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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기 탄약,나주등지 시위대에 공급
야산 숨겨진 상당수의 무기 발굴
교사.에술가 투쟁연루 고초 겪어
초기 시위협력하던 읍내 지사들 무기회수등 사태 수습 도지사 표창도
63 시위 확산 영암 <하>
나주에서 남쪽 해안지역 고을로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영암의 5.18항쟁은 21일 광주 항쟁여파가 본격적으로 파급되면서 청년과 학생 지역유지 순박한 아주머니 교사등 지역내 다양한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개입되고 항쟁후 갖가지 우여곡절이 생기며 수난을 받는다.
4월 초파일을 맞아 월출산과 도갑사등에 놀러 갔던 많은 사람들은 갑작스런 광주시위대의 출현으로 도중에 행락을 중단하고 돌연한 항쟁의 물결에 휩쓸린 사람이 많다.
청년학생들은 젊은 혈기에 [광주 시민들을 구해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으로 생사의 갈림길을 택한다.
광주항쟁본격파급
일부교사들은 제자들이 피해를 보면 안된다는 생각으로 교외지도차 시위현장에 나가 직접 총을 들기도 한다.
영암읍내 유지들은 시초에는 시위를 돕다가 사태가 확산되자 자체수습과 시민군방어 무기회수등에 나서는 곡절을 격기도 한다.
이들의 증언은 토대로 당시의 몇가지 영암상황을 정리해 보자.
광주 시위대가 출현해 광주 상황을 알리고 동참을 호소하자 가장 먼저 합류한것은 열혈 청년.학생들이다. 박재택을 비롯한 신북고 학생들은 신북버스터미널부근에서 광주에서 내려온 시위대 차량에 뜻밖에도 고향친구들이 끼어 있는것을 발견하고 두려움을 떤다. 이어 시위대가 신북지서의 무기고까지 부숴버리자 고조되는 분위기에 몰입돼 간다. [다른 고둥학생들은 다 차를 타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우리라고 가만히 있어야 되겠느냐. 우리도 시위대 차를 타고 시위대열에 동참하자.] 이들은 선생님의 눈을 피하기 위해 22일 오전 10시 시종면 금지저수지에서 만난다. 이에 앞서 이달연등 신북청년들은 픽업을 탈취해 무기탈취에 나섰는데 때마침 금지 저수지에서 동네 후배인 이들을 만나 합류한다.
숫자가 불어난 신북 청년 학생들은 군서 학산 미암등 영암군 일대를 무대로 무기를 찾았으나 찾지 못하고 대신 지서를 파괴한 후 중간에 학파 농장에서 트럭을 탈취한다.
시위대는 마침내 22일 오후 시종지서 방위병 김씨로 부터 시종지서 뒷산에 무기를 묻었다는 소식을 듣고 흥분한다. 이때가 오후 7시 30분께. [지서에서 50m 떨어진 곳에 땅을 판자국이 었었다. 나뭇 가지로 50cm정도 파니까 관처럼 생긴 나무상자가 나왔다. 속에는 총열과 개머리판이 엇갈리게 담겨져 여러정 있었다. 상자에는 무기가 가득 들어 있었고 밑에서부터 3개,2개,1개씩 쌓여 있었다. ](박재택증언)
시위대는 이곳에서 M1소총과 카빈소총을 합해 1백 50정,LMG 기관총1정을 트럭에 싣고 곧장 신북을거쳐 나주로 향한다. 그러나 실탄이 없어 도중에 만나는 동료 시위대 차량을 불러세운다.
[우리는 총은 많은데 실탄이 없소.]
[우리는 실탄은 있는데 총이 없소. 서로 실탄과 총을 바꿉시다.] 도로상에서 50여정의 총을 보급한 시위대는 곧바로 나주군청의 시위대를 찾는다.
무장률이 30%도 채 안된 나주 시위대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환영했고 무장이 튼튼해진 나주시위대는 광주 진출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청년.학생 , 차량 탈취
그러나 영암읍에는 총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다시 시종 뒷산을 찾아 3백정쯤 획득, 2백 50정을 함께 온 나주시위대 차량에 싣고 나머지는 자신들의 차량에 실은채 나주에 도착한다.
영암시위대는 광주진입이 어렵다고 판단하고 다시 영암으로 돌아와 무기공급을 모색한다.
다음날 아침 실탄을 찾아나선 이들앞에 세사람이 경운기를 몰고 나타난다. 도포지서로 가던중 덕화리 저수지에서 만난 경운기에 뭔가가 실려 가마니로 덮여 있었다. 처음에는 좀 수상했으나 그냥 지나치려다 다시 불러 세워 수색한 결과 놀랍게도 그것은 탄약상자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도포 예비군 제 2중대장 김금호씨가 방위병 2명과 함께 도포지서 무기고에 실탄을 숨기기 위해 옮기는 중이었다. 실탄은 M1실탄이 20상자, 카빈소총 실탄이 5상자였다. 나중에 조서를 쓸때 조사자가 2만몇천발이라고 했다.] (나종구 증언) 이후 영암시위대는 실탄을 계속 시민군 차량에 지급한다.
그러던중 이날 오후 3시께 김희규(현 52.서양화가.다시 영암번영회장)등 수습원들의 수습활동에 말려들어 무장해제를 당한다. 이후 이들은 영암경찰서로 모조리 끌려갔고 대다수가 상무대,교도소등에서 고초를 겪는다 이들중 최항우,박찬재,최준,서성규,박이선,박홍용,박광남,손철식,김태호등은 미성년자로 10월 27일 기소유예로 석방된다.
박재택을 비롯한 이달연등은 12월 29일 형집행 면제로 석방된다.
다음은 미술인과 교사들의 항쟁 참여. 5.18당시 광주에서 개인전을 하다 18일 마감하고 영암으로 내려온 김희규는 후배 이강하(당시 28,조선대 미대 1년,현서양화가)등과 영암읍 청년들의 시위대를 조직해 광주로 진입하는 것을 도와 둔다.
이씨는 당시 번영회장으로 당시 상록회장이던 최철환등 단체회장들과 상의해 시위대를 위해 약간의 돈도 모아 건네주며 도갑사에 숨겨둔 버스탈취등을 돕는다.
이강하 등은 이 돈으로 포목점에서 광목을 사다가 [영암군]이름으로 [전두환 물러가라] [김대중 석방하라] [계엄령 해제하라]등의 구호를 적고어시위차량에 매단채 시위에 합류한다.
장천일 (당시 29.영암여중 교생실습생,현재 교사,서양화가)과 구임규(당시 28.영암여중교사)등은 학생지도차 시위현장에 갔다가 총기를 만진것이 발단이 돼 상무대까지 끌려가는 고초를 겪었다.
장씨는 특히 학생지도도중 만난 국교동창 김봉수(김대중 내란음모사건과 관련돼 거사가 성공하면 해남우체국장을 시켜준다고 조작했던 당사자)와의 관계때문에 어처구니없는 일을 당하기도 했다.
자체 치안유지 나서
영암시위는 계속 확산되다 23일 부터 김무(당시 38.영암재향군인회장.고인)김희규 최충씨등이 중심이돼 무기회수에 나섬으로써 자체 시위는 끝난다.
김무는 시위대들이 무기를 탈취해 무장하는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해 21일 시위대가 남기고 간 영암경찰서 무기를 숨긴후 당시 정보과장이던 서태석등에게 인계하며 23일부터 농촌지도소를 근거지로 본격적인 무기회수에 나선다.
광주 진입후 영암경찰서업무가 재개되자 회수된 무기는 경찰서 뒤뜰로 옮겨져 인계된다.
수류탄11발,카빈.M16 소총 5백여정,대량의 실탄등 2.5t 트럭에 가득한 분량이었다. 이후 6월중순 김희규 김무 최충 등은 무기회수와 치안유지 공로로 도지사 표창상을 받는다. 그러나 김희규는 수상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초기 시위대 지원이 문제가 돼 구속되는 기이한 사태를 맞는다.
첫댓글 잊져서는 안될 우리의 불행한 현대사 입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 그게, 다 5.18광주민주항쟁 결과물 입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었습니다.
광주시민들의 희생 이세상 모두가 가슴에 새겨야 함니다
감사합니다.
잘읽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