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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日蓮 大聖人의 佛法 원문보기 글쓴이: 흐름
039-5. 개목초(開目抄) 하(下)(2)
세존(世尊)은 옛날 제이시중(第二時中)에 오직 발취(發趣)하여 대승(大乘)을 닦는 자(者)를 위(爲)하여서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무자성(無自性)이요, 무성무멸(無性無滅)이요, 본래적정(本來寂靜)이요, 자성열반(自性涅槃)인 까닭에 은밀(隱密)의 상(相)을 가지고 정법륜(正法輪)을 전(轉)하셨음이라.
더욱 심(甚)히 기이(奇異)하고 심(甚)히 이는 희유(希有)하다 할지라도 그 때에 전(轉)하신 바의 법륜(法輪)은 역시 (亦是) 유상(有上)이며 용수(容受)하는 바가 있어서 아직도 요의(了義)가 아니므로, 이는 모든 쟁론안족(諍論安足)의 처소(處所)이외다.
세존(世尊)이여, 지금 제삼시중(第三時中)에 있어서 널리 일체승(一切乘)을 발취(發趣)하는 자(者)를 위하여 일체(一切)의 법(法)은 모두 무자성(無自性)․무생무멸(無生無滅)․본래적정(本來寂靜)․자성열반(自性涅槃)으로서 무자성(無自性)의 성(性)임에 의(依)하여 현료(顯了)의 상(相)을 가지고 정법륜(正法輪)을 전(轉)하심이니,
제일(第一) 심(甚)히 기이(奇異)하고 가장 이는 희유(希有)이외다. 이제 세존(世尊)이 전(轉)하시는 바의 법륜(法輪)은 무상무용(無常無容)으로서 이는 참된 요의(了義)이니 모든 쟁론(諍論)이 안식(安息)할 곳이 아니외다」 등(等) 운운(云云).
대반야경(大般若經)에 가로되 「청문(聽聞)하는 바의 세(世)․출세(出世)의 법(法)에 따라서 모두 능(能)히 방편(方便)하여 반야(般若) 심심(甚深)의 이취(理趣)에 회입(會入)하고 모든 조작(造作)하는 바의 세간(世間)의 사업(事業)도 역시(亦是) 반야(般若)를 가지고 법성(法性)에 회입(會入)하니 일사(一事)라도 법성(法性)을 벗어 남을 보지 못함」 등(等) 운운(云云).
대일경(大日經) 제일(第一)에 가로되 「비밀주(秘密主)여, 대승행(大乘行)이 있어서 무연승(無緣乘)의 마음을 일으켜 법(法)에 아성(我性)이 없음이라. 왜냐하면 그 옛날에 그와 같이 수행(修行)한 자(者)와 여(如)히 온(蘊)의 아뢰야(阿賴耶)를 관찰(觀察)하여 자성(自性)은 환(幻) 같다고 알았음」 등(等) 운운(云云).
또 가로되 「비밀주(秘密主)여, 그는 그와 같이 무아(無我)를 버리고 심주(心主)․자재(自在)로서 자심(自心)의 본래(本來) 불생(不生)을 깨달음」 등(等) 운운(云云), 또 가로되 「소위(所謂) 공성(空性)은 근경(根境)을 떠나 무상(無相)이며, 경계(境界)가 없고 모든 희론(戱論)을 초월(超越)하여 허공(虛空)과 동등(同等)하며 내지(乃至) 극무자성(極無自性)」 등(等) 운운(云云),
또 가로되 「대일존(大日尊)이 비밀주(秘密主)에게 고(告)해 가로되 비밀주(秘密主)여, 무엇이 보리(菩提)인가, 가로되 실(實)과 여(如)히 자심(自心)을 안다」 등(等) 운운(云云). 화엄경(華嚴經)에 가로되 「일체세계(一切世界)의 모든 군생중(群生中) 성문승(聲聞乘)을 구(求)하고자 함이 적으며, 연각(緣覺)을 구(求)하는 자(者)는 더욱 적음이라. 대승(大乘)을 구(求)하는 자(者)는 매우 희유(希有)이지만, 그러나 대승(大乘)을 구(求)하는 자(者)는 아직도 쉽지만 능(能)히 이 법(法)을 믿기란 심(甚)히 어렵다. 하물며 능(能)히 수지(受持)하고 정억념(正憶念)하며 설(說)과 여(如)히 수행(修行)하여 진실(眞實)로 해(解)함에 있어서랴. 만약(萬若)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머리에 이고 일겁(一劫)동안 몸을 움직이지 않음도 그 소작(所作)은 아직 어렵지 않으나,
이 법(法)을 믿기란 이는 매우 어렵다. 대천진수(大千塵數)의 중생류(衆生類)에게 일겁(一劫) 모든 악구(樂具)를 공양(供養)함도 그의 공덕(功德)은 아직 뛰어나지 않으며, 이 법(法)을 믿기란 이는 수승(殊勝)이니라.
만약(萬若) 손바닥으로 십불찰(十佛刹)을 들고 허공(虛空) 중(中)에 주(住)함이 일겁(一劫)이라도 그의 소작(所作)은 아직 어렵지 않으며, 이 법(法)을 믿기란 이는 심(甚)히 어려우니라. 십불찰진(十佛刹塵)의 중생류(衆生類)에게 일겁(一劫) 모든 악구(樂具)를 공양(供養)함도 그의 공덕(功德)은 아직 뛰어나지 않으나, 이 법(法)을 믿기란 이는 수승(殊勝)이니라.
십불찰진(十佛刹塵)의 모든 여래(如來)를 일겁(一劫) 동안 공경(恭敬)하고 공양(供養)해도 만약(萬若) 능(能)히 이 품(品)을 수지(受持)하는 자(者)의 공덕(功德)은 그 보다도 최승(最勝)이라고 함이라」 등(等) 운운(云云).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이 모든 대승방등경전(大乘方等經典)은 또 무량(無量)의 공덕(功德)을 성취(成就)한다 해도 이 경(經)에 비(比)하고자 함에 비유(譬喩)를 할 수 없음은 백배(百倍)․천배(千倍)․백천만배(百千萬倍), 내지(乃至) 산수(算數) 비유(譬喩)도 미치지 못하는 바이니라,
선남자(善男子)여, 비유(譬喩)컨대 소에서 젖을 짜서 젖에서 낙(酪)을 내고 낙(酪)에서 생소(生蘇)를 내고 생소(生蘇)에서 숙소(熟蘇)를 내고 숙소(熟蘇)에서 제호(醍歸)를 내니 제호(醍歸)는 최상(最上)이니라. 「만약(萬若) 복용(服用)하는 자(者)는 중병(衆病)을 모두 제(除)하고 소유(所有)한 제약(諸藥)도 모두 그 속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
선남자(善男子)여, 부처도 또한 이와 같음이라. 부처로부터 십이부경(十二部經)을 내고 십이부경(十二部經)에서 수다라(修多羅)를 내고, 수다라(修多羅)에서 방등경(方等經)을 내고 방등경(方等經)에서 반야파라밀(般若波羅蜜)을 내고 반야파라밀(般若波羅蜜)에서 대열반(大涅槃)을 내니 마치 제호(醍歸)와 같으니라. 제호(醍歸)라 함은 불성(佛性)에 비유(譬喩)함이라」 등(等) 운운(云云).
이들 경문(經文)과 법화경(法華經)의 이금당(已今當)․육난(六難)․구이(九易)를 비교(比較)하면, 달에다 별을 나란히하고 구산(九山)에 수미(須彌)를 나란히해 놓음과 같으니라. 그런데 화엄종(華嚴宗)의 징관(澄觀)․법상(法相)․삼론(三論)․진언(眞言) 등(等)의 자은(慈恩)․가상(嘉祥)․고보(弘法) 등(等)의 불안(佛眼)과 같은 사람도 역시 이 글에 미혹(迷惑)하였으니,
어찌 하물며 맹안(盲眼)과 같은 당세(當世)의 학자(學者)들이 승렬(勝劣)을 분별(分別)하리요. 흑백(黑白)과 같이 명백(明白)하고 수미(須彌)와 개자(芥子)와 같은 승렬(勝劣)도 알지 못하였으니 어찌 하물며 허공(虛空)과 같은 이(理)에 미혹(迷惑)하지 않으리요. 교(敎)의 천심(淺深)을 알지 못하고서는 이(理)의 천심(淺深)을 분별(分別)할 사람이 없느니라. 권(卷)이 다르고 문(文)도 전후(前後)이므로 교문(敎門)의 판별(判別)이 어려울 터이니 문(文)을 내놓아 우자(愚者)를 도우려 하노라. 왕(王)에는 소왕(小王)․대왕(大王)이 있고, 일체(一切)에는 소분(少分)․ 전분(全分)이 있으며, 오유(五乳)에는 전유(全喩)․분유(分喩)가 있음을 알라.
육파라밀경(六波羅蜜經)에는 유정(有情)의 성불(成佛)은 있되 무성(無性)의 성불(成佛)은 없으며, 물론 구원실성(久遠實成)은 밝히지 않았느니라. 또한 열반경(涅槃經)의 오미(五味)에 미치지 못하니 하물며 법화경(法華經)의 적문(迹門)․본문(本門)에 비(比)할손가. 그런데 일본(日本)의 고보대사(弘法大師)는 이 경문(經文)에 미혹(迷惑)하여 법화경(法華經)을 제사(第四)의 숙소미(熟蘇味)에 넣었느니라.
제오(第五)의 총지문(總持門)의 제호미(醍歸味)조차도 열반경(涅槃經)에 미치지 못하거늘 어찌된 일인가. 그러함을 진단(震旦)의 인사(人師)들이 다투어 제호(醍歸)를 훔쳤다고 천태(天台) 등(等)을 도적(盜賊)이라고 썼느니라, 애석(哀惜)하여라, 고현(古賢)은 제호(醍歸)를 맛보지 못하였구나라는 등(等), 이렇게 자탄(自歎)했느니라. 이것들은 차치(且置)하고 나의 일문(一門)의 자(者)를 위해 쓰노니 타인(他人)은 믿지 않으므로 역연(逆緣)이로다.
일제(一右)를 맛보고 대해(大海)의 조미(潮味)를 알며 일화(一華)를 봄으로써 봄을 짐작하여라. 만리(萬里)를 건너서 송(宋)나라에 가지 않고, 삼개년(三箇年)이 걸려서 영산(靈山)에 이르지 않더라도, 용수(龍樹)와 같이 용궁(龍宮)에 들어가지 않을지라도, 무착보살(無著菩薩)처럼 미륵보살(彌勒菩薩)을 만나지 않더라도 이소삼회(二所三會)를 치우(値遇)하지 않을지라도, 일대(一代)의 승렬(勝劣)은 이를 알 수 있는 것이니라. 뱀은 칠일내(七日內)에 있을 홍수(洪水)를 아니 용(龍)의 권속(眷屬)이기 때문이며, 까마귀는 연중(年中)의 길흉(吉凶)을 알고 있으니, 과거(過去)에 음양사(陰陽師)였기 때문이고, 새는 나는 덕(德)이 사람보다 뛰어났느니라.
니치렌(日蓮)은 제경(諸經)의 승렬(勝劣)을 아는데 있어서 화엄(華嚴)의 징관(澄觀)․ 삼론(三論)의 가상(嘉祥)․ 법상(法相)의 자은(慈恩)․ 진언(眞言)의 고보(弘法)보다 수승(殊勝)하니라.천태(天台)․ 전교(傳敎)의 뒤를 승계(承繼)한 때문이로다. 그 사람들은 천태(天台)․ 전교(傳敎)에게 귀복(歸伏)하지 않았더라면 방법(謗法)의 죄(罪)를 벗어났겠느뇨.
당세(當世)에 일본국(日本國)에서 제일(第一)로 부(富)한 자는 니치렌(日蓮)이로다. 목숨은 법화경(法華經)에 바치고 이름은 후대(後代)에 남기리라. 대해(大海)의 주(主)가 되면 모든 하신(河神)이 다 따르고 수미산(須彌山)이라는 왕(王)에게 모든 산신(山神)이 따르지 않겠느뇨. 법화경(法華經)의 육난구이(六難九易)를 판별(判別)하면 일체경(一切經)을 읽지 않더라도 따르느니라.
보탑품(寶塔品)의 삼개(三箇)의 칙선(勅宣) 위에 제바품(提婆品)에 이개(二箇)의 간효(諫曉)가 있음이라. 제바달다(提婆達多)는 일천제(一闡提)인데 천왕여래(天王如來)로 수기(授記)되었다. 열반경(涅槃經) 사십권(四十卷)의 현증(現證)은 이 품(品)에 있으니, 선성(善星)․아사세(阿淞世) 등(等)의 무량(無量)의 오역(五逆)․방법(謗法)의 자(者)의 일(一)을 들고 우두머리를 들어 만(萬)을 다 갖추고 가지를 따르게 하였다.
일체(一切)의 오역(五逆)․칠역(七逆)․방법(謗法)․천제(闡提)는 천왕여래(天王如來)로 나타나서 독약(毒藥)이 변(變)하여 감로(甘露)가 되었으니 중미(衆味)보다 빼어났느니라. 용녀(龍女)의 성불(成佛)은 이는 일인(一人)이 아니라, 모든 여인(女人)의 성불(成佛)을 나타내었다. 법화(法華) 이전(已前)의 모든 소승경(小乘經)에는 여인(女人)의 성불(成佛)을 허락(許諾)하지 않았고, 모든 대승경(大乘經)에는 성불(成佛) 왕생(往生)을 허락(許諾)하는 듯하지만, 혹(或)은 개전(改轉)의 성불(成佛)이지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성불(成佛)이 아니므로 유명무실(有名無實)한 성불(成佛) 왕생(往生)이니라.
거일례제(擧一例諸)라 하여, 용녀(龍女)의 성불(成佛)은 말대(末代)의 여인(女人)의 성불(成佛) 왕생(往生)의 길을 열어 놓은 것이로다. 유가(儒家)의 효양(孝養)은 금생(今生)에 한(限)하며 미래(未來)의 부모(父母)를 돕지 못하므로 외가(外家)의 성현(聖賢)은 유명무실(有名無實)이니라.
외도(外道)는 과미(過未)를 알지만 부모(父母)를 도울 길이 없으며 불법(佛法)만이 부모(父母)의 후세(後世)를 도우므로 성현(聖賢)의 이름이 있느니라. 그렇지만 법화경(法華經) 이전(已前) 등(等)의 대소승(大小乘)의 경종(經宗)은 자신(自身)의 득도(得道)조차도 이루어지지 않으니 어찌 하물며 부모(父母)에 있어서랴. 다만 문(文)만이 있고 의(義)가 없음이라. 이제 법화경(法華經)의 때야말로 여인성불(女人成佛)의 때인지라, 비모(悲母)의 성불(成佛) 도 나타나고 달다(達多)의 악인성불(惡人成佛)의 때에 자부(慈父)의 성불(成佛) 도 나타났으니 이 경(經)은 내전(內典)의 효경(孝經)이로다. 이개(二箇)의 간효(諫曉)는 끝났느니라.
이상(已上) 오개(五箇)의 봉조(鳳詔)에 놀라서 권지품(勸持品)의 홍경(弘經)이 있었으니, 명경(明鏡)인 경문(經文)을 내놓고 당세(當世)의 선(禪)․율(律)․염불자(念佛者)와 더불어 제단나(諸檀那)의 방법(謗法)을 알게 하리라. 니치렌(日蓮)이라고 하는 자(者)는 거년(去年) 구월(九月) 십이일(十二日) 자축(子丑)의 시(時)에 목이 잘렸느니라. 이는 혼백(魂魄)이 사도(佐土)의 땅에 와서 다음 해의 이월(二月) 설중(雪中)에 써서 유연(有緣)한 제자(弟子)에게 보내니 무서워하지만 나는 무서워하지 않노라. 이 글을 보는 사람은 얼마나 겁먹을 것이뇨. 이는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이 미래(未來) 일본국(日本國)과 당세(當世)를 비추시는 명경(明鏡)이니 유물(遺物)이라고도 보아야 할지니라.
권지품(勸持品)에 가로되 「오직 원(願)하옵건대 심려(心慮)하지 마옵소서, 불멸도(佛滅度)의 후(後) 공포악세(恐怖惡世) 중(中)에 있어서 우리들은 응당(應當) 널리 설(說)하겠나이다. 모든 무지(無智)한 사람이 악구매리(惡口罵戎) 등(等)하고 더불어 도장(刀杖)을 가(加)하는 자(者)가 있겠지만 우리들은 모두 응당(應當) 참겠나이다. 악세(惡世) 중(中)의 비구(比丘)는 사지(邪智)이고 마음이 첨곡(諂曲)하여 아직 득(得)하지 않았음을 득(得)했다고 생각하여 아만(我慢)의 마음이 충만(充滿)하리라.
혹(或)은 아련야(阿練若)에서 납의(納衣)하고 공한(空閑)에 있으면서 스스로 참된 도(道)를 행(行)한다고 하며 인간(人間)을 경천(輕賤)하는 자(者)가 있으리라. 이양(移養)에 탐착(貪著)하는 고(故)로 백의(白衣)를 위해 법(法)을 설(說)하여 세상(世上)에서 공경(恭敬)받음이 육통(六通)의 나한(羅漢)과 같이 되리라.
이 사람은 악심(惡心)을 품고 항상(恒常) 세속(世俗)의 일을 생각하며 이름을 아련야(阿練若)에 빌고 즐겨 우리들의 죄과(罪過)를 끄집어내리라. 항상 대중(大衆) 속에 있어서 우리들을 비방(誹謗)하려고 원(願)하는 고(故)로, 국왕(國王)․대신(大臣)․바라문(婆羅門)․거사(居士) 및 여타(餘他)의 비구중(比丘衆)을 향(向)하여 비방(誹謗)하고 우리의 악(惡)을 말하되 이는 사견(邪見)의 사람이며 외도(外道)의 논의(論議)를 설(說)한다고 하리라.
탁겁악세(濁劫惡世) 중(中)에는 많은 여러 공포(恐怖)가 있으며 악귀(惡鬼)가 그 몸에 들어가 우리를 매리훼욕(罵戎毁辱)하리라. 탁세(濁世)의 악비구(惡比丘)는 부처의 방편수의(方便隨宜)의 소설(所說)의 법(法)을 알지 못하고 악구(惡口)하며 빈축(閒蹙)하고, 삭삭빈출(數數虐出)당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기(記)의 팔(八)에 가로되 「문(文)에 삼(三)이라, 처음 일행(一行)은 통틀어 사인(邪人)을 밝히니 즉(卽) 속중(俗衆)이니라. 다음 일행(一行)은 도문증상만(道門增上慢)의 자(者)를 밝힘이라. 삼(三)에 칠행(七行)은 참성증상만(悰聖增上慢)의 자(者)를 밝힘이라. 이 삼(三) 중(中)에서 처음 것은 참겠지만 다음 것은 전(前)보다 더함이라. 제삼(第三)은 가장 심(甚)하니 후후(後後)의 자(者)는 더욱더 식별(識別)하기 어려운 고(故)로」 등(等) 운운(云云).
동춘(東春)에 지도법사(智度法師) 가로되 「처음 유제(有諸)부터 하(下)의 오행(五行)은 제일(第一)에 일게(一偈)는 삼업(三業)의 악(惡)을 참음이니 이는 외악(外惡)의 사람이니라. 다음에 악세(惡世)의 하(下)의 일게(一偈)는 이는 상만출가(上慢出家)의 사람이니라. 제삼(第三)에 혹유아련야(或有阿練若) 이하(已下)의 삼게(三偈)는 즉(卽) 이는 출가(出家)의 곳에 일체(一切)의 악인(惡人)을 섭(攝)함」 등(等) 운운(云云).
또 가로되 「상재대중(常在大衆) 이하(以下)의 양행(兩行)은 공처(公處)를 향(向)하여 법(法)을 헐뜯고 사람을 비방(誹謗)함」 등(等) 운운(云云). 열반경(涅槃經)의 구(九)에 가로되 「선남자(善男子)여․일천제(一闡提)가 있어서 나한(羅漢)의 모습을 하고 공처(公處)에 주(住)하여 방등대승경전(方等大乘經典)을 비방(誹謗)하리라. 모든 범부인(凡夫人)이 보고 나서 모두 참된 아라한(阿羅漢)이요, 이는 대보살(大菩薩)이라고 말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또 가로되 「그 때에 이 경(經)이 염부제(閻浮提)에 있어서 응당(應當) 널리 유포(流布)되리라. 이 때에 필연(必然)코 여러 악비구(惡比丘)가 있어서 이 경(經)을 초략(抄躍)하여 나누어 다분(多分)으로 해서, 능(能)히 정법(正法)의 색향미미(色香美味)를 멸(滅)하리라. 이 모든 악인(惡人)은 또 이와 같은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할지라도 여래(如來)의 심밀(深密)의 요의(要義)를 멸제(滅除)하고 세간(世間)의 장엄(莊嚴)한 문식(文飾)과 무의(無義)의 어(語)를 안치(安置)함이라.
전(前)을 초(抄)하여 후(後)에 붙이고 후(後)를 초(抄)하여 전(前)에 붙이며, 전후(前後)를 중(中)에 붙이고 중(中)을 전후(前後)에 붙이니 응당(應當) 알지어다, 이와 같은 모든 악비구(惡比丘)는 이는 마(魔)의 반려(伴侶)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육권(六卷)의 반니원경(般泥洹經)에 가로되 「아라한(阿羅漢)을 닮은 일천제(一闡提)가 있어서 악업(惡業)을 행(行)하고 일천제(一闡提)를 닮은 아라한(阿羅漢)이 있어서 자심(慈心)을 하리라. 나한(羅漢)을 닮은 일천제(一闡提)가 있다 함은 이 모든 중생(衆生)이 방등(方等)을 비방(誹謗)함이라. 일천제(一闡提)를 닮은 아라한(阿羅漢)이란 성문(聲聞)을훼자(毁諄)하고 널리 방등(方等)을 설(說)함이라.
중생(衆生)에게 말하되 나는 여등(汝等)과 함께 보살(菩薩)이니라. 그 까닭은 일체(一切) 모두 여래(如來)의 성(性)이 있는 고(故)로, 그런데 그 중생(衆生)은 일천제(一闡提)라고 말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나의 열반(涅槃) 후(後) 내지(乃至) 정법(正法)이 멸(滅)한 다음 상법(像法) 중(中)에 필연(必然)코 비구(比丘)가 있으리니, 지율(持律)을 닮은 모습으로 약간 경(經)을 독송(讀誦)하고 음식(飮食)을 탐기(貪嗜)하여 그 몸을 장양(長養)함이라.
가사(袈娑)를 입었다 해도 마치 엽사(獵師)가 세시서행(細視徐行)함과 같고 고양이가 쥐를 노림과 같으니라. 늘 나는 나한(羅漢)을 득(得)했다고 말하며 겉으로는 현선(賢善)을 나타내고 안으로는 탐질(貪嫉)을 품고 아법(啞法)을 받은 바라문(婆羅門)들과 같다. 실(實)은 사문(沙門)이 아니면서 사문의 모습을 하고 사견치성(邪見熾盛)하여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대저 추봉(鷲峯)․쌍림(雙林)의 일월(日月)․비담(毘湛)․동춘(東春)의 명경(明鏡)에 당세(當世)의 제종(諸宗) 및 국중(國中)의 선율(禪律)․염불자(念佛者)의 추면(醜面)을 비추니 일분(一分)도 흐림이 없다. 묘법화경(妙法華經)에 가로되 「어불멸도후공포악세중(於佛滅度後恐怖惡世中)」 안락행품(安樂行品)에 「어후악세(於後惡世)」 또 가로되 「어말세중(於末世中)」 또 가로되 「어후말세법욕멸시(於後末世法欲滅時)」 분별공덕품(分別功德品)에 가로되 「악세말법시(惡世末法時)」 약왕품(藥王品)에 가로되 「후오백세(後五百歲)」 등(等) 운운(云云). 정법화경(正法華經)의 권설품(勸說品)에 가로되 「연후말세(然後末世)」 또 가로되 「연후래말세(然後來末世)」 등(等) 운운(云云).
첨품법화경(添品法華經)에 가로되 등(等). 천태(天台)가 가로되 「상법(像法)의 중(中)의 남삼북칠(南三北七)은 법화경(法華經)의 원적(怨敵)이니라」 전교(傳敎)가 가로되 「상법(像法)의 말(末)․남도(南都)․육종(六宗)의 학자(學者)는 법화(法華)의 원적(怨敵)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그들의 때는 아직 분명(分明)하지 않으니라. 이는 교주석존(敎主釋尊)과 다보불(多寶佛)이 보탑(寶塔) 중(中)에서 일월(日月)이 나란히 함과 같고, 시방분신(十方分身)의 제불(諸佛)이 수하(樹下)에 별을 줄지어 놓은 듯한 속에서 정법(正法) 일천년(一千年) 상법(像法) 일천년(一千年), 이천년(二千年)이 지나서 말법(末法)의 처음에 법화경(法華經)의 원적(怨敵)․삼류(三類)가 있으리라고 팔십만억나유타(八十萬億那由豹)의 제보살(諸菩薩)이 정(定)하신 일인데 허망(虛妄)이 될 것인가.
당세(當世)는 여래멸후(如來滅後), 이천이백여년(二千二百餘年)이니라. 대지(大地)는 가리켜서 어긋나는 일이 있을지라도 봄에 꽃이 피지 않을지라도, 삼류(三類)의 적인(敵人)은 반드시 일본국(日本國)에 있을 것이로다. 그렇다면 어떠한 사람들이 삼류(三類)의 안에 들 것이며, 또한 어느 사람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라고 지목(指目)될 것인지 안타까운 일이로다.
그 삼류(三類)의 원적(怨敵)에 우리들이 들어 있을 것인가, 아니면 법화경(法華經)의 행자(行者) 속에 들어 있을 것인가, 안타깝구나, 주(周)의 제사(第四) 소왕(昭王)의 어우(御宇) 이십사년(二十四年) 갑인(甲寅)․사월(四月) 팔일(八日)의 야반(夜半)에 하늘에 오색(五色)의 광기(光氣)가 있어 남북(南北)에 걸쳐 낮과 같음이라.
대지(大地)가 육종(六種)으로 진동(震動)하며 비도 오지 않는데 강하(江河)와 정지(井池)의 물이 늘고, 모든 초목(草木)에 꽃이 피고 열매를 맺었으니 불가사의(不可思議)한 일이로다. 소왕(昭王)이 크게 놀라니 대사(大史)․소유(蘇由)가 점(占)치기를 「서방(西方)에 성인(聖人)이 태어났소이다」
소왕(昭王)이 묻되 「이 나라는 어떠하뇨」 답(答)하되 「아무 일 없나이다. 일천년(一千年) 후(後)에 그의 성언(聖言)이 이 나라에 건너와서 중생(衆生)을 이(利)롭게 할 것이외다」 그 보잘것없는 외전(外典)의 일호미단(一毫未斷)․견사(見思)의 자(者)조차도 일천년(一千年)의 일을 알았다.
과연(果然) 불교(佛敎)는 일천일십오년(一千一十五年)이 지난 후한(後漢)의 제이(第二)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십년(十年) 정묘(丁卯)의 해에 불법(佛法)이 한토(漢土)에 건너갔었다.
그런데 이는 타(他)에 유례(類例)가 없는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분신(十方分身)의 부처 앞에서의 제보살(諸菩薩)의 미래기(未來記)로다. 그러니 당세(當世) 일본국(日本國)에 삼류(三類)의 법화경(法華經)의 적인(敵人)이 없을소냐.
그러므로 부처가 부법장경(付法藏經) 등(等)에 써서 가로되 「나의 멸후(滅後)에 정법(正法) 일천년간(一千年間) 나의 정법(正法)을 넓힐 사람 이십사인(二十四人)이 차례로 상속(相續)할지니라」
가섭(迦葉)․아난(阿難) 등(等)은 차치(且置)하고
일백년(一百年)의 협비구(脇比丘)․
육백년(六百年)의 마명(馬鳴)․
칠백년(七百年)의 용수보살(龍樹菩薩) 등(等), 일분(一分)도 어김없이 이미 출현(出現)하셨으니, 이 일이 어찌하여 허망(虛妄)될 것이뇨. 이 일이 상위(相違)한다면 일경은 모두 상위(相違)할 것이로다. 소위(所謂) 사리불(舍利弗)이 미래(未來) 화광여래(華光如來)․가섭(迦葉)이 광명여래(光明如來)로 된다 함도 모두 망어(妄語)가 되리니, 이전(爾前)이 도리어 결정적(決定的)이 되어 영불성불(永不成佛) 의 제성문(諸聲聞)이니라.
개나 여우를 공양(供養)할지언정 아난(阿難) 등(等)을 공양(供養)하지 말지어다라고 되리니 어찌 하리요, 어찌 하리요.제일(第一)의 유제무지인(有諸無智人)이라 함은 경문(經文)의 제이(第二)의 악세(惡世) 중(中) 비구(比丘)와 제삼(第三)의 납의(納衣)의 비구(比丘)의 대단나(大檀那)라고 보여진다.
따라서 묘락대사(妙樂大師)는 「속중(俗衆)」 등(等) 운운(云云). 동춘(東春)에 가로되 「공처(公處)에 향(向)함」 등(等) 운운(云云). 제이(第二)의 법화경(法華經)의 원적(怨敵)은 경(經)에 가로되 「악세(惡世) 중(中)의 비구(比丘)는 사지(邪智)이며 마음이 첨곡(諂曲)하여 아직 득(得)하지 않았음을 이를 득(得)했다고 생각해서 아만(我慢)의 마음이 충만(充滿)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이 때에 필연(必然) 여러 악비구(惡比丘)가 있으리라. 내지(乃至) 이 모든 악인(惡人)들이 또 이와 같은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한다 할지라도 여래심밀(如來深密)의 요의(要義)를 멸제(滅除)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지관(止觀)에 가로되 「만약(萬若) 신(信)이 없는 자(者)는 높이 성경(聖境)에다 미루고 자기(自己)의 지분(智分)은 아니라고 함이라.
만약(萬若) 지(智)가 없는 자(者)는 증상만(增上慢)을 일으켜 자기(自己)는 부처와 같다고 생각함」 등(等) 운운(云云). 도작선사(道綽禪師) 가로되 「이(二)에 이심해미(理深解微)함에 의(依)함」 등(等) 운운(云云). 호넨(法然) 가로되 「제행(諸行)은 기(機)가 아니며 시(時)를 잃음」 등(等) 운운(云云).
기(記)의 십(十)에 가로되 「아마도 사람이 그릇 이해(理解)하는 자(者)는 초심(初心)의 공덕(功德)이 큰 것을 모르고 공(功)을 상위(上位)에 물려주고 이 초심(初心)을 업신여기는 고(故)로, 이제 그의 행(行)은 얕고 공덕(功德)은 깊다 함을 보임으로써 경력(經力)을 나타냄이라」 등(等) 운운(云云).
전교대사(傳敎大師) 가로되 「정상(正像)은 초초(稍稍) 지나가 버리고 말법(末法)은 매우 가까우니라. 법화일승(法華一乘)의 기(機)는 이제 바로 그 때이니라. 무엇으로써 알 수 있는가 하니 안락행품(安樂行品)에 가로되 「말세법멸(末世法滅)의 때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에신(慧心)이 가로되 「일본일주(日本一州) 원기순일(圓機純一)이니라」 등(等) 운운(云云). 도작(道綽)과 전교(傳敎)와 호넨(法然)과 에신(慧心) 중 어느 것을 믿을 것이뇨. 그는 일체경(一切經)에 증문(證文)이 없고 이는 바로 법화경(法華經)에 의(依)했느니라.
게다가 일본국(日本國) 일동(一同)에게 에이산(叡山)의 대사(大師)는 수계(受戒)의 스승인데 어찌하여 천마(天魔)가 붙은 호넨(法然)에게 마음을 두고 자기(自己)의 제두(제頭)의 스승을 버리느뇨. 호넨(法然)이 지자라면 어찌 이 석을 선택에 실어서 화회하지 않았느뇨, 사람의 이를 숨기는 것이니라.
제이(第二)의 악세(惡世) 중 비구(比丘)라 가리킴은 호넨(法然) 등(等)의 무계․사견의 자이니라.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우리들 모두 사견의 사람이라 이름함」 등(等) 운운(云云). 묘락(妙樂)이 가로되 「스스로 삼교를 가리켜 모두 사견이라 이름함」 등(等) 운운(云云). 지관(止觀)에 가로되 「대경(大經)에 왈(曰), 이 이전(以前)은 우리 모두 사견(邪見)의 사람이라 이름함이라. 사(邪) 어찌 악(惡)이 아니뇨」 등(等) 운운(云云).
홍결(弘決)에 가로되 「사(邪)는 즉(卽) 이는 악(惡)이니 그런 고(故)로 마땅히 알지어다, 오직 원(圓)을 선(善)이라 함이라. 또 이의(二意)가 있으니 일(一)에는 순(順)을 선(善)으로 하고 배(背)를 악(惡)으로 하며 상대(相待)의 뜻이니라. 착(著)을 악(惡)으로 하고 달(達)을 선(善)으로 하니, 상대(相待)․절대(絶待) 함께 모름지기 악(惡)을 떠날지어다. 원(圓)에 착(著)함조차 악(惡)이니 하물며 여타(餘他)에 있어서랴」 등(等) 운운(云云).
외도(外道)의 선악(善惡)은 소승경(小乘經)에 대(對)하면 모두 악도(惡道)이고 소승(小乘)의 선도(善道)․ 내지(乃至) 사미삼교(四味三敎)는 법화경(法華經)에 대(對)하면 모두 사악(邪惡)이며 단(但) 법화(法華)만이 정선(正善)이로다.
이전(爾前)의 원(圓)은 상대묘(相待妙)이니, 절대묘(絶待妙)에 대(對)하면 역시 악(惡)이며 전삼교(前三敎)에 섭(攝)하면 역시 악도(惡道)로다. 이전(爾前)과 여(如)히 그 경(經)의 극리(極理)를 행(行)함도 역시 악도(惡道)이니 하물며 관경(觀經) 등(等)의 더구나 화엄(華嚴)․반야경(般若經) 등(等)에 미치지 못하는 소법(小法)을 본(本)으로 하여 법화경(法華經)을 관경(觀經)에 집어 넣어서 도리어 염불(念佛)에 대하여 각포폐사(閣抛閉捨)함은 호넨(法然)과 소화(所化)의 제자(弟子)들, 단나(檀那)들은 비방정법(誹謗正法)의 자(者)가 아니뇨.
석가(釋迦)․다보(多寶)․시방(十方)의 제불(諸佛)은 법(法)으로 하여금 오래 주(住)하게 하려는 고(故)로 여기에 내지(乃至)하셨느니라. 호넨(法然)과 더불어 일본국(日本國)의 염불자(念佛者)들은 법화경(法華經)은 말법(末法)에 염불(念佛)보다 이전(而前)에 멸진(滅盡)한다고 하였으니 어찌 삼성(三聖)의 원적(怨敵)이 아니겠느뇨.
제삼(第三)은 법화경(法華經)에 가로되 「혹(或)은 아련야(阿練若)에 있으면서 납의(納衣)하고 공한(空閑)에서 내지(乃至) 백의(白衣)를 위해 법(法)을 설(說)하여 세간(世間)에서 공경(恭敬)을 받음이 육통(六通)의 나한(羅漢)과 같이 되리라」 등(等) 운운(云云). 육권(六卷)의 반니원경(般泥洹經)에 가로되 「나한(羅漢)과 흡사한 일천제(一闡提)가 있어서 악업(惡業)을 행(行)하고 일천제(一闡提)와 흡사한 아라한(阿羅漢)이 있어서 자심(慈心)을 하리라.
나한(羅漢)과 흡사한 일천제(一闡提)가 있다고 함은 이 모든 중생(衆生)의 방등(方等)을 비방(誹謗)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니라. 일천제(一闡提)와 흡사한 아라한(阿羅漢)이란 성문(聲聞)을 훼자(毁諄)하며 널리 방등(方等)을 설(說)하여 중생(衆生)에게 말하되, 나는 그대들과 함께 이는 보살(菩薩)이니라.
까닭은 무엇인가, 일체(一切) 모두 여래(如來)의 성(性)이 있는 고(故)로, 그런데 그 중생(衆生)은 일천제(一闡提)라고 말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열반경(涅槃經)에 가로되 「나의 열반(涅槃)의 후(後)․상법(像法) 중(中)에 마땅히 비구(比丘)가 있으리라. 지율(持律)의 모습을 하고 약간(若干) 경전(經典)을 독송(讀誦)하며 음식(飮食)을 탐기(貪嗜)하여 그 몸을 장양(長養)하리라. 가사(袈裟)를 입었지만 마치 엽사(獵師)가 세시서행(細視徐行)함과 같고, 고양이가 쥐를 노리는 것과 같다.
항상 이 말을 외치리라, 나는 나한(羅漢)을 득(得)했노라고. 겉으로는 현선(賢善)을 나타내고 안으로는 탐질(貪嫉)을 품으며, 아법(啞法)을 받은 바라문(婆羅門)들과 같고, 실(實)은 사문(沙門)이 아니면서 사문(沙門)의 모습을 나타내며 사견(邪見)이 치성(熾盛)하여 정법(正法)을 비방(誹謗)하리라」 등(等) 운운(云云).
묘락(妙樂)이 가로되 「제삼(第三)은 가장 심(甚)하니라. 후후(後後)의 사람이 매우 식별(識別)하기 어려운 고(故)로」 등(等) 운운(云云). 동춘(東春)이 가로되 「제삼(第三)에 혹유아련야(或有阿練若)부터 이하(以下)의 삼게(三偈)는 즉(卽) 이는 출가(出家)의 곳에 일체(一切)의 악인(惡人)을 섭(攝)함」 등(等) 운운(云云).
동춘(東春)에 「즉(卽) 이는 출가(出家)의 곳에 일체(一切)의 악인(惡人)을 섭(攝)함」 등(等)이란, 당세(當世) 일본국(日本國)에는 어느 곳이뇨. 에이산(叡山)인가 온조(園城)인가 도사(東寺)인가 난토(南都)인가 겐닌사(建仁寺)인가 주후쿠사(壽福寺)인가 겐초사(建長寺)인가. 단단히 구명(究明)할지어다. 엔랴쿠사(延曆寺)의 출가(出家)의 머리 위에 갑주(甲冑)를 착용(着用)함을 가리키는가. 온죠사(園城寺)의 오분법신(五分法身)의 몸에 계장(鎧杖)을 착용(着用)함인가. 그들은 경문(經文)에 납의재공한(納衣在空閑)이라 가리킴과는 다르고, 위세소공경(爲世所恭敬), 여육통나한(如六通羅漢)이라 남이 생각하지 않으며 또 전난식고(轉難識故)라 말하겠느뇨.
가라쿠(華洛)에는 쇼이치(聖一) 등(等), 가마쿠라(鎌倉)에는 료칸(良觀) 등(等)과 흡사하니라. 사람을 미워하지 말라. 눈이 있으면 경문(經文)에 자신(自身)을 맞추어 보라. 지관(止觀)의 제일(第一)에 가로되 「지관(止觀)의 명정(明靜)함은 전대(前代)에는 아직 듣지 못했음」 등(等) 운운(云云).
홍(弘)의 일(一)에 가로되 「한(漢)의 명제(明帝)가 밤에 꿈꾼 이래(以來) 진조(陳朝)에 이르기까지 선문(禪門)에 들어 가서 의발전수(衣鉢傳授)하는 자(者)」등(等) 운운(云云). 보주(補注)에 가로되 「의발전수(衣鉢傳授)란 달마(達磨)를 가리킴」 등(等) 운운(云云). 지(止)의 오(五)에 가로되 「또 일종(一種)의 선인(禪人) 내지(乃至) 맹파(盲跛)의 사도(師徒) 둘이 함께 타락(墮落)함」 등(等) 운운(云云). 지(止)의 칠(七)에 가로되 「구(九)의 의(意)는 세간(世間)의 문자(文字)의 법사(法師)와 같지 않고 사상(事相)의 선사(禪師)와 같지 않으며, 일종(一種)의 선사(禪師)는 오직 관심(觀心)의 일의(一意)만 있어서, 혹은 얕고 혹은 거짓이며, 여(餘)의 구(九)는 전(全)혀 없더라. 허언(虛言)이 아니니 후현(後賢)이여, 눈이 있는 자(者)는 응당(應當) 증지(證知)할지어다.」
홍(弘)의 칠(七)에 가로되 「문자법사(文字法師)란 안에 관해(觀解)가 없고 오직 법상(法相)에 치우치고, 사상(事相)의 선사(禪師)란 경지(境智)를 한각(閑却)하고 비격(鼻膈)에만 마음을 두니 내지(乃至) 근본유루정(根本有漏定) 등(等)이니라. 일사유유관심일의(一師唯有觀心一意) 등(等)이란 이는 잠시 용여(容與)해서 말한 것이고 척탈(斥奪)해 말하면 즉(卽) 관해(觀解) 모두 다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