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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9. 02. 16(토)
■ 황씨의 유례(黃氏의 類例)
한국의 황 씨 본관은 창원(昌原), 평해(平海) ·장수(長水)를 비롯하여 상주(尙州) ·우주(紆州) ·덕산(德山) ·회덕(懷德) ·황주(黃州) ·관성(管城) ·부안(扶安) ·강화(江華) ·삼기(三岐) 외에도 문헌상에는 163본이 전 한다
황씨 중앙종친회 측에서는 대략 20여 본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모두 창원, 평해 ·장수의 3본에서 분파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황씨의 도 시조는 중국 후한(後漢)의 유신(儒臣)이었다는 황락(黃洛)으로 전해온다.
그는 광무제(光武帝) 건무 4년(유리왕 5=AD 28)에 장군 구대림(丘大林 : 平海丘氏의 시조)과 함께 교지국(交趾國, : 지금의 베트남)에 사신으로 가던 길에 동해에서 풍랑을 만나 평해에 표착, 그곳에 자리 잡고 살며 황 장군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황씨의 시원(始源)이다.
현재에도 평해(경북 울진군 평해읍) 월송(越松) 지역에는 황장군의 묘가 전해지며, 구(丘)장군이 살았다는 곳을 구미진(丘尾津)이라 부른다. 후세에 갑고(甲古) ·을고(乙古) ·병고(丙古)의 3형제가 있어 각각 기성군(箕城君 : 箕城은 平海의 옛 이름) ·장수군(長水君) ·창원백(昌原伯)에 봉해져 훗날 창원, 평해 ·장수등 3관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오늘날 전하는 20여 본이라는 것도 이 3본에서 갈린 분파라는 것이 통설이다.
예를 들면, 상주 ·덕산 등은 평해에서,
간주 ·남원 ·해주 등은 장수에서,
회덕 ·황주 ·제안 등은 창원에서 각각 분적(分籍)된 것으로 전해진다.
인구가 가장 많은 창원황씨는 각각 계보를 달리하는 3파가 있는데, 토황(土黃)으로 불리는 시중공(侍中公)파와 당황(唐黃)으로 불리는 공희공(恭僖公)파, 그리고 호장공(戶長公)파 등이다.
이들 3파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으며, 족보도 각기 따로따로 편찬한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당황’이라 불려온 공희공파의 파조(派祖) 황석기(黃石奇 : 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화평장사)가 원래 고려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魯國公主)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조적(趙)의 난’(1339)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는데,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배행(陪行)하여 왔던 것이다.
황씨는 고려말기에서 조선전기에 걸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상신(相臣) 3명, 대제학 2명을 비롯하여 총 171명의 문과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1960년도 통계청조사에서는 6만 1435가구에 인구 35만 907명으로 성별순위는 258성 중 제16위였고, 85년도 조사에서는 가구수 13만 4347가구, 전국 가구 구성비 1.4 %로 274성 중 제16위였다.
●평해황씨(平海黃氏)
대표적 인물로는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조선개국공신 2등에 오른 희석(希碩)을 비롯해 현(鉉) ·여일(汝一) ·윤석(允錫) 등을 들 수 있다.
현은 세종 때 대사성을 지낸 조선전기의 대표적 유학자이며, 여일은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공을 세우고 뒤에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를 다녀와 기록한 《조천록(朝天錄)》 등의 저서가 있다.
윤석은 영조 때의 실학자 ·언어학자로서 그의 문집인 《이재유고(齋遺稿)》와 그가 저술한 《화음방언자의해(華音方言字義解)》는 오늘날 국어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우주황씨(紆州黃氏)
우주황씨의 인물로는 명종 때의 정승 헌(憲)이 있다. 그는 명종3년 우의정에, 이듬해 좌의정에 올랐으나, 소윤(小尹)의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제안황씨(齊案黃氏)
제안(齊安黃氏) 황씨의 대표적 인물로는 영조 때 황고집으로 불린 순승(順承)이 있다.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생이던 그는 효자로 이름이 났을 뿐 아니라, 기행기벽으로 일화를 남겼다.
중종 때 개성의 한 진사의 서녀(庶女)로 태어난 송도의 명기 진이(眞尹)가 유명하다.
●장수황씨(長水黃氏)
조선시대의 4대 명상(名相)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황희(黃喜)가 배출되었다.
그는 정승(政丞)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治績)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그의 아들 세 명도 모두 현달하였는데, 치신(致身)은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고, 수신(守身)은 우의정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회의 후손으로 열(悅)의 아들인 정욱(廷彧)은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 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났는데,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기(璣)의 아들 경원(景源)은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또,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던 맹헌(孟獻) ·여헌(汝獻) ·효헌(孝獻) 3형제가 유명하고, 성조 때 일본에 다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내침(來侵)을 예고한 윤길(允吉),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한 엽(曄), 순조 때의 명신 승원(昇源),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은 《매천야록(梅泉野錄)》의 현(玹) 등은 모두 희의 후손이다.
●창원황씨(昌原黃氏)
시중공파(侍中公派) ·호장공파(戶長公派) ·공희공파(恭僖公派) 등 3파에서 고루 인물을 배출하였다.
시중공파에서는 자(梓) ·인검(仁儉) ·인점(仁點) 3부자가 유명하다. 자는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
문(갑인연행록)과 (경오연행록)을 편술하였다.
큰아들 인검은 형조판서를 지냈고, 둘째아들 인점은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파에서는 사우(士祐) ·응규(應奎) ·섬(暹)의 3대가 두드러진다.
사우는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으며, 아들 응규는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르고 돈녕부지
사를 지냈다. 손자 섬은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柳永慶)의 처남으로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공희공파(恭僖公派)에서는 파조(派祖)인 석기의 아들 상(裳)이 문하찬성사 ·서강도원수 등을 지냈고, 상의 현손 형(衡)은 공조판서를,
그의 아들 기(琦)는 직제학 ·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형의 증손 신(愼)은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直言)을 회피한 사실
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황씨의 인물로는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낸 구하(龜河),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 사영
(嗣永), 순조 때의 명문장 ·명필 기천(基天), 고종 때의 학자 재영(在英)과 명의(名醫) 필수(必秀) 등이 있다.
●평해 황씨(平海 黃氏)
황씨의 도시조인 황락의 첫째아들 갑고가 기성(평해의 옛지명)군에 봉해지고 그의 아들로 전하는 온인이 고려조에서 금오위 대장군을 지
내 평해에 세거하였다. 그리하여 후손들인 락(洛)을 시조로 하고 온인을 일세조로 계대하면서 본관을 평해로 삼았다.
(1985년 경제기획원조사 인구수 : 124,072명)
집성촌 : 경북 청송군 청송면 청운동
●장수황씨(長水黃氏)
시조 황경은 신라 경순왕의 부마로 벼슬은 시중을 지냈다.
그후 10세손 황공유가 고려 명종 때에 전중감으로 이의방의 난이 있은 후로 장수로 낙향 하였고, 15세손 황감평이 후학을 위한 덕망있는
학자 였다는 것 외에는 18세손 황석부 까지는 고증할 자료가 없다.
중시조 황석부는 황희의 증조부로 사후에 호조참의로 추증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황석부를 1세 조상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 인물
◇황희(黃喜) : 조선시대의 4대 명재상의 한 사람으로 정승의 지위에 24년간, 그 중 영의정에 18년간 있으면서 농사의 개량과 예법의 개
정, 서얼의 천역(賤役) 면제 등 치적을 쌓았으며, 소신이 굳으면서도 원만하고 청렴하여 청백리에 뽑히는 등 숱한 일화를 남겼다.
◇황치신(致身): 황희의 아들. 중추부판사 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올랐다.
◇황수신(守身): 황희의 아들.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랐다.
◇황정욱(廷彧): 이조판서, 예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광국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시와 서예에도 뛰어 났다.
저서로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황경원(景源): 대제학을 비롯해 이조, 예조,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황맹헌(孟獻): 황여헌(汝獻), 황효헌(孝獻) 3형제: 문장과 서예가 뛰어났다.
◇황윤길(允吉): 성조 때 일본에 다녀와 풍신수길[豊臣秀吉,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침략을 예고했다.
◇황엽(曄): 숙종 때의 학자로 의학뿐 아니라 지리에 정통하여 '여지도(輿地圖)'를 만들고 '지도연의(地圖衍義)'를 저술 했다.
◇황승원(昇源) : 순조 때의 명신 , 한말의 야사(野史)를 엮었다.
◇황현(玹) : '매천야록(梅泉野錄)'의 저자이다.
항렬
17세 주(周)/ 18세 의(義)/ 19세 연(淵)/ 20세 (示)변 인(仁) / 21세 (土)변 하(夏) / 22세 (水)변 규(圭) / 23세 (人)변 상(商) / 24세 (火)변 영(永) / 25세(土)변 진(震)
창원 황씨(昌原 黃氏)
창원황씨는 본관을 같이 하면서도 각각 선조를 달리하는 8파가 있는데, 이들 8파사이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뚜렷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족보도 각기 따로 따로 편찬한다.
◯시중공(侍中公)파 : 황신. 토황(土黃)으로도 불리운다.
◯공희공(恭僖公)파 : 황석기(회산군). 당황(唐黃)으로도 불리운다.
◯호장공(戶長公)파 : 황량충.
◯예빈동정공파 : 황성찬.
◯전서공파 : 황윤기.
◯호장공파 : 황우용.
◯규정공파 시중공파의 시조 황신의 원조는 고려때 문하시중을 지낸 황충준이며 그 후의 세계는 알 수가 없으나, 창원황씨가 확실하다고
한다.
공희공파의 파조 황석기(黃石奇)는 원래 고려 공민왕 때의 중서문하 평장사이었다.
종래에는 그가 원나라 사람으로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를 수행하여 고려에 온 것으로 전해졌으나, 이미 이전에 그는 고려에서 여러 벼
슬을 지내고 1339년에 '-조적의 난'을 평정하는 등 활약한 사실이 '고려사'에 뚜렷이 기록되어 있다.
1348년 고려 제29대 충목왕이 죽자 황석기는 이제현(李齊賢)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30대 충정왕의 승습(承襲)을 청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앞서 원나라에 와 있던 공민왕(江陵大君)이 원나라 위왕(衛王)의 딸 노국공
주와 결혼하여 귀국하게 되자 황석기는 그때 따라 왔던 것이다.
●대표적 인물
◯시중공파]
◇황자(梓) : 부제학, 대사헌을 역임하고 동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와 기행문 '갑 인연행록'과 '경오연 행록'을 편술하였다.
◇황인검(仁儉) : 황자의 큰아들. 형조판서를 지냈다.
◇황인점(仁點) : 황자의 둘째 아들. 영조의 딸 화유옹주와 결혼, 정조 때에는 동 지 겸 사은사가 되어 일곱 차례 청나라에 다녀왔다.
◯호장공파 ]
◇황사우(士祐) : 호조, 예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을 역임하였다.
◇황응규(應奎) : 황사우의 아들. 이퇴계의 문하생으로 임진왜란 때 절충장군에 오 르고 돈녕부지사를 지냈다.
◇황섬(暹) : 황사우의 손자. 부제학, 대사헌이 되었으나, 계축옥사(1613) 이후 낙 향하여 학문에만 전념 하였다.
소북파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 (柳永慶)의 처남이다.
◯공희공파
◇황상(裳) : 황석기의 아들. 문하찬성사?서강도원수 등을 지냈다
◇황형(衡) : 황상의 6세손. 공조판서를 지냈다.
◇황기(琦) : 황형의 아들. 직제학?대사간을 거쳐 도승지, 경기도 관찰사 등을 역 임하였다.
◇황신(愼) : 황형의 증손. 이율곡(李栗谷)의 문하생으로 정여립의 옥사(1589) 때 정언(正言)으로서 대신들이 서로 직언을 회피한 사실
을 논박하다가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후에 공조, 호조판서를 지냈다. 이 밖에 창원 황씨의 인물로는
◇황구하(龜河) : 영조 때 노론의 중진으로 이조판서를 지냈다.
◇황사영(嗣永) : 신유박해 때 순교한 백서(帛書)사건의 주인공이다.
◇황기천(基天) : 순조 때의 명문장이며 명필이다.
◇황재영(在英) : 고종 때의 학자이다.
◇황필수(必秀) : 명의(名醫)이다.
상주 황씨(尙州黃氏)
1) 시조 : 황 락[黃 洛]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상산(商山)은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옛 지명으로 삼한시대에 진한의 영토였으며, 신라 첨해왕때 상주(上州)라 하였고 그 후 경덕왕이 상주(尙州)로 개칭하였다. 상주황씨는 황씨의 도시조인 황낙(黃洛)의 후손이며, 고려조에서 벼슬이 상주국에 이른 황석주(黃石柱)를 1세조로 하고 있다.
상주황씨 족보]에 의하면 석주(石柱)의 4대손 을구(乙?)가 상주에 정착 세거하면서부터 본관으로 삼게 되었다고 한다. 상주황씨는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훌륭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였는데, 특히 조선 세종26년때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양관 대제학을 거쳐 의정부 좌찬성에 오른 효원(孝源)이 좌익 및 좌리공신에 책록되어 상산부원군에 봉해졌고 후에 청백리에 녹선 되었으므로 크게 명성을 떨쳐 가문을 중흥시켰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세근(世懃)의 아들 우한(佑漢)과 호조참판에 추증된 이환(以煥)의 아들 징(徵)이 있다. 우한(佑漢)은 선조 때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한림원의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으며 징(徵)은 현종 때 생원으로 무과에 급제하여 호조정랑을 거쳐 훈련원 부정. 부호군. 승지를 지냈고 전라좌수 수군절도사를 역임하였다.
한말에 와서는 한국통신원 주사 휘동(暉東)의 아들 노식(魯軾)이 1935년 오성면 양고리에 신흥학원을 설립하고 운영비와 교사의 보스 등을 자비로 부담하여 불우한 농촌아동 교육에 헌신하여 가문을 빛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상주황씨는 남한에 총 3,951가구, 17,151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경기도 광주군 오포면 양벌리
충북 보은군 보은읍 삼산리
경기도 평택군 현덕면 도대리
경북 선산군 선산읍 봉곡동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서천리
경북 영천군 북안면 북동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 북암리
제안 황씨(齊安黃氏)
1) 시조 : 황을구(黃乙耈)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제안은 황해도 황주의 고려 성종때 별호이다. 황주는 본래 고구려의 동홀인데, 신라 헌덕왕 때 취성군으로 개칭되었고, 고려 초에 황주라
하였으며,1895년에 황주군이 되었다.
제안황씨(齊安黃氏)는 창원황씨에서 분적된 계통으로 회산부원군 황석기의 증손 황을구(黃乙耈)를 시조로 받들고 있다.
문헌에 의하면 시조 을구는 고려조에서 문과에 급제하여 소윤과 이조참의를 역임한 후 나라에 훈공을 세워 제안군에 봉해졌으므로 후손
들이 그를 시조로 받들고 봉군지명인 제안을 본관으로 삼아 창원 황씨에서 분적 되었다고 한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로는 을구의 7세손 대붕이 조선조에 호성원 중 공신에 올라 현령, 군수를 지냈고, 후손 대임의 아들 응성은 조
선 중엽에 보령현감, 청도군수를 역임하였다. 이렇게 대대로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낸 제안황씨는 창원황씨 시조 황석기 계통의 제안공
파로 이어져 계대하고 있다.
1985년 경제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제안황씨는 남한에 총 603가구, 2,3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3> 집성촌
평남 대동군 부산면 화곡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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