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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子大全卷一百五十四 / 碑.
하서 김인후 신도비명 병서(河西金麟厚神道碑銘 幷序)
본조 인물의 도학ㆍ절의ㆍ문장이 각기 차등이 있어서, 모두를 겸하여 치우치지 않은 이가 거의 드문데, 하늘이 우리나라를 도와 배출시킨 하서 김 선생만은 예외인 것 같다. 선생의 휘는 인후(麟厚), 자는 후지(厚之)이다. 울주 김씨(蔚州金氏)는 신라왕(新羅王 경순왕(敬順王)) 김부(金溥)에게서 나왔는데, 시조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덕지(德摯)가 김부의 별자(別子 적자(嫡子)의 아우)이다.
본조에 와서, 직장(直長) 의강(義剛)과 훈도(訓導) 환(丸)과 참봉(參奉) 영(齡)은 바로 선생의 증조. 조부. 아버지이고, 어머니는 옥천 조씨(玉川趙氏)이다. 참봉공은 매우 효성스럽고 선(善)을 좋아하여 옛날 군자(君子)의 풍도가 있었다. 선생은 나면서부터 용모가 단정하고 풍신(風神)이 수아(秀雅)하였으며, 두어 살 때에 신[履]을 똑바로 신었고 지름길을 택하지 않았으며, 외물(外物 물욕)에는 일절 마음을 두지 않고 오직 서적(書籍)과 한묵(翰墨)만을 좋아하였다.
일찍이 나물 껍질[菜皮]을 손수 벗기면서 그 끝[心] 부분까지 다 벗기고는 말하기를, “생리(生理)의 본말(本末)을 관찰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9세 때에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보고 기이하게 여기며, “그대는 의당 우리 세자(世子 인종(仁宗)을 말함)의 신하가 될 것이다.”하였으니, 이는 인종의 천품이 생지(生知 배우지 않고도 사물의 도리에 통하는 것)하여 온 신민(臣民)이 다 그 성덕(聖德)을 우러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점차 장성하여서는 항상 조용히 앉아서 엄연(儼然)히 상제(上帝)를 직접 대하듯 하였고, 글을 강론하다가 마음에 드는 대문을 만날 적에는 흔연 자득(欣然自得)하여 밤새도록 자지 않았으니, 그 조예가 이미 심원하였던 것이다.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 26)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나이는 22였다.
그때 당화(黨禍)를 겪은 지 얼마 안 되어 선비들이 학문한다는 소문을 기휘(忌諱)하였는데 선생은 퇴계 이 선생과 지기(志氣)가 상합, 오가면서 학문을 강마하여 이택(麗澤)의 도움이 매우 많았다. 경자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承文院))에 소속, 말미를 받아 호당(湖堂)에서 글을 읽다가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를 거쳐 박사(博士)로 승진하여 시강원 설서(侍講院說書)를 겸하였다.
마침 인종이 동궁(東宮)에 있으면서 학문이 날로 높아가다가 선생을 만나 크게 기뻐하여 그 은우(恩遇)가 날로 융숭하였고 때로는 선생이 직숙(直宿)하는 곳까지 친림(親臨)하여 종용히 문의하였으며, 특별히 서책(書冊)을 하사하고 또 묵죽(墨竹)을 그려서 미의(微意)를 보이므로 선생이 시를 지어 사례하였는데, 그 묵죽의 인본(印本)이 세상의 보물로 되어 있다.
부수찬(副修撰)이 되었다가 동궁에 발생한 작서(灼鼠)의 변(變)으로 인하여 차자(箚子)를 올리기를, “예로부터 치도(治道)를 잘한 인군(人君)은 모두 현재(賢才)를 가까이하고 사습(士習)을 시정하는 것으로 근본을 삼아 왔으니, 이는 현재를 가까이해야만 보필을 오로지하여 기질(氣質)을 변화시킬 수 있고 사습을 시정해야만 이륜(彛倫)을 밝혀 풍속을 바르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지난 기묘년의 참화는 온 조야(朝野)가 다 제신(諸臣)들의 억울함을 가엾이 여기고 있는 바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본심을 털어놓고 무고(無辜)를 밝혀내어 위로는 전하의 한결같은 의혹을 풀어드리고 아래로는 제신들의 억울한 마음을 해소시키지 못하고는, 도리어 여기에 단언 정색(端言正色)하고 나서는 이가 있으면 대뜸 물정 모르는 무리로 배격하곤 하니 사습이 시정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앞으로 전하께서는 허심탄회한 마음과 차분한 생각으로 재변이 일어나게 된 동기를 깊이 사유(思惟)하시되, 학문을 강마하는 데서 기미를 연구하고, 존양 성찰(存養省察)하는 데서 일단을 미루어, 본원이 맑고 표리가 진실함으로써 털끝만큼의 사위(私僞)가 끼이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사정(邪正)을 분별하기 어렵지 않고, 시비(是非)가 제대로 판정되어, 이미 투박해진 사습을 시정할 수 있고, 이미 해이해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있을 것이니, 침체된 교화와 퇴패된 풍속을 그리 염려하실 필요가 없습니다.”하여 그 사의(辭意 말의 뜻)가 매우 간절하였다.
이로부터 중종이 정암(靜菴) 등 제현(諸賢)의 억울함을 절실히 시인, 자못 회오(悔悟)하는 뜻을 보였고 그 뒤에도 신원(伸冤)을 청하는 이가 더욱 많았다가 마침내 인종이 즉위하자마자 통쾌한 신원의 명이 내려졌으니, 이는 선생이 그 기회를 열어 놓은 것이다.
어버이 봉양을 위하여 옥과 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가서는 민정에 따르는 정사를 힘써 온 고을이 혜택을 입었고, 그 이듬해(1545)에는 조사(詔使) 장승헌(張承憲)이 오자, 선생을 제술관(製述官)으로 불렀다. 그때 인종이 막 즉위한 터이라 시의(時議)가 다 선생을 만류하여 신정(新政)을 보필시키려 하였으나 선생은 시사(時事)가 염려되어 친병(親病)을 들어 사양하고 임지로 돌아왔다.
그해 7월에 임금이 갑자기 승하하자, 선생이 부음(訃音)을 듣고 너무 놀라고 절통하여 거의 기절하였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이내 신병(身病)을 이유로 현임(縣任)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후부터서는 모든 임관(任官)에 일절 응하지 않았다.
연이어 어버이의 상(喪)을 당하여 정리(情理)와 의식(儀式)을 다하였고, 상복(喪服) 제도에 있어서는 일체 예경(禮經)을 따랐으며, 상을 마친 뒤에 교리(校理)로 불렀으나 역시 전(箋)을 올려 사양하였고, 명종(明宗)이 군신(君臣)의 대의(大義)를 들어 돈유(敦諭)하였으나 역시 신병 때문에 나아가기 어렵다는 정상을 간곡히 진달하는 한편, 하사된 식물(食物)까지 사양하였다.
경신년(1560, 명종15) 봄에 갑자기 병이 났는데, 마침 상원(上元 정월 보름)이었다. 가인(家人)에게, 시식(時食)을 마련시켜 가묘(家廟)에 올리고 나서, 옥과 현감 이후의 관작은 사용하지 말라는 유명(遺命)을 남기고는, 그 이튿날 임오일에 51세를 일기로 별세하자, 상이 듣고 경도(驚悼)하며 특별히 부의(賻儀)를 내렸다.
선생은 천품이 청명 온수(淸明溫粹)하고 흉금이 쇄락하므로 사람들이 맑은 물속의 부용(芙蓉)에 비유하였으며, 뜻을 세우고 학문을 하는 데는 이치를 궁리하고 경(敬)을 주로 삼고, 삼가 생각하고 밝게 분별하는 공부를 쌓았으므로, 그 깊은 조예를 남이 헤아릴 수 없었다.
대저 선생은 처음 김모재(金慕齋)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워 공력이 가장 깊었고 《대학(大學)》에 있어서는 혼자 단정히 앉아 1천 번이나 읽었는가 하면, 되풀이해서 실마리를 찾아내어 터득하고야 말았다. 이후부터 문인 제자를 가르치는 데에도 이 과정을 변동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말하기를, “일부(一部)의 《대학》 안에는 체용(體用)이 구비하고, 조리가 정돈되어 있다.
이 글을 제외하고는 도(道)에 나아갈 수 없다. 이 글을 읽지 않고 다른 경(經)을 보려 하는 것은, 마치 집터를 닦지 않고 집부터 먼저 지으려는 것과 같다.”하였고, 또 말하기를, “이 글을 읽고 나서 아무 의심도 없는 자는, 진실한 소득이 있는 것이 아니다.
과연 글자마다 연구하고 구절마다 사유(思惟)해 보았다면, 반드시 통철하지 못한 곳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장구(章句)에서 통철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혹문(或問)》을 참고하고 혹 《혹문》에서 통철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제가(諸家)의 설(說)을 참고하여 오랜 세월이 흐르면 반드시 얼음 녹듯 하는 성과를 보게 될 것이다.”하였으며, 《논어》. 《맹자》와 《시경》. 《역경》에 있어서는 깊이 생각하고 실제로 체험하고 나서 말하기를, “득력(得力)하는 데는 《논어》ㆍ《맹자》만 한 글이 없다.”하였고, 또 일찍이 말하기를, “태극도설(太極圖說)은 의리(義理)가 정심(精深)하고 서명(西銘)은 규모가 광대하니, 한 가지도 폐지할 수 없다.”하고, 사색(思索)하기를 마지않았다.
그 조수(操守)에 있어서는, 경(敬)을 마음의 주재(主宰)로 삼아, 매일 생활하는 사이에 엄연ㆍ숙연하여 사기(辭氣)가 안정되고 시청(視聽)이 단정, 표리에 간격이 없고 동정이 한결같았으며, 정의가 발로하는 데는 홀로 기미(幾微)에서 알아차리고 사물을 접하는 데는 반드시 의리에서 췌탁(揣度)하여 선리(善利)와 공사의 구분에 더욱 신중을 기하였으며, 성명(性命). 음양의 묘(妙)에서 인륜 효제(人倫孝悌)의 실제에 이르기까지 온통 한 몸에 모아 본말(本末)이 구비되어, 대중 지정(大中至正)한 규모에 탁연하였다.
그러므로 학문에 있어, 독행(篤行)에 전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에게는, 지(知)에 밝지 못하면 행(行)에 반드시 막힘이 있다고 말해 주고, 내치(內治)에 전력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에게는 외부가 정제하지 못하면 내부가 반드시 태만해진다고 말해 주었다. 또 일찍이 학문에는 반드시 지행(知行)이 아울러 진취되고 내외가 함께 닦아져야 된다고 하였다.
제가(諸家)의 합당하지 못한 설(說)을 증정(證訂)하는 데는 털끝만한 것도 반드시 분별하였다. 즉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의 설(說)에 대하여는 돈오(頓悟)한다는 첩경(捷徑)에 빠질까 염려하고, 일재(一齋 이항(李恒))의 설에 대하여는 도기(道器 이(理)와 기(氣))를 혼동(混同)하여 한가지로 본 것을 아쉬워하였다.
인심(人心). 도심(道心)을 논한 데는 나씨(羅氏 명(明)의 나흠순(羅欽順))의 체용설(體用說)을 배격하였으며, 퇴계 이 선생의 사단 칠정 이기호발론(四端七情理氣互發論)에 대하여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 기 선생이 이를 깊이 의혹하다가 선생에게 질문하고 나서 일체 막힌 데가 없었고, 드디어 이를 이 선생(李先生)과 논변한 글이 자못 수만 자에 이르렀으니, 세상에 전하는 ‘퇴고왕복서(退高往復書)’가 바로 이것이다.
대저 선생은 도리(道理)에 환하여 의혹이 없어 묻는 대로 답하기를 마치 소매 속에 있는 물건을 꺼내 주듯 하되, 모두 핍진하고 적절하였으므로 아무리 퇴계같이 정밀한 학문으로도 누차 자신의 소견을 버리고 따랐으며,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 김 선생도 선생의 설로써 예서(禮書)를 고증한 곳이 많았다.
선생의 의논은 신기(新奇)한 데 유혹되거나 격요(繳繞 테두리에 얽매이는 것)에 현란되지 않고 그저 평정 명백(平正明白)하여 사람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또 부수려 하여도 부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생은 도(道)를 안다고 자부(自負)하지 않고 언제나 부족해하였다. 일찍이 지은,
천지의 중간에 두 사람 있으니 / 天地中間有二人
공자(孔子)는 원기요 주자(朱子)는 진기일세 / 仲尼元氣紫陽眞
한 시(詩)에 의하면 선생의 지취(志趣)를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선생은 젊어서부터 경제(經濟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의 뜻이 있었다. 김안로(金安老)가 복주(伏誅)된 뒤에 김모재(金慕齋)ㆍ이회재(李晦齋) 등 제 선생이 점차 기용되었으나 선생만은 시사의 기미를 간파하고 즉시 물러날 뜻을 두었으며, 인종이 승하한 뒤에는 너무 놀라고 애통해하다가 기절하여 생(生)을 그만둘 듯이 하였고 집 안에 들어앉아 폐인으로 자처하여 세상사를 단념, 사자(死者)를 보내고 생자(生者)를 섬기려는 의사조차 전혀 없었으며, 매년 7월 1일이 되면 대뜸 집 남쪽에 있는 산골짜기로 들어가 통곡하다가 날이 새어서야 돌아오곤 하였다.
이는 인종 승하의 원인을 감히 물을 수 없어 그저 속으로만 애통해할 뿐, 말로 표현한 적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끝내 알지 못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지은 ‘유소사(有所思)’ 와 ‘조신생(吊申生)’이란 모든 사(詞)는 그 우의(寓意)가 격렬한 데다가 일편(一篇) 중에 그 뜻이 누차 표현되어 있어, 읽는 이가 저절로 머리칼이 곤두서고 담(膽)이 찢어지는 듯하나, 끝내 그 본지의 소재는 헤아릴 수 없다.
고금의 사적을 열람하다가, 간신(奸臣)이 화(禍)를 빚어내어 군부(君父)로 하여금 그 화에 걸리게 한 대목에 이를 적에는 으레 주먹을 불끈 쥐고 강개해하면서 자신이 직접 당한 것처럼 여길 뿐이 아니었으니, 이는 한마음으로 삼재 조화(三才造化)의 묘리(妙理)를 함축하고 한 몸으로 만세 강상(萬世綱常)의 중책을 맡은 사실을 끝내 속일 수 없었다.
가정에는 윤리를 바르게 하고 은의(恩義)를 돈독히 하는 것을 위주하여 규문(閨門)이 화순 옹목(和順雍睦)한 가운데 엄정으로써 다스리므로 선생의 가정을 방문하는 이는 마치 조정에 들어선 듯하였으며, 술을 마셔 얼근해지면 이어 시가를 읊었는데, 그 음조(音調)가 우렁차고 창쾌하여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씩씩하면서도 화열하게 하였으며, 한가한 날에는 으레 관동(冠童 어른과 아이)을 데리고 야외에 나가 소요하면서 제생들을 향하여 말하기를, “배우는 이가 수시로 기수(沂水)와 정초(庭草)의 기상(氣像)을 체험한 뒤에야 능히 조금의 진취를 보게 된다.”하였으므로, 후학 중에 선생의 인접(引接)을 받은 이는, 마치 춘풍(春風)에 훈습되고 경운(慶雲)을 목도하는 듯하였다.
저작(著作)에는 풍아(風雅 《시경》의 풍과 아)를 근본으로, 소선(騷選). 이두(李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를 참고로 하였고, 감촉되는 바가 있을 적에는 일체 시(詩)를 읊어 발산시키되, 청절(淸絶)하면서도 과격하지 않고 간절하면서도 촉박하지 않고, 즐거우면서도 음탕한 데 이르지 않고 걱정스러우면서도 애상(哀傷)한 데 이르지 않으니, 이는 성정(性情)이 다스려지고 도덕이 함축된 때문이요, 그 소장(疏章)은 통창 전아(通暢典雅)하여 으레 도리가 앞섰으니, 참으로 인의에서 나온 말이었다.
문집 몇 권이 세상에 전해지고, 《주역》 관상편(觀象篇)과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등의 저작은 유실되어 전해지지 않으니, 애석한 일이다. 그리고 천문(天文). 지리(地理). 의약(醫藥). 복서(卜筮). 산수(算數). 율력(律曆) 등에도 모두 정통하였고, 필법이 경건(勁健)하여 절대로 연미(姸媚)한 태도가 없었으니, 이른바 덕성이 서로 연관된 때문이다.
부인 윤씨(尹氏)는 현감 임형(任衡)의 딸이고 두 아들은 종룡(從龍)ㆍ종호(從虎)이고 세 여서(女婿)는 조희문(趙希文). 양자징(梁子徵). 유경렴(柳景濂)이다. 종룡의 아들 중총(仲聰)은 참봉으로 후사가 없고 종호는 찰방(察訪)으로 아들 남중(南重)을 두었으며, 남중의 아들은 형복(亨福). 형록(亨祿). 형우(亨祐). 형지(亨祉)이고 두 여서는 이규명(李奎明). 기진발(奇震發)이다.
형복의 아들은 창하(昌夏)ㆍ태하(泰夏)이고 형우의 아들은 기하(器夏)이고 형지의 아들은 명하(鳴夏). 대하(大夏)이며, 형록에게 출계(出系)한 이는 중남(仲男)이다. 창하의 아들은 익서(翼瑞)ㆍ두서(斗瑞). 시서(時瑞)이고 태하의 아들은 천서(天瑞). 지서(地瑞). 원서(元瑞)이고 명하의 아들은 치서(致瑞)이며, 이규명의 아들은 일지(逸之). 실지(實之). 필지(苾之). 밀지(密之). 길지(佶之)이고, 기진발의 아들은 정연(挺然). 정지(挺之). 정한(挺漢)인데, 내외 증. 현손 수십 명이 문행(文行)으로써 서로 숭상하였다.
그해 3월 계유일에 장성(長城) 서쪽 원당산(願堂山) 선영(先塋)에 남향으로 된 묘에 안장되었고 문인들이 서원을 세워 향사하였다. 숭정(崇禎 명 의종(明毅宗)의 연호) 임인년(1662, 현종3)에 현종대왕이 ‘필암(筆巖)’이라 사액(賜額)하고 다시 이조 판서ㆍ양관 대제학(兩館大提學)에 추증,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내렸는데 시법(諡法)에, 도덕이 널리 알려진 것을 문(文), 관락(寬樂)하여 유종의 미를 거둔 것을 정(靖)이라 한다. 아, 성조(聖朝)의 융숭한 보답이 이에 이르러 유감이 없었다.
대저 우리 해동이 은사(殷師 기자(箕子))의 세대가 멀어진 이후로 성인의 학이 밝지 못하였다가 우리 중종. 명종 세대에 이르러 치도(治道)와 교화가 융성하여, 모두가 낙민(洛閩)으로 준칙을 삼았다. 그러나 도기 위미설(道器危微說)에 있어 오히려 의혹하는 이가 많았는데, 선생만은 홀로 대의를 간파하여, 배우고 묻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것으로 곧장 정맥(正脈)을 찾아내었다.
또한 본조(本朝)의 종유 명현(宗儒名賢)이 이따금 정도(正道)가 침체된 시기에 나서서 주선 위이(周旋委蛇)하여 사직을 붙들고 사림을 구제하려다가 신명까지 상실하곤 하였으나 선생은 스스로 시기의 미(微)와 현(顯)을 알아 세상을 등지고 미련없이 인생을 마쳤으니, 이로써 본다면 그 밝은 지(知)와 통달한 식견이 어지러운 사물(事物) 밖에 초월하고 깊은 조예와 두터운 덕이 정밀 정대한 경지에 이르렀으며, 그 청풍 대절(淸風大節)은 온 세상에 진동하여 탐욕스러운 자가 청렴해지고 겁 많은 자가 자립하게 되었으니, 백세(百世)의 스승이라 하여도 옳을 것이다.
그러나 그 근본을 따져 보면, 사실 바른 도학(道學)에서 기인된 것이다. 사람이란 반드시 도를 알아야 하는데, 도를 알려면 학문을 버리고서야 어찌 되겠는가. 세상에서 한갓 절의(節義)만으로 선생을 논하는 이는 얕은 지견(知見)이라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공통된 도 다섯 가지 중에 / 達道有五
군신 부자가 / 君臣父子
가장 큰 것이니 / 此其大經
그 도리 다하려면 / 欲盡其理
어찌 성경에서 구하지 않으랴 / 盍究聖經
지가 있고 행이 있네 / 有知有行
학문의 도가 / 學問之道
진정 여기에 있거니 / 亶在於是
이를 버리고 어디로 갈쏜가 / 捨是曷程
아 선생은 / 於惟先生
천부가 특이하여 / 天賦之異
기질이 청수하고 / 質粹氣淸
지력이 웅호하며 / 志豪力雄
용맹스레 옛것에 매진해 / 勇邁終古
광대 고명한 데 이르렀네 / 廣大高明
여러 학설(學說) 다 섭렵하고는 / 旣極群言
도리를 하나로 총괄하였으니 / 反以約之
참으로 집대성일세 / 允矣集成
군신의 의와 / 君臣之義
부자의 인이 / 父子之仁
작기 제자리 얻었으니 / 各得其貞
사람에게 준 교화 / 其所及人
사방에 두루 미쳐 / 沛然旁達
모두 전형으로 삼았네 / 式圍式型
세도 인문과 / 世道人文
천질과 민이가 / 天秩民彝
해와 별처럼 밝았으니 / 炳如日星
예부터 지금까지 / 循古訖今
그 공덕 논한다면 / 計功論德
어느 뉘 맞설쏜가 / 孰與先生
성조의 표창과 / 聖朝褒崇
다사의 존모가 / 多士尊慕
태산북두와 같네 / 岱宗魁衡
원당산 앞쪽에 / 願堂之陽
이 비 세우니 / 銘此豐碑
천만년 유전하리 / 維千萬齡
ⓒ한국고전번역원 | 이재수 (역) |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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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河西金先生神道碑銘 幷序
國朝人物道學節義文章忒有品差。其兼有而不偏者無幾矣。天佑我東。鍾生河西金先生。則殆庶幾焉。先生諱麟厚。字厚之。蔚州之金。蓋出新羅金傅王。鶴城府院君德摯其別子也。以至于本朝。直長義剛,訓導丸,參奉齡。寔先生曾祖祖與考也。妣玉川趙氏。參奉公孝謹好善。有古君子風。先生生而形貌端正。風神秀朗。數歲。行必正履。不由側逕。身外之物。一不經意。惟書籍翰墨是好。嘗手劈菜皮。必盡其心乃已曰。欲見生理之本末。九歲。奇服齋遵見而異之曰。子當爲我世子之臣。蓋仁廟性質生知。臣民咸仰其聖德故也。稍長。常穆然默坐。儼若對越。講論到意會處。輒欣然自得。達曙不寐。其所造已深遠矣。嘉靖辛卯。中司馬。時年二十二。時經黨禍未久。士諱學問之名。先生與退溪李先生志氣相得。往還講磨。極有麗澤之益焉。庚子。登第分隷槐院。賜暇湖堂。拜弘文正字。陞博士。兼侍講院說書。仁廟毓德春宮。聖學日躋。得先生大悅。恩遇日隆。或親至直廬。從容問難。且特賜書冊。又爲墨竹。以寓微意。先生作詩以謝。其印本爲世所寶。爲副修撰。因東宮火變上箚曰。自古善治之主。莫不以親賢才正士習爲本。蓋必親賢才。可以專輔翼而養氣質。必正士習。可以明彝倫而正風俗。且如向來己卯之禍。朝野無不愍其冤枉。然而至今不能開陳本心。顯白非辜。上以釋殿下一念之疑。下以洒諸臣九原之憤。而一有端言正色之人。則輒斥以小學之徒。士習不正。職此之由。願殿下虛心靜慮。深惟致災之原。硏幾於講學而致曲於存察。要使本原澄澈。表裏皆實。無一毫私僞以雜之。則邪正不難辨。是非有所定。可以起已偸之士習。可以振已解之紀綱。敎化之陵夷。風俗之頹敗。有不足虞矣。辭意剴切。自此中廟益知靜菴諸賢之冤。頗示悔悟。而厥後申請者益衆。卒至仁廟初服。快下伸雪之命。先生蓋發其機焉。乞養得玉果縣監。務循民情。一境賴之。明年乙巳。詔使張承憲至。召爲製述官。時仁廟初卽位。時議咸欲留先生以補新化。而時事顧有可憂者。先生辭以親癠而歸。七月。上猝然賓天。先生聞訃驚慟。幾絶而蘇。因以疾解縣任歸。自是凡有除拜。皆不就。連丁內外喪。克盡情文。至於衰服之制。一遵禮經。喪除。以校理召。又上箋辭。明廟諭以君臣大義。先生亦極陳疾病難進之狀。竝辭食物之賜。庚申春。忽感疾。屬當上元。命家人具時食薦于家廟。事訖。遺命勿用玉果以後官爵。遂以翌日壬午。壽五十一而歿。訃聞。上驚悼。特致賻儀。先生淸明溫粹。胸次洒落。人以爲淸水芙蓉。至其立志爲學也。積之以窮理主敬謹思明辨之功。則其造詣之深。人不能有所測知者矣。蓋先生初從金慕齋。受小學書。用功最深。至於大學。則兀然端坐而讀之。至於千餘遍。反復紬繹。不得不措。自後雖以授門人弟子。未嘗以易此也。嘗曰。大學一部之中。體用具備。條理不紊。捨此無以進道矣。不讀是書而欲看他經。猶不築基址而先作室屋。又曰。讀此書無疑者。未必有實得。苟字字硏窮。句句思量。則必有未透處。如於章句未透。參以或問。或問未透。參以諸家之說。久久必見氷釋之效矣。其於語,孟,詩,易。覃思實踐而曰。得力莫如語孟。又嘗謂太極圖說義理精深。西銘規模廣大。不可偏廢。常玩索不已。至其持守。則必以敬爲一心主宰。日用之間。儼然肅然。辭氣安定。視聽端直。表裏無間。動靜如一。情意之發。獨先照於幾微。事物之應。必揆度於義理。善利公私之分。益致其謹。自其性命陰陽之妙。以至人倫孝悌之實。體在一身。本末備具。卓然乎大中至正之規矣。故有言學當專務篤行者則曰。知有不明。行必窒礙。有言學當專治其內者則曰。外不整齊。內必怠慢。又嘗曰。學莫如知行竝進。內外交修。至其證訂諸說之未安者。毫釐必辨。於花潭則慮其弊流於頓悟之捷徑。於一齋則病其道器之混爲一物。論人心道心。則黜羅氏體用之說。至於退溪李先生有四端七情理氣互發之論。高峯奇先生深疑之。質問於先生。沛然無所凝滯。遂以論辨於李先生殆數萬言。世所傳退高往復書者是也。蓋先生於道理。洞然無疑。叩之斯應。若取諸袖中而與之。而無不曲當。故雖以退溪之精密。亦屢舍己見而從之。文元公金先生。以先生說考證禮書者多有焉。先生論議。不惑於新奇。不亂於繳繞。平正明白。使人易知。攧撲不破。然未嘗以知道自居。常若有不足者。嘗有詩曰。天地中間有二人。仲尼元氣紫陽眞。先生識趣大槩。此可見矣。先生少有經濟志。當安老伏法之後。金慕齋,李晦齋諸先生稍稍進用。而先生獨見幾微。卽有歛退志。及仁廟賓天。驚號隕絶。如不欲生。杜門自廢。屛棄人間事。頓無送往事居之意。每値七月一日。輒入家南山谷中。慟哭竟夕而反。蓋當時不敢問故。只自隱痛於心而未嘗形諸言語。人終不能知也。嘗作有所思弔申生諸詞。寄意激烈。一篇之中。屢致意焉。讀之者自然髮豎而膽裂。然竟莫測其旨意之所在也。歷覽古今。至奸臣媒孼。使君父嬰其禍者。必扼腕慷慨。不翅躬親當之者。蓋以一心而函三才造化之妙。以一身而任萬世綱常之重者。終有所不可誣者矣。其家政。必以正倫理篤恩義爲主。閨門之內。和順雍睦而濟以嚴整。入其家者。如入治朝焉。飮酒微醺。繼以吟哦。音調洪暢。令人莊以和。暇日必携冠童。逍遙徜徉。顧謂諸生曰。學者時時體認沂水庭翠氣象。然後方能少進爾。後學之被其引接者。如襲春風而覩慶雲也。其述作根於風雅。參以騷選李杜。凡有感觸。一於詩發之。淸而不激。切而不迫。樂而不至於淫。憂而不至於傷。皆所以理性情而涵道德。其疏章通暢典雅。必以理勝。眞仁義之言也。文集若干編行于世。周易觀象篇,西銘事天圖諸作。逸而不傳。惜哉。至於天文地理醫藥占筮算數律曆。無不通曉。筆法勁健。絶無姸媚態。所謂德性相關者然也。配尹氏。縣監任衡女。二男從龍,從虎。三女壻趙希文,梁子徵,柳景濂也。從龍男仲聰。參奉。無嗣。從虎察訪。男南重。其子亨福,亨祿,亨祐,亨祉。二女壻李奎明,奇震發也。亨福男昌夏,泰夏。亨祐男器夏。亨祉男鳴夏,大夏。其出后亨祿者仲男也。昌夏生翼瑞,斗瑞,時瑞。泰夏生天瑞,地瑞,元瑞。鳴夏生致瑞。李壻男逸之,實之,苾之,密之,佶之。奇壻男挺然,挺之,挺漢。內外曾玄摠若干人。以文行相尙。其年三月癸酉。葬于長城治西願堂山先塋面陽之原。門人創書院以享之。崇禎壬寅。顯宗大王賜額曰筆巖。復命贈吏曹判書兩館大提學。諡文靖。道德博聞曰文。寬樂令終曰靖。嗚呼。聖朝崇報之典。至是而無遺憾矣。蓋海東自殷師世遠。聖學不明。至我中,明之世。治敎隆盛。莫不以洛閩爲準則。然於道器危微之說。尙多聽瑩者。而先生自能獨見大意。學問思辨。直尋正脈。本朝宗儒名賢。往往致身於蔑貞之際。周旋委蛇。志欲扶社稷救士林。身且不免。而先生自能知微知彰。遯世無悶。以沒其世。由是觀之。其明知達識。超乎事物紛糾之表。而深造厚積。進乎精密正大之域。至其淸風大節。聳動震耀。使之頑廉而懦立。則雖謂之百世之師可也。然而本之則實根於道學之正。然則人不可以不知道。而欲知道。捨學問何以哉。世徒以節義論先生者。可謂淺之爲知也。銘曰。
達道有五。君臣父子。此其大經。欲盡其理。盍究聖經。有知有行。學問之道。亶在於是。捨是曷程。於惟先生。天賦之異。
質粹氣淸。志豪力雄。勇邁終古。廣大高明。旣極群言。反以約之。允矣集成。君臣之義。父子之仁。各得其貞。其所及人。
沛然旁達。式圍式型。世道人文。天秩民彝。炳如日星。循古訖今。計功論德。孰與先生。聖朝褒崇。多士尊慕。岱宗魁衡。
願堂之陽。銘此豐碑。維千萬齡。<끝>
宋子大全卷一百五十四 / 碑
하서 김인후 신도비(전라남도 기념물 제219호)
소재지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산25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