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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움직이는 세계 ] |
2001년10월31일 제382호 |
발칸을 망친 세명의 ‘종교인’
기획연재/ 슬픈 발칸(상)-종교분쟁
종교를 정치적 도구로 이용한 밀로셰비치·이제트베고비치·투지만이 주는 교훈
세계의 시선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모아진 가운데 2년 전에 있었던 미국의 유고폭격은 잊혀져가고 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한 모퉁이에서는 지금도 작은 전투가 매일 벌어지고 있으며 언제 다시 전면전으로 타오를지 모르는 상황에 있다. 복잡하게 얽혀 있는 발칸분쟁은 세계의 치부를 드러내주는 창이다. 현지취재 등을 통해 발칸문제를 연구해온 하영식 통신원이 서방언론에 의해 왜곡된 발칸분쟁의 진실을 3차례에 나눠 밝힌다. 편집자
사진/ 나토의 폭격으로 파괴된 정교회 수도원. 이 폭격은 같은 정교회 국가였던 그리스와 러시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발칸분쟁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만큼이나 쉽게 사그라질 것 같지 않다. 사이좋은 이웃이 아니라 증오하는 이웃으로 지금도 복수의 칼날을 갈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이 같은 지역에서 각기 다른 문화와 종교를 유지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에서 벌써 갈등의 여지를 보게 된다. 동시에 유럽과 중앙아시아의 길목이라는 지리적인 특성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외세의 침입과 지배를 받았다는 데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발칸분쟁은 내부에서 시작됐든 외부에서 주입됐든 금방 세계적 차원의 분쟁으로 전화된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계기가 됐던 오스트리아 황태자암살사건에서도 잘 나타난다.
티토의 카리스마가 사라진 그곳엔…
사진/ 현재 헤이그 국제전범법정에 회부된 밀로셰비치의 재임시 모습. 그에게 정교회는 어떤 의미였을까.
티토의 신화적 카리스마가 발휘되던 시절 유고연방 국가들인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크로아티아는 각기 다른 종교와 문화를 지켜오면서 공산주의라는 대원칙 아래서 통합된 하나의 국가였다.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는 정교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가톨릭으로 각기 다른 종교를 갖고 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외세의 침입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다.
매년 6월28일은 세르비아의 민족적 기념일이다. 1389년 이날,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흑까마귀벌판’에서 터키병사들과 한판 승부를 벌였고, 여기서 국왕까지 전사하는 민족적 패배를 당했다. 이때부터 세르비아는 오토만제국에 무려 400년 동안 지배당하게 된다. 오토만제국은 그 영향력을 넓히면서 나중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까지 점령하여 전 발칸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발칸’이란 이름도 터키어에서 ‘산맥’을 의미한다.
발칸이 터키에 점령당하기 전 이곳은 비잔틴제국의 영향을 받아서 모두 정교회로 개종한 상태였다. 그러나 무슬림국가였던 오토만제국의 끈질긴 개종정책으로 많은 크로아티아인들과 보스니아인들이 무슬림으로 개종했고 남서쪽의 알바니아인들도 터키에 의해 모두 무슬림으로 개종했다. 이후 16세기 초 발칸북부가 오스트리아제국의 지배 아래 들어가면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지금까지 가톨릭의 영향을 받고 있다. 이렇게 터키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거치는 동안 발칸은 세 종교가 지배하는 지역으로 자연스럽게 나뉘었다.
80년대 말이 되면서 슬로베니아를 시작으로 독립국가로서 유고연방을 하나둘 이탈하기 시작했다. 이 격동기에 발칸에서는 세명의 지도자가 출현하는데 이들은 모두 종교를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해 피를 불러들인 장본인들이다.
티토가 사망한 뒤 세르비아 출신의 밀로셰비치가 등장하면서 유고연방의 대통령으로 정치적 공백을 메우게 된다. 그러나 티토와 달리 그는 강한 세르비아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내면서 당시에 분열됐던 연방 내 국가들을 정치적으로 느슨하게나마 통합시키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적대적 대립을 부추기는 화근이 된다. 이는 소비에트연방이 무너진 이후 독립국가연합으로 느슨하게나마 연대의 틀을 마련함으로써 민족간의 대립과 전쟁을 최소화했던 러시아와는 대조적이다.
1989년 6월28일 코소보전투 600주년 기념식에서 밀로셰비치는 유럽으로의 이슬람교 확산을 저지시킨 세르비아민족과 정교회의 영웅주의를 찬양했다. 또한 당시 알바니아분리주의자들에 의해서 소요가 끊이지 않았던 코소보를 유고슬라비아, 즉 세르비아의 한 부분으로 남겨놓을 것임을 못박았다. 이날의 연설을 통해 밀로셰비치는 정교회의 대이슬람투쟁이라는 종교적인 성격을 강하게 부여함으로써 당시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 불을 댕긴 꼴이 되었다. 당시 코소보는 유고연방에서도 알바니아인들의 자치주였다. 이 연설을 한 지 정확히 10년 되던 해, 세르비아와 코소보는 나토의 폭격으로 비참한 상황을 맞게 된다. 나토 폭격 당시에 같은 정교회국가였던 그리스와 러시아 등에서 심한 반발을 한 것은 당연하다. 특히 아테네에서는 미국대사관 앞에서 100차례 이상의 반미시위가 있었고 반알바니아 정서가 퍼져나갔다.
정교, 이슬람, 가톨릭의 정치적 충돌
사진/ 보스니아 대통령 이제트베고비치. 그는 무슬림 사이에서 발칸의 지도자로 불린다.
같은 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이제트베고비치는 민주실천을 위한 무슬림당(SDA)을 창당하기 위해서 아랍국가들을 방문하던 중이었다. 그는 반국가적인 무슬림운동으로 투옥되어 14년을 선고받고 6년을 복역한 뒤 출옥한 상태였다. 당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는 3개의 서로 다른 민족과 종교가 혼재된 상태였으나 무슬림인구가 다수를 차지했다.
1990년 11월18일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총선에서는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무슬림당이 86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고 그뒤를 이어 세르비아당이 72석을 차지했고 마지막으로 크로아티아당이 44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총선결과에 따라 다수당 대표에게 1년 재임의 순번제 대통령직이 돌아갔다. 순번제 대통령직은 다른 소수민족들에 대한 정치적 배려에서 나온 각 민족정당들간의 합의사항이었다. 그러나 이제트베고비치는 1992년 자신의 대통령직을 세르비아당 대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하고 그대로 대통령직을 지켰다. 이로써 세 민족간의 정치적 공존의 기반이 무너졌다. 이후 반세르비아전투가 본격화되면서 중동과 아프가니스탄, 북아프리카지역에서는 수천명의 무슬림전사들이 ‘무슬림국가건설’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전투에 참여하게 된다. 휴전이 성립된 뒤 많은 수의 아랍국가 출신의 무슬림전사들은 본국으로 귀환하지 않고 보스니아 여인과 결혼을 하면서 이곳에 체류했다. 지난 9월11일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은 뒤 ‘악명’을 떨치고 있는 오사마 빈 라덴의 해외조직망도 이곳에 건설돼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미국과 유럽이 가장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고 있는 국가 중 하나가 됐다.
이와는 별도로 크로아티아에서는 투지만이 두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는 티토의 공산군에 입대하여 나중에 소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크로아티아파시즘 부활을 위한 운동은 그를 감옥으로 내몰아 3년을 복역하게 했다. 그는 미국에서 크로아티아파시즘에 관한 책을 출판한 적이 있는데 이 책을 통해서 2차대전 중에 대학살을 저질렀던 크로아티아의 나치우스타쉬 정권과 가톨릭교회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했다. 그리고 당시 크로아티아가 유고연방 내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총선을 통해 크로아티아의 대통령이 되었다.
다음해(1991)에 크로아티아의 가톨릭 주교들이 전세계의 주교들과 천주교회에 공개서한을 발송한 사건이 있었다. 서한에서 크로아티아 가톨릭주교들은 베오그라드 정권이 정교회의 지원을 받고 또한 이를 통해서 유지되며 공산주의형태의 사회주의를 지속해나가기를 원한다고 썼다. 그리고 유고의 정부와 군부는 세르비아민족에 의해 지배되며 또한 행정관료들이나 군부요인들은 중앙집권주의자들로서 서구문화와 민주주의전통을 완강히 반대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이 서한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미국에서는 이 서한이 대유고정책의 기본방향을 좌우하는 주요한 변수로, 서구언론매체들의 반세르비아 여론몰이의 도구로 오랫동안 그 위력을 발휘했다. 대통령이 된 뒤 투지만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를 방문했고 다시 사흘 뒤에는 자그레브 스타디움에서 가톨릭교회 신부들이 모두 참석한 가운데 군대행진 행사를 거행하고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축복을 받았다. 당시 갈리 유엔 사무총장이 제출한 공식보고서에서는 1991년에서 1992년 사이 크로아티아의 인종청소캠페인으로 약 25만명의 세르비아인들이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됐고 수천명이 학살당했음을 밝히고 있다.
발칸분쟁과 대테러전쟁
미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있은 뒤 부시 대통령은 미국의 대테러 전쟁을 ‘십자군전쟁’에 비유한 적이 있다. 이후 엄청난 반발이 일자 부시는 자신의 발언을 취소하는 소동까지 빚었다. 걸프전 당시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과 사담 후세인도 기독교의 하나님과 아랍의 알라신의 전쟁을 선동했다. 이처럼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반 민중의 순수한 종교적 열정을 이용하는 데 서슴없다는 사실을 발칸분쟁의 전야에서도 볼 수 있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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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11월07일 제383호 |
나토는 평화를 믿지 않는다
기획연재|슬픈 발칸(중) - 외세개입
‘응징’을 명분으로 끊임없이 발칸에 개입한 서구 열강의 의중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진/ 나토의 유고폭격 당시 이륙하는 미 해병대의 전파방해기.
“(협상안에) 사인을 하든지
아니면 공격을 당하든지 하라는 기가 막히는 최후통첩이다. 이건 협상의 방법이 아니다. 왜 세계가 우리를 이렇게
증오하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왜 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태어났을까?
처음에는 슬로베니아, 다음에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이제 코소보…. 그 다음엔 우리, 팔레스타인 민족처럼 나라없는 민족이 될지도 모른다.” 이런 절망적인 심정이 나토의 1999년 3월24일 유고폭격이 시작되던
날 유고슬라비아 한 대학생의 일기장에 잘 나타나 있다.
나토 ‘동진’의 걸림돌
당시 나토의 유고폭격은 미국과 유럽의 나토회원국들이 유고의 ‘인종청소’를 심판한다는 명분으로 감행되었다. 70일 가까이 지속된 이 폭격으로 세르비아에서는 1500명이 목숨을 잃고 수만명이 부상당했다. 대부분의 공공시설과 중요한 건물들이 파괴되어 폭격 전 수준으로의 경제회복에 30년 이상이 걸린다는 진단이 나올 정도로 파괴를 경험해야만 했다. 이어 미국이 원하던 대로 세르비아에서는 새로운 정부가 혁명적으로 들어섰고 밀로셰비치는 권좌에서 밀려나 지금은 헤이그전범재판소에서 자신의 운명이 결정될 날만 기다리는 처지로 전락했다. 코소보는 미국을 비롯한 17개국의 수중에 떨어졌고 여전히 미래가 불투명한 처지에 놓여 있다.
사진/ 정찰임무를 띠고 세르비아로 출동하는 미 해병대원들.
당시 미국은 ‘인도적 차원’에서 세르비아의 인종청소를
눈뜨고 볼 수 없어서 코소보와 유고슬라비아를 폭격하고
군대를 파견한다고 발표했다.
그렇다면 과연 미국이 내세웠던 명분은 정당한가. 미국이
과연 ‘정의의 기사’로서 세계무대에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해왔던가.
90년대 들어와서 세계 최대의 학살로 꼽히는 1994년 르완다학살사건 당시 미국 정부는 르완다학살에 대한 발표조차도 꺼려했고 마지못한 발표에서도 학살(genocide)이란 말을 삭제했다. 이후 아프리카를 공식순방중이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르완다학살에 대한 미국의 ‘방관’에 공식사과까지 했다. 또한 지금도 기본적인 인권조차 말살당한 채 살아가는 쿠르드족에 대한 터키 정부의 박해와 강제이주 정책은 수만명을 희생시켰으며 100만명이나 되는 쿠르드족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은 군사동맹국인 터키로부터 인쥐릭 공군기지의 사용권과 군사적 협력을 얻는 대가로 쿠르드노동당(PKK)을 테러리스트단체로, 쿠르드족은 테러리스트단체를 지원하는 민족으로 규정하여 터키 정부의 박해를 정당화시켰다. 군사정권과 함께 ‘인종청소’의 공범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 있다. 팔레스타인 민족이나 스리랑카의 타밀족처럼 지금도 지구상에는 많은 민족들이 소수민족이란 이유로 다른 민족으로부터 박해당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지만 미국은 눈을 감고 있다. 미국의 세계정책은 철저히 이기적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재수없게도’ 미국이 의도적으로 처음부터 노려온 경우에 해당된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는 1949년 소련과 그 동맹국의 군사적인 위협의 가능성으로부터 서유럽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창설된 기구이다. 그러나 1990년 이후 동구권의 몰락으로 사실상 소련과 바르샤바조약기구 국가들의 군사적 위협이 소멸된 상태에도 나토를 해체하기는커녕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동유럽 국가들을 나토회원국으로 가입시키려는 공을 들여왔다. 폴란드, 체코, 헝가리 등은 이미 나토의 후보국으로 거의 회원국의 문턱에 들어서 있고, 발틱 3개국을 비롯하여 다른 동구권 국가들도 나토로부터 제의를 받고 있다. 사실상 나토를 조직했던 미국은 나토를 발판으로 서유럽의 정치경제를 좌우하는 영향력을 행사해왔고 계속 그 영향력을 동유럽 국가들에 확대해왔다. 유럽연합 후보국들은 모두 나토의 후보국으로 중복가입된 상태며 공교롭게도 폴란드, 헝가리, 체코 3개국이 유럽연합 후보국 중에서 일순위로 2004년부터 정식회원국이 될 전망이다. 터키만 하더라도 미국의 나토를 통한 유럽지배를 실감나게 한다. 유럽연합은 터키가 유럽연합 가입조건에 미달한다는 이유로 협상대상국에서조차 제외시킨 상태지만 나토회원국인 터키는 미국을 상대로 유럽연합 가입을 추진하고 있다.
원유 수송이 주요 목적
사진/ 유고폭격의 풍경들. 폐허가 된 아프트건물(좌측상단). 폭탄에 맞아 끊어진 다리(좌측하단). 폭격이 진행되는 가운데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
나토의 존립근거가 무너졌음에도 ‘동진’을 강행해온 나토는
동진의 최대걸림돌인
유고슬라비아와 맞부딪히게 됐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은 서구의 시장경제정책을
대부분 수용했고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등은
이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 친미나 친유럽으로 돌아선 반면 유고슬라비아,
특히 세르비아는 이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길을 걸어왔다. 세르비아의 ‘반항’에 나토는 세르비아, 특히 밀로셰비치가 미국과 유럽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는 언론플레이를 통해 인구 1천만명의 작은 국가를 미국과 유럽을
위협하는 거대한 공룡으로 조작하여 나토의 존립과 확대에 정당성을 불어넣었다.
미국의 발칸 개입은 군사전략적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경제적인 이익과도 직결되어 있다. 필자가 지난 6월 마케도니아를 취재하면서 입수한 암보프로젝트 자료를 통해서도 밝혔듯이 미국은 중앙아시아의 유전지대에서 생산된 원유를 흑해와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알바니아를 통해 수송하려는 계획을 세운 바 있으며 벌써 공사가 진행중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특히 발칸에서는 미국이 지하원유수송관을 설치하여 흑해에서 수송된 원유를 불가리아에서 마케도니아를 거쳐 알바니아로 수송하여 다시 해상로를 통해 유럽으로 수송하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세우고 있다. 이 지역에서 미국의 정치군사적 지배가 필수 조건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따라서 현재 진행중인 마케도니아 내전은 남발칸지역에서 세르비아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또다른 목적이라 볼 수 있다. 현재 진행중인 아프간 전쟁도 중앙아시아에서 생산중인 원유 수송과도 깊이 관련돼 있다는 것이 국제전문가들의 시각이다. 테러공격을 당한 당사국도 아닌 영국이 참전한 것도 순수한 ‘의리’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이미 우즈베키스탄을 대아프간 침공의 기지로 만든 미국은 중앙아시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여 사실상 유전개발, 원유생산과 수송을 독점하려 하고 있다. 이곳에서 생산된 원유를 흑해와 발칸을 통해서 유럽과 미국으로 수송하는 경로 확보가 현재 미국이 초점을 맞추고 있는 가장 큰 사업이다.
미국이 남발칸에 초점을 맞췄다면 북발칸지역은 독일의 영향권 안에 들어갔다. 독일은 유럽의 나토회원국 중에서도 가장 발칸지역을 탐낸 국가이다. 동서독이 통일될 때 이미 ‘동진’을 계획해놓은 상태에서 때만 기다리고 있었던 독일은 미국과 함께 발칸을 파편화시킬 계획을 세우고 실행해나가게 된다. 실제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전쟁이 끝나면서 북발칸지역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은 독일의 정치·경제적인 영향력 아래 들어가게 된다. 즉, 독일은 간절히 원했던 아드리아해로의 접근이 가능하게 되었다. 독일이 잠정적으로는 현재 라인강과 다뉴브강을 잇는 운하를 통해서 3천t급의 배들이 북해에서 흑해까지 항해할 수 있는 뱃길을 확보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들만의 신세계질서
또한 유고내전에서 바티칸의 개입도 확인되었다. 보스니아전쟁 중 바티칸이 약 4천만달러를 크로아티아 정부에 무기구입비로 지원한 사실이 2년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법정에서 밝혀진 바 있다. 영국, 프랑스 등 모든 유럽국가들이 나토의 이름으로 유고슬라비아를 작은 조각으로 만드는 데 일조하면서 거기서 나오는 이익을 챙기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미국과 나토의 유고폭격은 나토확대의 걸림돌을 제거하면서 동쪽으로 뻗어나갈 발판을 열어놓았고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공고히 해왔다. 걸프전 당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이미 밝혔던 ‘신세계질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조금 세련된 표현인 ‘자유시장구조’와 ‘세계화’로 나타났지만 9·11테러 이후 아들 부시 대통령은 “우리와 함께하지 않으면 적”이라는 직설적인 ‘마피아식’ 표현으로 신세계질서의 구도를 시사했다. 미국은 유고내전의 개입을 통해 신세계질서의 의미를 세계에 보여주었고 유럽의 나토회원국들은 미국의 정책에 보조를 맞추면서 함께 그 이익을 챙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otenet.g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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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11월14일 제384호 |
코소보의 감춰진 진실
기획연재|슬픈 발칸(하)-코소보
유고 개입을 위해 CIA가 의도적으로 반군 지원… 평화를 부르짖는 나토의 더러운 속내
사진/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은 시위를 통해 코소보평화유지군에 자신들의 독립의지를 표현하고 있다.
코소보는 중세 이후 세르비아의
정신적인 수도로서 1천여개나
되는 수도원과 정교회 건물들이
들어서면서 ‘발칸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매년 순례하던 성지였으며 오랜 세월 동안 이 지역은
세르비아의 영토로 인정받아왔다. 1차대전이 끝나면서 코소보는 여전히 세르비아의 영토로서
국제적으로 재확인받았다.
알바니아인들은 언제나 코소보를 자신들의 땅이라고 주장해왔다. 1389년 코소보 벌판에서 벌어진 한판 승부에서 세르비아가 오스만제국에 무릎을 꿇고 난 뒤 이 지역은 450년 동안 오스만제국의 점령지가 되었다. 그 여세를 몰아 터키는 알바니아까지 정복하여 알바니아 민족 대부분을 무슬림으로 개종시켰다. 연이어 취했던 정책이 알바니아인들을 코소보로 이동시키는 것이었다. 알바니아인들이 대규모로 이 지역으로 밀려든 이때 동시에 세르비아인들이 대규모로 코소보에서 추방당했다.
베트남 용병들이 코소보에 모인 이유
1차대전 뒤 오스만제국이 몰락하고 세르비아민족이 돌아오면서 그들이 코소보 인구의 반을 차지하게 됐으나 2차대전중 이 지역을 점령했던 독일과 이탈리아 파시스트 정권에 의해 30만명 이상의 세르비아인들이 추방당하게 된다. 민족의 형식적 봉합에만 신경썼던 티토는 세르비아인들이 코소보로 돌아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배경에 의해 코소보 인구의 다수를 알바니아 민족이 차지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세르비아 영토에 90%의 알바니아인들이 거주하는 기형적인 모습으로 변모하게 되었고 마침내 유고 정부가 더이상 알바니아인들을 통제할 수 없을 정도의 상황으로 치닫는다. 알바니아인들의 저항에 견디다 못한 유고 정부는 1974년에 코소보를 자치주로 인정해주었다
유고의 자치주가 된 코소보는 중앙의 통제가 느슨해진 틈을 백분 활용했다. 코소보의 프리스티나대학에서는 당시 알바니아 정권이 ‘대알바니아’의 관점에서 편집한 수천권의 교과서를 들여와 알바니아 학생들의 학사과정에 사용했다. 즉 코소보를 알바니아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키려는 이론적인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다. 프리스티나대학 출신 중 상당수가 현재 코소보해방군(KLA)과 마케도니아의 민족해방군(NLA)의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뉴욕타임스>의 발칸지부장을 역임했던 크리스 헤지스가 KLA의 구성원들에 대해 소개한 것을 보면 대략 두 종류로 나뉜다. 먼저 알바니아 우익전사들의 아들이나 손자들을 꼽을 수 있는데 2차대전 당시 파시스트쪽에 가담했거나 나치에 의해 만들어졌던 SS부대에 자발적으로 참가했던 사람들의 자손이거나 80년 전에 세르비아에 대항해서 봉기했던 알바니아 우익들의 자손이다. 또다른 그룹은 소수의 좌익공산주의자들로서 우익과 마케도니아의 소수 알바니아 민족들을 위한 전투에 참여할 것인지에 대해서 다수의 우파들과 심각하게 대립해왔다.
90년대 초 KLA가 창설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미국중앙정보부(CIA)와 독일정보부(BND)였다. BND에 의해 독일 군복과 동독의 무기들, 마약밀수를 통해 세탁된 돈 등이 KLA에 지원됐다. BND의 비밀활동은 독일 정부의 발칸 진출을 위한 것이었다. 이 과정에서 CIA와 BND는 상호 역할분담까지 할 정도로 KLA 창설을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BND가 주로 군수품 공급을 맡았다면 CIA는 군사훈련 부문에 집중했다. 시골 출신의 코소보 알바니아 청년들을 직업적인 게릴라전사로 키우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열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외부전문가들의 전문적인 조언과 교육이 필요한데 이를 CIA에서 맡았다. 왕년의 베트남전 출신 예비역 용병들을 데려와서는 알바니아 청년들을 게릴라전사로 훈련시켰다.
마피아와 거래했다는 의혹도
사진/ 코소보 어린이가 그린 전쟁그림. 코소보 전쟁의 불씨는 CIA 의 공작이었다.
올해 들어서 시작된 마케도니아분쟁에서 확인됐던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지난
6월25일 스코페에서 20km
떨어진 알파치노보에서 있었던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군은 알바니아 게릴라들을
제압했다. 그러나 알바니아
게릴라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이들을 체포하려는 순간
미군이 들어와 알바니아 게릴라들을 구출한 뒤 유유히 사라졌다. 이 과정에서 알바니아 게릴라들과 뒤섞여 있던 미국 용병들을 쉽게 구별해낼 수 있었다. 미군이 개입하여 알바니아 게릴라들을 구출해간 이유는 알바니아 청년들의 목숨을 소중히 여겼다기보다는 ‘미국 시민’인 미국 용병들의 목숨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이해가 가는 대목이다. 약소민족의 설움을 톡톡히 맛보아야 했던 마케도니아 국민들은 그날 밤 국회의사당 앞으로 몰려가서 마케도니아 정부에 화풀이를 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미국에 의해 90년에 취해진 금수조치는 유고슬라비아의 경제에 암운을 드리웠고 이런 경제적 파탄상태는 코소보의 알바니아 청년들을 알바니아에 있던 KLA 훈련장으로 가게 만든 조건이 되었다. 이곳에서 훈련받은 뒤 배치된 게릴라전사들은 일정한 보수가 주어졌기 때문에 실업자로 있느니 차라리 게릴라전사가 되는 길을 택했다. KLA가 이렇게 막강한 자금력을 배경으로 3만명이나 되는 코소보의 알바니아 청년들을 모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세계에 네트워크를 갖춘 알바니아 마피아의 지원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유럽으로 공급되는 마약의 70%가 터키에서 공급되는데 이 마약은 알바니아 마피아의 중개를 거쳐 이탈리아 마피아로 넘겨진다. 알려진 바로는 이 마약밀수사업의 규모가 자그마치 70억달러나 된다고 한다. 지금도 CIA를 비롯한 유럽의 정보기관들은 이를 방관하든지 아니면 아예 함께 ‘동업’하고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1998년 공식적으로 삭제되기 전까지 오사마 빈 라덴과 관련됐다는 혐의로 KLA는 미 국무성의 테러단체명부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즉, 당시 테러단체였던 KLA를 CIA가 지원했다는 얘기가 된다. 미국 정부가 합법화한 KLA는 이후 알바니아에서 공급됐던 중국제, 옛소련제 낡은 무기들을 버리고 신형 미제 무기들로 무장하한다.
밀로셰비치가 정권을 잡은 뒤 하나둘 유고슬라비아연방을 이탈해가던 시기 코소보에서는 소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다수의 알바니아인들에 의해서 희롱당하는 사례가 종종 일어났고 이에 항의하는 세르비아인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세르비아 경찰이 세르비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알바니아인들과 충돌하게 되고 급기야 대규모 알바니아인들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 와중에서 걷잡을 수 없는 시위로 발전되자 세르비아에서 군대가 파견되면서 KLA와 무장충돌이 벌어지게 된다. 이것이 코소보전쟁의 시작이다. 온갖 전시선전이 난무하고 양편의 난민들이 줄을 잇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서방언론매체들의 전시선전과 달리 밀로셰비치는 전쟁을 원치 않았고 가능하면 자존심을 세우는 방향에서 평화적인 타결을 보기를 원했다. 그러나 미국은 단지 이 분쟁을 나토군이 합법적으로 주둔할 명분으로 이용했다.
클린턴도 전범이다
당시 홀부르크가 중재한 안은 합법적인 나토군의 주둔을 가능케 하는 것 이상이 아니었다. 즉 분쟁이 있어 우리 군대가 들어가겠으니 순순히 허락을 하든지 아니면 폭격을 받든지 하라는, 한 나라의 주권을 완전히 무시한 협박이었다. 코소보분쟁은 CIA가 ‘더러운 공작’을 통해 다른 나라의 영토를 점령한, 희대의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밀로셰비치가 선 전범재판소에 빌 클린턴을 비롯한 유럽 수반들, 대통령들도 함께 서야 한다는 주장이 미국과 유럽 진보진영에서는 지금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인도적인 차원에서의 개입을 주장하면서 수천명의 민간인들을 살상한 행위도 반인류적 범죄행위로 묵과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코소보 폭격이 끝나고 코소보평화유지군이 코소보의 질서와 안정을 되찾는다는 명분으로 들어갔지만 평화가 정착됐다는 소식은 들리지 않는다. 지금은 알바니아인들과 코소보평화유지군이 마찰을 빚고 있다는 소식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에서는 코슈투니차가 서방세계에 비굴한 모습을 보이면서까지 원조를 구걸하고 있다. 한 민족이 두 가지 모습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바로 코소보전쟁 이후 세르비아 민족이다. 유고사태를 다시 써나가면서 필자를 계속 고뇌하게 만들었던 것은 만약 우리 민족이 세르비아 민족과 같은 상황으로 내몰렸다면 과연 어떤 길을 선택했을까 하는 의문이었다.
아테네=하영식 통신원 youngsi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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