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차분히 창가에 앉아 있다.
조금 후면 그녀가 오겠지.
창밖 도로에는 차들이 꽉꽉 들어차 있다.
인도(人道)에는 활기찬 사람들이 걸어다닌다.
이게 예전의 보통 만남이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오늘이 마지막 날.
제발 늦게 나왔으면......
우습다.
오늘이 아니면 다시 볼 수 없다.
그리고 오늘 보면 또 볼 수 없다.
그녀는 조금 늦나 보다.
지금 약속 시간이 거의 다 되어간다.
깜짝이야!
"야! 많이 기다렸니?
미안.
약간 늦었어."
명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애써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아니.
별로.
괜찮아."
함께 식사하는 동안 그녀는 줄곧 즐거워 보였다.
그녀는 Paris로 돌아가서 하게 될 일들을 얘기해 주었다.
"돌아가자마자 내년 2월까지 전시회를 준비하게 될거야.
그리고 나서 다시 돌아오게 돼."
갑자기 침묵.
"선배, 나 어리지?"
"아니야."
벌써 헤어져야 할 시간이 왔다.
사실은 만나자마자 얼굴을 바라보며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안녕!
저녁 늦게 전화할게.
아니, 니가 전화해라.
밤새 꾸릴 짐이 많아서 깨어 있을꺼야."
차마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줄곧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했다.
미련없이 고백해버리자!
안돼!
상처받기 싫어.
그러나 도저히 견딜 수가 없다.
후회없이 말하련다.
눈물이 흐르려고 하는데 참았다.
떠나는 사람
가려면 가라지
잡아야 무슨 소용
그래도 흐르는 눈물
그치지 않네.
문득 떠오른 시.
아!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플 줄이야.
오늘따라 가족들이 늦도록 잠도 안 자고 있다.
동생은 아직 집에 없다.
엄마랑 아빠랑 TV 보며 이야기한다.
"다녀왔습니다."
"잘 다녀왔니!"
곧장 옷 갈아입고 샤워를 했다.
무더운 요즘에 하루라도 거르면 미칠 지경.
몸과 마음이 시원하다.
따뜻한 물이 내 몸 구석구석을 감싸주는 느낌.
그러나 그녀가 떠오른다.
생각하면 우습다.
그녀를 알게 된 지 7년.
처음으로 본 건 대학 1학년 때.
그 동안 그녀를 특별하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냥 친구 같은 선배였다.
몇 년 전 전공분야인 미술을 더 공부하기 위해 Paris로 간다고 했다.
아무 감정이 없었다.
그저 가는구나 했다.
그 후로 가끔 방학중 서울에 들른 것 같았다.
왠지 볼 기회가 없었다.
특별하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런데, 무더운 여름 그녀가 돌아왔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그저 반가웠다.
반가운 생각에 한번 만났다.
또 보고 싶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다.
그러던 것이 결국 사랑이 되었다.
그녀의 맑은 눈과 순수한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열심히 자신의 일을 해나가는 그녀의 삶이 마음에 들었다.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이런저런 음악을 틀어본다.
사랑에 관한 노래가 많다는 걸 새삼 알았다.
그리고 다짐한다.
고백해야지!
공중전화 카드를 갖고 집을 나섰다.
그녀의 아빠가 받는다.
얼른 끊었다.
다시 전화했다.
그녀다.
"안녕, 너니.
잘 했어."
잠깐 머뭇거리다가 오늘 저녁 헤어진 이후의 일을 물었다.
조금 있다가 그녀가 말했다.
"왜 그리 말이 없니?"
"누나가 떠나게 돼서 내 마음이 쓸쓸해."
"나 내년 2월에 다시 돌아와.
아주 가는 거 아니잖아."
잠시간 침묵
"나 누나 떠나기 전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나 사실 누나 좋아해!
아니 사랑해!
떠나기 전날 여러 가지로 생각이 복잡할 텐데,
미안해! 잊어버려!"
갑자기 조용하지만 확신에 찬 그녀의 목소리
"아니야, 그렇지 않아. 나도 좋아해!"
그 순간 전화가 끊어졌다.
돈이 다 되었다.
전화 다시 하려니 동전이 없다.
동전 바꾸려고 근처 오락실에 갔다.
공중전화로 또 돌아왔다.
제발 걸려라!
통화중.
좋아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얼까?
긴장.
초조.
불안.
답답.
아! 부디...
뾰족한 수 없이 일단 집에 들어갔다.
잠시 후에 재시도해야지.
모두들 잠들고 나 홀로 방에 불을 킨 채 사념에 잠겼다.
전화가 정적을 한 순간 깨버린다.
따르르릉.
따르르르릉.
황급히 수화기를 들었다.
"나야. "
부드러운 그녀의 목소리는 나의 마음에 냉수와도 같았다.
"어어"
난 침묵했다.
그녀는 어색한 분위기를 녹이려고 이러저런 자기 이야기를 한다.
난 여전히 불안하기만 했다.
그녀의 정중함이 고맙기는 했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계속 길어지는 이 대화를 끝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결론은 뻔하니까.
마음이 아프다.
너무 슬퍼서 울음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가슴 한 구석에는 혹시라는 마지막 기대가 꺼져가는 불씨처럼 남아있었다.
"야아, 무슨 말이든 좋으니 얘기 좀 해봐."
"응, 알았어."
내가 그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했는지는 거의가 기억나지 않는다.
과거에 있던 빗나간 만남들에 대해 말했던 것만 떠오를 뿐.
왜 그랬을까?
아뭏튼, 마지막으로 말했다.
"미안해.
미안해."
그러나 속으로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가버리지 말아줘.
그녀가 무슨 말인가를 꺼내려고 하는 데,
그녀의 부모님이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게 그녀는 말을 했다.
"미안해.
지금 전화 귾어야 해.
하지만, 나도 좋은 감정이야!"
난 물었다.
"그냥 동생으로?"
"아니야.
그럼, 안녕.
편지 할께."
전화를 끊고서 한참을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마음 한 구석에 있던 구름이 사라지고 환한 해님의 미소가 비치는 듯했다.
사랑.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것.
요즘 몇 일 동안 제대로 잠들지 못했는데,
바로 지금 편안하게 좋은 꿈을 꿀 수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