고, 그것을 인정하기에 엄마를 자랑스러워한다.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도 아이들의 성장에 큰 양분이 될 수 있다.
요즘 엄마들에게 조언을 한다면? 아이들이 태어나서 결혼할 때까지 엄마의 간섭과 틀 안에 갇혀 있다. 이렇게 자란 자녀에게 무엇을 기대하겠나? 생각도 많이 하고 몸도 많이 움직이며 잘 노는 아이로 키워야 한다. 무엇보다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아이로 키워 달라.
우리 시대의 수많은 어머니와 여성의 삶을 몸으로, 눈빛으로 연기해온 배우 손숙의 얼굴은 새로운 인생의 목표를 갖게 한다. 그녀의 뒷모습에서 청춘보다 빛나는, 노년의 아름다운 관록을 보았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