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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남의진 기념비 (경북 영천시 창구동 영천문화원 내)
산남의진(山南義陣) 발상지 立巖
竹長은 한말 풍전등화 같은 국가의 위기에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분연히 일어나 일제침략자와 맞서 싸운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고장이다. 소위 산남의진발상지(山南義陣發祥地)이다. 입암리 죽장고등학교 뒷편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산남의진발상기념비가 역사적 사실을 묵묵히 대변하고 있다.
산남의진이란 영천 자양면 출신의 정용기에 의해 처음 결성된 후 흥해 출신의 최세윤으로 이어지면서 포항, 즉 옛 영일군 일대를 중심으로 거센 항쟁의 횃불을 들었던 구한말 제2단계 의병운동을 대표하는 의병조직이다. 산남(山南)이라 함은 문경새재 즉, 조령 이남의 영남지방을 이르고, 의진(義陣)이라 함은 '의병진영'을 줄여 일컫는 말이다.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기개 있는 선비와 우국지사들은 분하고 억울함을 참지 못하여 다투어 의병을 조직하고 더러는 자결하기도 하는 시국상황이 전개되던 무렵에 당시 시찰사 정환직이 고종 황제로부터 "경이 화천지수를 아는가?(朕望華泉之水知呼)"라는 밀지(密旨)를 받게 되었다. 이는 제나라 환공(桓公)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로서, 일본으로부터 나라를 되찾는 데 힘써 달라는 황제의 간곡한 당부가 담겨있는 것이었다.
이에 정환직은 사직한 후 아들 정용기와 함께 논의한 끝에, 아버지 정환직은 서울에서 군사를 모집, 가산을 정리하여 각종 무기를 마련하고, 특히 인천의 중국 상인들을 통하여 신식무기를 몰래 들여와 이를 석 달 후까지 강릉으로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아들 정용기는 고향인 영천에서 의병을 규합, 강릉으로 북상하되, 대구, 대전을 거치게 되면 반드시 왜병들의 강한 저항이 있을 것이므로 동해안을 따라 올라가기로 하고, 도중에 이미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는 영덕의 신돌석 의진과도 합세하기로 했다.
이런 작전계획들을 수립한 후 정용기는 즉시 영천으로 내려와 평소에 뜻을 같이 하던 친구인 이한구, 정순기 등과 함께 인근 각처의 선비와 유림들에게 격문을 보내 의병을 규합하니, 순식간에 3천여 명이 모여들었다. 이 무렵이 바로 광무 10년(1906) 2월이었는데, 대장에는 정용기가 추대되고, 군호를 산남의진으로 칭했다.
1907년 8월 영덕군 달산면 팔각산 부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본군들과 산남의진은 격전이 벌어졌다. 밀고 밀리는 공방전을 사흘간 계속하다가 일단 후퇴한 산남의진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겨울 채비를 한 후 9월 10일까지 재집결토록 하였다.
마침 영천 수비대 소속의 일본군들이 죽장 창리에 들어왔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용기 대장은 이세기, 우재용, 김일언 등 세 장령에게 각기 군사를 나누어 매복한 후 새벽에 적을 급습키로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작전에 옮기기 위해 광천(廣川)으로 가던 이세기의 의병들은 북구 죽장면 입암리 주막에서 소수의 일본군들이 식사를 하는 것을 탐지하고, 일본군이 극소수라는 판단 하에 주막을 덮쳤으나, 주변에 매복해 있던 많은 무리의 적들에 의해 포위되고 말았다. 이에 다른 매복지로 가고 있던 정용기,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이 지원에 나섰으나 예상외로 많은 일본군 병력과 5시간의 접전 끝에 산남의진은 결국 패하고 말았다. 1907년 9월 1일에 벌어진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를 위시하여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40여 명의 의병이 일시에 순국하였으니, 이 전투를 산남의진 입암지변(立巖之變)이라 하고, 흔히 임암전투라 부른다. 이 날 전투로 산남의진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죽장면 입암리 일대의 가옥 수십 동이 불타고, 양민 수십 명이 학살당하는 등 패전의 참화가 극심하였다. 죽장에 이 날을 전후하여 제사 든 집이 많은 이유가 여기 있다.
영천시 자양면 검단리 본가에 머물러 있던 정환직이 이튿날 비보를 접하고 입암의 격전지로 달려가 시체들을 수습한 후 의진을 재결성하여 그해 9월 27일 정환직이 2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 해 10월에는 곳곳에서 일본군의 주둔지를 급습해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니, 포항지역의 모든 일본군과 일본인들이 산남의진을 크게 두려워했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사정은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부족한 군량미에 날씨마저 추워진데다 산남의진의 기세에 놀란 일군이 병력을 증강시켜 더는 지탱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에 정환직 대장은 일단 의진을 해산하고 때를 기다리기로 결정한 뒤 적의 형세를 살피기 위해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청하에 잠입하였다. 하지만 내연산 깊숙한 곳에서 정환직은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영천감옥에 수감된 지 얼마 안 되어 두 부하와 함께 총살을 당하였다.
2대 정환직 대장의 순국 이후 산남의진의 7백여 병력은 정환직의 조카이자 흥해 사람이었던 정순기의 지휘 아래 청송군 보현산 산악지대로 이동했다. 그 후 정순기는 봄이 오리를 기다렸다가 평소 정환직과 가까이 지내던 포항시 북구 흥해읍 곡강리 출신 최세윤에게 사람을 보내 산남의진의 지휘를 간곡히 부탁하였고, 최세윤이 이를 수락함으로써 1908년 3월 5일, 최세윤이 제3대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최세윤 대장은 전체 의병을 4개 대대로 편성하고 게릴라 전술을 감행하여 흥해, 영양, 진보, 안동 등에서 크고 작은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이 무렵에 와서 포항지역이 산남의진의 주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하지만 1908년 7월, 옛 장기 내남면(현 경주시 양북면)에서 최세윤 대장이 체포된다. 최세윤 대장은 대구로 압송되어 3년에 걸친 고문과 회유를 견뎌내고, 1911년 11월 10년형을 언도받는다. 이후 최세윤 대장은 서울 서대문 형무소로 이감되어 8년간의 옥고를 겪다가 1916년 8월 9일, 11일간의 단식 끝에 순국했다.
최세윤 대장을 잃으면서 산남의진은 구심력을 잃고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이 땅에서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 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성스러운 뜻을 품은 지 4년여 만인 1909년, 그 의로운 횃불을 민족의 가슴 속에 밝혀 놓은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 자료는 『포항문학』32호(포항문인협회, 2009) <포항 속의 포항-죽장>에서 발췌했습니다.
◆ 산남의진, 영천출신 47명 있었다
광복절은 1945년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된 것을 기념하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날이다. 특히 2015년은 광복을 맞은지 70주년이 되는 해로 국가와 민간이 함께 광복70주년기념사업위원회를 조직하고 ‘위대한 여정 새로운 도약’이라는 주제로 각지에 태극기 게양운동을 펼치는 등 다양한 사업들을 이어간 해였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본지에서도 1906년 3월 조직된 영천의 대표적인 항일의병부대인 산남의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영천의 독립운동사 참조)
◆ 의병운동의 시작
1905년 을사늑약 이후 반일 감정은 극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의병이 봉기했다. 대표적인 의병 부대는 경기도와 강원도의 원용팔ㆍ정운경ㆍ박장호 등의 부대, 경상도의 김도현ㆍ유시연ㆍ신돌석 등의 부대와 정환직ㆍ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충청도의 홍주 의병, 전라도의 최익현ㆍ백낙구ㆍ고광순 등의 부대, 그리고 양서 지역의 우동선ㆍ전덕원의 부대가 있었다.
◆ 산남의진 창의
산남의진이 시작된 것은 당시 중추원의 의관(의술에 종사하던 벼슬)이었던 자양면 검단리 출신 정환직이 고종 황제로부터 짐망화천지수(朕望華泉之水)라고 적힌 밀지를 받게 되면서 부터다. 고종은 제나라 환공을 적의 추격에서 탈출시킨 봉추부의 고사 ‘짐망화천지수’라는 글을 정환직에게 보내 나라를 되찾는데 힘써달라는 당부를 했다.
이에 정환직이 관직에서 물러나 의병을 조직하고 아들인 정용기에게는 고향에 내려가 가문을 지켜달라고 당부하지만 정용기는 62세인 아버지를 대신해 자신이 직접 의병을 창의하겠노라고 말하고 1906년 3월 고향인 영천에서 이한구, 손영각 등과 3000명의 의병을 규합해 산남의진이라는 부대를 결성했다.
◆ 정용기 대장의 전사
초기에 정용기가 영해 지방의 신돌석 의병부대를 후원하고자 북으로 진군하던 중, 경주 우각에서 신석호의 간계로 체포되기도 하지만 석방되어 영천, 경주, 청하, 청송 등지에서 일병기지를 습격해 크고 작은 전과를 올렸다.
하지만 1907년 9월 1일 영일군 죽장면 입암리 주막에서 식사하는 일병들을 급습했다가 주변에 매복해 있던 영천수비대에 포위돼 정용기와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 의병 40여명이 전사했다. `산남의진 입암지변으로 명명된 이날의 비극은 민가 수십채를 방화하고 수십명의 양민들을 학살한 침탈로 이어져 의병전쟁사에서 최초의 민간인 참화로 기록되고 있다.
◆ 정환직 대장의 순국
그 후 64세의 정환직이 아들을 대신하여 대장이 되어 군사를 모집하고 진영을 재편성 하였고 의병진을 이끌며 흥해분파소를 습격하고 청하를 공격하는 등 보현산 일대와 영일의 동대산 일대를 중심으로 영천, 영덕 일원에서 의병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경찰병력이 보강된 일본군의 추격과 식량의 부족으로 해산하게 되었고, 대장 정환직은 1907년 12월 청하에서 체포되고 말았다. 이세기 등 장병들이 구출작전을 전개하기도 했지만 실패했고 12월 17일 정환직은 대구로 이송되던 중 도주를 기도하였다는 이유로 영천의 남쪽 교외에서 총살 당해 순국했다.
◆ 최세윤 대장의 체포와 산남의진의 해체
최세윤이 본대가 머물고 있던 거동사에서 다시 의병을 규합하여 대장에 취임한 후 산남의진은 산악지대를 중심으로 1908년 8월 말까지 유격활동을 하며 일본군과 유격전을 펼치는 등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최세윤이 경주 양북면 용동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자 산남의진은 구심점을 잃고 해체되기에 이르렀다. 최세윤은 대구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중 단식투쟁 끝에 순국했다.
◆ 산남의진 참가 의병
산남의진에 모인 장병의 수는 ‘산남창의지’와 ‘산남의진유사’의 기록이 다른데 ‘산남창의지’에는 201명, ‘산남의진유사’에는 244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중 영천출신은 47명이다. 주로 산남의진 의병대장이던 정용기와 그의 아버지 정환직을 중심으로 그들의 일족 및 지역인들이 다수 참여했다. 주로 전직관료, 지방유생, 해산군인, 포수, 농민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직접 전투에 참가한 의병과 물적으로 후원하는 각지의 부호로 구분할 수 있다.
◆ 산남의진의 의의
산남의진은 영남 지방을 대표하는 대규모의 의병부대로 인근 지역의 신돌석 의병부대와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고, 1907년 말부터 1908년 초까지 전개된 십삼도창의대진소의 서울진공작전에 참여하기 위해 북상을 준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산남의진의 구성인물들은 영남지방을 총 망라할 만큼 광범위하고 활동범위도 경상도 중북부 전역에 걸쳐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항쟁 기간도 3년 이상의 장기적 대일 항쟁을 수행했다. 따라서 한말 의병투쟁의 전개 과정에서 차지하는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 『영천의 독립운동사』 공저자
조인호 교장 인터뷰
“산남의진 활동이 오랜기간 동안 이어졌지만 대장들의 순국 등으로 치열한 양상을 띠지 못하고 와해되고 말았다. 하지만 서울진공작전에 단서를 제공했다는 면에서 큰 의미가 있으며 그것이 산남의진의 가장 큰 의병사적 의의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산남의진에 관한 학술적 재조명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현재 산남의진의 학술 연구가 상당히 미흡한 상태다. 정상적인 학위 논문이 전국에 하나밖에 없고 그 논문마저도 중앙에서 연구하다 보니 영천지역의 편재가 정확하게 기재되어 있지 않고 지역성을 정확하게 판단하지 못해 생긴 오기 부분이 있다. 산남의진과 관련된 학술서를 내는 것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몸은 죽어도 마음은 변치 않으리 의리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구나”
-정환직, 〈임종시〉 에서
나라에 목숨을 바친 父子를 돌아보다
약 30여 년 전부터 산남의진과 兩世義兵長에 대해 연구해 온 권영배 교수가 의병장 정환직·정용기 부자에 대한 최초의 평전을 펴냈다. 지금까지 이들만을 총체적으로 고찰한 연구는 거의 없었으며, 아버지와 아들 2대에 걸친 의병장임을 일컫는 ‘양세(兩世)의병장’이라는 호칭조차 일반 대중에게는 낯설게 다가오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 창의(倡義)가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아 이루어졌으며, 이들이 이끌었던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영남 지역을 대표하는 의병부대였다는 점에서 그 활약상을 조명하는 일은 의병사 연구에서 필수일 것이다. 이에 지은이는 사료로써 정환직·정용기뿐만 아니라 정 부자 사후 산남의진을 이끈 정환직의 후계자 최세윤의 삶과 투쟁을 생생하게 복원해 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인물총서 열다섯 번째 책으로 출간됨으로써 우리 독립운동사의 또 다른 위인을 본격적으로 추적·발굴해 냈다는 점이 뜻깊다.
양세의병장의 활약에 담긴 선조의 정신
지은이는 ‘충절’과 ‘의기’라는 양세의병장의 곧은 신념의 뿌리를 영일정씨 가문의 풍토에서 찾아낸다. 고려 충신 형양공 정습명, 포은 정몽주부터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친 강의공 정세아와 그 아들 정의번 등, 시대를 관통하는 충직의 가풍 아래 성장한 것이 이들의 행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 결과 양세의병장은 위로 임금을 섬기면서 시국 극복 방안을 제시하며 역적·매국노를 규탄하는 데 앞장서고, 아래로는 민심을 살피고 앞장서서 독려하여 기울어 가는 나라를 일으키고자 힘쓸 수 있었다. 우리 민족과 나라의 존립에 대한 이 같은 염원은 양세의병장의 여러 일화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정환직은 삼남도찰사 겸 토포사로서 곳곳을 시찰하면서 백정과 같은 천민의 목소리에까지 귀를 기울였고, 정용기는 의병 모집에 앞서 먼저 민심을 안정시키고자 애썼다.
華泉之水의 유래 : 죽음을 무릅쓰고 받든 ‘화천의 물’
나라에 대한 양세의병장의 강직한 충성심은 정환직이 고종 황제로부터 직접 밀명을 받는 순간 단적으로 표출된다. 바로 “경이 ‘화천의 물’을 아느냐”는 고종의 한마디였다. 화천의 물, 곧 ‘화천지수(華泉之水)’는 주군과 옷을 바꾸어 입고 화천에서 물을 떠 오라고 시킴으로써 위기 상황에서 주군을 탈출시키고 대신 죽은 중국 제나라 경공의 호위장군 봉축보에 얽힌 일화를 일컫는다. 일제의 엄중한 감시로 직접 나설 수 없었던 고종이 중국 고사를 인용하여, 가장 믿을 수 있었던 신하에게 나라를 구하라고 명한 것이다.
정환직은 자신이 봉축보와 같이 끝내 죽을 것을 알면서도 밀지를 받자마자 사직하고 창의를 준비했다. 정용기는 자신이 의병을 모집하러 내려가겠다고 간청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냈다. 당시 일제는 대규모 병력과 신식 무기를 총동원하여 의병 전면 토벌에 나섰고, 셀 수 없이 많은 의병들이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듯 죽어 나갔다.
첫댓글 山南義陳에 대하여 상세하게 아리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역시 아우님은 문중의 보배로다.
山南義陳에 대한 내력을 잘 알려주어 모든 자료를 잘 보았습니다.
우리문중과 어떤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되어 문의 했던 것인데
아쉽게도 관련된 사건은 찾지 못하여 약간 서운 했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 주시어 궁금했던 사항을 잘 알게되었습니다.
정말 감사 합니다.
山南義陳과 우리문중과의 관련은 '求敏 3家' 東峯 11代孫, 31世孫 大震 (字 敬朝, 號 松厓) 할아버지께서
山南義陳 中軍將으로 참전하시어 조국광복에 진력하시다 전사하신것이 밝혀져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이 追敍되었으며
19 07 년 丁未年에 입암전투에서 일본군의 보복으로 입암은 永慕堂을 비롯한 많은 집이 불타는 큰 피해를 보아
입암사람들은 이를두고 "丁未年 난리"라고 합니다.
영훈님, 옛날에 영모당이 불탄 사건 이야기를 들은적 있었으나
관련된 인적사항까지 올려주시어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건국공로훈장 애국장에 추서 되었다니 정말 반가운 일이나
난리중에 전사 하셨다니 너무 애통 합니다.
문중의 역사를 알게되어서 감사드립니다.
역사 자료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