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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중국 무한 화중과기대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now
중국의 종교개황과 특징,
원시종교
Ⅰ.중국의 종교개황과 특징
ⅰ.중국의 종교개황
중국의 역사는 구석기에서 시작하여 신석기를 거쳐 夏, 殷, 周(춘추전국시대), 秦, 漢으로 이어진다.
기원전 1000년이 조금 못 되었을 때 고대의 상商(은殷나라)가 쇠망하고 주周나라가 등장하였다. 주나라를 세운 인물은 주공周公이라 하여, 뒤에 이상적인 인물상으로 추앙받는다.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중국 문화가 형성된 것은 8세기 동주東周(기원전771~221)때부터였다. 공자가 편찬한 고전도 이때부터 내려온 것이다. 공자는 기원전 551년에서 479년까지 살았고, 전설적인 인물 노자는 그보다 약간 나이가 많았던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노자가 지었다고 하는 『도덕경』은 사실상 후대에 편찬된 것이 분명하다. 그 뒤 수세기 동안 유가와 도가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중요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맹자孟子와 장자莊子가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1세기에는 불교가 이미 중국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2세기에는 장도릉張道陵이 종교로서의 도교를 창시했다. 그러니까 2세기 이전까지를 중국 종교의 형성기 또는 초기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수隋나라와 이어서 당唐나라 시대가 10세기까지 펼쳐지는데, 이때를 고전시대라 부를 수 있다. 이 시기에 유불도儒彿道 세 종교의 핵심적 형태가 완성되었다. 특히 중국 불교가 크게 융성하면서 불교사상과 신행에 새로운 내용이 풍부하게 첨가되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11세기에서 18세기까지, 즉 서양의 영향력 앞에 전면적으로 노출되기 직전까지를 중세 또는 근대 이전 시대로 규정할 수 있다.
중국이 공산주의 국가인 만큼 종교는 이념적 모순으로 말미암아 원칙적으로는 부정된다. 그러나 신앙의 속성 상 절대적 통제는 어려움이 뒤따르며 55개나 되는 소수 민족 정통의 민간 신앙에서부터 국제 사회의 조류 등 제반 문제를 감안하여 외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있다. 종교에 대한 중국 정부의 기본 방침은 다음과 같다.
* 종교의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며 미래에 종교가 자연스럽게 소멸될 때까지 이를 시행한다.
* 각 민족 종교계와 애국정치연맹을 공고히 하고 확대하며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의 건설과 국가 통일의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더불어 노력한다.
* 자율적인 운영(三自:自治·自養·自傳)을 견지한다.
이 방침은 원칙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지만 종교의 소멸을 최종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적 교리의 긍정적 수용이라고 보기는 어렵고 정치적 연대를 통한 사회주의의 달성에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종교정책의 한계로 말미암아 몽고족·장족·회족 등은 종교문제에 불만하여 민족분리 운동을 전개하기도 한다. 한편 외국인은 종교 활동이 허용된 장소에서는 그 활동이 허용되지만 공공연한 장소에서 선전과 포교활동을 하면 추방당한다.
현재는 불교·도교·기독교·천주교·이슬람교 등 5대 종교의 활동이 이루어지고있다. 기독교는 唐代에 경교(景敎)라는 이름으로 중국에 전래되었다. 개신교는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19세기에 중국에 유입되었다. 당시의 선교사들은 현대식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 미신타파·남녀평등·혼인자유 등 서양의 근대 관념을 전파하여 중국 사회 전반에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현재는 중국기독교협회·中國基督敎三自愛國運動委員會 등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천주교는 明代에 마테오리치가 중국에 들어오면서 전래되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에 호응하여 한때 종교 활동이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현재도 중국 천주교 애국회(中國天主敎愛國會)·중국천주교주교단(中國天主敎主敎團)을 통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이슬람교는 당대唐代에 중국으로 전래되었으며, 원대元代에 이르러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었다. 이후에도 꾸준히 신도 수가 늘었고 역법·천문학·건축·서역의 의학 등의 방면에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현재는 중국이슬람교협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중국의 소수 민족은 일반적으로 모두 종교宗敎를 믿고 있다. 세계의 三大 宗敎인 이슬람교, 佛敎, 基督敎는 중국 소수 민족에게 모두 심각한 영향을 주었다. 이슬람교를 믿는 소수 민족은 10개 민족인데, 回族, 維吾爾族, 哈薩克族, 柯爾克孜族, 塔塔爾族, 鳥孜別克族 등이다. 라마교 또는 불교를 믿는 소수 민족은 藏族, 蒙古族, 土族, 裕固族, 布朗族, 德昻族 등이 있다. 기독교를 믿는 소수 민족은 苗族의 일부, 이밖에, 또 어떤 소수 민족은 원시적인 자연숭배의 여러 가지 신앙을 유지하고 있는데, 선조 숭배, 토템 숭배, 巫敎, 샤머니즘 등을 포괄한다. 여기에 속하는 소수 민족은 獨龍族, 怒族, 景頗族, 高山族, 鄂倫春族 등이다.
ⅱ.중국인의 종교관
중국을 흔히 종교성이 박약한 곳이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문화의 배경에는 종교적인 관념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즉, 天의 관념으로 이는 고대부터 중국인에게 존경의 대상은 되었지만 종교적인 絶代적 存在로는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고대부터 종교로 확립될 수 있는 확실한 대상이 있으면서도 그것이 관념으로만 남아 있게 된 원인을 찾아보면 그럴만한 이유가 성립된다.
고대 중국 문명을 일으킨 민족은 인도나 이집트 혹은 중동지역처럼 고정된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黃河유역을 이동하며 생활권을 형성하였다. 즉 황하 상류에서부터 하류로 東進하며 비옥하고 광활한 토지 확보에 승리한 종족을 중심으로 해서 거대한 문명권을 형성한 것이다.
황하유역에서 문명을 일으킨 종족에게 당면한 시급한 문제는 범람하는 황하를 다스리는 治水문제와 무한한 토지의 분배, 그리고 급증하는 인구를 관리하는 현실 위주의 문제 등으로 인해 종교가 자생할 수 있을 만큼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신앙보다는 정치적 질서와 統率을 우선 과제로 삼은 결과 기원전 이천여 년경에 종교보다도 封建제도의 성립을 보게 되었다.
이러한 환경 하에서 가장 중요시 되는 종족의 단결 문제와 家父長에 의한 질서 확립 문제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天 관념은 하늘에 대한 존경과 더불어 조상에 대한 숭배 사상으로 성립되어 고대의 夏, 殷, 周를 관통하는 사상의 핵심이 되었고, 이는 중앙 집단체제의 국가 형태를 성립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물론 그보다 더 이전 원시적인 토템신앙에 의한 원시 종교 형태의 출발점은 있었지만 그것 역시 多神신앙에 불과할 뿐 중국의 종교는 애초부터 불완전한 형태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 다신신앙의 단계만을 계속 이어왔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중국인이 보이는 언행의 기본 핵심은 종교가 아닌 현실 위주의 사상으로 채워지게 되었고 이것이 3대를 거치면서 儒學으로 성립되는 결과를 가져 왔다.
때문에 중국인의 思惟와 言行의 기본은 당연히 유학으로 정착되었지만 유학 역시 종교의 역할은 했어도 종교로 발전하지는 못하였다. 그렇다고 유학이 무신론을 표방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록 유학이 현실 긍정적이고 현실위주사상을 기본으로 하지만 그 사상 속에는 전통적인 天 사상이 포함되는 만큼 절대적인 무신론을 표방한다고는 볼 수 없다.
현실위주라는 것은 인간의 사회생활을 위한 現世, 인간 세계가 중심이기 때문에 그의 理想은 治人과 修己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곧 사회에서 인간의 노력과 능력에 따라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 엄격한 종교 생활과 고행을 통해 도달하는 기타 문명권의 종교관에 의한 사회관이나 이상론이 중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신앙의 대상으로서 天이나 天帝의 개념은 고대 그리스에서처럼 인간과 유사한 형태의 존재이거나 인간이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하는 그 어느 곳의 존재도 아닌 것으로 인식되어 단지 현실의 인간 세계를 완성하려는 노력을 神助하는 역할로 여겼다. 중국에 있어서 종교란 인간의 절대적인 통제자로서 존재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ⅲ.중국에서 종교의 역할
비록 중국의 종교가 절대적이지 못한 특색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중국 문화의 배경에는 종교적 요소가 풍부하다. 이미 전술한 天 외에도 원시시대부터 원시 종교가 횡행하고 있었다.
원시종교는 원시인이 敬畏하는 자연의 위력이나 驚異적인 존재를 숭배하는 행위에서 비롯되는데 이것이 중국에서는 종교적 형태가 아닌 하늘과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배를 나타내는 祭祀의 관념으로 전수되었다. 이러한 관념은 중국인의 생활 관습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현대에 이르러서도 생활과 신앙의 핵심 요소로 작용하며 종교에 관심을 갖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된 원인은 중국의 종교 관념이 기타 다른 문명 발생 지역과 다르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인도의 종교는 자연을 초월하는 것을 강조하려는 경향이 있다. 즉, 자연을 일종의 幻覺작용으로 해석하여 비연속적이고 일시적인 현실성만으로 간주할 뿐이다. 때문에 인도의 종교는 空間과 時間 그리고 방법을 초월하는 절대적인 實在性을 추구하게 되었다.
반면 유태교와 기독교 혹은 이슬람교 등의 종교는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성경의 예를 들면 대지와 하늘은 매우 仁慈한 존재로 인간은 모든 대지를 완전히 統治함을 委託받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물질 역시 신성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으며 장차 천국이 반드시 降臨할 것으로 믿는다. 바로 기독교가 표방하는 육체 부활의 敎義는 비록 사망한다고 해도 물질의 포기는 있을 수 없음을 강조하게 된다. 이러한 종교 정신에 의해 서양은 물질과 자연에 대해 최고의 존경심을 갖게 되므로 근대 과학이 서양에서 발전하게 되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중국에도 자연과의 일체를 강조하는 老莊철학이 종교시 되어 道敎라고 불리지만, 여기서 강조되는 자연은 문학적 경향의 자연주의와 흡사할 뿐 과학적 연구 대상으로서의 자연주의는 성립되지 못하였다.
때문에 중국은 일찍이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여러 가지 우수한 발명 성과를 거두기는 했지만 이같이 탁월한 업적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이론적 기초를 마련하지 못한 채 답보 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혹은 과거의 업적으로 남아 명맥조차 이어 오지 못할 정도로 미미한 결과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결과를 미루어 보면 중국에서는 종교가 일반인의 일상생활에 깊이 관여할 수 없는 상태로 사회가 유지되면서 일찍부터 종교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평가되었다고 여겨진다. 과학과 산업주의를 앞세운 근세에 접어들면서 서양에 비해 낙후하게 된 커다란 원인 중의 하나는 바로 종교의 역할과 평가가 다른 곳에 비해 열세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라고 해석된다.
Ⅱ.원시종교
ⅰ.원시시대 구분의 정의
사전에서 원시시대(原始時代)는 문화가 아직 발달되지 않았던 미개한 시대를 말한다. 보통 중국의 원시시대는 하(夏)․상(商)․주(周) 이전을 말하며, 삼대(三代)를 확실히 문화가 발달한 시대라 꼬집어 말하기 뭣한 부분도 없잖아 있기에 삼대의 종교생활을 약간 가미하고자 한다.
ⅱ.원시신앙
-삼대(三代)이전
1.토템신앙
토템신앙 Totemism이란 인디언족의 언어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어떤 조직적 종교가 아니라 야만인들이 믿는 일종의 자연적인 미신을 말한다. 그들이 숭배하는 물질적 대상이나 동물은 사회나 개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토템은 종족적 토템과 개인적 토템으로 구분되는데 소위 종족적 토템이란 어떤 한 종족이 그 종족의 조상이 어떤 한 토템으로부터 유래되었거나, 어떤 한 토템의 화신(化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만약 이 토템이 뱀이나 곰 혹은 소나 거북이라면 그 종족사람들은 반드시 뱀, 곰, 거북등을 숭배하고 그것들을 신으로 모신다. 예를 들면, 히브리족은 모세(摩西)가 이집트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고 황야에서 황금으로 된 소를 만들어 숭배했다. 즉 그들은 소를 신으로 섬긴 것이다. 인디언이나 아프리카인 중에 야만적인 원주민에게는 지금까지도 이런 신앙이 존재하고 있다. 중국민족에 관해서 고서(古書)에서는 비록 많은 자료를 발견할 수 없지만, 복희씨(伏羲氏)가 팔괘(八卦)를 그리는데 근거를 삼았던 하도(河圖)와 하우(夏禹)가 구주(九疇)를 만드는데 근거가 되었던 낙서(洛書) 등은 말하자면 용마영귀(龍馬靈龜)에서 나온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서중에 기록된 고대제왕(古代帝王)의 형상 중에는 몸뚱이는 뱀이고 머리는 사람의 형태이거나, 말머리에 사람 몸뚱이를 한 것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이는 고대제왕들이 뱀이나 말과 같은 것에서 유래되었음을 믿는 증거가 된다. 다시 말하면 고대제왕의 이름 중에서 요(堯)․순(舜)․우(禹) 등은 모두 토템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중국 변경 각성의 명칭인 민(閩), 월(粤), 촉(蜀), 요(猺) 등도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현녀병법(玄女兵法)』에 “황제가 치우(蚩尤)를 토벌하러 나갈 때 서왕모(西王母)가 그에게 부적을 주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부적이란 역시 토템의 일종으로서 후세에는 귀신을 쫓아낸다고 하여 집에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녔다. 이는 모두 토템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팔괘(八卦)를 재난을 쫓아내는 표지로 한 것과 같은 의미이다 .때로는 팔괘의 그림을 문 위에 그려 넣거나 어린아이들의 몸에 지니고 다니게 하였는데 이는 팔괘를 일종의 신령으로 여겼으며, 종족과 개인을 보호해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런 보편적인 사상은 고대 토템의 유물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에는 개인적인 토템에 관해 알아보자. 강소원(江紹原)이 지은 『수발과(鬚髮瓜)』를 보면 중국민족의 미신에 관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이러한 종교사상은 고대의 토템숭배와 매우 흡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마치 개인의 생년(生年)에 그에 해당하는 동물을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그가 쥐해에 태어나면 그에 해당하는 동물은 쥐에 속하기 때문에 쥐를 그 보호신으로 삼고, 뱀해에 태어나면 그 동물은 뱀이기 때문에 뱀을 보호신으로 삼아서 쥐나 뱀을 감히 해치지 못했음은 물론 경건한 마음으로 그들을 숭배했다. 북방인들의 상당수가 여우에게 제사를 지냈고, 남방인들의 상당수가 뱀에게 제사지냈는데 이러한 현상은 바로 토템에서 유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어떤 사람은 갓난아이의 이름을 뱀 귀신이나 기타 동물귀신의 이름을 따서 붙여주었는데 이는 이렇게 하면 이 아이가 뱀 귀신이나 동물귀신에 예속되어 그 혈통과 친척관계를 맺게 되고 그 귀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어서 잘 성장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앙을 표출하고자 아이 이름을 아묘(阿猫)나 아구(阿狗) 등으로 지었는데 이런 사상은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매우 보편화되어 있는 것이며 오늘날에도 그 예를 다 들 수 없을 정도이다.
다음에는 고대 위인들의 전기를 보자. 고대인들은 모두 그들이 속해있는 성좌가 있는데, 만일 어떤 사람이 호(虎)좌에 해당하면 그 사람이 죽을 때는 반드시 호좌가 나타난다고 믿었고, 용(龍)좌에 속하면 그 사람의 평생에 반드시 용과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믿었다.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대목에서 춘추가 끝나고, 공자 수ㅡ스로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다는 이야기나, 혹은 한고조(漢高祖)가 뱀을 죽이고 의병을 일으킬 때 노인들이 적제자(赤帝子)가 백제자(白帝子)를 죽였다고 통곡했던 이야기뿐만 아니라 사기(史記)에 한고조가 태어날 때 태공이 그의 처와 용(龍)이 교접하는 것을 보았다는 등등의 이야기들은 모두 토템의 유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만물숭배(萬物崇拜)와 범신숭배(汎神崇拜)
세계 종교의 기원은 토템숭배와 만물숭배에서 점차 군신(群神)과 천신(天神)의 숭배를 거쳐 조직을 갖춘 종교로 발전하게 된다. 중국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중국에는 이에 관한 자료가 많지 않을 뿐 아니라 고대 사적에 기록된 대부분의 서적은 신빙성이 별로 없으므로 여기서는 잠시 역대로 내려오는 제사(祭祀)로부터 고대의 신앙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월숭배(日月崇拜)
『예기(禮記)』제의편(祭義篇)을 보면 “교제(郊祭)는 하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으로써 태양신을 주(主)로 하고 월신(月神)을 배제(配祭)로 한다. 하후씨는 저녁에 제사를 지냈고, 은나라 사람은 대낮에 제사지냈으며, 주나라 사람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제사지냈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삼대(三代)에는 모두 일월(日月)을 숭배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제사지내는 시기는 하(夏)나라 정월(正月)로 초봄을 말하며 그 까닭은 봄에는 만물이 생장하므로 그 공(功)이 매우 크기 때문에 봄에 제사를 지내 보답하는 뜻이 된다. 그런데 왜 하늘에 제사지내지 않고 일월(日月)에 제사지냈는가? 그 주(主)에는 “하늘은 형체가 없기 때문에 만물을 밝히는데 해를 백신(百神)의 왕으로 삼고 달로써 보조하도록 했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고대에는 숭배의 대상이 주로 유형의 물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夏)나라는 어둠을 숭배하여 초저녁에 제사지냈고, 은(殷)나라는 밝음을 숭상하여 낮에 제사를 지냈으며, 주(周)나라는 문채(文彩)를 숭상하여 예(禮)가 복잡하였으므로 하루 종일 제사지냈다.
제의(祭義)에는 또 “춘분에는 제단에서 해에게 제사지내고, 추분에는 웅덩이(坎)에서 달에게 제사지낸다. 외제(外祭)에는 해에 대해 동쪽에서 지내고, 내제(內祭)에는 달에 대해 서쪽에서 제사 지낸다”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해에게 제사지낼 때 달에게도 함께 제사지내는 것은 삼대에 통용되었던 방법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삼대의 제례는 삼대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당연히 삼대이전부터 전래된 것이다. 우순(虞舜)때에 이미 ‘육종(六宗)에 제사 지낸다’는 기록이 있는데 육종이란 가규(賈逵)의 말을 빌면 “천종(天宗)의 세 가지는 일(日)․월(月)․성(星)이고, 지종(地宗)의 셋은 하(河)․해(海)․대(岱)이다”라고 했다. 특별히 춘추의 두 시기로 나누어 일월(日月)에 제사지내는 일 외에도 교제(郊祭), 시제(時祭), 사제(蜡祭), 상설풍우(霜雪風雨) 등에 대한 비정기적인 제사에는 늘 일월에도 함께 제사를 지냈다.
성신(星辰)에 대한 숭배
『주례(周禮)』춘관대종백(春官大宗伯)에는 “제물로써 일월성신(日月星辰)에 기원한다”는 기록이 있다. 대종백은 천신(天神)․지신(地神)․인귀(人鬼)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는 사람으로 소를 장작위에 올려놓고 불로 태운다. 주(周)나라 사람은 소가 타는 연기의 냄새로써 신을 감동시켰는데 이것은 고대에 유태인이 소와 양을 태워 여호아께 봉헌한 것과 다름없다. 이러한 제사는 일년 중 여러 차례 거행되거나, 혹은 동지교제(郊祭)를 지내는 둘째 날이나, 음력 시월에 그 다음해를 기원할 때, 혹은 상설풍우(霜雪風雨)가 일정하지 않을 때도 모두 일월성신(日月星辰)에 제사지냈다. 고대에는 일월성신을 삼광(三光)이라고 불렀는데 중국문자에서 보면 숭배나 제사에 속하는 문자들은 모두 ‘시(示)’자로 시작이 된다. 그 이유는 시(示)자가 二(즉윗자)와 川(삼수)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삼수(川)는 곧 일월성(日月星) 삼광을 뜻하는 것으로 하늘의 삼광을 숭배하는 것이 중국에서는 숭배의 기원이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성신(星辰)에 관계되는 제사를 살펴보자. 성신을 제사지내는 제단(祭壇)을 ‘유종(幽宗)’이라 한다. 왜냐하면 성신은 밤에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포(布)’라고 하기도 하고 ‘유(幽)’라고 부르기도 한다. 제사 ‘포’란 두루 펼친다는 뜻으로 별들이 하늘에 두루 펼쳐있기 때문에 ‘포’라 불렀다. 그들은 또 무수히 많은 별들 중에 ‘사명(司命)’, ‘사중(司中)’, ‘사록(司祿)’ 등의 특별한 별에게 제사지냈는데 이 세 별은 문창궁성(文昌宮星)중 제 4, 5, 6의 위치에 해당하며 합해서 삼태(三台)라 불렀으며 이들이 하늘의 기둥(天柱)이 된다고 생각했다.
『주례(周禮)』에는 성신에 대한 제사를 전담하는 관리가 있는데 그를 보장씨(保章氏)라고 부른다. 그는 언제나 모든 지방에 명령하여 각자 자신들이 예속된 별에게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예를 들자면 남방에서는 대화성형혹(大火星熒惑)에 제사지내게 했고 서방에서는 삼성(參星)의 무리에게 제사지내게 하였으며, 왕의 마정(馬政)을 맡은 교인(校人)은 소만절(小滿節)에 사람들에게 방마사성(房馬四星)에 제사지내도록 했는데, 이러한 사실은 모두 고대에 별들에게 제사지냈던 풍습을 증명해 준다.
풍우(風雨)에 대한 숭배
『주례(周禮)』대종백(大宗佰)에 “화롯불로 사중(司中), 사명(司命), 풍사(風師), 우사(雨師)에 기원한다”는 기록이 있다. 풍사는 기성(箕星)이라 하고 우사는 필성(畢星)이라 부른다. 『홍범(洪範)』에 “어떤 별은 바람(風)을 좋아하고 어떤 별은 비(雨)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주(注)를 보면 “기성은 바람을 좋아하고 필성은 비를 좋아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부터 우리는 바람과 비에 제사지내는 것은 별에 지내는 제사의 범위에 포함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제례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구분이 있다. 그것은 대사(大祀)에는 양(玉帛牲栓)을 제물로 쓰고, 차사(次祀)에는 동물과 재물을 쓰고, 소사(小祀)에는 동물로써 제사지낸다. 대사란 하늘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고 차사란 해․달․별에 지내는 제사를 말하며 소사란 사중(司中)․바람(風)․비(雨)에 지내는 제사를 말한다. 이런 구분은 본래 명확하지 않으나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은 고대에는 풍우에 대한 숭배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운신(雲神)과 뇌신(雷神)에 대한 제사가 있었고 운신과 뇌신은 풍륭(豊隆)과 병예(屛翳)라고 불렀으며 국가에는 이들을 관장하는 기구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한서(寒暑)에 대한 숭배
『주례(周禮)』 춘관(春官)중에는 약장(籥章)이라는 일등관리가 있는데 그는 “중춘(中春)의 대낮에 토고(土鼓)를 두드리고 빈시(豳詩)를 피리 불며 여름을 맞이하고, 중추(中秋)에도 이와 같이 하여 겨울을 맞이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약(籥)이란 일종의 악기로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취약(吹籥)으로 피리처럼 짧고, 다른 하나는 무약(舞籥)으로 퉁소처럼 길다. 토고(土鼓) 역시 악기의 일종으로 기와로 구운 다음 양면을 가죽으로 씌운 것이다. 겨울과 여름을 맞이하는 제사 중에 약장이라는 이 일등관은 한편으로는 피리를 불고 북을 두드리며 또 한편으로는 빈풍칠월(豳風七月)의 시를 노래 불렀다. 따라서 『시경』 빈풍칠월편에는 “피리를 불고 노래하며 여름신을 맞이하고 중추의 밤에도 이와 같이 하여 겨울신을 맞이한다”는 등의 내용이 있다.
사직(社稷)숭배
사직이란 토지와 오곡(五穀)의 신을 말한다. 고대에는 스물다섯 가구마다 하나의 사(社)를 세워 서사(書社)라고 불렀고 그 사(社)의 사람들의 이름을 명부에 기록했다. 그리고 100가구당 이사(里社)가 있었고, 2500 가구당 주사(州社)가 있어서 각 사(社)마다 그에 해당하는 나무를 심어 신으로 섬겼다. 『논어(論語)』에 “애공(哀公)이 재아(宰我)에게 사(社)에 관하여 묻자 재아가 대답하기를 ‘하후씨(夏候氏)는 소나무로써, 은나라 사람은 잣나무로써, 주나라 사람은 밤나무로써 사(社)의 신을 삼았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장자(莊子)』인간세(人間世)편에도 방대한 사수(社樹)가 있어 사신(社神)이 머무는 이야기가 있다. 이렇게 보면 고대에는 사신(社神)에게 제사지내는 것이 매우 보편화 된 이야기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대개 입춘과 입추의 오무일(五戊日)에 사신(社神)에게 제사지내는데 봄에는 풍년을 기원하고, 가을에는 그 보답으로 제사를 지낸 것이다. 각 사(社)에는 사장(社長)이 있어서 사(社) 전체의 공동이익을 도모하며 사신에 제사지내는 방법으로 단합을 도모했다. 현재에도 많은 향촌 부락에는 이러한 풍습이 보존되어 있다.
처음에는 단지 자연숭배의 일조이었던 것이 주나라에 와서는 토지의 신으로 우사직 좌종묘(右社稷左宗廟)라는 제사가 생기고 구룡(句龍)을 사에 첨부시켜 토지의 신으로 삼고 기(棄)를 직(稷)에 첨가해서 농업의 신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제사지내는 것으로 변천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이러한 제사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으며 국가의 존망도 완전히 이러한 제사에 관계가 된다고 생각했다.
산천(山川)에 대한 숭배
『주례(주례)』소종백(小宗伯)에 “산천, 구릉, 물가와 평지마다 조(兆)를 설치해 제사지냈다”라는 기록이 있다. 조(兆)란 제사를 위해 쌓은 단(壇)을 뜻하며 일(日)․월(月)․성(星)․해(海)에 대한 제사를 사류(四類)라 하고 오악사독(五岳四瀆)에 지내는 제사를 사망(四望)이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제사들도 매우 일찍부터 생겨난 것이다. 『상서(尙書)』에는 우순(虞舜)이 사악(四岳)을 두루 다니며 사냥하는 기록이 있다.
“2월에는 동쪽으로 순수하셨다. 태산(泰山)에 이르러 제사지내고 차례차례 산천에도 제사지냈다.……5월에는 남쪽으로 순수하셨다. 화산(華山)에 이르러 처음과 같이 제례하셨다. 11월에는 북쪽으로 순수하셨다. 항산(恒山)에 이르러 서쪽에서와 같이 하였다.” 또 “산천에 제사지내고 두루 여러 신에게 제사지냈다.” “새로 열두 주(州)를 마련하고 열두 산을 그 제후들에게 봉지(封地)로 주어 제단을 받들게 하고 하천을 보수했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는 명산대천(名山大川)에 올리는 제사는 천자(天子)와 제후들의 소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기(史記)에서는 관자(管子)의 말을 인용하여 “옛날에는 태산에서 봉선을 행한 자가 72가(家)에 달했다”고 한 것이다.
예기 제법(祭法)에도 산림(山林)․천곡(川谷)․구릉(丘陵)은 백성들이 재물을 모을 수 있는 장소라고 하여 사전(祀典)에 들어있다. 『이아(爾雅)』에는 산(山)에 드리는 제사를 ‘기현(庪縣)’이라 하고 천(川)에 드리는 제사를 ‘부침(浮沈)’이라 정의하고 있으며, 『주례(周禮)』에서는 총괄하여 ‘매침(薶沈)’이라고 불렀다. 소위 ‘매침으로 산림천택(山林川澤)에 제사 지낸다’는 구절에서도 산천에 지내는 제사 역시 매우 중요한 의식(儀式)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각종 행사는 모두 고대 만물숭배의 유산으로서 원시 종교사상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아래에 예를 든 『예기(禮記)』제법(祭法)편의 두 구절은 이들을 포괄할 수 있는 말들이다.
소뢰(小牢)를 태소(泰昭)에 파묻는 것은 사철의 신에 제사지내는 법이며, 감단(坎壇)에서 추위와 더위를 맞고 보냄은 한서(寒暑)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이다. 왕궁에서는 해의 신을 제사지내고, 야명(夜明)에서는 달의 신을 제사지내며 유종(幽宗)에서는 별의 신을 제사지낸다. 우영(雩榮)에서는 가뭄의 신을 제사지내고 사감단(四坎壇)에서는 사방의 신에게 제사지낸다. 산림(山林)․천곡(川谷)․구릉(丘陵)에서 구름을 일으키고 비바람을 이루며 괴이한 현상을 나타내는 것을 모두 신이라고 한다. 천자(天子)는 백신(百神)에게 제사지내고 제후는 그 영지 안에 있는 여러 신에게 모두 제사지내지만 그 땅을 잃었을 때에는 제사지내지 않는다.
왕은 모든 백성을 위해 칠사신(七祀神)을 세우고 이들을 제사지낸다. 칠사신(七祀神)이란 사명(司命)․중류(中霤)․국문(國門)․국행(國行)․태려(泰厲)․호(戶)․조(竈)의 신을 말한다.……제후는 자신의 나라를 위해 오사신(五祀神)을 세우고 이를 제사지낸다. 오사신이란 사명(司命)․중류(中霤)․국문(國門)․국행(國行)․공려(公厲)의 신을 말한다.……대부(大夫)는 삼사신(三祀神)을 세우고 이를 제사지내는데 삼사신이란 족려(族厲)․문(門)․행(行)의 신을 말한다. 적사(適士)는 이사(二祀)를 세우고 이를 제사지내는데 이사란 문과 행의 신을 말한다. 서사(庶士)와 서인(庶人)은 일사(一祀)를 세우고 이를 제사지내는데 호신(戶神)을 세우거나 조신(竈神)을 세우기도 한다.
위의 두 예문은 우리들에게 고대인은 만물과 군신(群神)을 숭배했을 뿐만 아니라 숭배에 있어서도 계급에 따라 달랐다는 인상을 준다. 즉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치적으로 계급이 나뉘어 지면 이와 함께 종교 역시 계급적인 차등이 있었다. 오직 천자만이 하늘에 제사지낼 수 있었기 때문에 천자는 정치적인 우두머리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장 역할을 담당했다.
3.감생(感生)의 신화
이것 역시 종교사상의 일부분이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는 겨드랑이 아래로 태어났다는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는 동정녀로부터 탄생했다는 말이 여기에 속한다. 중국 역사에도 이러한 기록이 있는데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 복희씨의 모친 화서씨(華胥氏)가 이창제(履蒼帝) 영위앙(靈威仰)의 점지를 받으니 무지개가 그녀를 감싸 결국 복희씨를 낳았다.
․ 신농씨의 모친 임사(任姒)는 은인(隱人)중 신용수(神龍首)의 점지를 받고 신농씨를 낳았다.
․ 황제(黃帝)의 모친 부보(附寶)는 큰 번개가 북두칠성을 에워싸고 그 빛이 광야를 환히 비출 때 교감(交感)하여 황제를 낳았다.
․ 소호씨(少昊氏)의 모친 황아(皇娥)는 금성(金星)의 정기가 화저(華渚)로 내려올 때 감응하여 소호(少昊)를 낳았다.
․ 전욱(顓頊)씨의 모친 여추(女樞)는 요광성(瑤光星)의 감응을 받았는데 그때의 모습은 마치 무지개가 달을 관통하는 듯하였고 그 빛이 완연한 흰 색이 되었을 때 전욱을 낳았다.
․ 요(堯)의 모친 경도(慶都)는 삼하(三河)의 적룡(赤龍)과 교감(交感)하였는데 이때 적룡은 지도를 메고 나와 그녀와 혼인하여 요를 낳았다.
․ 순(舜)의 모친 악등(握登)은 커다란 무지개와 감응하여 순을 낳았다.
․ 우(禹)의 모친 수기(修紀)는 명성(命星)과 감응하여 꿈에 교접하여 우를 낳았다.
․ 설(偰)의 모친 간적(簡狄)은 제비 알을 삼키고 설을 낳았다.
․ 기(棄)의 모친 강원(姜嫄)은 큰 발자욱을 밟고 감응되어 기를 낳았다.
이러한 예들은 모두 감생(感生)했다는 상고시대 제왕과 위인들의 이야기로서 우리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매우 황당무계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고대인들은 이들을 이상하게 느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이로 인해 오히려 제왕이나 위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심화되었다. 그들은 하늘에서 내려준 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그들 나름대로의 특이한 점이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시경(詩經)』의 명당악가(明堂樂歌)속에도 “하늘이 까마귀에 명하여 상(商)”을 낳도록 했네”란 구절이 있다. 이밖에 대대로 숭배해온 노자(老子)와 공자(孔子)같은 대성인에게도 감생의 전설이 있다. 『신선전(神仙傳)』에 의하면 노자는 그의 모친이 대유성(大流星)과 감응하여 임신을 했고 임신한 지 72년 만에 노자모(老子母)의 왼쪽 겨드랑이를 째고 나왔다고 기록되었다. 또 어떤 사람은“한 예쁜 옥녀(玉女)란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 팔십이 되어도 자식이 없자 노자가 노란 탄환으로 바뀌어 옥녀가 낮잠을 자는 틈을 타 입으로 들어가자 그녀는 그 알을 삼켜 결국은 잉태하게 되었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태양이 막 뜰려고 할 때 옥녀가 오얏나무를 손으로 당기고 태양을 향해 정신을 집중하고 한참 있으니 일정(日精)이 점점 작아져서 결국 하늘로부터 떨어져 유성으로 변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오색이 찬연한 구슬과도 같았다. 그 유성이 옥녀의 입으로 날아들어 옥녀가 받아들고 삼키니 갑자기 좌측 겨드랑이가 열려 갓난아이가 태어났는데 태어나자마자 아홉 걸음을 걸었다”고도 한다. 이러한 신화는 완전히 불교를 모방하여 생긴 것이다. 불교에서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기술할 때 석가의 모친 마야(摩耶)가 해와 감응하여 잉태하고 보리수 아래에서 우측 겨드랑이를 통해 석가를 탄생시켰는데 태어나서 바로 일곱 걸음을 걸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위의 이야기는 도교의 한 사람이 노자를 추켜올려 석가를 능가한다는 점을 의도적으로 추구한 데에서 생긴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노자는 태양의 화신이고 오얏나무 아래서 좌측 겨드랑이로 태어났으며 태어나자마자 아홉 걸음을 걸었다고 했다. 심지어 석가는 노자의 화신이라고까지 했는데 이는 실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이야기이다.
공자는 유교(儒敎)의 대성인이다. 그러나 그의 가어(家語)에서는 “공자모친 안징재(顔徵在)가 니산(尼山)에서 기도하고 꿈에 흑제(黑帝)를 본뒤 공자를 낳았다”고 기술하고 『춘추연공도(春秋演孔圖)』에도 “공자모친 징재가 큰 연못가에서 놀 때 꿈에 흑제(黑帝)를 보고 공자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사기(史記)』는 정사(正史)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야합(野合)에 의해 공자를 낳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면 그가 말한 야합이란 무엇인가?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남자가 64세를 넘어 혼인하는 것을 야합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고,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한 노인네와 소녀가 예의에 벗어나는 짓을 하는 것을 야합이라 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사마천이 말하는 야합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 우리로서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결국은 비정상적인 의미가 내표되어 있거나 오늘날 흔히들 말하는 사생아를 의미하는 지도 모르겠다. 공자의 탄생에 관한 기록은 그래도 황당무계한 축에는 들지 않는다. 사마천이 몸담고 있던 왕조(王朝)의 개국황제인 한 고조에 대해서는 매우 정중한 표현을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한 고조의 모친 유온(劉媼)이 큰 연못가에서 쉬고 있을 때 꿈속에서 신을 만나게 되었다. 이때 천둥번개가 치고 있었는데 태공(太公)이 가서 보니 교룡(蛟龍)이 그녀 위를 덮치고 있었다. 얼마 지나 태기가 있고 결국 고조를 낳았다”고 기록했다. 사마천은 결국 고조는 태공의 아이가 아니라 교룡의 아이라고 기술했는데 장태염(章太炎)은 이에 대해 강간당하는 장면을 천둥번개 소리로 가장하여 한 고조의 사생을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은 결코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천자(天子)는 용(龍)의 부류였기 때문에 한 고조를 적제자(赤帝子)라고 불렀다. 이것은 옛날 사람들의 사상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좋은 일례라 할 수 있다.
이상에서 열거한 감생신화는 현재 우리들이 보기에는 일소(一笑)의 가치도 없는 것이나 옛날 사람들의 사상 속에서는 한 명의 위인이 탄생함에 있어 특이할 만한 기적이 없으면 그 위대성을 표현하기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이는 마치 예수교에서 예수의 탄생은 동정녀라야 예수와 같은 훌륭한 인물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이치와 흡사하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 고대인의 종교사상으로 보아도 이상할 것이 없다.
4. 무당과 점
원시종교 가운데는 마술성을 띤 무술을 포함한 것이 더러 있다. 중국에 있어서도 예외일 수는 없다. 만일 중국의 무술을 모두 역사적으로 수집하고 설명한다면 수십만 마디의 말로도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 고서(古書)중에는 경(經)․사(史)․자(子) 어느 것을 막론하고 무술적인 색채를 띠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역(易)』의 음양(陰陽)․『서(書)』의 오행(五行)․『예(禮)』의 명당(明堂)․『시(詩)』의 오제(五際) 그리고 『24史』의 오행방기술수(五行方技術數)․자집(子集)중의 귀신인과(鬼神因果), 특히 한나라 때의 참위(讖緯)와 한 이후 불교와 도교의 모든 서적들은 하나같이 신기하고 괴상한 무술(巫術)로 가득하다. 여기서는 그 범위를 축소해서 몇 가지 경적(經籍)을 통해 간단히 고대종교사상의 일면을 살펴보도록 한다.
무당과 점의 기원
무당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전문적으로 신명(神明)에게 기도드리고 복을 내려 주기를 비는 사람으로서 마치 고대 유태의 제사(祭司)와 흡사하다. 이들은 기도할 때 일종의 무용과 기타의식을 사용하는데 남자는 격(覡)이라고 부르고 여자는 무(巫)라 부른다. 이들은 원시종교에서매우 중요한 지위를 차지한다. 고대에는 두 종류의 관리가 있었는데 하나는 사(史)라고 불렀고 다른 하나는 축(祝)이라고 불렀다. 무는 축과 같은 부류였기 때문에 『설문(說文)』에는 “무란 축이다. 그는 신명(神明)을 부를 수 있는 사람으로 남자일 경우 격(覡)이라 하고 여자인 경우에는 무(巫)라 한다”고 되어 있다. 『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도 이와 같은 내용이 있다. 따라서 무당이란 고대의 관리로서 『주례(周禮)』에는 대축(大祝)․소축(小祝)외에도 사무(司巫)․남무(男巫)․여무(女巫)가 있어서 국가에 어떤 큰 일이 생기면 모두 그들의 제사와 기도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다음은 점장이에 관해 알아보자. 점장이란 무당의 일종으로 그들은 전문적으로 남들의 의혹을 풀어주고 길흉을 판단해 준다. 복희(伏羲)는 팔괘(八卦)를 그려 천하의 길흉을 정했고, 홍범(洪範) 구주(九疇)에는 계의(稽疑)를 잘 쓰라는 조항이 있다. 또 『주례(周禮)』에는 태복(太卜)․귀인(龜人)․복사(卜師)․점인(占人)․서인(筮人)․점몽(占夢)등의 관리가 있었다. 『사기(史記)』순경전(筍卿傳)에는 ‘점장이를 활용해 화복을 믿는다’라는 말이 있는데 이로부터 점쟁이의 기원은 매우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당과 점의 의의
무당과 점은 비록 두 종류로 분류할 수 있지만 합해서 무술(巫術)이라고 부를 수 있다. 무술의 범위는 매우 포괄적이고 복잡하다. 그 범위는 대체적으로 사적 중에 열거된 제사에 관계된 명당(明堂)․합궁(合宮)․봉선(封禪)․사사(祠祀)등과 병가(兵家)들이 말하는 권모(權謀)․형세․음양․기교, 술수(術數)의 천문(天文)․역보(曆譜)․시구(蓍龜)․오행․잡점․형법, 방기(方技)의 의경(醫經), 의방(醫方)․방중(房中)․신선……등등을 들 수 있다. 본래 무당의 책임은 오로지 하늘에 제사지내는 일을 전담하는데 있었다. 그들은 백성과 국가를 대표해서 하늘의 도움을 기원할 수 있었고 국가의 모든 안녕과 발전은 전적으로 하늘에 지내는 제사의 경건함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었다. 따라서 고대에는 무사(巫史)등의 관리를 별도로 두어 이런 일들을 관장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호(少皥)씨 이후 구려(九黎)가 질서를 어지럽히고 집안이 모두 무사(巫史)가 됨으로써 무당의 신성한 책임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춘추(春秋) 이후에는 점차 음사(淫祀)가 흥행하고 조축(祖祝)이 많아져서 본래 하늘에 지내는 제사만을 전담하던 무당은 결국 민간의 보통 미신으로 확산되었으며 소위 상전(桑田)의 무(巫), 경양(梗陽)의 무(巫)와 초(楚)의 범무(范巫) 등의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더욱이 한 대(漢代)에는 무고(巫蠱)의 사건이 발생하고 육조(六朝)때에는 이러한 일들이 더욱 빈번히 발생하였다. 당 현종(唐玄宗) 때에는 동악(東嶽)에 제단을 쌓고 심지어 늙은 무당 아마파(阿馬婆)에게 명하여 악신(嶽神)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했다. 또한 왕여(王璵)란 사람은 결국 여자 무당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제물을 긁어모으도록 했고 체왕염(棣王琰)의 두 첩은 서로 총애를 차지하려고 은밀히 무당을 구해 체왕염의 신발에 부적을 집어넣도록 부탁하며 무당을 신주 모시듯 했다고 한다. 질병을 치료하고 복을 빌고 기우제를 지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개인의 화복까지 모두 무당에게 물어 보았다. 이렇게 무당에 대한 미신은 사람들의 마음 깊이 자리 잡고 수천 년에 걸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점도 무당과 동일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구시(龜蓍)를 사용해 점을 쳤다. 『서전(書傳)』에서는 “거북으로 점을 칠 수 있는 이유는 오래 살았기 때문이다. 천 년을 살면 영험하여 비록 짐승이라 할지라도 길흉을 알 수 있다. 시(蓍)로 점을 칠 수 있는 이유는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백 년에 한그루에서 백 개의 가지가 생기고 장수하기 때문에 길흉을 알 수 있다”고 했고 『역계사(易繫辭)』에서는 “천하의 길흉을 점쳐 대업을 이루는데 있어 시구(蓍龜)만한 것이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시구를 사용하여 길흉을 점치고 의혹을 푸는 일은 고대에 매우 보편화된 일이었다. 그러므로 『상서(尙書)』에서도 “당신에게 해결하기 어려운 큰 문제가 생기거든 먼저 당신의 마음에 물어보고 다음에 여러 웃사람들에게 물어보고 다음에는 거북과 시초점에 물어보십시요”라고 했다. 『장자(莊子)』에도 “점 없이 길흉을 알 수 있겠는가?” 라는 기록이 있다. 이밖에 『사기(史記)』, 귀책전(龜策傳), 일자전(日者傳)과 역사서적중 『오행방기술수(五行方技術數)』 등에는 이러한 무술에 관한 기록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무당과 점의 발전
팔괘(八卦)는 이러한 무술의 근원이다. 『역계사(易繫辭)』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역에는 성인(聖人)의 도가 네 가지 있다. 역을 사용하여 무엇인가 말하려는 자는 그 언사를 숭상하고, 역으로써 행동하려는 자는 그 음양변화를 숭상하고, 역으로써 무엇인가 기구를 만들려는 이는 역의 상(象)을 존중하고, 역으로 미래를 점치려는 자는 그 점괘(占卦)를 숭상하여야 한다.
이로부터 『주역』은 상수(象數)로 발전하여 ‘점치는 책’이란 부류에 속하게 되었다. 공자는 십익(十翼)을 지어 역을 높이 평가하고 이로써 신명(神明)의 덕(德)에 통한다고 말했다. 진시황(秦始皇)이 분서갱유(焚書坑儒)할 때에도 주역은 점치는 책으로 분류되어 불태워지지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 점성술이 뛰어난 사람으로는 노나라의 재신(梓愼)․정나라의 비조(裨竈)․진나라의 복언(卜偃)․, 송나라의 자위(子韋)․초나라의 감공(甘公)․위나라의 석신(石申) 등이 있다. 이들은 모두 선견지명이 뛰어난 사람들로 존경을 받았다. 또한 모든 전쟁, 혼인, 후사(後嗣)를 세우는 일 등의 대사는 귀신에 점을 쳐서 결정하여야 했다. 한 무제(漢武帝)는 유학(儒學)을 숭상해서 오경박사를 세웠다. 그때 경방(京方)은 역에서 재이(災異)를 중시했고, 맹희(孟喜)는 역에서 괘기(卦氣)를 중시했는데, 후에 정현(鄭玄)이 주를 달 때는 이들의 학설을 이용했다. 상수학은 송(宋)나라 유학자들에게까지도 여전히 성행하였으며 한송(漢宋) 학자들 사이에도 무술(巫術)에 대한 관심은 상당한 것이었다. 특히 음양오행(陰陽五行)․신선방술(神仙方術)이 사회에 만연되자 하류계층의 사람들은 물론 상류계층의 사람들까지도 빈번히 현혹되어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했으며, 결국 삼천 년 동안의 중국사회가 무술(巫術)의 지배를 받게 된 결과가 되고 말았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중국에서 무술이 발달하게 된 원인
가. 백성들의 지적 수준이 낮았다.
무술은 자연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현상의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발생하게 되었다. 백성들은 생활의 만족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연히 무술의 유혹을 쉽게 받아들였고, 무술이 오랜 세월 동안 전래되면서 결국은 풍속화(風俗化)되었다. 비록 성현호걸이라도 귀신에게 올리는 제사는 계속 봉행(奉行)하였으며 특히 거북점, 잡점, 의방(醫方)․풍수(風水)는 그들 생활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나. 제왕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의 기록을 보면, 제왕이나 대신들이 무술을 믿었던 실례가 대대로 끊임없이 이어진다. 조간자(趙簡子)가 사묵(史墨)에게 점몽(占夢)했던 일, 진시황이 서시(徐市)를 믿었던 일, 한무제가 난대(鸞大)를 믿었던 일,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사례에서 역대 제왕들이 모두 무술을 깊게 믿었음을 잘 알 수 있다.
다. 학자들이 선도적인 역할을 했다.
노장(老莊)․공맹(孔孟)은 비록 무술을 두드러지게 제창하지는 않았지만, 도가(道家) 서적 중『금궤(金匱)』, 『관자(管子)』등에서는 어느 정도 무술적인 색채를 엿볼 수 있다. 노장 이후 방사도교(方士道敎)에서는 신괴의 이야기에서 비롯하여 도인(導引), 비승(飛昇), 단정(丹鼎), 부록(符籙)에 이르기까지 매우 널리 유행했다. 유가경적(儒家經籍)중 『역경(易經)』에 “신비로운 물건을 권장하여 백성의 쓰임에 앞장선다”․“가만히 신명께 찬조하여 시초(蓍草)를 뽑으셨다.” 그리고 “삼대의 명왕이 천지신명을 섬김에 복서(卜筮)를 쓰지 않음이 없었으니”라는 기록이 있다. 자사(子思), 맹자(孟子), 순자(荀子) 등도 공자(孔子)의 학문을 계승하여 역시 제사에 치중하였고 신의 화복을 믿었다. 더욱이 묵가(墨家)는 하늘을 숭상하고(尊天), 귀신을 믿는(明鬼) 정도가 일상생활의 모든 행동에 관계되지 않은 곳이 없을 만큼 심했는데, 그 학설은 귀신파(鬼神派)나 병가파(兵家派) 모두 마찬가지였다. 결국 도가의 음양오행설, 유가의 교사(郊祀)와 사사(詞祀)의 예(禮), 그리고 묵가의 존천(尊天)․명귀(明鬼)의 사상은 모두 일반 백성들의 무술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중국사회가 무술화된 점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삼대(三代)의 종교
신기귀매(神示鬼鬽)의 숭배
이 당시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전래하는 군신숭배(群神崇拜)를 계승하여 신기와 귀매를 믿었다. 신이란 천신을 말하며 천신 가운데서는 호천상제(昊天上帝)가 가장 존귀했고, 그 다음이 오제(五帝)였다. 오제에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동방창제(東方蒼帝)로서 나무(木)를 관장하며 영위앙(靈威仰)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남방적제(南方赤帝)는 불(火)을 관장하며 적표노(赤熛怒)라고 부른다. 세 번째는 중앙황제(中央黃帝)로서 흙(土)을 관장하며 함추뉴(含樞紐)라 부르고, 네 번째는 서방백제(西方白帝)로서 쇠(金)를 관장하며 백초거(白招拒)라 부르고, 다섯 번째 북방묵제(北方墨帝)는 물(水)을 관장하고 협광기(叶光紀)라고 부른다.
『예기(禮記)』에는 호천과 오제에 제사지내는 규정이 있는데 이 사상은 순전히 왕을 존중하는 관념으로부터 나온 것으로서 인간세계의 국가조직을 빌어 천국의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호천상제는 아마 천국에서의 군왕 같은 존재일 것이고, 그 나머지 오제군신(五帝群神)은 천국에서는 왕후(王侯) 및 신하나 재상으로서 호천상제를 위해 사역을 했을 것이다. 인간세계에서의 군왕은 역시 호천상제가 보낸 사람으로서 오제의 화신이며 하늘을 대신해 도(道)를 실행한다.
천신 가운데는 또한 사중(司中), 사명(司命), 풍사(風師), 우사(雨師), 뇌신(雷神), 운신(雲神)과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신들이 있는데 각각 하늘의 직분을 수행한다.
천신 이외에 또 일종의 인신(人神)이 있다. 『국어(國語)』의 주어(周語) “사람의 얼굴을 하고 흰 털로 덮여 있으며 호랑이 손톱을 달고 도끼를 들고 있는 신이 있는데 이를 욕수(蓐收)라 부른다. 그는 하늘에서는 형신(刑神)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욕수란 가을의 신을 말한다. 『예기(禮記)』의 월령(月令)에도 “음력 칠월에 그 제왕은 소호이며, 그 신은 욕수이다”란 내용이 있다. 추령(秋令)은 주로 형벌을 맡았기 때문에 형신(刑神)이라 한 것이다. 『묵자(墨子)』명귀편(明鬼篇)에도 이와 동일한 기록이 있다. 구망이란 사목(司木)의 신으로 봄에 속한다. 그러므로 『예기』월령편에도 ‘음력 정월 그 신은 구망이다’라고 한 말이 있다. 복희(伏羲)는 몸은 뱀이고 얼굴은 사람 얼굴이었으며, 여와(女媧) 역시 몸뚱이가 뱀이었고, 신농씨(神農氏)는 소의 머리를 하고 있었다. 이러한 기괴한 현상들은 모두 인신(人神)의 부류에 해당된다.
다음에는 기(示)에 관해 살펴보자. 기란 곧 땅의 신령을 말한다. 사직(社稷)․오악(五嶽)․산림(山林)․천택(川澤) 등 주위 온갖 사물의 신이 모두 땅의 신령이다. 그 가운데 사직이 가장 중요하다.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을 말하며 유덕한 자를 종묘(宗廟)에 공신(功臣)으로 추대해서 부제(附祭)할 수 있다. 『좌전(左傳)』에는 “공공(共工)씨의 아들 구룡(句龍)을 후사(后士)라 했고, 열산(烈山)씨의 아들 주(柱)를 직(稷)이라 했다”는 기록이 있고 제법(祭法)에는 “여산씨(厲山氏)가 천하를 얻게 됨은 그 아들 농(農)이 백곡(百穀)을 심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 하(夏)가 망하고 주(周)의 기(棄)가 계승하게 된 것은 직(稷)에 제사지냈기 때문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토지와 곡식은 민생에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므로 사직에 제사지내지 않는 임금은 무도한 임금으로서 반드시 나라를 잃게 되었다. 갈백(葛伯)이 제사를 지내지 않자 탕(湯)은 그를 정벌했고, 무왕(武王)이 주(紂)의 죄상에 대해 언급할 때 ‘마음이 혼란하고 어지러워 제사를 자기 멋대로 지냈다’라고 한 것은 그들이 제사를 지내지 않기 때문에 ‘사직을 바꾸어 놓겠다’는 명분으로 삼았다. 사직을 바꾸어 놓겠다는 뜻은 곧 그 나라를 멸망시키겠다는 말이다. 이 밖에 오사(五祀)․오악(五嶽)의 신에게 제사지내는 내용이 『산해경(山海經)』에 수백 번 언급되었다. 『초사』중 굴원(屈原)의 구가(九歌)․상군(湘君)편에 있는 상수(湘水)의 신은 때로는 상부인(湘夫人)이라고 부르며, 진박사(秦博士)는 이를 요(堯)의 두 딸 즉 아황(娥皇)․여영(女英)이라고 했고, 『포박자(抱朴子)』에서는 빙이(憑夷)가 강을 건너다 익사해서 하백(河伯)으로 봉해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굴원과 장주 모두 같은 논리이다. 또 낙빈(雒嬪)이라고 불리는 것도 역시 수신(水神)인데 조자건(曹子建)의 낙신부(洛神賦)에서의 낙신은 바로 이 신을 가리킨다. 이런 신들을 열거하자면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다음에는 귀(鬼)에 관해 알아보자. 귀란 본래 돌아간다(歸)의 뜻이다. 『설문(說文)』에서는 “사람이 돌아가는 것을 귀(鬼)라 한다”고 했고 『석문(釋文)』에도 “귀(鬼)란 돌아간다는 뜻이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은 죽은 사람을 귀인(歸人)이라 했다. 『예운(禮運)』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기(氣)는 하늘로 돌아가고, 백(魄)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로 미루어 보면 옛사람들은 현세 이외에 귀(鬼)의 세계가 있어서 사람ㅇ이 죽으면 현세로부터 귀의 세계로 돌아가고 현세에 못다 푼 한을 귀의 세계로 가서 풀 수 있으리라고 깊게 믿었다. 이러한 일들은 『좌전(左傳)』에서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장공(莊公) 8년의 “제후(齊後)가 패구에서 사냥을 할 때 큰 멧돼지가 나타났다. 양공의 종자(從者)가 그것을 보고 ‘공자팽생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나 희공(僖公) 10년의 “호돌이 곡옥(曲沃)으로 갔다가 태자 신생(申生)을 만났다. 태자는 ‘상제(上帝)께서는 나에게 죄지은 자를 벌하도록 허락하셨다’고 말했다”는 기록이나 문공(文公) 2년에 희공(僖公)이 신주(神主)를 민공(閔公) 위에 놓자 하부비기(夏父弗忌)가 “새로운 귀(鬼)는 매우 크고 옛날 귀(鬼)는 매우 작은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한 것 등이다. 새로운 귀는 희공을 가리키고 옛날 귀는 민공을 가리킨다. 또 “선공(宣公) 15년, 위나라의 과(顆)가 진나라의 두회(杜回)와 전쟁을 할 때 한 노인이 풀을 비끄러매어 두회에게 대항하는 것을 보았다. 두회는 말에서 떨어지고 체포되었다. 밤에 그의 꿈을 꾸었는데 그 노인은 ‘나는 당신이 시집보내준 그 부인의 아버지다’라고 말했다”는 것도 있다. 이 밖에도 『좌전』 속에는 이러한 종류의 기록이 매우 많다. 『묵자』명귀편(明鬼篇)에는 인과응보적인 사례가 더욱 많다. 예를 들면 주의왕(周宜王)이 무고하게 두백(杜伯)을 죽이자, 두백은 붉은 화살을 겨눠 왕을 쏴 죽였다. 연간공(燕簡公)이 장자의(莊子儀)를 무고하게 죽이니 장자의의 귀신이 나타나 붉은 장대를 메고 연간공을 치자 연간공은 수레 위에 쓰러져 죽었다. 또 관고(觀辜)․중리요(中里徼)……등등의 이야기가 있는데 이들은 모두 귀신의 보복에 관한 것으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처럼 기록되어 있다.
다음에는 도깨비에 관해 살펴보자. 도깨비란 일종의 괴물이다. 『주례(周禮)』하관(夏官)에 “방상(方相)씨란 도깨비가 있었는데 곰의 가죽을 입고, 네 개의 황금 눈을 하고, 위에는 검은 색 아래는 붉은 옷을 입고, 창을 거머쥐고 눈을 부릅뜬 모습으로 석목(石木)의 괴물 방량(方良)이라는 도깨비를 내몰았다”는 기록이 있다. 『추관(秋官)』에는 정씨(庭氏)가 전문적으로 괴이한 새(妖鳥)를 쏘아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방량(方良)과 요조(妖鳥)는 모두 도깨비의 일종을 말한다. 『관자(管子)』에는 “마른 못의 도깨비를 경기(慶忌)라고 부른다. 그는 마치 사람과 같이 생겼으며 키는 4촌(寸)에 누런 옷을 입었고, 누런 색 관을 썼으며 누런 색 우산을 갖고 다닌다. 그는 또 작은 말을 타고 미친 듯이 질주하는 것을 좋아하여 하루에 천 리를 왕복할 수 있다고 한다. 마른 내(川)의 도깨비는 위(虫+爲)라 하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고 그 모습은 뱀과 같으며 키는 8척이고 소리를 지르며 고기와 자라도 잡을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물매(物鬽)이다. 하(夏)의 우(禹)는 구정(九鼎)에 도깨비의 모양을 만들어 백성들로 하여금 신간(神奸)을 알도록 하였다는 기록으로부터 옛사람들은 모두 이러한 도깨비를 깊이 믿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고대인들은 이러한 신기귀매(神示鬼鬽)를 헤아리지 못하고 두려워했으며 이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숭배하게 되었으며 국가에서도 이 일을 전담하는 관리를 설치하게 된 것이다. 예를 들면 『주례(周禮)』춘관(春官)의 대종백(大宗伯)은 천신인귀지기(天神人鬼地示)의 예(禮)를 전담하여 동지 때는 천신․인귀에 제사지내고 하지 때는 지기(地示)물매에 제사지냈는데 이런 것은 모두 국가의 중대한 행사로서 거행되었다.
Ⅲ.참고자료
『세계의 종교』/니니안 스마트/예경
『종교와 민족』/이상훈/한국정신문화연구원
『중국종교사상사』/왕치심/이론과실천
『중국문화의 이해』/이수웅/대한교과서
http://home.hanmir.com/~hellochina/culture-info/history-zongjiao.htm
http://www.hoseo.ac.kr/%7Edong/sdy1.html
네이버 국어사전
국립 안동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중국문화의 이해 발표 수업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