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풍월
길고 긴 솔을 베어 조그만하게 배 모와 타고 술과 안주 많이 실어 술렁 배 띄워라
강릉 경포대로 달구경 가세. 대인난(待人難) 대인난은 촉도지난(蜀道之難)이 대인난이요
출문망(出門望) 출문망은 월사오동(月斜梧桐)의 상상지(上上枝)라 자라 등에 저 달을 실어라 우리 고향을 어서 가세.
그 달을 다 보내고 오월이라 단오날은 천중지가절(天中之佳節)이요 일지지창외(日遲遲窓外)하야
창창한 숲속에 백설(百舌)이 자자(孜孜)꾸나 때때마다 성현들은 산량자치(山梁紫雉) 나는구나
광풍제월(光風霽月) 너룬 천지 연비어약(鳶飛魚躍)이 되단 말가.
백구(白鷗)야 나지마라 너 잡을 내 아니다 성상(聖上)이 버리시매 너를 쫓아 내 왔노라.
강산에다가 터를 닦아 구목위소(構木爲巢)한 연후에 나물먹고 물 마시고 팔 베고 누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가 요만허면 넉넉할거나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낱말풀이] 1) 오호상연월야(五胡上煙月夜): 안개 자욱히 낀 오호(五胡)의에 달빛이 비치는 밤오호란 중국 태호근방의 호수로 격호, 조호, 사호, 귀호, 태호를 말함 2) 범상공(范相公) 춘추시대초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여 자는 소백 월나라 재상으로 월왕 구천을 도와 오왕 부차를 죽여 원수를 갚게 하였음. 3) 한송정(寒松亭): 강릉시 동해가에 있는 정자. 신라시대 화랑의 수련장으로 돌절구등의 유적이 남아있고 지금은 샘만 남아 있음. 4) 무어 : 만든다는 뜻의 전라도 사투리 5) 대인난(待人難): 약속한 때에 오지않는 사람을 기다리는 고통 6) 촉도지난(蜀道之難): 산이 험하여 두 골짜기를 잇는 다리가 없이는 다닐수 없었던 서촉의 험한 길. 이곳에 길을 만들기 위하여 많은 장사들이 죽었다함. 7) 출문망(出門望): 문 밖에 나가 바라볼 만한 경치. 8) 월사오동(月斜梧桐)의 상상지(上上枝): 기울어가는 달이 오동나무의 맨 끝 가지에 걸려 있는 모습 9) 일지지창외(日遲遲窓外): 창 밖에 해가 느리고 느리다. 제갈량의 대몽시중 한 구절 10) 백설(百舌): 지빠귀. 때까치.11) 자자(孜孜): 부지런히 날아 다니는 모습 12) 자자(孜孜): 검붉은 꿩이 산을 펄펄 뜀. 13) 광풍제월(光風霽月):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평한말로 마음결리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한 유덕자(有德者)의 기상을 형용한말이나 여기서는 비 온 후의 풍월이란 뜻. 14) 백구(白鷗): 갈매기 15) 구목위소(構木爲巢): 나무를 얽어 집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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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조순애의 국악세계} 음반(정창관 제작 한정반 CKJCD-002, 1CD, 고수:장송학, 음반 해설 및 사설 채록:이보형 노재명, 1998년 녹음, 1999년 지구레코드 제조) 해설서에 실린 것이다.
판소리 명창 조순애 글/노재명
조순애 명인은 1929년 9월 21일(음력, 호적:1929.9.22)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 잠정리(또는 석고리:불분명함, 본적 신고:서울)에서 아버지 조명수, 어머니 박모암 사이의 1남 3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조순애의 본명은 조순희인데 집안 어른들이 순하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한다. 그리고 과묵하고 얌전한 성품을 지녀 주변사람들은 조착실이란 별호로 부르기도 한다. 조순애 집안은 대대로 능주에서 살아온 토박이로서 많은 국악 명인들이 배출된 유명하고도 유서깊은 가문이다. 조순애의 좋은 목구성과 특별한 음악재능은 바로 이같은 가문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 조순애의 부친 조명수는 능주 사람으로서 가야금 산조와 풍류의 거장이었다. 조명수는 아주 미남이었고 멋덩어리였기에 별호가 조떵어리 또는 조떵구로 불렸는데 조순애 나이 9세 때(1937년) 아버지 조명수가 작고하여 조순애는 부친이 가야금 연주하는 모습을 못봤다 한다. 조명수가 판소리 명창 김연수와 친구로 지냈다 하니 조명수의 출생시기는 1907년 무렵일 것이고 그렇다면 조명수는 31세 무렵에 작고했을 것이다. 조순애는 부친 조명수의 스승이 누구인지, 조명수한테 배운 제자는 누가 있는지 등에 대한 상세한 내력은 들은 바 없고 조명수의 가야금이나 사진 등의 유품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다만 조명수가 일제 때 영화 유충렬전에 왕으로 출연한 적이 있으니 그 필름이 남아있다면 볼 수 있을 것이라 한다. 당시 조명수가 이 영화 촬영 도중 말에서 떨어져 크게 욕봤다고 한다. 조명수는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는데 지금 판소리 활동을 하는 임향님의 부친이 서울서 조명수를 따르는 여자들의 연애편지 심부름을 많이 했다 한다. 조순애의 모친 박모암 역시 능주 사람인데 국악은 하지 않았다 한다. 조순애의 친남동생은 작고했으며 여동생들과 이복 남동생은 현재 생존해 있는데 조순애 외에 형제들은 모두 국악을 하지 않았다 한다. 피리 태평소의 대가 조계남과 판소리 명창 조몽실은 조순애의 당숙어른 뻘이며 판소리 명창 박기채는 조순애의 외삼촌, 판소리 명창 조동선과 현재 전라도 삼현육각의 마지막 거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능주의 피리 장고 명인 조도화(조동선의 남동생)는 조순애의 육촌 오빠, 현재 판소리 경기민요 발탈 국극 등의 활동을 하고 있는 조영숙(조몽실 딸)은 조순애의 육촌 여동생이라 한다. 예전에 조순애가 살던 능주면과 가까운 이양면에서 박현옥의 모친(성명 미상)이 굿을 아주 잘했다 한다. 그리고 1950년대에 대금 명인 한주환이 5∼6년간 능주면 잠정리에서 연주 활동을 한 바 있다고 한다. 이때 조순애의 외삼촌 박기채, 조순애의 육촌 오빠 조도화 등이 한주환과 어울렸다 한다. 조순애는 12세부터 3년간 능주면 잠정리에서 외삼촌 박기채한테 판소리 심청가와 적벽가 토막소리를 배웠다. 박기채는 당시 40대였다 한다. 이때 조순애와 동갑인 능주 사람 조봉례, 오옥석도 함께 배웠는데 조봉례는 조도화의 여동생이며 오옥석은 조도화의 누나 조모씨의 딸로서 그중 조봉례가 현재 생존해 있다 한다. 조순애는 박기채 문하에서 학습할 때 약 3개월 동안 그 어른을 모시고 남자 학습생 2명과 함께 강진의 어느 산으로 소리공부를 들어갔다 한다. 이때 강진에서 판소리 명창 김채만의 부인이 씻김굿 하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굿을 무척 잘했으며 김채만은 당시 작고한 뒤였고 그 부인과 딸이 강진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한다. 박기채는 정응민제 심청가가 특기였는데 방안소리는 잘했으나 부끄러움을 많이 타서 큰 무대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다. 박기채의 부인은 국악을 하지 않았다 한다. 조순애는 14∼15세 무렵에 친구들과 함께 2개월 가량 능주면 잠정리에서 명무이자 명고수였던 김막동한테 승무를 배웠다. 조순애는 이때 배운 춤을 이제 나이가 들어 거의 못춘다고 한다. 조순애는 16세 때 조봉례, 오옥석과 함께 동일창극단에 입단하였다. 당시 조상선 앞에서 입단 시험을 본 후 합격해야 그 단체에 들어갈 수 있었는데 조순애, 조봉례, 오옥석은 서울 종로 우미관에서 시험을 보았다 한다. 이때 세 사람 모두 합격하였는데 시험이 끝난 후 조상선이 조순애한테 장래가 유망하다고 칭찬했다 한다. 조순애는 동일창극단에서 21세까지 약 5년간 공연 활동을 하다가, 몇달 동안 집에서 쉬고 다시 그 단체에 들어가 23세까지 있었다. 조순애는 여기에 몸담고 있으면서 판소리 명창 장판개의 아들 장영찬과 함께 조상선한테 소리를 배웠다. 이때 조순애가 익힌 소리는 단가 <적벽부>와 <여객같은>, 판소리 춘향가 중 <비맞은 제비같이>∼<하루 가고>, 창극 논개전의 소향 역과 선화공주의 공주 역 소리 등을 배웠다. 조상선은 정정렬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는데 작곡력이 매우 뛰어났다 한다. 조순애는 조상선이 단가 <백발가>(젊어 청춘)와 열사가를 부르는 것은 못봤으며 이동백한테 배웠다는 말은 못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순애는 동일창극단 활동 당시 조상선 문하에서 <단오노래>, <칠석놀이>, <추석노래>, <널뛰기>, <사철가>와 같은 조상선 작곡의 신민요도 배웠는데 조순애와 같은 조상선의 제자들에 의해 지금까지 이 민요들이 널리 알려져 자주 불리고 있는 것이다. 조순애는 이 신민요들이 지금은 부른지 오래되어 뜨문뜨문 기억난다고 한다. 그리고 조순애는 구음이나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과 같은 옛 민요는 특별한 스승없이 어려서 많이 들어 자연스레 부를 수 있게 됐고 특이한 사설과 성음은 여러 선생들이 하는 걸 듣고 땄다고 한다. 동일창극단에는 조순애 활동 당시 조상선, 장영찬, 조봉례, 오옥석 외에도 판소리 명창 강남중, 공기남, 정남희, 임소향, 강장원, 정광수, 박초월, 박귀희 같은 이들이 활동했었는데 이때 임소향은 창극 무대에서 춘향모로 유명했다 한다. 조순애는 동일창극단 등 단체 생활에 여념이 없던 6.25 전쟁 발발 무렵 서울 조계사(또는 대각사:불분명함)에서 열린 5명창 추모 합동제사에 참가한 바 있다. 이 제사에서는 스님들이 염불 천도를 해주었으며 추모 공연은 없었고 제사 후 참석자들 전원 식사를 함께 하고 헤어졌다 한다. 이때 강장원, 고일연, 김계룡(?, 단체 사무일 담당), 김광식, 김세준(?), 김유난(?, 국악 애호가), 김윤덕, 김재선, 박귀희, 박도화, 박록주, 박석기, 박헌봉, 백점봉, 백모씨(만담가), 성금연, 성순종, 신숙, 심상건(?), 오태석, 이동안, 이정업, 임유앵 임춘앵 자매, 임종선, 정남희, 정득만, 조봉란, 조상선, 조소옥, 지영희, 5명창의 부인들과 친척 자손 등이 참석했으며 송만갑의 아들 송기덕과 송영덕, 송만갑의 조카 송억봉(송업봉?)은 당시 오지 않았다 한다. 이 가운데 고일연은 조순애보다 4∼5세 연상이며 소리는 전혀 못했고 국극 무대에서 단역을 주로 맡았으며 현재 생존해 있다 한다. 김재선은 조순애보다 20세 이상 연상이고 박도화는 조순애보다 3세 가량 연상이며 오래 전에 작고했다 한다. 백점봉은 충청도 사람으로서 조순애보다 20세 이상 연상인데 조순애는 그의 판소리는 못들어봤다 한다. 성순종은 김연수한테 판소리를 배웠고 신숙은 경상도 사람으로서 김소희와 비슷한 연령이며 미인이었고 판소리와 <육자배기>를 잘했으며 1950년대 후반에 작고했다 한다. 신숙은 1940년대 국극 선화공주가 처음 발표될 때 첫번째로 공주 역을 맡았다 한다. 임종선은 조순애보다 20세 가량 연상이며 관악기 악사였다 한다. 조봉란은 전라도 사람이 아니고 그 모친은 이북 사람이라 한다. 조봉란은 조상선 문하에서 소리를 배웠고 조순애보다 5∼6세 연하이며 지금으로부터 약 15년 전에 작고했다 한다. 조봉란은 연극 전문인이었지만 소리를 꽤 잘했고 그 후손이 있으나 국악은 하지 않는다고 한다. 조소옥은 <육자배기>를 잘했고 1960년대에 작고했는데 조순애는 그의 판소리는 못들어봤다 한다. 조순애는 23세 때 동일창극단을 나온 뒤 2∼3년간 집에서 쉬다 조상선, 박록주가 이끌던 국극사에 입단하였다. 그 국극사에서는 20대 후반까지 2년 가량 활동하다가 나와서 새한여성국극단(단장:김경애)에 입단하여 2∼3년간 활동하였다. 새한여성국극단에는 조순애 활동 당시 김순자, 변녹수, 백숙자, 김행, 장난희, 박옥순, 한성숙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한다. 백숙자는 조순애보다 5∼6세 연하로서 소리는 전혀 못했고 연극 전문인이었으며 김행은 조순애보다 5세 가량 연상이며 소리는 약간 했고 역시 연극 전문인이었다 한다. 그리고 장난희는 소리는 전혀 못했으며 연극 진행자였고 국극 공연시 꼽추 역 등을 맡았다 한다. 박옥순은 조순애보다 7∼8세 연하이며 소리는 약간 했고 국극 공연시 사령 등의 단역을 주로 맡았다 한다. 한성숙은 조순애보다 5세 가량 연하로서 소리는 약간 했으며 연극 전문인이었다 한다. 새한여성국극단에서 조순애가 활동할 당시 김진진의 이모 임춘앵이 1940년대 조상선이 작곡한 국극 선화공주의 곡조를 토대로 하여 그 작품을 다시 무대에 올렸으며 이 단체에서는 박동진 작곡의 국극(사씨남정기 등)도 자주 공연했다고 한다. 조순애는 이 당시 찍은 국극 활동 사진을 몇장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예전에 창극단 공연시 입은 의상은 사용 후 그때그때 단체에 반납했기 때문에 옛 무대 옷은 지금 소장하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 조순애는 새한여성국극단을 나와 집에서 몇달 쉬다가 명창 박초월 문하에 들어가서 4∼5년 동안 단가 <강상풍월>, 판소리 춘향가 토막소리, 수궁가와 흥보가 전판을 사사받았고 <추월강산>과 심청가는 안배웠다 한다. 당시 박초월 문하에 성우춘, 김선초, 조통달, 김경숙 등이 있었고 한성준의 제자 장홍심이 박초월 학원(종로)에서 무용을 가르쳤다 한다. 성우춘은 전주 사람으로서 조순애보다 4∼5세 연상이며 지금 판소리 활동을 하는 성창순, 장영찬의 부인 성희경과 친척간이라 한다. 김선초는 명고수 김세준의 딸로서 1925년 무렵에 출생했으며 판소리, 가야금산조와 병창을 했는데 지금은 일본에서 살고 있다 한다. 김선초 밑에 김채돈(김차돈)이라는 동생이 있는데 김채돈은 조순애보다 2∼3세 연상이며 미인이었고 현재는 미국 하와이에 거주하고 있다 한다. 조순애는 30대 후반에 김선초 김채돈 자매를 보고 그 뒤로는 못보았다 한다. 김선초 김채돈은 판소리 명창 김창룡의 손녀인 셈이며 김창룡의 손자 중에는 김인태가 현재 KBS 탤런트로 활동 중이라 한다. 김선초 김채돈 자매는 예전에 새한여성국극단에서 조순애와 함께 활동한 바 있는 김순자(일명 문재네)와 사촌간이며 김인태와 김모씨(일명 포천댁)는 형제간이라 한다. 김선초, 김채돈, 김순자, 포천댁 김모씨의 후손 가운데 국악을 하는 사람은 없다고 한다. 포천댁 김모씨는 조순애보다 3∼4세 연하라 한다.(계속)
2001년1월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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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애는 30대 중반에 박초월과 일본 공연을 가기 전에 박초월 학원에서 장홍심한테 검무를 배웠는데 지금은 그 춤을 대부분 잊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순애는 장홍심 문하에서 검무를 배우기에 앞서 30대 초반에 1∼3달 가량 서울 김취란 자택에서 그를 독선생으로 모시고 가야금산조 한바탕을 배웠다 한다. 그때 익힌 산조 가락은 성금연류와 같았는데 지금은 연주를 거의 하지 못하며 당시 병창은 안배웠다 한다. 김취란은 명고수이자 줄타기의 명수였던 이정업의 부인으로서 경상도 사투리를 썼고 조순애보다 7∼8세 연상이었으며 그의 스승은 누구인지 모른다 한다. 조순애는 박초월 문하에서 나와 2∼3년간 집에서 쉬다가 명창 박록주를 찾아가 2∼3년 동안 단가 <백발가>와 <편시춘>, 판소리 흥보가와 숙영낭자전 전판을 사사받았다. 이러는 와중에 김여란이 박록주에게 조순애를 자신의 후계자로 달라고 청하여 조순애는 김여란 문하에 들어가게 됐다. 그리하여 조순애는 김여란한테 몇달 동안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부터 <신연맞이>까지 익혔고 단가는 안배웠다 한다. 조순애는 여러 스승한테 배운 판소리들 가운데 자신의 성대로 봐서는 김여란과 박초월의 소리제가 맞지만 마음은 박록주제에 끌렸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그냥 듣기엔 김여란제가 가장 좋았다 한다. 박록주는 소리를 바쁘게 하는 편이며 여자지만 남자소리를 하는 명창이었고 김여란은 아주 느리게 부르는 편이었고 그래서 배우기가 어려웠다 한다. 박초월은 청이 무척 높았는데 1950∼60년대에는 다들 청이 대체로 높았다 한다. 조순애는 그땐 김여란의 소리가 너무나 익히기 어려워 배우다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아까운 소리를 놓쳐 버렸다 싶어 후회가 된다고 한다. 조순애는 30대 때 며칠간 한갑득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거문고산조 진양조를, 서용석한테는 아쟁산조 진양조를 잠깐 배웠는데 두 산조 모두 다른 사람들과 같이 성음이 잘 나오지 않아 성이 안차 중도에 작파했다 한다. 조순애는 지금으로부터 약 30여년 전, 그러니까 당시 나이 40세 무렵에 명고수 김동준과 혼인하면서 국악 활동을 거의 중단했다. 물론 가정 살림하는 중간중간에 공연, 음반 취입 등을 조금씩 하기는 했지만 예전에 비한다면 음악 활동을 거의 중지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순애의 남편 김동준은 1925년 전남 화순에서 4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나 박동실, 박봉술, 김연수 문하에서 판소리를 배웠으며 소리뿐 아니라 북, 장고, 가야금으로도 명인이었고 판소리 고법 인간문화재로 활동하다 1990년 작고하였다. 김동준은 가야금 명인 유대봉과 자주 어울려 서로 우스게 재담을 잘했다 한다. 김동준은 슬하에 2남 4녀를 두었으며 그 가운데 현재 나이 40대 중∼후반 된 장녀 김영화만 국악을 했는데 김윤덕한테 가야금을 배웠으나 지금은 작파하고 일본에서 가정 살림을 하고 있다 한다. 김동준의 첫째 동생 김동섭은 현재 63∼64세 가량 되었는데 국악은 하지 않았다. 둘째 동생 김동식(김동진)은 한주환과 강백천 문하에서 대금산조를 배웠는데 대금을 반대 방향으로 불어서 사람들이 인정을 잘 안해줬으나 대단한 명인이었으며 형 김동준보다 1년 앞서 작고했다. 셋째 동생 김동표는 강백천한테 대금산조를 배워 그 음악으로서 인간문화재로 인정받았으며 1999년에 환갑이 된다. 막내 여동생 김향옥(본명:김수련)은 1945년 전주에서 태어나 어려서 오빠 김동준에게 단가, 판소리, 가야금산조를 배웠고 여러 여성국극단에서 공연 활동을 했으며 김오채 등에게 설장고, 꽹과리 등을 사사받았다. 김동표와 김향옥은 현재 부산에서 활동하고 있다. 조순애는 1950년대 후반(30세 전후)에 김효순, 한농선과 함께 신세기레코드에서 남도민요 <칠석놀이> 유성기음반(Sinseki N213∼214, 1SP)에 자신의 첫 녹음을 남겼다. 당시 <칠석놀이> 외에도 다른 소리가 더 취입됐을 것으로 보이는데 조순애, 김효순, 한농선이 이때의 음반 취입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바가 거의 없고 이 녹음 외에 이들이 함께 남긴 것은 더 발견된 자료가 아직 없는 상태다. 다만 이때 김효순이 독창으로 취입한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어사와 장모> 유성기음반(Sinseki N227∼230, 2SP, 고수:미상)은 자주 발견되는 편이다. 1967년 무렵 조순애는 스승인 박초월 등과 함께 대도레코드에서 입체창 춘향전 중 <농부가>를 취입했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조순애는 입체창 흥보전(대도레코드 TLM-714:이 음반표지 기록은 오류인 듯함, 12인치 3LP)에서 전반부 흥보 역을, 입체창 수궁가(대도레코드 TLM-723∼725, 12인치 3LP)에서는 용왕 역을 맡아 취입했다. 이때 전반부 흥보 부인 역은 성우춘, 후반부(둘째 박타령∼끝) 흥보 역은 김선초, 후반부 흥보 부인 역과 토끼 역은 김춘시, 나머지 배역은 박동순, 양옥진 등이 맡았으며 대금 연주는 박초월의 조카 서용석이 했고 북 반주자(또는 아쟁 연주자:불분명함)로 정철호가 참가했다 한다. 그리고 이 당시 취입된 <농부가>는 입체창 흥보전과 수궁가의 녹음을 마치고 시간이 남아서 취입한 것인데 박초월, 성우향, 한농선, 박봉선, 김옥주가 이에 앞서 1960년 무렵 취입한 창극 춘향전 음반(대도레코드 TLM-713∼717, 10인치 5LP)의 녹음에 함께 덧붙여져서 1968년 4월 음반화 되었다.(대도레코드 STLM-708∼712, 12인치 5LP) 대도레코드에서 나온 이 입체창 음반들은 모두 박초월과 그의 제자들이 소리를 한 것이다. 이 가운데 김춘시는 김원술의 딸로서 현재 50대 중∼후반이고 박동순은 박초월의 조카로서 조순애에게 아줌마라고 부르는 정도의 나이 차이였다 한다. 양옥진은 조순애와 같은 나이 정도였으며 작고했다고 한다. 김옥주는 전주 사람으로서 조순애와 박동순의 중간 나이 정도 되는데 현재 미국에서 살고 있다 한다. 조순애는 1973년 5월 23일 제3회 판소리 유파 발표회에 참가하여 소리를 한 바 있다. 이때 초기 판소리 인간문화재와 그 제자들이 함께 판소리 공연을 했는데 그 가운데 이선옥은 박초월의 제자로서 조순애보다 5∼6세 연하인데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고 김소희의 동생 김경희는 1990년 무렵에 작고했다 한다. 1977년 조순애는 박송희, 성창순과 함께 대도레코드에서 남도민요 음반(대도레코드 DS-00-7231∼2, 12인치 2LP)을 취입했다. 여기에는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 <보렴>, <성주풀이>, <진도아리랑>, <새타령>, <방아타령>, <강강수월래>, <농부가>, <남원산성>, <휘여능청>, <널뛰기>, <달맞이>, <까투리타령>, <구음살풀이>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음반의 뒷표지에는 반주자가 김동준(장고 꽹과리), 서용석(대금 새납), 윤윤석(아쟁 가야금)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조순애와 박송희의 기억에 의하면 실제는 장덕화(장고), 이생강(대금 새납), 윤윤석(아쟁 가야금)이 반주했으며 <농부가>에서는 박송희가 소리를 하면서 중간중간에 꽹과리를 쳤다고 한다. 조순애의 증언에 의하면 이 남도민요 음반은 이생강의 주선으로 왕십리에서 녹음한 것이라 한다. 1989년 조순애는 박송희, 신유경과 함께 뿌리깊은나무에서 남도민요 음반(12인치 1LP)을 냈다. 여기에서는 서용석(대금), 윤윤석(거문고), 장덕화(장고)가 반주를 했으며 장덕화의 주선으로 취입을 하게 됐다 한다. 이 민요 음반은 1994년 11월에 다시 콤팩트디스크로 제작된 바 있다.(뿌리깊은나무/신나라레코드 CDD-012, 1CD) 이 녹음집에는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이 들어있다. 그리고 1997년 조순애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김동표의 음반(국립문화재연구소 NCPR-9602, 1CD, 비매품)을 제작할 때 구음과 장고 반주를 녹음한 바 있다. 조순애는 뿌리깊은나무에서 발표한 민요 녹음과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낸 구음 녹음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한다. 상기 음반들과 본 음반에 취입된 것 외에 조순애는 1998년 4월 MBC-AM 좋은아침 우리가락에 출연하여 단가 <여객같은>과 <적벽부>, 판소리 흥보가 중 <떴다 보아라>, 창극 논개전 중 <소향이가 논개에게 죽지 말라고 만류하는 데>, 구음, 남도민요 <육자배기>, <자진 육자배기>, <삼산은 반락>, <개고리타령>, <흥타령>을 기록 보존용으로 남긴 바 있다. 이 가운데 흥보가 중 <떴다 보아라>(박록주제) 녹음은 조순애가 현재 부를 수 있는 소리 중 음반화 되지 않은 것이기에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그리고 1998년 8월 19일 조순애가 자택에서 조상선 작곡의 국극 선화공주 중 <헛소문이든 아닌 소문이든>(중모리 무반주)을 부르는 장면이 비디오로 촬영되어 현재 국악기록보존연구소에 보관되어 있다.(디지털 6mm 비디오테입 소장 관리번호:MI6V-0230) <헛소문이든 아닌 소문이든>은 서동에게만 시집가려고 하는 선화공주를 왕비가 서풍과 혼인시키려 하니 공주가 안가겠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이 외에 조순애는 여러 국악 라디오방송에 출연하고 여러 국악 공연에 특별 출연하여 남도민요 등의 녹음을 수차례 남겼다. 조순애는 이처럼 여러 음반을 비롯해서 방송 및 현장 녹음과 영상을 남겼으나 여지껏 독집 음반은 단 한장도 낸 적이 없었다. 그런 차에 이렇게 본 음반 제작이 성사되어 70세에 비로소 이렇게 자신의 첫 독집 음반을 내게 된 것이다. 조순애는 현존 남도명창 가운데 독집 음반을 안남긴 이로는 박보아의 소리가 꼭 녹음으로 남았으면 좋겠다고 몇차례 강조를 하였고 조금앵이 언니인 조농옥의 판소리 춘향가를 녹음해둔 것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1995.5.21.15:00∼15:20 / 1998.7.7.14:30∼18:00 / 7.21.21:40∼21:55 / 7.22.14:00∼21:00 / 8.19.14:00∼18:30 / 8.27.13:45∼15:00. 조순애 증언) 조순애는 본 음반 취입시 녹음을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목이 좋아졌다. 그리고 본 음반은 거의 모든 곡이 단 한번에 취입되었다. 수록곡 가운데 단가 <적벽부>와 <여객같은>은 지구스튜디오 측에서 녹음상태 조절에 따른 요구에 의해 두번 취입하였고 판소리 수궁가 중 <여봐라 주부야>∼<별주부 부인 만류>는 조순애가 부른지 오래된데다 사설이 길어 후반부만 한차례 수정 녹음하였다. 남도민요 연곡은 녹음내용이 길어서 두번에 걸쳐 나누어 불렀는데 <자진 육자배기> 부분에서 한차례 쉬었다가 이어서 녹음하였다. 본 음반에 고수로 참가한 장송학은 녹음을 마친 직후 조순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천구성을 타고 났다. 70세를 넘기고, 더구나 오랫동안 활동을 안하다가 그만큼 소리할 사람이 없다. 어느 누구든 소리를 하면 대체로 흠이 다 있게 마련인데 이 사람은 흠을 잡을 데가 없다. 난 이 음반 취입을 시작할 때 무척 긴장이 됐다. 앞으로 이런 기회가 조순애에게 다시 온다는 보장도 없고 이것이 그의 마지막 녹음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반주를 더 잘해주고 싶었고 그와 제대로 장단을 맞추어본 것도 꽤 오래 전의 일이기에 부담이 컸다. 그런데 녹음에 들어가서 그가 소리를 너무나 잘하고 별다른 실수없이 무사히 취입이 끝나 이제 속이 무척 후련하다.] 조순애는 현재 서울 홍제4동에 살면서 이따금 찾아오는 제자들에게 국악을 가르치고 있다. 조순애 문하에서 소리를 배운 사람은 본 음반의 민요 녹음시 조창자로 참여한 채수정뿐이다. 그리고 조순애는 김죽파가 생전에 가야금산조를 연주할 때 장고 반주를 자주 해주었고 그 산조 가락을 많이 들어봐서 현재 박현숙이 보내오는 가야금 제자 3∼4명에게 구음으로 그 가락들을 전해준다고 한다. 오랜 세월 동안 화순 능주 일대를 유명한 국악의 고장으로 꽃피운 유능한 예술 집안 조씨 가문이 배출한 국악인들은 어느덧 대부분 세상을 떠났거나 사회의 차가운 시선 때문에 국악을 등지고 후손에게는 그 가업을 물려주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행히 조순애 명인이 고희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용기를 내서 그간 덮어두었던 소리들을 꺼내어 최선을 다해 이렇게 음반에 남겨주었다. 본 음반은 그 찬란하고도 유서깊은 화순 능주 조씨 가문의 국악 발자취에 대한 여운을 길게 남기는 의미있는 기록물로서, 소중한 예술로서 우리에게 오래도록 남을 것이다.(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