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산집 제47권 / 행장(行狀)
묵헌 봉공 행장(默軒奉公行狀)
공은 휘가 여해(汝諧), 자가 화보(和甫)이다. 봉씨(奉氏)는 하음(河陰)에 관적을 두니, 고려 좌복야(左僕射) 하음백(河陰伯) 휘 우(佑)가 시조가 된다. 휘 천우(天佑)에 이르러서 충숙왕(忠肅王)이 원(元)나라에 들어갈 때를 만나 충심을 다해 세자를 보호하였고 문겸(文謙)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으니, 이분이 공의 고조가 된다.
증조는 휘 문(文)으로, 판도 판서(版圖判書)이다. 조고는 휘 유례(由禮)로, 본조에 들어와서 이조 판서가 되었다. 선고는 휘 즙(楫)으로, 병조 판서이다. 선고 판서 공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를 아내로 맞이하였으니, 문충공(文忠公) 계맹(繼孟)의 딸이다. 영락(永樂) 기해년(1419, 세종1) 8월 15일에 고양리(高陽里)의 집에서 공을 낳았다.
공은 성품이 온화하고 순수하며 재주가 출중하고 빼어나서 어린 나이에 이미 노성한 사람과 같았다. 성공 삼고(成公三顧) 형제와 문민(文愍) 박공 중림(朴公仲林)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는데, 박공이 공의 기국(器局)이 큰일을 이룰 만한 것을 아껴서 자신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하였다.
공은 취금(醉琴) 박공(朴公: 박팽년(朴彭年)과 나이가 조금 차이 났으나 지기(志氣)가 부합하여 서로 지기(知己)로 인정하였다. 평소에 염정(恬靜)하고 과묵하여 종일토록 단정한 자세로 경례(經禮)를 연구하였다. 묘당에서 그 명성을 듣고 천거하여 사옹원 별좌에 제수하였는데, 공은 작은 관직도 하찮게 여기지 않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직분을 수행하여 명망과 실제가 모두 드러났다.
조정에서 장차 크게 기용하려고 하였는데, 육신(六臣)이 상왕(上王)을 복위할 것을 도모함에 이르러 일이 발각되자 체포되었다. 취금의 아우 박기년(朴耆年)도 정국(庭鞫)에 있었는데, 그가 말하기를, “봉여해가 미리 계획하여 스스로 ‘칼을 차고 대궐로 들어가서 막는 자가 있으면 찌르겠다.’라고 말하였다.”라고 하였다.
사형을 앞두고 취금 공과 이 충간공(李忠簡公) 개(塏)가 공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남자는 살아서는 의사(義士)가 되어야 하고 죽어서는 의귀(義鬼)가 되어야 하네.”라고 하였다. 이에 공이 미소를 머금은 채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바로 병자년(1456, 세조 2) 5월 모일(某日)이었다. 여러 공과 함께 적몰(籍沒)을 당하고 자손은 호남(湖南)으로 유배되었다.
배위는 순천 박씨(順天朴氏)로, 2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감찰 인(寅), 사직 헌(憲)이고, 딸은 진효연(陳孝淵)에게 출가하였다. 손자는 시언(時彥)이다.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지성(至性)이 있어서 부모를 섬김에 효성을 다하였고, 거상(居喪)할 적에는 이척(易戚)을 모두 잘 갖추었으며 죽을 먹으며 여묘(廬墓)하기를 삼 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탁월하게 풍절(風節)이 있어서, 일찍이 격앙하고 강개하여 국가를 위해 한번 죽기를 원하였다. 문장의 재주를 일찍 이루어서 저술한 바가 매우 많았으나 유고와 사경(四經)의 석의(釋義)가 모두 화마에 삼켜졌으니, 애석하다.
또 공의 삼종질(三從姪) 병조 판서 강성군(江城君) 석주(石柱)는 총부(摠府)에서 입직하다가 광묘(光廟 세조)가 선양(禪讓) 받은 것을 듣고는 실성하여 통곡하였는데, 취금 공이 경회루(慶會樓) 아래의 청위지(淸渭池)에 투신하려다가 성 충문공(成忠文公 성삼문(成三問)의 만류로 그만둔 것을 보고는 물러나 〈청위지가(淸渭池歌)〉를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깊고 깊은 청위지여 / 深兮深兮淸渭池
요동쳐도 탁해지지 않고 물을 대도 흐르지 않네 / 撓之不濁注之不流
이 속에 투신하려는 사람이여 / 投其人於此中兮
몸은 죽더라도 뜻은 변하기 어려우리라 / 身雖死而志難渝
그러자 시기하는 자가 고하여 아뢰기를, “봉석주는 좌익(佐翊)에 참여하지 않았고 또 〈청위지가〉를 지어서 육신(六臣)의 억울함을 슬퍼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강성군이 김공 효성(金公孝誠)과 함께 같은 날에 주륙을 당하였고 공의 종숙(從叔) 봉뉴(奉紐)도 동시에 절개를 세워 죽었으니, 이 일이 《장릉지(莊陵誌)》와 《동학사초혼기(東鶴寺招魂記)》에 실려 있다.
숙묘조(肅廟朝 숙종조)에 특별히 강성군의 죄안을 씻어주고 아울러 훈봉(勳封)을 회복하였다. 정묘(正廟 정조) 신해년(1791, 정조15)에 공을 장릉(莊陵 단종의 능)의 제단에 배향하였고, 순묘(純廟 순조) 을축년(1805, 순조5)에 공에게 좌승지를 추증하고 또 삼계(森溪)의 사당에 공을 제향하였다.
아, 장릉과 광릉(光陵 세조)의 시대는 사적에 궐문(闕文)이 많아서 감히 할 말을 다 하지 못하지만, 여러 공이 천인(天人)과 기수(氣數)를 다투어 구족이 멸하여도 후회하지 않았던 것은 황조(皇朝 명나라)의 방효유(方孝孺), 철현(鐵鉉) 등의 현인들과 시대는 다르나 똑같이 부합한다.
나는 매번 계유년(1453, 단종1)과 병자년(1456, 세조 2)의 일을 읽을 때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다. 무릇 죽고 사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중대한 것이지만, 몸을 희생하지 않으면 인(仁)을 이룰 수 없고 생(生)을 버리지 않으면 의(義)를 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생사의 관문을 초월하여 이로써 인의(仁義)의 옳은 도리를 구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정신이 여유롭고 힘이 안정되어 사생을 조모(朝暮)와 같이 보는 자가 아니면 어찌 이처럼 천경(天經 천지간의 당연한 도리)을 지탱할 수 있겠는가.
공의 13세손 인직(仁稷)이 공의 유사(遺事)를 안고 와서 나에게 행장을 지어줄 것을 청하였다. 공이 하료(下僚)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의(義)를 견지함이 더욱 굳건하여 육신(六臣)과 같은 경지로 돌아간 것은 특히 우뚝하게 빼어나니, 이는 바로 천도(天道)에 근원하고 민이(民彝)를 따라서, 의도한 바가 없이 이렇게 하는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양하지 않고 이상과 같이 기술하고 강성군과 공의 종숙의 일을 함께 들어서 이로써 지언(知言)의 군자에게 고하는 바이다.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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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默軒奉公行狀
公諱汝諧字和甫。奉氏貫河陰。以高麗左僕射河陰伯諱佑爲初祖。至諱天佑。値忠肅王入元。調護世子盡忠。諡文謙。是爲公高祖也。曾祖諱文版圖判書。祖諱由禮。入本朝爲吏曹判書。考諱楫。兵曹判書。判書公娶慶州李氏。文忠公繼孟女。以永樂己亥八月十五日。擧公于高陽里第。公性質溫粹。才藝穎達。髫齔已如老成人。與成公三顧兄弟。受業于文愍朴公仲林之門。朴公愛其器局。可以大受。以其子妻之。公與醉琴朴公年齒少差。而志氣脗合。相許爲知己。居恒恬靜寡默。終日端拱。鑽硏經禮。廟堂聞其名。薦拜司饔院別座。公不卑小官。而壹心營職。望實俱著。廷議將大用。逮六臣謀復上王。事覺被逮。醉琴之弟耆年亦在庭鞫。言汝諧預謀。自言佩刀入闕。有拒者將刺之。臨刑醉琴公及李忠簡公塏。執公手曰。男兒生當爲義士。死當爲義鬼。公含笑就禍。卽丙子五月某日也。與諸公同被籍沒。子孫流竄湖南。配順天朴氏。有二男一女。男寅監察,憲司直,女適陳孝淵,孫時彥。公生有至性。事父母盡誠。居憂易戚俱備。啜粥廬墓。三年如一日。卓犖有風節。嘗激昂慷慨。願爲國家一死焉。文章夙就。著述甚富。遺稿及四經釋義。盡畀於崑炎。惜哉。且公三從姪兵曹判書江城君石柱直摠府。聞光廟受禪。失聲痛哭。見醉琴公欲投慶會樓下淸渭池。被成忠文公挽止。退作淸渭池歌曰深兮深兮淸渭池。撓之不濁注之不流。投其人於此中兮。身雖死而志難渝。媢疾者告云石柱不參佐翊。又作淸渭之歌。悲六臣之冤。江城君與金公孝誠同日被戮。公從叔名紐。亦同時立慬。事載莊陵誌及東鶴寺招魂記。肅廟朝特洗江城君丹書。幷復勳封。正廟辛亥。配公于莊陵饗壇。純廟乙丑。贈公左承旨。又享公於森溪廟。嗚呼。莊光之世。史多闕文。有未敢索言。而諸公與天人爭氣數。湛九族而不悔者。與皇朝之方鐵羣贒。異世同揆。愚每讀癸酉丙子時事。未嘗不流涕也。夫死生之於人大矣。不殺身仁不能成。不舍生義不可取。故必透生死之關。用求仁義之是。是故苟非神閒力定。視死生如朝暮者。何能搘拄天經乃爾哉。公十三世孫仁稷。抱公遺事。謁余狀德之文。公身處下僚。而秉義彌堅。與六臣同歸者。尤爲卓絶。是乃本天咫循民彝。無所爲而爲者。故不辭而書之如此。幷擧江城君及公從叔事。以諗于知言之君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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