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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산에서 부처를 찾다(소요산행기. 2006년 3월 18일. 날씨: 흐림 10도)
청하 권대욱
5코스(4시간 소요)
관리소-하백운대-중백운대-상백운대-나한대-의상대-공주봉-구절터-관리소
한 주동안 잠잠하던 육신의 주말이 되면 역사살이 도져서인지 근질 근질하여진다.
작년 6월달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산행길은 이제는 낯선 곳도 잘 다니게끔 자동적으로 훈련이되어 그럭 저럭 산꾼의 티가 나는 것같다.
어제 일기예보를 들으니 날씨가 흐리다 비가 온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에 내리는 비는 흙비라는데, 오늘 가지 않으면 내일은 야구(wbc 대일본전)을 시청하여야 하고 상협이와 같이 목욕탕에 가야하는데, 그래 비가 오면 어떨러고, 기어이 준비를 하여 08시 30분에 집을 나섰다, 아내가 도시락을 싸준다. 김과 김치, 그리고 기본 산행행동식과 오랜지 두개를 챙겨넣었다
면목역으로거서 도봉산으로 09시 5분에 도봉산역에서 의정부로 출발 하여 09시 20분 신탄리행를 탔다
낭만적인 주말의 이 통일호 열차는 두 번째지만 어김없이 좌석은 산님들로 꽉 찬다
다들 들뜬 마음일 것이다.. 마침 좌석이 하나 있어 앉아서 바깥의 경치를 보면서 갔다.
이 경원선은 신타리에서 중단된 찻길, 그래서 아마도 신탄리의 고대산은 안보관련 산행길이 되었을 것이다. 통일호 열차의 요금은 1,200원이다. 신탄리를 가건 여기 소요산이건 같은 요금이다.
소요산 기차역에 도착하였다.. 이 기차는 의정부역에서 매시 20분에 출발하고 반대로 소요산에서는 매시 43분출발을 한다. 잘 외워 놓아야지,. 그래야 교통비 절감과 시간이 절감될 것이다.
참고로 조사해보니 버스는 수유리에서 36.39.136 번등이 있었다. 오늘도 하산길에 버스를 타려다가, 그래도 기차가 훨씬 더 편안할 것 같아 열차를 이용한다.
10시00경에 소요산역에 도착하고 출발하는 열차의 기관사에게 손을 흔들며 작별인사를 하니 젊으신 기관사 분이 흔쾌히 같이 손짓을 해준다.. 오늘 산행은 웃으며 시작을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소요산 역은 아주 규모가 작은역이며 깔금한 분위기이다. 우리나라의 역들이 많이 바뀌었다.. 어디를 가도 거의 다 그런 분위기이다,. 문화관광의 선두주자인 것만을 확연하다.
역사에는 내 누에는 영락없이 노부부로 보이는 친절한 역무직원이 반겨준다.. 역을 나와서 소요산 4거리에서 들머리로 향했다,
앞선 분들이 많아 따라 나서면 되는 길인것 같다. 무슨 산악회에서 시산제를 지내려함인지 40여명이 앞장을 선다.
소요산 입구에는 구한말에 독립 만세운동을 이끌었던 홍덕문의 추모비가 있다. 단정한 비각과 안내문이 산객을 맞이한다. 여기서부터가 유원지인 모양이다.. 깔끔하게 다듬어 놓은 길, 무궁화, 단풍이 줄지어 서있다.. 정갈한 도로 포장,, 참 아름답다.
길을 좀 더 가니 여기 입구에서부터가 바로 요석공원이다. 그래 요석공주의 일화가 적힌 안내판이 보인다..
원효대사와의 인연, 설총의 설화가 생각난다...
신라 무열왕 시절 원효대사께서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주면 하늘을 떠 받칠 재목을 만들겠노라." 호언 하고 만난 사람이 요석공주. 호언대로 원효가 요석을 통해 만든 재목이 '설총'이라는 대 학자다. 원효는 요석공주와의 관계이후 속세를 버리고 은둔을 한다. 그 은둔지가 바로 소요산이란다. 그 후 요석공주는 원효대사와 사이에 낳은 어린 설총을 데리고 공주봉 기슭에 별궁을 짓고 살면서 지금의 일주문 부근에 와서 원효대사가 수도하는 곳을 향해 세번 절하게 하고 학업에 정진토록 했다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어떤 기록에는 공주봉이 늘 절하던 장소라고 한다.
걸음을 옮겨 입구의 매표소에 도착하니 시계는 10시 20분을 가르킨다. 입장료는 2.000원이다. 국립공원보다 더 많이 받는다.. 아마도 자재암에 국보급이나 보물급 문화재가 있는가 보다. 등산지도를 요청하였더니만 입구의 관리소에만 있다고 한다..
할 수 없이 입구에서 찍은 안내판을 참고하여 등산을 하여야 할 것 같다.
걸음을 재촉하니 드디어 일주문이 나온다.. 소요산 자재암이다, 일주문의 용머리가 양쪽에서 하늘을 치어다 본다. 아주도 불법도량을 수호하는 팔부중인가보다..
합장 배려 올린 후에 안내판을 보면서 조금더 가니, 마지막 휴게소이다. 잠시 쉬면서 컵라면을 하나 구입하고 배낭을 정리, 복장도 산행에 맞추고 점퍼는 배낭에 들어메고 걸음을 재촉하니 아까의 대규모 산님들이 잠시 기초체조를 한다.
여기부터인가 보다. 왼쪽과 오른쪽에 급경사면이 보인다,
작은 폭포가 있고, 안내표지는 없다 나중에 보니 이 폭포가 바로 원효폭포라고 한다.
이 폭포는 직폭에 가까운 폭포인데다 주변의 경관이 폭포의 아름다움을 더해준다. 이제 봄이 왔음인지 수량도 늘어서 올해 처음으로 본 물이 내리는 폭포를 보게 되었다.. 계곡의 물이깨끄하여서인지 물고기가 헤엄을 치는 모습도 보인다. 아름다운 우리 국토, 우리 산천이다.개울옆 석축위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들어가면 백운암이 나온다.. 오르는 계단이 힘든다.. 잠시 지나니 작은 벼랑이 나오고, 돌담으로 웅장하게 둘러싸인 산성같은 담벽, 굳게 산문을 닫아 건, 백운암이 보인다.
지금도 동안거 중이신가 보다.. 원효대사님처럼 철저한 수행을 거쳐 보살도로 우리네 중생을 구제하실 스님들의 수도 중이시니 숙연한 마음으로 지나쳤다..
소나무에 설치된 스피커에서 천수경의 낭송이 산천에 울려퍼진다.. 저 천수경 소리들 듣고 누리의 중생들이 지옥고를 벗어나고 축생고를 벗어나고 아귀도를 벗어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드디어 자재암이 나온다. 자재암일대가 바라다 보이는 입구부근의 작은 전망대바위에서 바라보면 계곡안이 비좁은데도 자재암은 지형을 따라 좁은 곳을 아주 효과적으로 이용하여 터를 잡고 있으며, 그 뒤에는 단애와 노송숲이 어울어져 산록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하백운대의 서릉에 해당되는 능선까지가 자재암의 뒷능선에 해당되는데 자재암뒤의 삼성각에서 능선까지는 급경사여서 반 단애를 형성하여 마치 수목과 단애, 절벽과 송림이 적절히 어울어진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놓은 캔버스같다.
포근한 느낌이 드는 곳, 아주 아담하여 보인다.
자재암에 대한 기록을 여기에 옮겨 본다
--소요산 자재암-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의 말사이다. 654년(무열왕 1) 원효가 창건하여 자재암이라고 했다. 고려시대 974년(광종 25) 각규(覺圭)가 태조의 명으로 중건하여 소요사로 바꾸고, 1153년(의종 7) 화재로 소실된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채만을 복구하여 명맥만 이어왔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1872년(고종 9) 원공(元空)과 제암(濟庵)이 퇴락한 이 절 44칸을 모두 중창하고 영원사(靈源寺)라 하였다. 이때 영산전· 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각·산신각·별원(別院)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1907년 화재로 만월보전을 제외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1909년 성파(性坡)와 제암이 다시 중창하고 절 이름을 자재암으로 고쳤다.
다른 기록에는 원효가 소요산 바위굴 (지금의 나한전)에서 수도를 할 때 비를 흠뻑 맞은 어떤 미모의 여인이 초당을 찾아들었지만 원효는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낸 여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 여인이 바로 관세음보살이었고, 관세음보살로부터 의지력을 시험받은 원효대사는 초당자리에 암자를 짓고는 '내 마음 하나만큼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뜻으로 자재암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한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어 1961년 진정(眞精)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에는 삼성각을, 1982년에는 일주문을 각각 지었다. 이어 1984년에는 부설 유치원이 개원하였고, 1983~1985년에 오래된 건물이 헐리고 새로운 중창이 이루어지면서 오늘날의 면모를 갖추었다.
요사채와 대웅전, 그리고 삼성각이 눈에 들어온다.. 대웅전에는 젊은 남자분이 참배를 하고 있다. 같이 참배를 하고, 나한전으로 걸음을 옮기다가 안내문을 읽어보았다.. 인터넷상에 기록된 문헌들의 내용들이다.
산행을 하면서 늘 이런 경험, 즉 사찰의 유래나 경과, 역사와 관련된 사항들을 보면서 자연스러이 옛스런 사항들을 알게된다..
내가 역사에 관심이 많은 건, 이런 영향 때문일지도 모른다. 덩달아 우리 아이도 상당히 관심이 많은 모양이다..
이 자재암에는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한다. 원효가 요석공주와 세속의 인연을 맺은 뒤, 이곳에 초막을 짓고 수행에 정진하고 있을 때, 관세음보살이 변신한 아름다운 여인이 유혹을 하였다. 설법으로 유혹을 물리친 원효는 이내 그 여인이 관세음보살이었음을 깨닫고 더욱 수행에 정진하는 한편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고 자재무애의 수행을 쌓았다는 뜻에서 절을 짓고 자재암이라 했다고 전한다.
또한 수락산 흥국사(興國寺)의 승려이던 제암과 자재암의 주지인 원공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한다.
절 근처에는 원효와 요석공주의 전설이 얽힌 요석궁지와 조선 태조의 행궁(行宮)터가 있다는데 초행인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요석궁지는 요석공주가 설총을 키웠다는 곳인데 그 위치는 자재암 부근의 하백운대 부근으로 보인다라는 안내만 들었을 뿐이다. 나는 볼 수 없을 수 밖엔 없다...
나한굴에서는 노스님께서 축원을 하고 계신다.. 좀 전의 천수경은 여기에서 낭송이 되었는가 하는 짐작을 가져본다..
나한전은 원효대바위아래 굴속에 있다. 신라의 어느스님이 기거했다는 설이 있다 샘터 안쪽으로 깊숙이 동굴이 형성되고 거기에 나한전이 이루어졌다.
합장으로 삼배올리고 나한전옆 원효대 아래 굴 입구에 솟아오르는 샘물, 여기는 입구의 용머리형이 조각되어있다
석간수가 솟아올라 사철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을 축여 주는 이규보의 시에서처럼 7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시원한 물맛을 과객에게 선사하고 있음직도 하다.. 물이 귀한 암자에서는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한 잔마시고 나도 물병에 채웠다.. 감사의 표시로 작은 금액을 시주하였다. 좋은 일에 쓴다고 하니 작은 보시를 한 셈이다...
나한전 옆의 작은 폭포는 옥류폭포라고 한다. 이제 봄 날인지 가늘지만 폭포가 형성되어 있어 아름다워 보인다,,. 수량이 풍부하여지면 많은 사랑을 받을터, 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동쪽 요사채와 나한전 사이에 있는 바윗길이다. 이 길은 노송이 우거져 있어 운치가 그윽한 길이나 워낙 급경사여서 철책을 길게 세워놓았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일이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니다. 하산하시는 분들의 숨소리도 무척 거칠지만 같이 오르는 산님들의 호흡소리는 차마 거칠게 느껴진다.. 나도 그러하고
바윗돌이 무척 미끄러워보이는 아주 강한 성질의 것들로 보인다. 뾰쬭하여 넘어질 경우는 큰 부상을 당할 것이다.. 조심스럽게 산행을 시작하여 오르니, 산바람이 불어온다.
아직은 채익지 않은 봄 날인데도 바람이 무척 시원하다.. 오름을 계속하다 뒤를 돌아보니 건너편의 산세가 오밀 조밀 참 아름답다,
발 아래로 사찰의 모습이 정겹게 보인다. 나무 틈새로 보이는 자재암의 모습을 뒤로 하고 가파른 나무계단을 올라 좀 더가니 하백운대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갈래길이다. 다른 곳에 들머리가 있는 모양이다. 여러분이들이 쉬고 계신다.. 미군병사로 보이는 젊은이도 연신 미소를 띠며 즐거운 산행을 하고 있음이 눈에 들어온다 시계를 보니 벌써 11시 45분 쯤 되었다.. 해발 440m 이다..계속 오름길이 될 모양이다.
그러면 여기까지의 구역을 하백운대라고 하는 모양이다.
시원한 물을 한 모금하고 산님께 부탁,기념촬영을 하고, 다시 배낭을 매고 길을 나섰다. 약간은 미끄러운 길, 아마도 소요산은 육산인 모양이다. 낙엽과 진흙이 뒤섞여 얼었는 눈이 녹아 진창길이 많다.자연히 조심 조심 오르게 된다.
중백운대가 나온다. 안내판에는 510 m, 시간은 12시 쯤 되었나보다.. 단애인지 소나무가 멋있게 보인다.
아름다운 경치, 멀리 봉우리가 몇 개보인다.. 아마도 이 산은 안내도면 처럼 빙둘러싸인 병풍처럼 생겼나보다.
솔바람이 불어온다,, 상큼하다.
중백운대에서 상백운대까지의 능선, 상백운대에서 나한봉까지의 능선도 밋밋한 육산의 모습이다. 상수리나무계통의 수목이 우거져 있다. 낙엽이 그렇게 보인다.
무척 많은 소나무 군락지를 지나 상백운대에 도착했다. 진창이 심하다. 해발 559 m 쉼터인가 보다.. 하산길도 있는 것같다. 많은 산님들이 모여서 간식 중이다,
잠시 머물다가 칼바위(칼날바위) 쪽으로 향했다..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위들, 옛분들의 산수화에서 봄직라한 바위들이 줄 서 있다, 좁은 능선 비윗길에는 소나무들이 어울리고 아름다운 경치에 취한 산님들이 카메라를 들이댄다.
능선을 지나서 식사 할 곳을 찾아보니 양지녁이 보인다. 아래는 절벽, 여기에서 배낭을 끄르고 혼자 앉아 식사를 하였다 시계는 12시 반을 가르킨다.
저 아래의 동두천 군부대에서 들리는 사격소리, 여기도 전방지역인가보다
봄의 자취가 여기저기 보인다. 바로 옆의 철쭉나무, 진달래나무도 봄 소식을 가져올 태세다. 잘 생긴 소나무의 모습은 하나같이 그림속의 낙락장송들이다.
고사리도 겨우내 잘 견디었는지 파란 빛을 보인다. 겨울을 용케 보냈는지 모르겠다. 이끼에도 물이 오르는 모양이다.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출발, 이정표가 있는 곳을 지나니 다시 오르막이다. 오던 길을 돌아보니 아까 지나왔던 중백운대위 소나무가 있던 곳은 엄청난 절벽의 위다.
멀리서보 멋스럽게 보인다.
계획대로 오후 한시에 출발하여 걸음을 옮기니 드디어 나한대( 571m) 나온다, 전망이 시원하다. 건너편에는 산님들이 의상대에 모여 있다. 다시 내리막을 거쳐 오르니 드디어 해발 587 m 인 이 소요산의 정상인 의상대에 도착하였다. 시간은 벌써 한시반이다 정상의 바위 역시 단단한 재질인 모양이다. 약간 미끄러워 보인다. 표지석이 보인다.. 그리고 꼭대기의 바위에서 산을 빙 둘러보았다.. 오밀조밀한 소요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망대 처럼 보이는 바위는 출입금지 팻말이 붙어있다. 잠시 머물다 발걸음을 옮겼다.이 산의 봉우리들이 가만히 보니 불교식의 지명들이다. 나한대, 의상대, 원효대, 그리고 관련된 공주바우위 등.
소요산 자재암의 유래와 연결된 그런 지명들, 그런데 의상대는 왜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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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 솔바람
청하 권대욱
산 너머 봄이 온다기에
봄을 잡으러 나선 길가
수양버들 푸른빛은 하늘을 드리우고
일주문 들어서려니 여기까지가 속세인가
백운암 수도승은 언제 뵐것인고
엄동설한 안거속에 한 소식들으려나
천수경 염불소리 솔바람에 흘러가니
저 바람이 실어온 봄소식은 예서 남아 있구나
속리교 지나니 이제는 세상이 아닐것이니
자재암 그 깊은 골을 찾아보네
원효폭포는 말 없이 우뚝하고
요석공주가 기다리는 천년세월일세
나한전 석굴에는 노스님염원 저리 간절하고
감로수 한 잔후엔 나도 삼배로다
어허라 여기가 바로 극락일세
옥류폭포 흘러가니 예가 봄이로다
고갯길 나섰더니 속세를 이별하네
구름이 언뜻지나니 여기가 백운대로다
낙락장송은 천년 세월 지켜오니
칼날바위 그 예봉이 서슬푸르다
양지녁에 나그네는 차 한잔 시름덜고
굽이돌다 나한봉을 올라서서
세상을 굽어보니 수도자 같아지네
저곳이 의상대라니 웅장도 하구나
공주봉 솔바람은 요석공주의 사부가인가
옛 절터 산죽에 스치는 아련함 채워
원효폭포 물소리에 속리교 나서려니
어허라 다시 속세길이로구나
소요산 산행길은 천년세월을 더듬게 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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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봉으로 가는 이정표가 보인다.. 역시 약간 미끄러운 길이다. 울창한 활엽수의 군락들이 원시림처럼 보인다.. 다시 능선길이 계속된다.. 한 참을 가니 외국인 두 분이 좁을 곳에서 나에게 길을 양보한다. 그래도 여기가 우리 강산인데, 서로 양보하다보니 안되겠다, 기어이 양보하니 우리말로 감사하다고 한다. 아름다움이 배어나온다.
뒤 따라오시던 일행은 바로 샘터가 있는 쪽으로 하산을 한다.
나는 공주봉으로 향하고, 앞의 분과 같이 남은 온수로 커피 한잔을 나누어 마셨다, 군무원인 모양이다. 먼저 길을 재촉하시라 하고 혼자 잠시 있다가 오르막길을 재촉한다.
공주봉을 올라가는 길에도 암릉은 있고 암릉 한쪽의 전망대에 서서 단애에 뿌리박고 선 소나무 가지아래로 의상대를 조망하거나 먼 계곡 바닥에 자리잡은 자재암을 바라보는 경관이 보통이 아니었다.
동두천의 외진 지역이 잘 보인다.
벼랑길을 한 참 오르니 드디어 공주봉이 나온다 이정표에는 526m 시간은 두시 십여분이다
야외음악당을 만들어 놓은 것만 같다. 헬기장이 있고 토치카가 보인다.
되새겨 생각해보니 원효대사의 '전설'을 말해주는 것들이 여러군데 보인다. 공주봉은 요석공주에서 따온 것인듯싶다. 요석공주가 기거하던 궁터도 산입구에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져오고 있는 모양이다.
정상의 공터에는 세분이 좀 과하게 음주를 하고 있다.
위험할 터인데, 빨리 벗어나니 하산길이다. 작은 돌탑군이 보인다.
누군가의 염원이 저 돌탑군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공주봉에서 내려오는 길은 소요산의 어떤 길보다도 안전한 흙길이어서 40분이면 자재암아래 폭포까지 올 수 있다. 문제는 이 길이 너무 심한 진탕길이다. 중간에 평탄한 바위와 바위끝 벼랑에 서서 바라보는 전망은 또하나의 아름다운 경관이었다.
이름모를 아름다운 절벽에서 보이는 소나무와 치올려보이는 의상대와 그리고 저 아래 자재암이 보인다.
진탕길이 끝날 무렵 반대편에서 올라오는 대단한 산님들, 아마 산에서 1박이라도 하실 요량인다. 15여분이 일행을 지어 오른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비탈길을 계속 내려오니 드디어 엣절터가 나온다
시계를 보니 14시45분이다.
여기는 골짜기에 아직은 얼음이 박혀있다. 연세 지긋하게 보이는 노인분이 옛절터를 찾기에 여기라고 안내 해드리니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한 바퀴 빙 돌아보신다.
절터의 언덕은 산죽군락이다, 작은 벼랑이 뒤를 감싸고 앞은 계속, 산죽에 스치는 바람 소리는이 폐허를 지나간다,
부서진 작은 기왓조각들, 제행무상려니...
좀 더 걸음을 옮기니 입산 지점이 나온다.원효폭포의 물소리는 여전하다.
세상과 분리되었다는 속리교를 지나고 들어옴과 나옴이 하나일것인 일주문을 지나 오늘의 산행을 마무리 하였다.
소요산은 바람이라도 불면 솔바람 소리가 시원할 아름다운 능선이었다.
간간이 나타나는 노송들의 멋진 자태는 바위틈에서 수많은 세월 동안 온갖 시련을 겪어내면서 아름답게 자신을 승화시켜 낸 거룩한 예술품들일것이다. 이 거룩한 예술품인 노송은 이미 앞서서 해탈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소요산에서 부처를 찾는 여행은 이 시점에서 마무리를 하였다.
이 산을 올 가을에 꼭 다시 와 보리라.
속과 세가 분리될 것이 없으니, 내 마음의 진리여행은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