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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새롭게 하루 시작 원문보기 글쓴이: 선녀
♣우리나라 왕조는 왜 오래 지속됐을까?♣
국사를 3년 후 부터는 대입 필수과목으로 하기로 확정했고, 지금 한국사 국정교과서 문제로 시끄럽다 . 역사를 보는 방법은 다양하다. 우리는 초등학교 때 일제 식민지사관의 영향으로 이렇게 배웠다.
"조선은 사색당쟁, 대원군의 쇄국정책, 성리학의 공리공론, 반상제도 등 4가지 때문에 망했다." 그러면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아, 우리 조선은 500년 만에 망한 민족이구나, 그것도 기분 나쁘게 일본에게 망했구나." 하는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된다. 이만큼 국사를 보는 학자의 견해는 청소년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1300년대의 역사 구도를 놓고 보면 전 세계에서 500년 간 왕조는 하나도 없다. 신성로마제국이 1,200년째 계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제국이지 왕조가 아니다. 오스만투르크가 600년째 계속 되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도 제국이지 왕조는 아니다.
유일하게 500년 간 왕조가 하나 있다. 에스파냐왕국이다. 그 나라가 500년째 가고 있었는데 에스파냐 왕국은 한 집권체가 500년을 지배한 것이 아니다. 전세계에서 단일한 집권체가 518년째 가고 있는 것은 조선 딱 한 나라 이외에는 하나도 없다. 중국은 수 많은 나라가 흥망을 거듭했지만 수명은 300년 내외였다.
통일신라가 1,000년 갔다. 고구려가 700년 갔다. 백제가 700년 갔다. 고려가 500년 갔다. 이와같이 우리나라는 한 왕조가 세워지면 500년, 700년, 1,000년을 갔다. 그럴려면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가 성립해야 한다. 하나는 우리 선조는 몽땅 바보여야 한다, 그래서 권력자들, 힘 있는 자들이 시키면 무조건 굴종했을 것이다. 그래서 세계 역사상 유례없이 500년~1,000년을 갔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선조들이 바보가 아니었다,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인권에 관한 의식이 있었고 심지어는 국가의 주인이라고 하는 의식이 있었다. 또 잘 대드는 성격이 있었고, 최소한도의 정치적인 합리성, 최소한도의 경제적인 합리성, 조세적인 합리성, 법적인 합리성, 문화의 합리성 이러한 것들이 있었기 때문에 전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러한 장기간의 통치가 가능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국가를 오래 지탱하게 해준 것은 기록의 문화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을 보면 25년에 한 번씩 민란이 일어났다. 동학란 등은 전국적인 규모이고, 이 민란은 요새 말로 하면 대규모의 데모에 해당한다.
우리나라는 상소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백성들이, 기생도 노비도 글만 쓸 수 있으면 ‘왕과 나는 직접 소통해야겠다, 관찰사와 이야기하니까 되지를 않는다.’ 왕한테 편지를 보낸다. 그런데 이런 상소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났다. 왜냐하면 편지를 하려면 한문을 쓸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는 언문상소를 허락해 주었다.
그래도 불만 있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래도 글줄 깨나 해야 왕하고 소통하느냐, 나도 하고 싶다’ 이런 불만이 터져 나오니까 신문고를 설치했다. ‘그럼 와서 북을 쳐라’ 그러면 형조의 당직관리가 와서 구두로 말을 듣고 구두로 왕에게 보고했다.
이래도 또 불만이 터져 나왔다. 지방 사람들은 ‘왜 한양 땅에 사는 사람들만 그걸 하게 만들었느냐, 우리는 뭐냐’라고 반발했다. 그래서 격쟁(擊錚)이라는 제도가 생겼다. 격은 칠격(擊)자이고 쟁은 꽹과리 쟁(錚)자이다. 왕이 지방에 행차를 하면 꽹과리나 징을 쳐라. 혹은 대형 플래카드를 만들어서 흔들어라, 그럼 왕이 ‘무슨 일이냐’ 하고 물어봐서 민원을 해결해 주었다. 이것을 격쟁이라고 한다.
이러한 제도는 형식적인 제도가 아니였다. 예를 들어 정조의 행적을 조사해 보면, 정조가 왕에 재임한 것은 24년이다. 24년 동안 상소, 신문고, 격쟁을 해결한 건수가 5,000건이나 된다. 이것을 제위 연수로 나누어보면 매년 200건을 해결했다는 얘기이고 공식 근무일수로 따져보면 매일 1건 이상을 했다는 것이다. 얼마나 바빴겠는가. 이래서 정조는 보령 40에 붕어했는지도 모르겠다. 영조 같은 왕은 백성들이 너무나 왕을 직접 만나고 싶어 하니까 아예 날짜를 정하고 장소를 정해서 ‘여기에 모이시오.’ 해서 정기적으로 백성들을 만났다.
서양의 왕 가운데 이런 왕은 없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면 우리나라 백성들은 그렇게 안 해주면 통치할 수 없으니까 이러한 제도가 생겼다고 봐야 한다. 따라서 우리나라 국민들은 녹녹한 백성들이 아니였다. 그러려면 최소한도의 합리성이 있어야 한다. 그 합리성이 무엇인가 하면 기록의 문화이다.
이집트에는 피라밋과 스핑크스가 있다. 중국에는 만리장성이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해외관광을 하면서 거의 다 이런 생각을 한다. ‘이집트 사람이나 중국 사람들은 참 복도 많다. 좋은 선조 만나서 가만히 있어도 세계의 관광달러를 다 끌어 모이는구나’
반면에 석굴암은 정교하지만 스케일이 너무 작아 세계관광자원 차원에서는 눈에 띠지도 않는다. 대신에 무엇을 남겨주었느냐면 기록을 남겨주었다. 사관은 왕의 하루 일과를 빠트리지 않고 다 적었다.
경국 대전에 따르면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그 누구도 독대할 수 없다. 우리가 사극에서 왕이 간신배를 독대하고 장희빈을 살살 만나고 하는 것은 다 흥미위주의 거짓말이다.
왕은 공식근무 중 사관이 없이는 누구도 만날 수 없게 되어 있다. 심지어 인조 같은 왕은 너무 사관이 사사건건 자기를 쫓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어떤 날 대신들에게 ‘내일은 저 방으로 와, 저 방에서 회의할 거야.’ 그러고 도망갔다.
거가서 회의를 하고 있었는데 사관이 임금을 찾았다. 어디 계시냐 하다가 지필묵을 싸들고 그 방에 들어갔다. 인조가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데서 회의를 하는데도 사관이 와야 되는가?’ 그러니까 사관이 이렇게 말했다. ‘마마, 조선의 국법에는 마마가 계신 곳에는 어디나 사관이 있게 되어 있습니다.’ 너무 그 사관이 괘씸해서 다른 죄목을 걸어서 귀향을 보냈다. 그러니까 다음 날 다른 사관이 와서 또 적었다. 이렇게 500년을 적었다.
사관은 종7품에서 종9품 사이의 벼슬이다. 오늘날 공무원제도에 비교를 해보면 사무관 정도다. 그러한 사람이 왕을 사사건건 따라 다니며 다 적는다. 이걸 500년에 걸쳐 적는데, 한문으로 써야 하니까 막 흘려 쓰고 그날 저녁에 정서를 했다. 이걸 사초라고 한다.
그러다가 왕이 붕어하면 한 달 이내에 요새 말로 하면 왕조실록편찬위원회를 구성한다. 사관도 잘못 쓸 수 있으니까 ‘영의정, 이러한 말 한 사실이 있소? 이러한 행동한 적이 있소?’ 라고 확인을 한다. 그렇게 해서 즉시 출판한다. 4부를 출판했다. 4부를 찍기 위해서 목판활자로, 나중에는 금속활자본을 만들었다.
왜 활판인쇄를 했느냐면 사람이 쓰면 글자 하나를 빼먹을 수 있고 글자 하나를 잘못 쓸 수 있으며 하나 더 쓸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후손들에게 4부를 남겨주는데 사람이 쓰면 4부가 다를 수 있다. 그러면 후손들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다. 이래서 실록을 활자본으로 만들었다.
유네스코에서 조사를 하니 전 세계에 조선만이 이러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6,400만자인데,이는 1초에 1자씩 하루를 4시간으로 보면 11.2년 걸리는 분량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에는 공식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을 다룬 학자는 있을 수가 없게 되어 있다.
‘사관도 사람인데 공정하게 역사를 기술했을까’ 이런 궁금증이 들수 있다. 사관이 객관적이고 공정한 역사를 쓰도록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는냐에 대한 한 예를 들어 본다.
세종이 집권하고 나서 가장 보고 싶은 책이 있었다. 뭐냐 하면 태종실록이다. ‘아버지의 행적을 저 사관이 어떻게 썼을까?’ 너무너무 궁금해서 태종실록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맹사성이라는 신하가 나섰다.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저 사관이 그것이 두려워서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세종은 참았다.
몇 년이 지났다. 또 보고 싶었다. 그래서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겠다.’ 이번에는 핑계를 어떻게 댔느냐면 ‘선대왕의 실록을 봐야 그것을 거울 삼아서 내가 정치를 잘할 것이 아니냐’ 그랬더니 황희 정승이 나섰다.
‘마마, 보지 마시옵소서.’ ‘왜, 그런가.’ ‘마마께서 선대왕의 실록을 보시면 이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이고 다음 왕도 선대왕의 실록을 보려할 것입니다. 그러면 저 젊은 사관이 객관적인 역사를 기술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마마께서도 보지 마시고 이 다음 조선왕도 영원히 실록을 보지 말라는 교지를 내려주시옵소서.’라고 했다.
세종은 ‘네 말이 맞다. 나도 영원히 안 보겠다. 그리고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봐서는 안 된다’는 교지를 내렸다.
그래서 조선의 왕 누구도 실록을 못 보게 되어 있었다. 단, 하나의 예외가 있는데, 연산군은 어머니 폐비윤씨가 왜 사약을 받고 죽었는지 너무 궁금해서 무지막지한 왕권을 발동하여 성조실록을 보았고, 이럼으로써 많은 사람이 죽게 되는 갑자사화가 일어났고 결국 그도 왕위에서 쫒겨났다.
또 하나의 위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이다. 승정원은 오늘 날로 말하자면 청와대비서실이다. 승정원은 ‘왕에게 올릴 보고서, 어제 받은 하명서, 또 왕에게 할 말’ 이런 것들에 대해 매일매일 회의를 했다. 이 일지를 500년 동안 적어 놓았다. 실록은 그날 밤에 정서했다고 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전월 분을 다음 달에 정리했다. 이 승정원일기는 조선이 망한 해인 1910년까지 썼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 때 절반이 불타고 현재 288년 분량이 남아있다.
이게 몇 자냐 하면 2억 5,000만자이다. 요새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것을 번역하려고 조사를 해 보니까 잘하면 앞으로 50년 후에 끝나고 못하면 80년 후에 끝난다고 한다. 이러한 방대한 양을 남겨주었다. 이것이 우리의 선조다.
일성록(日省錄)이라는 책이 있다. 날 日자, 반성할 省자이다. 왕들의 일기다. 정조가 세자 때 일기를 썼다. 그런데 왕이 되고 나서도 썼다. 선대왕이 쓰니까 그 다음 왕도 썼다. 이 일성록도 나라가 망하는 1910년까지 썼다.
선대왕들이 이러한 경우에 어떻게 정치했는가를 지금 왕들이 알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를 정조가 고민해서 기왕에 쓰는 일기를 체계적, 조직적으로 썼다.
국방에 관한 사항, 경제에 관한 사항, 과거에 관한 사항, 교육에 관한 사항 등을 전부 조목조목 나눠서 썼다. 150년 분량의 제왕의 일기를 가진 나라를 전 세계에 어느 나라도 없다.
조선시대 법률제도를 보면, 조선시대에 3심제는 없었다. 그러나 사형수에 한해서는 3심제를 실시했다. 원래는 조선이 아니라 고려 말 고려 문종 때부터 실시했는데, 이를 삼복제(三覆制)라고 한다.
조선시대에 사형수 재판을 맨 처음에는 변 사또 같이 시골 감형에서 하고, 두 번째 재판은 오늘 날 고등법원격인 관찰사로 간다. 옛날에 지방관 관찰사는 사법권을 가지고 있었다. 마지막 재판은 서울 형조에 와서 받았다. 재판장은 거의 모두 왕이 직접했다.
왕이 신문을 했을 때 그냥 신문한 것이 아니라 신문한 것을 옆에서 받아 썼다. 조선의 기록정신이 그랬다. 기록을 남겨서 그것을 책으로 묶었다. 그 책 이름이 심리록(審理錄)이라는 책이다.
정조가 1700년대에 이 심리록을 출판했다. 오늘날 번역이 되어 큰 도서관에는 심리록이라는 책이 있다. 왕이 사형수를 직접 신문한 내용이 거기에 다 나와 있다. 왕들은 뭐를 신문했냐 하면 이 사람이 사형수라고 하는 증거가 과학적인가 아닌가이다.
또 한 가지는 고문에 의해서 거짓 자백한 것이 아닐까를 밝히기 위해서 왕들이 무수히 노력했다. 이 증거가 맞느냐 과학적이냐 합리적이냐 이것을 계속 따진다. 이렇게 해서 상당수의 사형수는 감형되거나 무죄 석방되었다. 이런 것이 조선의 법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은 이집트 또는 에스파냐라고 한다. 에스파냐 즉 스페인에 1490년대에 국립대학이 세워졌다. 옥스퍼드, 캠브리지, 하버드대학은 1600년대에 세워진 대학이다. 우리나라는 삼국사기를 보면 682년 신문왕 때 국립대학격인 국학(國學)이라는 것을 세웠다. 그것을 세워놓고 철학과를 만들었다. 관리를 길러야 되니까 논어, 맹자를 가르쳤다.
그런데 학과가 또 하나 있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산학박사와 조교를 두었다’ 라고 쓰여 있다. 명산과다. 밝을 明자, 계산할 算자, 과정. 계산을 밝히는 과이다. 요새 말로 하면 수학과다. 15세에서 30세 사이의 청년 공무원 가운데 수학에 재능이 있는 자를 뽑아서 9년 동안 수학교육을 실시하였다. 여기를 졸업하게 되면 산관(算官)이 된다.
전 세계에서 수학만 잘 하면 공무원이 되는 나라는 없다. 이것을 산관이라고 한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이 망할 때까지 산관은 계속 되었다. 산관들은 세금 매길 때, 성 쌓을 때, 농지 다시 개량할 때 전부 산관들이 계산했다.
고려 때는 992년(성종 11)에 국립교육기관인 국자감(國子監)을 창건했고, 1289년 성균관(成均館)으로 개칭하였다. 이것이 조선으로 이어졌다. 성균관은 태학(太學)으로도 불리었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자료는 한문으로 되어있다. 그런데 선조들이 남겨준 그러한 책이 조선왕조실록 6,400만자짜리 1권으로 치고, 2억 5,000만자짜리 승정원일기 한 권으로 칠 때 선조들이 남겨준 문질이 우리나라에 문건이 몇 권 있냐면 33만권 있다. 따라서 우리 국학을 연구하려면 평생 한문만 공부하는 일단의 학자들이 필요하다.
이들이 이러한 자료를 번역해 내면 국사학자들은 국사를 연구할 것이고, 복제사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복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경제를 연구한 사람들은 한국경제사를 연구할 것이고, 수학교수들은 한국수학사를 연구할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시스템이 현재 우리나라에는 전혀 되어 있지 않다. 한문을 공부하면 굶어죽기 딱 좋기 때문에 아무도 한문을 전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자를 반드시 알아야 하는데, 한동안 교육정책이 한자공부를 소홀히 했으니 이 후유증이 오래갈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의 소회, 두가지를 말하고자 한다. 첫째는 우리나라는 이와같이 통치자의 말 한 마디까지 기록해 두었는데, 이 전통이 근래에 와서 억망진창이 되어 국가안보에 관한 통치자와 상대방 수장과의 대화기록조차 행방불명이 된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일어났다.
이는 아예 만들지 않았거나 폐기처분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어떻든 두가지 모두 국가기강이 형편없이 땅에 떨어진 수준 이하의 행정조직이며 국정을 희화화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다.
두번째는 일본에 나라를 뺏기면서 실록의 기록은 대가 끊어져, 해방이 되어 건국이 되었어도 최고통치자에 대한 기록은 제한적이었다. 이러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료가 없어 근대사를 보는 눈이 보수세력과 좌파세력과의 견해가 극명하게 대립하고 있다.
흔히 무슨 중대한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은 후일 역사가 평가해 줄것이다'라고 하는데, 이것도 정답이 아니다. 후일 역사가는 자기 잣대로 그리고 자기 눈높이로 역사를 기술하기 때문에 어느 것이 진실인지는 영원히 미궁에 빠진다. 더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런데 현금은 억지를 쓰는 집단이 거칠은 행동으로 역사를 왜곡하려고 한다. 이것이 과연 민주주의 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참으로 개탄스럽다. 젊잖고 침묵하는 보수파는 메인 스트림이 아니고 목소리 크고 저돌적인 좌파가 한국사의 주류가 되려고 한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국민의 힘으로 이를 바로 잡아야 할 것이다. 淸閑 執筆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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