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기상 존칭어는 생략합니다/史料적인 史實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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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촌 이집 선생의 아우이며 광이의 일파인 십운과 공파는 생원공 李 唐의 네번째 아드님으로,
둔촌 선생님은 어짐과 현칙의 표상으로 당시에 사림에 표가 높고 칭송이 자자했는데,
특히 부모님에 대한 효성과 형제 간의 우애로도 단연 으뜸이었다.
특히 네번째 동생인 휘 이자령 동생을 사랑하기를 지극히 했다고 전하였다.
십운과 공파란 생원공 이 당의 다섯아들이 모두 과거에 등과햇는데
네번째 자령의 등과명이 십운과라하여 십운과 공파라고 부른다
유독, 십운과 공파의 후손들이 광주와 전라도에 많이 살게 되고
장흥일대가 세거지가 된 것은, 공의 증손이자 5극과 형제 간인 공조판서 李斗信 공이
단종복위 운동인 계유정난에 연류되어, 장흥에 유배되면서 부터,
십운과 파는 장흥과 광주로 각각 나누어지게 된 것이다.
고려말에 태어난 세종시대의 공조판서 이두신 공은
호(號)는 溪亭(계정)이며 생원공의 4자 자령의 증손(曾孫)이고,
(贈)영의정 이참(吏參) 휘蓬老(봉로)공의 子이다,
1387년, 우왕13년 생,문장이 절륜(絶崙)하여 그 풍성이 자자했고
태종 을미1415년 생원 등제(以生員登悌), 성균관 박사(成均館博士) 한림 설서(翰林院兼設書)을 력(歷)했으나
입신 출사에 뜻이 없는 淸玉(청옥)의 鶴人(학인)으로 (전교)를 不仕했다.
1443년 계해, 세종이 資憲 工判(자헌대부, 공조판서)를 제수하니 皇泣(황읍)하여
노년의 세종을 도와, 치적을 올렸다.
1453년 6월에 수양 世祖가 김종서등 世宗의 총신을 제거하고 영상에 오르며
칭왕을 도모하려 하자(계유정난)
稱病謝職(칭병사직)했다. 1455년 단종을 폐하고 세조가 즉위하자, 後 집현전 학사들이
주도한 단종복위 사건에 같이 참가 하였다.
세조 2년 병자년 ,1456년에 장흥에 유배되어, 성종 기축년 1469년 12월에 장흥에서 천양했다,
공은 유배지에서 後學과 儒學의 이도(理道)에 深究(심구)했으니,
영광인 金筆(文 관찰사), 文緯世 (문 부사),尹 構, 金세언, 김시습 등이 제자다.
中宗 辛未 6년(1511년) 기묘명현 金光遠, 朴祥, 연안인 金銓, 蓉濟 李荇과 탄수선생 諱연경, 諱약빙,
文군수 안 정, 諱 元和등 후손들의 상소로 신원 복관되고,
증 시 충민공(贈諡 忠愍公),追贈 大匡報國崇祿大夫領議政兼知經延 弘文館禮文館事世子傅이며,
배위는 밀양 朴문의 이/병조참판 박應宗(응종)의 여식이다.
이두신의 장자는 李 庇 이고, 네 아들 四叔인 李叔耕, 李叔剛, 李叔貞, 李叔明(숙경,강,정,명)있는데
장흥의 유명한 사림 김 필이, 이숙강 李叔剛의 여서이고,
이숙경의 아들이 유명한 박호 이침 이다.
이두신 공의 증손녀의 사위가 곧 김필인 것이다.
이 김필이 바로 현재 전하는 장흥 예양가의 장흥의 사인암/사인정 전설의 주인공이고
설암산(사인암) 유래의 주인공이다.
그래서 당시의 김필을 알기 위해서는
교유가 많은 이 침과 문위세 등을 알아본다.
이 침( 광주이씨) 은 김필의 처남으로 이 두신의 증손이다.
호는 박호(博湖)이며,자는 가진(可珍)이다. 판서 이 두신의 증손이자 ,
장자인 府使를 지낸 휘 이叔耕의 자이다.
문종조1452년 5월, 생원,함열(舊 태안) 현감에 제수되었였다.
1455년 을미 7월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즉위하자, 모친상을 핑게로 사직하고 不仕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함열 이사군 시절에는, 예악과 현가로 고을을 다스려,
읍민의 칭송이 있었으며, 공의 사직 이임 行路에는
많은 백성이 울며 아쉬워했다. 後 향리들과 유림이 공덕비를 세우니 ,
보성인 무과 (歷 경흥도호부사) 宣重倫이 찬명하엿다.
성종1년 1470년 조부 판서 휘 두신 공의 유배 적거지로 내려가 후학을 지도하고,
조부와 부친을 위해 효우하엿으며,
김설봉 광원,남추강 효온,사복판관 윤구,김세언,
사인 김필(휘숙강의 여서), 김양좌,김시습 등과 교유하엿다.
1491년 홍치 4년 장흥 독곡에서의 남효온과 조유 일화가 유명하며,
추강은 박호를위해 조대기를 썻다.
"장사는아득한하늘 머언먼 남쪽나라의땅,이몸 소신은
그땅의 예양가 물가에 있네!,사군은 멀리계시니 그리워 사모하는 정을 삭이는데,
내 낚시꾼과 무리되어 기다린세월 다가고,낙시대는
한가로이 태평을 노래하는구나(장사막막천남토,長沙漠漠天南土,천자금거예수빈
賤子今居汭水濱,사군원모리고신 事君遠慕離孤臣, 이작조도다세월 已作釣徒多歲月 ,
일간유대태평춘 一竿揄帶太平春)라며,수양세조가 등극후 낙남한 공은
성군 성종을 그리는 시를 지어 화답했다.
1492년 성종 23년에 성종은 공에게 세자(연산군)의 세자사부를 제수하였으며,
1500년 연산 7년에 천양하니,연산은 공을
贈 의정부 우찬성겸지경연사 예문관춘추관사 세자사부에추증하고,
사제예장(賜祭禮葬) 하였으며,전라 관찰사를 보내 弔하고,
유림과 향반의조문객은 人海를 이루었다,
남도 12개군 (보성,익산,고부,영암,영광,진도,낙안,순창,금산,김제,진산,장흥부)방백과
관원이 예장하였으니 공의 현덕이 풍성했음이다,
장동 북자동에 묻히셨으며 입표석했다,,
일찌기 추강(남효온)은 생전에 공(이침)을 讚하기를
"효도와행실은 청렴을 구비하였고, 문무가 겸전한 동방의 志才이네,
세월이 그 節義에 감읍하고 시샘하여 ,
임금곁에 가지 못하지만 언제인가 임금께서 부르리니,
어찌 태공,강과 엄자룡에 비견하리요,
참으로 충절은 또 동방의 可珍이리라" 하였다
중종반정 後 반정 공신들은 박호가 생전 연산의 스승이였음을 모함,
공의 증관작이 추탈되었으나
장흥지는 추강의 독곡조대기와함께 공을 기록하기를
以世子師傅,文章學問鳴於一世라했다.
박호 이침의 손자인 승지 諱 이요흠은
이침을 추모하기위해
장흥 예양강가 수령천 변 독곡에 [精舍] 를 지어
휘 斗信과 琛의 절의를 기리고,
당대의 유림과 교유하고,후학을 지도하였으며,
현손, 여경(휘송룡,자 운경)은
호란(일설,을묘왜변)시 노모를 숨기고,
은거한 일화로, 精舍는 후 효절의 제각으로 불리웠다.
장흥지에 기록은 전하나,[정사]는 그 후 없어지고,,
지금은 그때의 송산 광이의
풍성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유히 예수빈은
월하의 淸江이 되어 흘러가고만 있다.
사인정과 사인암 전설과
김필(영광김씨)에 대하여--장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