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의 품에 안겨
울산바위 "돌잔치 길"에 들다
누구나 생각없이 사는 사람 없겠지만
이 작은 몸에 생각할 일이 무에 그리 많은지
온갖 상념이 나를 산으로 가게 만든다.
산에 가면
꽃이며 산새며 작은 나무 한 그루에도
이름 없는 것은 없다
바위와 계곡 하나에도 이름이 있고
그 모양대로의 철학이 담겨 있다.
[운무에 잠긴 외설악]
소설가 신경숙은
'우리 나무 백가지를 알게 되면 친구 100사람을 아는 것과 같고
식물의 의사소통을 알게 되면
커다란 마당 하나 갖게 되는 것과 같다' 고 하였다.
자연은 유구하며 또한 위대하니
산과 바다, 하늘과 땅.. 무엇 하나 사소로운 게 없다.
그런 자연을 따르다 보니
의미없이 살고 그렇게 유지되어지는줄로만 알았던 자연은
그 모양과 생김새에 따라 오묘한 의미와 진실이 담겨 있음을
어느새 믿고 의지하게 된다
꿈에 잠기듯 숲에 머물고 방황 하듯 여행을 즐기며
옛 선비의 행적을 따라 길을 떠나보지만
내 작은 가슴에 크게 둥지 튼 바위와의 인연은 늘 나를 산으로 부른다.
그런 바위는 메마르고 탁해진 요즘 내 일상에,
촉촉히 물 뿌려주는 단비와 같다.
[울산바위에서 바라본 운무 서린 노적봉과 권금성 일대]
새벽 4시.
암흑의 설악동은 모든 것을 감추고 숲도 피곤한 듯 잠시 잠들어 있다
장비를 갖추고 헤드랜턴에 의지한채 바위찾아 오르는 외설악 한자락은
대원들의 둔탁한 발자욱소리와 거친 호흡소리가 정적을 깬다
잠시 흔들바위가 있는 계조암 샘터에서 목을 축이고
뒤쳐진 대원들과 합류하여 또다시 울산바위를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제법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430계단을 오르면 울산암 전망대에 이른다
이 전망대는 권금성 케이블카와 함께 설악산을 찾는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번 탐승해보기를 염원하는 대상지이리라.
때문에 평소 등산경험이 없는 이라도 이 울산암 탐승길에 나서곤 하지만,
그리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은 아니다.
[동해의 검푸른 물결을 헤치고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
잠시 머무르니 여명(黎明)이 밝아 온다.
동해의 검푸른 물결을 헤치고 장엄하게 떠오르는 태양이 장관을 이루는
설악의 동북부 울산바위전망대..
태양은 어둠을 종식시키려는 듯 순식간에 떠밀어 내고
감추었던 산하를 일시에 보여준다
찬란한 태양, 그 눈부심에 먼저 보이는 게 울산암이었다.
기라성처럼 길게 이어진 저 우람한 곡선미.
그것은 아이보리빛 화강암의 거대한 꽃송이였다.
그 웅장함을 바라보려니
울창한 밀림을 일시에 삼켜버린 캘리포니아 남부의 악령같은 산불처럼
울산암도 자신을 태우려는 듯
진홍빛으로 물들어가는 모습이 상서롭다
동쪽을 바라보면 광활한 학사평 벌판 저멀리 동해의 푸른 물빛이 눈에 들고
남쪽을 바라보니 공룡능선에서 대청봉을 경유 화채능선 줄기와
그 능선에서 날카롭게 내리뻗은 암릉의 침봉들이
거세게 밀려오는 듯 느껴진다
[설악산 소청봉 주변의 단풍]
단일 암봉으로서는 남한 제일의 암괴를 자랑하는 설악산 울산암..
시인 "장호"님은
"길이 끝난데서 등산은 시작되고
언어가 끝난데서 시가 비롯된다"고 했고
"알피니스트 예지 쿠쿠츠카"는
"긴 세월을 평범하게 살며 얻는 것보다,
저 높은 곳에선 단시일에도 더 많은 것을 체험할 수 있다"고 고백했으니,
번잡한 토요일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울산바위와 조우해
그걸 조금이나마 느껴보고 싶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울산바위(蔚山岩)]
울산바위는 설악산 동북쪽에 동서로 걸쳐있는 수직 암릉으로
설악의 풍경을 한층 돋보이게 하는 해발 780m에 길이 2km에 달하는
약 32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진 거대한 화강암 바위 덩어리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조물주가 하늘 아래 가장 아름다운 산인 금강산을 만들기 위하여
전국의 명산과 바위들을 모집할 때,
울산(鬱山)을 대표하는 바위가 이에 참가하고자 먼길을 떠나 왔으나
거대한 몸집으로 인해 그 시기를 놓쳐 고향으로 돌아가던중
설악의 풍경에 반해 이 자리에 눌러 앉아 있어
'울산(鬱山)바위'라 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양양부 북쪽 63리,
청초호 서쪽에 있는 큰령 동쪽 가닥으로 기이한 봉우리가 구불구불 하여
마치 울타리를 설치한 것 같다고 하여 울산이라 이름하였으나
항간에서는 울산(蔚山)이라고도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신흥사의 '신흥사지'엔 울산(鬱山),
즉 '우는 산’이라는 뜻의 우리말을 한자화 한 것으로,
비가 내리고 천둥이 칠때면 바위 전체가 천둥소리에 울리어
마치 산이 울고 하늘이 으르렁거리는 것 같아 '울산(鬱山)바위'라 했으며
일명 '천후산(天吼山)’이라고도 하였다는 기록이 실려 있다.
[넘어서도 넘어서도 또 다시 나타나는 바위 봉우리]
울산암 "돌잔치 길"은 제법 난이도가 있다
한가닥 로프에 몸을 맡기고 힘겹게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해가며
인생같은 바위길을 섭렵해 나간다
그러면서 자연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다
숨이 턱에 차오는 체력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한 피치 한 피치 전진하다보면
이제는 다 왔을 것 같았던 바위 봉우리는
끈질기게도 또 다른 봉우리가 나타나 기다림과 인내심을 배우게 하고
피가 역류하는 듯 거친 숨소리는 나의 정신과 심장을 튼튼하게 한다
봉우리에 오르면 산 전체의 모습을 한 눈에 바라볼 수 있어 좋다
탁트인 시야로 근육질 남성같은 설악산 고령 준봉들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전진하는 리지등반의 매력은
볼더링이나 암벽등반에서 느낄 수 없는 희열과 감동을 선사한다
정상을 향해 뻗어오른 능선과 그 사이를 흘러내리는 계곡
건너편 능선에서 뿜어오는 신선한 기운을 받으며
고도를 높여가면서 넓어지는 시야만큼 마음 또한 넉넉해 짐을 느낀다.
[운무에 휩싸인 그림같은 울산바위]
미지의 세계를 동경하는 인간의 본능
일련의 규칙속에서 정신적 육체적 행위로 자연을 극복해 나갈때
터득하게 되는 우리네 인생같은 삶과
그것을 성취했을때 얻어지는 말할 수 없는 희열..
이런 느낌, 이런 매력 때문에
많은 이들이 리지등반에 빠져 드는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의 선인은 이렇게 말했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고....
그러니
오만과 자만을 모두 버리게 하여준 그대 바위여,
겸손 하라며 매섭게 생채기를 주던 그대 돌덩이여,
인고의 세월속에서 초연히 자리를 지키던 암릉이여,
거칠지만 아름다움과 위대함을 겸비한 그대 암반이여,
그저 사랑하고 볼 일이다.
[계조암에서 바라본 울산바위]
어느덧 울산바위 한복판에 이르렇고
약 30미터의 하강코스를 내려서는데 멀리 산자락엔
외설악을 휘돌아 진부령을 넘는 차량 행렬이 까마득히 보여 아름답다.
녹슬어 조금 불안한 하켄이지만,
수차례 당겨 본 시도끝에 하강 하기로 한다.
바람이 강하게 불지만 바위 아래로 로프를 던지고
한 마리 새처럼 암벽 밑으로 몸을 날린다.
[통돼지 바베큐처럼 로프에 매달려 건너야 하는 티롤라인브릿지 구간]
티롤라인브릿지 구간이다.
협곡이기에 밑에서 치어 오르는 바람이 제법 매섭다
내려다보면 까마득한 직벽의 고도감에 섬뜩함을 느낀다
암벽은 자연이 허락하여야만 가능하다.
작년 이맘 때, 몸을 가눌 수 조차 없는 매서운 강풍으로
이 지점에서 전진을 포기해야만 했던 아쉬운 기억을 떠올리며
설상가상으로 카메라까지 고장이 나 좋은 풍경들을 담아내지 못했으니
그저 안타까운 여운만 추억으로 남겼다.
그런 아쉬움이 있기에
어느 바위를 오르던 늘 생각하게 된다.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라는....
[불번지듯 번져가는 설악산 단풍]
바위를 오르다가
저 높은 곳, 깊이를 알 수 없는 쪽빛 하늘 아래로
불타듯이 번져가는 붉은 단풍을 보는 순간
내 마음의 번뇌와 일상에서의 시름을 모두 내려 놓는다
중간 중간 확보줄에 매달려 멀리 보이는 동해바다의 푸른 물과,
얼마전 다녀왔지만, 또다시 그리운 노적봉의 자태..
이제 막 물들어가는 붉은 물결의 나무들과 이름모를 꽃들..
그런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형용할 수 없는 어떤 행복함이 감당할 수 없을만큼 마구마구 덤벼들어
와락, 눈물이 쏟아질것만 같다.
[약 30미터의 절벽 아래로 한 마리 새처럼 몸을 날린다]
이렇게 바위 끝에 매달려 있으면
늘 비상(飛翔)의 꿈을 꾸게 된다.
이 줄이 없으면 나도 새처럼 이 공기 위를 날 수 있을까?
포근하고 부드러운 하늘을 둥~둥 떠다니다가
저 아래 푹신한 천역색 카펫 위에 살짝 안겨보는 행복한 상상을 하면서
오늘도 팔을 활짝 벌려 본다.
이순간 만큼은 세상 누구도 부럽지 않고,
그 어떤 어려움도 문제되지 않는다... 아~~
바위야, 내가 이리 행복한 것은 네가 있기 때문이다....
[천불동계곡의 화려한 단풍]
설악이 있어 이 가을이 더욱 풍요롭다.
마치 자석에 이끌리 듯
내몸과 의식은 아무런 저항 없이 울산바위를 넘고 또 넘는다
그러다가 팀원의 실수로 로프를 잡은 양손이 암벽으로 딸려가 부딪쳐
열 손가락 모두 두 번째 마디가 뭉개지는 부상을 입는다
일원의 도움으로 응급조치를 받았지만
암벽을 오를 때마다 가해 지는 압력을 이기지 못해
두껍게 감은 붕대를 뚫고 떨어지는 검붉은 피로 베이지색 등산복은
불번지듯 번져가는 설악산 단풍처럼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자연이 거부하지 않는 한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다.
[울산바위 한복판에서 잠시 여유로움을 갖는다]
쉼없는 오르기와 하강의 반복.
겨우 몸만 빠져나갈 수 있는 바위 틈새를 나오면,
또다시 크랙과 침니를 통과해야 하고
사춘기 소년의 여드름만한 돌기를 잡고 슬랩을 오르면
기기묘묘한 바위와 하늘을 뚫을듯 솟아오른 암릉들의 위용이
또다시 우리를 유혹하며 부른다.
환각상태가 이런 기분일까?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흥취를 느끼며 깊게 빠져드는 것이....
[영랑호에서 바라본 거대한 꽃같은 울산바위]
마지막 바위를 지나 전망 탁트인 암봉에 서니,
설악의 모습이 그대로 들어온다.
바람이 알싸하게 불면서,
선홍빛 저녁놀이 점점 추워지는 설악동 하늘에 핑크빛으로 번져 가고 있었다.
"아~~! 그모습 너무 황홀하여, 나도 모르게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돌잔치 길...!
"잔칫날"이라 해서 누구도 나를 초청하지 않았지만
"오지 말라" 시비하지도 않았다.
나는 오늘 설악의 한켠 울산바위 '돌잔치'에 참석해
화려한 상차림을 받고 가슴 뿌듯하게 일상으로 돌아간다.
['한편의 시를 위한 길'에서 바라본 한떨기 꽃같은 울산바위]
단풍이 찾아와 행복한 가을.
설악산 울창한 숲속에 붉은 가을 빛이 살포시 내려 앉았다.
대청봉에서 시작된 오색단풍의 화무(火舞)는
발빠르게 남쪽으로 질주하고 청량한 가을바람 타고
단풍의 고운 빛깔이 시나브로 눈을 황홀하게 한다.
이런 가을날
잠시 일상을 탈출하여
바위의 짜릿한 손맛을 느끼며 단풍의 우아한 자태에 흠뻑 빠져 보았고
인생같은 바위를 오름으로 삶에 대한 희망과 활력을 얻었다
바위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주는
진지한 인생교훈의 플롯(plot)을 갖고 있다.
격렬한 체력과 격정적인 열정을 필요로 하는 릿지는
오름짓을 통해 자신의 참모습이 무엇인지,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길이지만, 흙이 없는 거친 길.
그런 길이기에 힘에 겨운 곳에선 로프에 의지했다.
헤아릴 수 없는 돌투성이 속에서
바위 봉우리 하나하나 올라 설 때마다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밟히는 풍광들이 너무 경이로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배길 수가 없었다
12시간 이란 짧지않은 산행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힘들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산 하는 비탈길은 고즈넉하였고
또렷하지 않은 희미한 산길이 참으로 좋았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자.
2003.10.20 -無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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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헉..나두 좀 데불고 가주세염..부럽습니다요..무로님..지도 좀 어떻게..
센타장님! 놀리지만 마시고 한 번 데리고 가 주세요.
멋지십니다....혹시 작가이신가요....글하나하나 모두가 감동적입니다.........읽고나면 편안해지는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