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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공동체가
저널리즘 공동체에 주는 시사점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몸살을 앓기 시작한 지 만 2년을 넘겼다. 바이러스의 명칭은 코로나‘19’지만 20‘22’년에 들어선 우리 인류는 이 기나긴 터널의 끝을 아직도 가늠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생각보다 빨리 백신이 나와 벌써 몇 차례 접종했고, 효능을 갖춘 치료제도 의료 현장에 본격 투입될 예정이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전파력을 높인 변이 바이러스의 파도를 어쩌면 그 누구도 피해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방역의 끈을 놓아버려서는 안 된다. 어차피 걸릴 사람은 걸리고 죽을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못 절박해 보이는 자포자기의 심정 뒤에는 ‘설마 그게 나겠어?’라거나 ‘혹여 내가 걸리더라도 별일 있겠어?’라는 심리가 작동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 사회에 걸리는 막대한 부하와 그에 수반되는 희생은 누가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
‘죽음의 정치(necropolitics)’라는 용어가 있다. ‘삶·생체를 주관하는 정치(biopolitics)’와 그 권력(biopower)을 강조했던 미셸 푸코(Michel Foucault)의 개념을 연장·전도시킨 것으로서, ‘살 자와 죽을 자’를 가르는 근대 국가의 정치적 특성을 지목하기 위해 아쉴 음벰베(Achille Mbembe)가 사용한 말이다. 코로나19 관련 정책은 필경 이런 정치의 불가피성을 보여주는 최신 사례라 할 만하다. 제아무리 방역의 ‘과학성’을 강조한다고 해도, 그것이 국가적 정책의 일환이 되는 한, 방역은 과학과 정치의 경계에서 작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진 결정은 특정한 누군가를 죽음에 이르는 부수효과를 필연적으로 발생시킨다. 그간의 우리 정치가 되도록 많은 사람을 살리려 하는 정치였다고 믿지만, 우리 정치의 야누스적인 얼굴 한쪽에는 누군가의 삶 혹은 편리를 위해 다른 누군가의 죽음을 사실상 방치하거나 부추기는 정치도 있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런 정치는 과학의 이름으로 비과학을 동원했다. 우리 언론의 일부 역시 그런 질 낮은 정치의 파트너가 되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팬데믹 시대, 우리 언론이 가장 많이 참조한 전문가
정재훈 가천대 의대 예방의학교실 교수는 코로나19의 막막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온 2년간 우리 언론이 가장 많이 참조한 전문가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친절하고 차분한 어투와 간결하되 과학적 기반을 잃지 않는 문장 덕분에, 솔직히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던 우리 언론의 코로나19 관련 보도 가운데 그나마 조금이라도 합리적이고 정보력을 갖춘 기사가 나올 수 있었다고 본다. 코로나19 이전까지만 해도 시쳇말로 찬밥 신세였던 감염병과 예방의학이 갑자기 모든 이목을 끌어들이는 전문 분야가 됐다. 정부와 언론을 비롯한 모든 사회 부문이 상대적으로 소수의 ‘진짜’ 전문가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에 정재훈 교수는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의 전문지식과 시간을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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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교수 <출처 - 필자 제공>
“이렇게 될 줄은 전혀 몰랐어요. 제 인생이 이렇게 될 줄은. (하루에도) 이상한 문자 (메시지) 200개씩 오고.”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찾아온 인생의 황금기를 말하는 걸까?
“안티 백신하시는 쪽에서는 제 주소도 알고 전화번호도 알아요. 메일을 써서, ‘집주소랑 핸드폰 번호 다 알고 있다’(라고 위협도 해요). (저더러)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지만요. (웃음) 대개는 제가 과학적으로 설명하거나 반박하는 주장이예요. 근데 종종 과학적 논리를 빙자했지만, ‘정부와 화이자가 비밀 협약을 해서 50년 동안 정보 공개가 안 되는 내용이 있다’는 식으로 애초부터 반박이 불가능한 그런 주장을 펼치는 분들도 많아요.”
정재훈 교수가 백신의 효과성과 접종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는 전문가였기에, 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집단이나 그들이 배경으로 삼고 있는 유사 전문가로부터 다양한 비과학적 공세를, 그리고 때로는 위협까지 받는 상황에 처해 있는 듯했다. 치러야 할 유명세라기엔 너무 씁쓸한 일인데, 혹여 위축되거나 하는 일은 없었을까?
“저도 진지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제 와서 그 (논리) 구조를 보니까, 사회적인 인식의 분포와 되게 비슷한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오늘 다른 전문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왔는데, 어찌 보면 그런 사람이 일정 비율로 존재하는 게 인류의 생존에 있어서는 나쁘지 않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틀릴 수도 있잖아요. 우리가 틀려서 다 죽으면 안 되니까 저렇게 항상 딴죽 거는 사람들의 비율이 한 5~10% 정도 있는 게 종의 영속이라는 관점으로 본다면 나쁘지 않겠다. 그 이야기하면서 막 웃었어요.”
유쾌하다. 그리고 낙천적이다. 게다가 그런 순간마저도 과학(철학)적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다’고 인정하고, 그런 의심하고 반대하는 인물의 존재가 인류 전체의 생존이라는 진화생물학적 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불가피하고 바람직한 일일 수도 있다고 받아들인다. 반대자에 대한 포용을 넘어 그 유용성을 수긍한다는 점에서 사회철학적이기도 하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는 않아요. 그런 분들도 결국 (감염돼서) 죽을 수 있잖아요. 그래서 그분들을 살려야 하는데, 백신 반대하시는 분들이 감염되면 (그분들이 공격했던) 저나 다른 선생님들이 치료하고 역학조사하고 그래야 하는 건데, 아이러니한 일이죠.”
당신이 내 의견에 반대할 수 있다는 걸 존중한다. 내가 틀렸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당신을 살리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래서 마냥 웃을 수만은 없다. 과학자이자 의료인으로서 그가 품고 있는 신념과 윤리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같은 과학자이자 의료인을 표방하면서도 그와는 확연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이들이 있다. 어떤 이는 자신의 전문성을 넘어서, 전문적 견해로 포장된 정파적 발언을 한다. 또 어떤 이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지식을 갖고 있음에도 자신의 과거 혹은 현재 직위를 팔아 대중을 선동한다.
우리 나라에 보건 전문 의료 기자가 성장하기 어려운 이유
“사실상 이 분야에 관련된 연구 능력이 전혀 없는 분들임에도 (정부가 발주하는 연구 과제 같은 것을) 다 가져가서는 밑에 애들 시키는 경우도 있죠. 그나마 그분들은 백신 반대 같이 비과학적인 행동을 하시지는 않고 그냥 연관된 연구를 하는 것이니까 차라리 낫긴 한데, 경제적 동기뿐 아니라 정치적 야심을 갖고 계신 분들이 있어요. 그분들이 가끔 보이는 (비일관적이거나 비과학적인) 모습은 자신의 정치적 위치가 흔들릴까 봐 그런 거죠.”
연구를 직접 수행해온 전문가도 아니고, 기껏해야 인접 분야에 근무해온 이력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전문성을 훌쩍 뛰어넘는 과감한 발언을, 그것도 때로는 무책임하게 펼치는 걸 매체들이 사실상 방치하거나 방조하게 된 이유는 뭘까?
“방송사에서 저를 불러서 나갈 때마다 제가 작가들한테 (몇 번) 물어봤어요. (전문성이 충분치 않은) 일부 선생님들을 섭외하는 목적이 뭐냐고요. 보도 전문 채널의 경우에는 코로나19 상황에 관련된 보도를 하루 종일 수행하니까 반드시 채워 넣어야 할 자리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도 그렇고 실제 전문성을 지니신 현역 전문가들은 (수행해야 할 기본 업무로 인해) 아예 나올 수 없는 시간대나 요일이 있거든요. 그 남은 자리를 그런 분들이 채워주고 계시는 거예요. 이 분야에 대해 충분히 전문적인 이야기를 해줄 수 있는 사람들은 매우 제한돼 있고, 그 가운데서도 저처럼 그나마 방송에 나가서 이야기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은 또 일부에 불과하니까, 전문성이 부족한 분들이 잘못된 정보 전달을 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 거죠.”
그렇다. 전문가들 가운데는 매체 노출을 선호하는 이도 있고 회피하는 이도 있다. 함부로 말할 수는 없지만, 깊이 있는 연구자와 전문가는 대체로 매체 노출을 꺼린다. 전문 분야에 종사하느라 바빠서 매체에 나갈 시간이 없는 경우가 태반이고, 혹 전문가의 사회적 책임 차원에서 매체에 나간다고 하더라도 매체란 것의 특성상 전문성이 희생되는 일도 허다하다. 게다가 매체에 노출돼서 작은 영향력이라도 얻게 되면 그것을 질시하거나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해 그 전문가를 부당하게 공격하는 일마저 발생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문적 역량이 부족한 이들 가운데서 오히려 더 매체 노출을 바라고 즐기는 경우를 보는 건 매우 흔한 일이다. 그들은 애초부터 희생시킬 전문성이 없고, 특정한 욕심을 품고 자신이 속하거나 인접한 분야의 전문성을 의식적으로 훼손한다. 그리고 정치, 각종 이해집단, 나아가 언론이 그런 그들을 의도적으로 활용하거나 비의도적으로 방치하게 되는 매체 환경 속에 우리는 내던져졌다.
“저희랑 분야가 조금만 달라도 논문에서 쓰는 단어도 표현도 달라지잖아요. 예를 들면 역학에서 쓰는 단어랑 다른 분야에서 쓰는 단어가 (다르거나, 같더라도) 뉘앙스가 다르거든요. 그럼 역학 연구를 안 해본 분들은 (역학에서 쓰는 용어나 표현을) 또 다르게 해석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분들도 전문가 명찰을 달고 방송에 나오잖아요. 그렇다고 제가 대놓고 ‘저 선생님은 관련 논문을 하나도 안 썼어요. 원래 이쪽 분야를 보던 분이 아니에요’라고 말할 수가 없잖아요. 결국 과학자가 자신의 품위를 어디까지 내려놓게 되느냐의 문제인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건 나설 데와 그렇지 않을 데를 가리지 못하는, 아니 의도적으로 가리지 않기도 하는 (유사) 전문가의 문제기도 하지만, 그들에게 본래 전문가와 동등한 위치를, 그것도 ‘토론’이라는 이름으로 보장하는 매체의 문제기도 하다. 나아가 그걸 분별하고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책임질 수 있는 역량과 윤리를 갖추지 못한 저널리스트들의 한계다.
“저는 그게 우리 사회의 전체적인 역량을 반영한다고 생각해요. 인력풀은 한정돼 있는데 관련 인력을 요구하는 시장은 너무 커서 개별 행위의 수준이 떨어지게 되는 거죠. (…) 제가 며칠 전에 셰리 핑크(Sheri Fink)라는 뉴욕타임스 기자를 만나 인터뷰를 했어요. 그분은 의사 출신 기자인데 미국에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왔을 때 홍수에 잠겨버린 병원 관련 르포 취재를 해서 유명해진 사람이죠. 전기가 다 끊겨서 중환자실 환자를 옮겨야 하는 상황에서 누구를 먼저 옮길 것인가에 대해 의료진이 판단을 내려야 했고, 옮기지 못할 환자를 안락사시킬 수밖에 없었던 일을 다룬 기사를 통해 퓰리처상을 탔어요.”
맞다. 셰리 핑크.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홍수와 단전을 겪어야 했던 병원에서 그들 스스로도 지치고 목숨이 위태로웠던 의사들이 긴급히 내려야 했던, 삶과 죽음을 가르는 결정의 연대기’를 써서 2010년 퓰리처상 탐사보도 부문 수상자가 됐던 인물.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신경과학 박사를 취득한 뒤 의학박사 자격까지 얻었던 전문가. 의학전문대학원 졸업식에 참가하는 대신 국제의료단의 일원으로 코소보 전쟁 피난민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에 매진했을 만큼 사회적 의식이 강했던 그는, 여러 뛰어난 취재와 저작을 선보이며 미국에서 가장 독보적인 보건 전문 의료 기자로 자리매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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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0월 22일 단계적 일상 회복을 위한 공개토론회에서 발표 중인 정재훈 교수 Ⓒ뉴스1
“예전에 그분 책을 매우 감명 깊게 읽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그분이 코로나19 취재를 위해 한국에 와서 저에게 연락을 했길래 응했죠. 그분이랑 이야기하면서 든 생각이 뭐냐면, ‘저런 정도의 깊이 있는 취재, 시각을 제공해주면서도 전문가인 사람들이 우리 토양에서 나올 수 있을까’라는 거였어요. 신경과를 전공한 의사이고, 기초의학을 연구한 다음에 기자 생활을 하고, 이제는 (보건의료 분야) 르포 작가로 전념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 정도의 사람이 우리나라 의료나 각 분야마다 존재할 수 있을까. 결국은 시장의 규모, 시장의 크기인 거잖아요.”
자료만이라도 충실히 모아 데이터 저널리즘과 분석에 치중한다면
코로나19 문제를 최전선에서 다룰 수 있는 전문가의 역량은, 그런 최적의 전문가를 선별해 최상의 저널리즘으로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저널리스트의 역량과 만났을 때, 최고의 사회적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음을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우리에겐 뭐가 부족한 걸까?
“제가 궁금해서 그분에게 여쭤봤어요. ‘선생님은 어떻게 이걸 할 수 있어요?’라고요. 그랬더니 기본적으로 (소속된 언론사에서) 돈을 많이 준대요. 의사를 하는 것만큼 수입도 되고 명성도 얻을 수 있어서 자기는 (전문기자로서의) 이 길이 나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대요. 그러니까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나마 사정이 낫다고 하는) KBS 의학 전문기자만 해도 페이닥터 월급의 반 정도밖에, 아니 반도 안 되죠. 객관적으로 가능한 조건이 아닌 거예요. 그래서 저는 대안도 생각해 봤어요. 과학적 방법론을 잘 알고 자료 해석이 가능하면 어떤 분야든 비교적 양질의 기사가 나갈 수 있을 거라서. 제가 요즘에 연락하는 기자가 상당히 많거든요. 그 기자들 중에는 그런 잠재력을 보이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똑똑하기 때문에 빨리 이 분야를 벗어나고 싶어 해요. (웃음) 그걸로 훈련받고 난 다음에 경제부나 정치부로 빨리 가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는 경로를 걷고 싶어 하는 거예요.”
정확한 우리 언론의 현주소를 다시금 정재훈 교수의 날카로운 관찰을 통해 확인하니 웃음의 뒤로 쓴웃음이 배었다.
“매일 기사 써야 하는데, 기사량은 많고, 브리핑은 매일 나오고 그러니까, 일진 기자라고 해도 나이가 저보다 어린 기자들이 많이 고생하죠. 그동안 친해져서 형·동생도 하고 그랬는데, 지난 11월 초에 ‘형, 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 이제 가요. 후배 잘 받아주세요.’ 그러는 거예요. 그리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죠.”
전문 분야를 취재하겠다고 나선 기자가 적정 수준의 전문적 식견을 갖추지 못한 건 그나마 이해할 수 있다. 처음부터 전문성을 띠고 오는 게 가장 좋겠지만, 여러 여건상 그렇지 못한다 해도, 해당 분야에서 말 그대로 ‘구르면서’ 적정한 전문성을 갖춰 대중성과 조화시키는 ‘지식 브로커(knowledge broker)’의 역할을 하는 게 현대 저널리스트의 핵심 역량이고 저널리스트 육성 체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가 아닐까.
“솔직히 해당 분야 전문가가 아니면 잘 모를 수밖에 없는 문제죠. 저처럼 (기자들의) 전화를 받아주는 전문가가 거의 없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고요. 또 너무 작은 언론사가 너무 많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유력 중앙일간지인데도 지금 코로나19 관련 기사를 쓰는 기자가 세 명이에요. 경제지나 다른 쪽으로 가면 두 명이나 한 명이 되는 식이죠. 그날 브리핑 정리해서 내고, 이슈가 있으면 전문가 몇 명에게 전화해서 기사 써서 내는 게 다인데, 그럼 심층 기사는 누가 쓰겠어요. 심층 기사 쓰는 기자 있죠. 시사IN 같은 주간지에. 물론 취재 인력이 여섯 명인 곳도 있어서, 데스크에서 기사를 비트는 문제가 가끔 있지만, 그래도 기사 내용 자체는 가장 정갈해요. 분명히 인력과 시간의 문제기는 한데, 저는 (모든 언론사에 한두 명씩의 코로나19 담당 기자를 두는 것조차도) 낭비적인 부분이 있다고 생각해요. 규모가 있는 언론사에서 적정 인력을 둬서 같이 깊이 있는 기사를 쓰고 잘못된 부분을 걸러주는 역할을 해주는 (선택과 집중이 있는) 방식이라면 나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백신이나 방역 패스 같은 이슈에서도 서로 반대되는 의견이 있다고 하더라도 (방역 문제뿐 아니라 기본권 문제나 사회과학적 시각을 골고루 참조한) 잘 정리된 논의 지형이 있었다면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걸 못한다면 적어도 자료만이라도 충실히 모아서 분석한 데이터 저널리즘에 치중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올바른 과학 커뮤니케이션, 제대로 된 보건의료 홍보를 위해
정재훈 교수의 대단히 현장감 있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확실히 너무 잡다한 이슈를 모두 다루는 데 다들 몰입하는 언론 환경의 문제, 즉 분야마다 적정한 전문성과 규모의 경제를 이뤄 ‘윈윈’하는 시스템을 갖추지 못한 한계를 다시금 절실히 확인하게 된다. 비록 예상했던 바이긴 했지만, 보건의료 분야의 사이비 전문가 문제를 논하던 것이 결국 언론 분야의 미숙함과 무질서함을 가감 없이 지적하는 것으로 이어지자, 내심 부끄러워졌다.
“저는 교수님을 만나면 꼭 해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어요. 과학을 다룰 때, 그리고 방역 문제를 다루는 경우 (정부나 여러 행위자들이) 너무 레거시 미디어에만 치중한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카카오톡에 퍼지는 메시지나 유튜브 영상, 그리고 심지어 외국에서 만들어진 클립 같은 것을 사람들이 훨씬 더 신뢰하는 세상이 됐는데, 정부나 기타 기관의 소통 방식은 전혀 뉴미디어 친화적이지 않아요. 차라리 경제 유튜버나 게임 유튜버들에게 비용을 지불하고 홍보하는 게 훨씬 더 나은 방식일 수 있어요. 그래서 제가 아예 중립적인 유튜버 리스트를 정리해서 (관계자들에게) 준 적도 있거든요. 그런데 검토 해보겠다고 하더니 결국은 안 되더라고요. 위에 있는 결정권자들이 그걸 안 보니까요.”
정부에 있는 의사결정자들, 기성 매체의 관계자들, 그리고 나 같은 매체 연구자들 모두 뜨끔한 마음으로 귀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적인 조언이다. 물론 세대에 따른 매체 이용 방식의 차이가 있어서, 기성 매체를 배제한 채 신흥 매체로 무게중심을 옮기는 게 반드시 ‘보편적으로’ 바람직한 건 아니겠지만, 올바른 과학 커뮤니케이션, 제대로 된 보건의료 홍보 행위를 하기 위해서는 정보 이용자들의 특성과 매체 관습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정재훈 교수처럼 전문성과 대중적 설득력을 지닌 뛰어난 전문가가 다수 나서준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는 일일 터이나, 그 전에 정책 담당자들이, 그리고 기성 매체가 제대로 된 전문가의 지식과 권고를 제대로 된 커뮤니케이션 형식으로 전달하는 것, 나아가 기성 매체와 신규 매체를 포괄해 허위 조작 정보와 조직된 반지성주의에 대항하는 더 효과적인 매체 비평을 행하는 것의 중요성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인터뷰 중간중간 정재훈 교수는 ‘저도 빨리 제자리로 돌아가려고 해요’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제대로 된 전문지식을 정책 결정자, 매체, 대중에게 전달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어려운 일인지를 그는 절감하는 듯했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를 좋은 방향으로 훈련한 것 같았지만, 그로 인해 잃어야 했던 것도 많았기 때문일 테다.
“저도 이제 슬슬 ‘빵꾸’가 나기 시작해요. (웃음) 물론 연구 성과야 충분히 남겼지만, 제 전문 분야의 일도 그렇고, 사람들이 ‘얘도 이제 번아웃되기 직전이구나’라며 걱정하거든요.”
이렇게 코로나19 국면에서 우리 사회가 발굴하고 의존했던 한 좋은 전문가가 다시 매체를 회피하는 길로 접어드는 걸까. 그를 지치게 하기보다 우리와 함께 선순환 구조 속에 들어가게 할 방법은 없는 걸까.
“저를 도와주시는 선배 선생님들이 꽤 많아요.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보고 조언해주시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시는 분들이죠. 제가 총대를 메고 쓰는 셈이죠. 공개적인 발언을 잘 안 하시는 분들이지만, 저를 통해 더 좋은 정보를 사회에 전달하고 싶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사실 가장 큰 위로가 되죠. 논문 같이 썼던 좋은 교수님들, 훌륭한 연구자들이 내가 쓰는 글을 지지해주고 도와준다는 게, 저를 버티게 하는 가장 큰 힘 중에 하나예요.”
과학 공동체, 학문 공동체, 전문가 공동체의 건강함은 ‘피어 리뷰(peer review)’ 즉 동료들이 해주는 진정한 피드백으로 유지된다. 정재훈 교수의 과학자 공동체는 그런 건강함을 갖추고, 적절한 사회적 역할 분담까지 수행해내는 모양이다. 그들이 모습이 다른 학문 공동체나, 특히 저널리즘 공동체에 많은 시사점을 주길 바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