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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훈 (불당초 5)
익산의 역사 탐험
오늘은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익산에 갔다. 처음으로 미륵사지 석탑을 보러 갔다. 갔더니 탑은 딱 1개 남아 있었다. 그 탑은 동쪽에 있는 복원된 탑이었다. 서쪽 탑은 해체되었다. 그전에는 서쪽 탑이 시멘트로 지탱되었는데 그렇게 계속 놓아두면 부서지기 때문에 해체했다. 그것은 국보 제 11호였다. 그리고 원래 가운데에 목탑이 있었는데 불에 타서 없어졌다. 서쪽 탑에서 사리장엄구가 나왔다. 아주 예뻤다. 나는 그것을 자세히 그렸다. 설명을 다 듣고 점심을 먹었다. 짜장면이었다. 맛있었다. 다 먹고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 갔다. 가서 공부를 했다. 가장 인상 깊은 것은 화장실의 모양이었다. 모양이 엄청 이상하게 생겼다. 그리고 화장실 사용할 때 힘들었을 것 같다. 뒤처리용 막대기가 신기했다. 나는 지금 시대에 태어나서 다행이다.
곽지원 (서당초 6)
익산에 남아있는 백제의 숨결
나는 오늘 천안 곰곰이 역사탐험에서 익산으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백제에 대해 배우러 갔다. 처음으로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들었다. 서동은 홀로 사는 어머니께서 낳으신, 용의 아이이다. 아이는 자라 마를 캐어 시장에 팔아 생활을 꾸려 나가서 서동이라고 부른다. 서동이란 아이는 선화공주와의 혼인을 결심하고 신라에 가서 아이들에게 마를 주며 이 노래를 부르라고 했다. 노래 내용은 자기와 선화공주가 사귄다는 뜻이었다. 이런 얘기를 들은 왕은 선화공주를 내쫓고 선화공주는 서동을 만나 행복하게 살았다. 나는 이 이야기를 진짜라고 믿진 않지만 진짜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 서동은 무왕이 되면서 절을 세웠다. 그곳이 미륵사지다. 미륵사지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금동제사리외호’이다. 금색이라서 그렇다. 역시 나는 금을 좋아한다. 또 신기했던 것은 백제 사람들이 화장실에서 썼던 뒤처리용 나무막대였는데 재활용을 한다는 말을 듣고 우웩 했다. 오늘 알던 것을 더 자세히 배우고 모르는 것도 배워서 좋았다.
김준성 (불당초 5)
익산 역사 탐험
오늘은 세 번째 탐험이다. 처음에는 익산 미륵사지로 갔다. 동쪽 석탑은 복원되었고 가운데 목탑은 불타 없어지고 서쪽 석탑은 고치고 있었다. 서쪽 석탑은 국보 제 11호이다. 익산 미륵사지는 엄청나게 큰 절이었다. 그 다음에 재밌는 것은 바로 전시관이었다. 전시관에 여러 가지 유물이 있었다. 영상관, 사진관이 있어서 자세하게 볼 수 있었다. 나는 금제사리내호를 그렸는데 선생님이 엄청 꼼꼼하게 했다고 칭찬을 해 주셨다. 기분이 좋았다. 오늘 제일 좋은 것은 중국집 짜장면이 엄청 맛있었다. 그러나 양이 너무 적었다. 그래도 아주 재미있었다.
남기랑 (불당초 5)
익산에서 본 탑과 유물
옛날에 서동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가 내 친구 서동희랑 비슷해서 신기했다. 처음에는 미륵사지를 갔다. 직접 보니 터가 엄청 컸다. 미륵사지는 엄청나게 큰 절로서 현재는 동탑만 복원되었고 국보인 서탑은 현재 복원하고 있다. 만약에 진짜로 미륵사가 남아 있었다면 지금은 스님들이 좋아서 거기에서 일하였을 것 같다. 왜냐하면 절이 크고 자기네 절보다 좋고 주변에 산도 있고 뛰어 놀 수도 있는 마당이 있으니 넓은 곳에서 부처님을 모실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으로 짜장면을 먹고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 가서 팀별로 미션 수행을 하였다. 나는 미션지에 있는 힌트로 문제를 풀고 나머지는 팀원에게 들었다.
남이현 (불당초 6)
익산 미륵사지의 석탑
오늘은 곰곰이 역사탐험으로 익산에 왔다. 익산에서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전시관, 익산 쌍릉에 갔다. 그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곳은 익산 미륵사지였다. 그곳에 반짝반짝한 새 탑이 있었다. 원래는 가운데 큰 목탑을 중심으로 동쪽과 서쪽에 석탑인 동탑, 서탑이 있었다고 한다. 근데 목탑은 없어지고 서탑은 복원 중이었다. 지금은 동탑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이것도 최근에 복제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원래의 탑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일제강점기 때 서탑이 무너질랑말랑 해서 일본인들이 시멘트를 엄청 많이 발랐는데 나쁜 일일 수도 있고 좋은 일일 수도 있다. 시멘트를 발랐기 때문에 서탑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무너진 조각들을 모아놓은 것도 봤는데 나중에 잘 복원해서 원래의 탑을 다시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배진수 (양당초 5)
익산 미륵사지를 찾아서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에 갔다. 미륵사지에는 원래 큰 절이 있었는데 없어졌다. 그리고 탑이 세 개 있었는데 목탑은 번개를 맞아 불타 절과 함께 없어졌다. 석탑은 동쪽과 서쪽에 한 개씩 있었는데 동쪽 탑은 요즘에 복원한 것이고 서탑은 무너져서 일제강점기 때 시멘트 떡칠을 해서 보수를 했다. 시멘트는 시멘트독이란 게 있어 돌을 썩게 하기 때문에 복원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 목탑이 있었으면 얼마나 높았을까? 그리고 절도 있었으면 멋있었을 텐데……. 그놈의 번개 때문에 모두 불타버렸다. 목탑이 번개를 맞은 이유는 너무 높이 지었기 때문이다. 미륵사지에 있는 목탑과 절을 보고 싶다.
배진우 (양당초 6)
미륵사지에서 만난 석탑과 유물
익산 미륵사지에 갔다. 미륵사지는 원래 부처님을 모신 금당과 탑이 각각 세 개씩 있는, 아주 큰 절이었다. 가운데에는 큰 목탑이 있고 그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석탑이 있다. 서탑은 무너질 거 같아서 일제강점기 때 시멘트를 발라서 보수를 하였다. 서탑의 이름은 미륵사지 석탑이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11호이다. 석탑을 해체·복원하는 도중 사리장엄구(사리를 넣어서 보관하는 그릇)가 발견되었다. 미륵사의 석탑을 세우는 데 크게 힘을 보탠 백제의 왕비가 있었는데 왕비의 성이 사택이었다. 사택왕비가 힘을 보태지 않았으면 미륵사의 석탑을 못 세웠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신다은 (서당초 5)
익산 역사 탐험
오늘은 곰곰이 마지막 역사탐험이어서 기분 좋게 곰곰이로 갔다. 가장 먼저 익산 미륵사지로 탐험을 갔는데 가서 보니 천오백 년도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탑이 무너질 것 같아 일제강점기에 시멘트를 발라서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두 번째로 간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서는 무왕이 당시 수도인 부여(사비)를 떠나 익산으로 천도할 계획이란 걸 알게 되었다. 무왕의 익산 천도 이야기가 나오는 <관세음응험기>에 보면 익산의 백제 때 이름은 지모밀지라고 불렀다. 왕궁 안에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드는 공방이 있었는데 공방에서 쓰던 금, 유리, 동 등을 녹이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인 도가니가 무척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국보 289호인 왕궁리 5층석탑을 보았다. 아랫부분에 국보 123호인 사리장엄구가 들어 있었는데 그 유리병이 깨지지 않고 그대로 있다는 점이 신기했다. 진짜 마지막으로 백제 왕궁은 사라지고 큰 절이 세워졌다고 한다. 대관관사, 관궁사, 왕궁사 같은 절 이름이 찍힌 기와가 그 사실을 말해준다. 오늘 알게 된 점 말고 백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다.
오혜민 (백석초 6)
아쉬운 마지막 탐험
오늘은 곰곰이 탐험단을 가는 날이다. 장소는 익산이다. 처음에는 미륵사지라는 절터에 갔다. 미륵사지는 원래 부처님을 모신 금당과 탑이 각각 세 개씩 있는, 아주 큰 절이었는데 가운데에는 큰 목탑이 있고 동쪽과 서쪽에 각각 석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없다. 미륵사지 석탑이 무너질 것 같아서 일제강점기에 크게 보수를 하느라 시멘트를 발랐다고 한다. 그래서 요즘에 다시 복원하려고 해체했다. 미륵사지 석탑은 국보 11호이다. 그리고 밥을 먹으러 갔는데 너무 맛이 없었다. 이제야 집 밥이 맛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세 번째로 간 곳은 왕궁리 유적 전시관이었다. 선생님이 활동지 3번부터 7번까지 팁을 짜서 돌아다니면서 답을 직접 찾아보라고 하셨다. 모르는 문제를 찾다가 도저히 모르겠어서 안내데스크에 가서 직원분한테 물어보았다. 역시 지식이 많으신가보다. 답을 다 알고 계셨다. 오늘 마지막 탐험이어서 아쉽지만 다음번에도 다시 할 것 같다.
원누리 (불당초 4)
백제의 역사를 찾아 익산 탐험
오늘은 익산에 갔다. 멀미가 날까봐 걱정을 했는데 다행히 멀미가 나지 않았다. 맨처음으로 탑이 있는 곳으로 갔다. 목탑은 가운데에 있는 것인데 불에 타 버렸다. 서쪽 탑은 시멘트를 발라서 지탱하긴 하였지만 보기가 좋지 않아서 시멘트를 없애고 다시 복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동이와 선화공주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 이야기는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서동이는 커서 무왕이 되었다. 무왕은 내가 잘 아는 의자왕을 태어나게 한 아버지다. 무왕은 신라에게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신라를 조금씩 공격했다. 의자왕도 무왕을 따라했다. 하지만 백제는 멸망하였다. 제대로만 했으면 멸망하지 않았을 텐데……. 머리에 지식이 꽉 차서 굉장히 힘든 날이다.
이성민 (불당초 4)
익산으로 떠나는 역사탐험
오늘 역사탐험은 익산을 다녀왔다. 익산 미륵사지에 예정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했다. 먼저 익산 미륵사지에 갔다. 옛날 백제에 홀로 살던 어머니가 용의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이 아이는 자라 마를 캐어 시장에 팔아 생활을 꾸려 나갔기에 사람들이 서동이라고 불렀다. 이 아이는 나중에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하였고 백제 30대 왕이 되었다. 바로 무왕이다.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 밑 큰 연못가를 지나갈 때 연못 속에서 미륵불 셋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래서 무왕과 왕비는 연못을 메꾸어 땅으로 만들어서 절을 세웠다고 한다. 점심을 먹고 왕궁리 유적 전시관을 관람했다. 바람이 너무 많이 불었다. 추워서 얼어죽을 것 같았다. 무왕은 당시 수도인 부여를 떠나 익산으로 옮길 생각으로 익산에 새로운 궁궐과 큰 절을 지었다. 왕궁 안에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건을 직접 만드는 공방이 있었다고 한다. 도가니는 공방에서 금, 유리, 동 등을 녹이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이었다. 뛰어난 솜씨를 지녔던 백제 사람들의 후예답게 지금 익산은 보석의 도시로 유명하다. 지금은 익산이 부자일 것 같다. 보석의 도시로 유명하니까 말이다. 백제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어주던 정원에는 일부러 파서 만든 연못이 있고 그 주위는 아름답고 희귀한 돌들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한다. 돌을 직접 보니 정말 희한했다. 백제가 멸망해서 참 안타깝다. 아주 조금 힘들기는 했지만 재미있는 탐험이었다.
이예진 (서당초 6)
익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문화재
나는 오늘 천안 곰곰이에서 전라도 익산에 갔다. 추운 날씨와 바람을 이기며 백제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백제는 비록 멸망한 나라였으나 참 훌륭한 문화재가 많다. 그러나 사라진 문화재도 많다. 백제 문화재에는 탑이 많은 것 같다. 목탑, 돌탑, 금탑 등 여러 종류의 탑이 많이 있다. 크기도 장난 아니게 크다. 한 4층 건물 크기만하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목탑이 사라졌다는 점! 그런데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탑 안에는 ‘사리장엄구’가 들어 있다. 사리장엄구란, 부처님의 사리를 넣는 통이다. 이것 또한 부서지고 일부는 사라졌지만 사진에서 보고 또 직접 보니 참 예뻤다. 섬세한 무늬며 금빛이며 나도 하나 갖고 싶었다. 요즘 불국사에서 천년 만에 석탑 안에 사리를 넣는 공사를 하고 있다고 한다. 그것을 보면서 사리가 참 신기하게 보였다. 사리는 도대체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불교는 참 신비스러운 것 같다.
이은빈 (탕정초 5)
익산에서 만나는 백제
전라북도 익산으로 갔다. 익산은 백제에 관련된 것이 많다. 처음으로 익산 미륵사지를 갔다. 옛날 백제의 서울 남쪽 연못가에 홀로 살던 어머니가 왕의 아이를 낳았다. 그 아이는 자라서 마를 캐어 시장에 팔아 생활을 꾸려나갔는데 사람들은 그 아이를 서동이라고 불렀다. 나중에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와 결혼을 했고 또 백제의 제 30대 왕이 되었다. 바로 무왕이다. 무왕이 왕비와 함께 수레를 타고 용화산 밑 큰 연못가를 지나갈 때 연못 속에서 미륵불 셋이 나타났다. 그러자 무왕은 얼른 내려 기도를 드렸다. 그러고 나서 무왕은 연못을 메워 절로 만들었다. 미륵사지에서 석탑을 보았는데 천오백 년도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탑이 무너질 것 같아 일제강점기에 크게 보수를 했는데 어떻게 했느냐면 시멘트를 발라서 무너지지 않게 하였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본이 석탑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도와는 주었지만 시멘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모르고 해서 조금 마음에 안 들었다. 하지만 석탑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게 해주어서 어떤 면으로는 고맙다. 가장 웃기고 기억에 남는 것은 왕궁리에서 국내 최초의 공동화장실 유적이 발견된 것이다. 화장실은 용변을 보는 곳 뿐 아니라 변을 본 뒤 정화시키는 시설까지 갖추었다고 한다. 나는 옛날에도 공동화장실이 있었다는 것이 신기하고 그냥 구덩이가 화장실이라는 것도 신기했다. 다음에 또 익산에 와서 백제에 대해 더 알아보고 싶다.
이준모 (불당초 5)
백제의 기상
웬일로 9시에 출발을 했다. 저 멀리 있는 전라북도 익산에 간다고 했다. 스케줄을 보니 미륵사지→점심→왕궁리 유적 전시관→익산 쌍릉이었다. 첫 번째로 익산 미륵사지에 갔다. 이곳에 대한 일화는 이렇다. 백제 무왕과 왕비가 용화산 아래 연못가에 행차를 했는데 그 연못에서 미륵불 3명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연못을 메우고 미륵사를 세웠다. 구조는 금당과 탑이 각각 세 개씩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큰 금당과 목탑이 있었고 옆 동쪽과 서쪽에는 각각 금당과 석탑이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서탑은 시멘트로 일제강점기 때 메웠다고 하니 일본 사람들에게 니킥을 날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그때는 시멘트가 최우선이었다고 하시자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이 서탑을 재건하고 있었는데 큰 건물 안에서 아직 하고 있었다. 한 것이라고는 아래쪽의 돌자국들에 푯말을 세워둔 것이었다. 그리고 동탑은 깨끗하게 신제품(?)이었는데 아깝게도 국보로는 안 된다. 많이 아까웠다. 그리고 미륵사지 탑을 해체·복원 중에 나온 사리장엄구가 있었는데 이것은 총 3겹으로 돼 있었다. 금동제사리외호→금제사리내호→유리병(지금은 깨짐). 백제인들의 섬세함이 느껴졌다. 백제! 지금은 비록 멸망했지만 백제의 기상은 유물을 통해 아직까지 전해지고 있다.
임주미 (용암초 5)
마지막 역사탐험
나는 오늘 곰곰이에서 익산에 남아 있는 백제의 유물들을 보러 갔다. 그것 때문에 8시에 일어나서 준비를 하고 힘들게 도착하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그 이유는 삼촌이 토요일날 우리집에 와서 주무시고 갈 때만 역사탐험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럴 때 정말 곰곰이가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곰곰이가 없다면 밤 12시 넘게까지 공부해야할 이유가 없고 또 할아버지 핸드폰으로 ‘POU’라는 게임을 실컷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익산에 가서 먼저 서동과 선화공주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로 로맨틱하고 재미있었다. 또 이 내용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이야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때 백제와 신라가 원수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천오백년도 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던 석탑이 무너질 것 같아서 일본인들이 시멘트를 발랐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다. 직접 보니 다시 보수를 하고 있었다. 어쨌든 힘들었지만 꽤 재미있었다. 하지만 2학기 때는 절대로 안 할 거다. 다리 아파!
전근아 (백석초 5)
익산 쌍릉의 전설
익산에 있는 쌍릉에서 한 가지 전설을 들었다. 그 전설은 백제의 멸망과 의자왕의 죽음과 관련된 것이다. 백제는 나·당 연합군과 백제의 스파이에 의해 멸망했다. 신라에서는 의자왕을 죽이면 백제 백성들이 분노해 반란을 일으킬까봐서 그런지 당나라에 붙잡아갔다. 의자왕은 당나라에 묻혔다고 한다. 익산에 있다가 발견된 쌍릉은, 옛날에 도굴을 당해서 누구의 무덤인지 확실하게 증명할 수는 없다. 하지만 발굴을 통해서 쌍릉이 백제의 무덤이라는 것을 증명해냈다. 도굴범들이 도굴을 할 때에 빠뜨리고 간 토기조각과 관의 조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의 조각을 분석해보니 백제의 무령왕릉 관 조각과 같은 일본의 소나무로 제작한 관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쌍릉이 백제 왕의 무덤일 것이라고 추측해냈다. 그리고 무덤의 특징을 살려 무덤을 쌍릉이라고 하였다.
조남인 (백석초 5)
익산 미륵사지와 왕궁리 유적
오늘은 익산에 가서 먼저 미륵사지 석탑을 보았다. 옛날에 마를 캐어 파는 ‘마보이(서동)’가 선화공주와 결혼하고 무왕이 되었다. 만약 서동이 왕이 되지 않았다면 미륵사지 석탑이 없었을 거다. 이 석탑은 부처님이 세 명 와서 절을 짓고 탑을 세운 것이다. 무왕은 왕권을 강하게 하려고 도읍지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바꾸려 했다. 무왕은 42년이나 왕을 하면서 신라를 엄청 못살게 굴었다. 미륵사지의 서쪽 탑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시멘트를 발라서 돌이 점점 썩었다. 하지만 안 그러면 무너질 수도 있었기 때문에 나 같아도 그랬을 거다. 그 다음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 갔는데 화장실 유적에서 발견된 뒤처리용 막대가 인상적이었다. 여러 명이서 쓴다는 게 좀 그랬다. 그러면 그 막대는 좀 더러울 것 같았다. 왕궁 안에는 공방이라는, 물건을 만드는 곳이 있었는데 명색이 왕이면 수입한 걸 쓰지 직접 만들어 쓸 줄은 몰랐다.
최은혜 (둔전초 6)
재미있는 익산 투어
오늘의 역사탐험은 익산이다. 이번 역사탐험은 마지막이다. 처음으로 익산 미륵사지에 갔다. 이번에 바람이 좀 많이 불어서 친구들과 떠들며 마음을 녹였다. 하지만 그래도 들을 것은 들었다. 미륵사지에서 휑한 벌판에 돌탑만 덜렁 놓여 있었다. 원래는 돌탑은 동쪽, 서쪽에 놓여져 있고 가운데는 목탑이다. 근데 석탑은 복원되어서 새 거 같았다. 이것은 동탑이다. 서탑은 망가져서 일제강점기 때 일본이 시멘트를 처발라서 다시 우리가 해체했다. 동쪽 복원된 석탑만 해도 큰 편인데 목탑은 석탑보다 더 컸다고 하니 도대체 얼마나 클까? 다음으로 왕궁리 유적 전시관에 갔다. 나, 현이, 혜민이 같이 돌아다니며 활동지를 푸는 미션을 가졌다. 거기서 뒤처리용 나무막대를 보았는데 더럽기도 하고 좀 많이 웃겼다. 또 하나 ‘왕궁이 사라지고 큰 절이 세워졌다. 대관관사 등 절 이름이 찍힌 무엇이 이 사실을 말해준다.’라는 문제를 나는 어렵게 생각했는데 답은 기와였다.
황민구 (백석초 5)
백제와 익산 탐험
오늘은 백제의 멸망 시기를 알아보기 위해 익산으로 갔다. 일단 익산 미륵사지로 갔다. 불이 나서 절과 함께 모든 탑이 없어지고 무너지고 해서 돌을 쌓아 탑을 복원하려고 했는데 너무 없어져서 붙이기 힘들었다고 한다. 새로 복원해서 만들어져 있는 것은 동탑밖에 없었다. 동탑 안으로 들어가 봤는데 너무 좁았다. 동탑이 생각보다 별로 크지 않았다. 오히려 가운데에 있었다고 하는 목탑은 모형을 보니 다른 탑보다 컸다. 그리고 지금 서탑은 아직까지는 바닥 부분만 복원되어 있었다. 서쪽 탑은 국보 제 11호라고 한다. 그리고 왕궁리 유적전시관에 갔다. 무왕은 도읍지를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하려고 했다. 익산은 백제 때 이름이 ‘지모밀지’였다. 왕궁에 꼭 필요한 것은 성문과 공방, 그리고 화장실이었다. 또 왕궁에는 저원이 있었는데 백제 사람들은 그 속에 연못을 팠다. 무왕이 죽고 의자왕이 계속 신라를 공격했지만 백제는 결국 신라와 당나라군에 의해 멸망되었다. 신라가 혼자 공격했어야 하는데,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