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 不老洞 古墳群
李熙敦(대구대박물관)
Ⅰ. 古墳의 槪念
우리나라의 무덤은 신석기시대부터 나타나지만 청동기시대 이후로 무덤형식이 다양해지고 역사시대에는 각지에 고분군이 남아 있다. 그러나 통일신라시대 이후로는 부장품(副葬品)이 빈약해지거나 아예 없어져서 고고학에서의 고분연구성과는 삼국시대의 그것보다는 많이 줄고 있다.
무덤은 흔히 유택(幽宅)이라고도 불리는데 이것은 사자가 저승에서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또 왕의 무덤인 능을 능침(陵寢)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사후에 편히 쉬는 곳을 뜻하는 말이다. 이와 같이 무덤이 사자가 사는 집 또는 쉬는 곳이라고 관념은 선사시대부터 이어져왔으므로 그 집안 무덤을 지키고 가꾸는 조형과 조경의 역사도 그만큼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 나라의 무덤이 일찍부터 풍수도참사상과 결부되어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산 사람이 사는 터를 양기(陽基)라 하고 죽은 사람의 집인 무덤을 음택(陰宅)이라 하여, 좋은 양기에서 살면 부귀 다자손하여 행복하고 좋은 음기에 조상을 모시면 조상의 음덕으로 자손이 발복(發福)한다는 것이 풍수지리의 기본 사고이다. 조상의 시신은 비록 유명을 달리하였을지라도 자손과 연결된 기(氣)는 그대로 유지되어 살아 있는 자손에게 길흉화복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왕실이나 민간이나 풍수지리에 온통 휩쓸려 들어갔다. 그것은 자손의 발복(發福)이라는 이기적 동기가 조상에게 효도한다는 추효(追孝)로 위장될 수 있기 때문에 더욱 성행되어갔다. 비록 불길한 천명을 타고났을지라도 조상의 시신을 길지(吉地)에 모심으로써 전화위복할 것을 바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의미에서 천명을 거역하는 일이므로 함부로 할 수 없고 전문적 술사인 지관(地官)의 힘을 빌리게 된다.
1. 古墳의 意義와 名稱
古墳이란 ‘역사적으로 오래된 무덤’, ‘가까운 과거나 현대의 무덤 중에서 역사적 고고학적 자료가 될 수 있는 분묘’, ‘흙을 쌓아 올린 묘(墓)’, ‘옛날 사람의 시체를 매장한 시설물’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본에서는 고총● 문화유산해설사 양성 과정 2002. 3 - 4 (영남대학교박물관)●
분묘(高冢墳墓)만을 고분이라 부르며 묘와 분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다. 고대 중국에서는 지하에 시체를 매장하고 지상에 아무런 표식을 만들지 않는 무덤을 ‘묘(墓)’라 하고, 반대로 지상에 봉토 등 표지물을 설치하는 것을 ‘분(墳)’이라 하였고 누가 묻혔는지 주인공을 알 수 없는 무덤을 ‘총(塚)’이라 하였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묘와 분을 엄격히 구분하지 않고 사용하였다. 근래에 와서는 ‘분묘(墳墓)’라는 합성어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학계에서 주로 사용하는 고분이란 용어는 일제시대의 용어를 답습한 것이다. 한편 왕과 왕비의 무덤은 ‘릉(陵)’, ‘산(山)’, ‘구(丘)’라 부르며, 왕자․공주의 무덤은 ‘원(園)’이라고도 한다.
2. 古墳의 構成要素
사람의 시체를 매장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설물인 무덤은 어떤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을까?
첫째, ‘묘지(墓地)’이다. 시체를 매장할 장소로서 어떤 위치에 어떤 지형의 장소를 선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의 매장 관념상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이다. 구석기시대에는 동굴 속을 택하였으며, 청동기 시대의 지석묘는 하천변의 평원을, 가야시대에는 산의 능선상을 골라 무덤을 축조하였다.
둘째, 시체를 안치하고 보호할 수 있는 공간시설로, 즉 내부시설이라고 하는데, 지면을 간단히 판 구덩이에서 시작하여 토광(土壙)과 곽실(槨室)로까지 발전한다.
셋째, 시체와 함께 매장하는 부장(副葬)유물이다. 일반적으로 부장유물은 인지 발달수준에 따라 변하였는데 인간의 내세관에서 비롯되었다.
넷째, 내부시설을 보호하는 시설인 분구(墳丘)이다. 후세로 내려오면서 분구의 기능은 내부시설의 보호라는 원초적 기능이외에 묘의 표식, 기념물로서 사회적 신분의 표현수단으로도 중요하게 취급되어졌다.
3. 墓地 選定
사람이 인위적으로 시체를 묻은 흔적은 약 7, 8만년 전 중기구석기시대부터 나타나고 있으며, 후기구석기가 되면 생명의 부활을 바라는 뜻에서 붉은 산화철을 시체 위에 뿌리기도 하였다. 이 당시 시체는 거주지인 동굴내를 묘지(墓地)로 선정하였다. 이 같은 동굴매장은 시체에 대한 공포나 신앙에서가 아니라 자기 집단의 성원을 죽은 후에도 보살펴 주려는 감정에서 시작하였다. 신석기시대의 분묘는 주로 남해안 패총(貝塚)에서 발견되고 있는데 하천변의 일반적인 주거지 부근에서 발견되고 있다. 청동기시대의 지석묘는 하천변 대지성 구릉이나 평지 또는 산록에 축조하였다. 청동기시대 이후 초기철기시대에는 산기슭에서 평야로 흘러내린 대지상을 이용하였고, 삼국시대 초기에 오면 대지성 구릉지를 지나 평지로 내려오고 있다. 중기로 오면 다시 구릉이나 산의 사면을 묘지로 선택하고 있다. 가야지역은 산 구릉의 높은 곳을 선호하고 있는데 이는 낙동강 수계와 연계하여 정치적, 경제적 상황과 맞물려 있다.
4. 葬法
장법은 시체를 처리하는 여러 방법으로 일차장(一次葬)과 이차장(二次葬)으로 분류되며 일차장은 시체를 육신 그대로 매장하는 방법으로 토장(土葬), 수장(水葬)이 있고, 이차장은 시체를 한번에 처리하지 않고 육체와 해골을 분리시키는 단계를 거쳐 해골만을 최종적으로 매장하는 방법으로 화장(火葬), 풍장(風葬), 세골장(洗骨葬), 초분(草墳), 빈(殯) 등이 있다.
5. 埋葬姿勢
시체를 매장하는 형상에 따라 앙와신전장(仰臥伸展葬), 측와장(側臥葬), 굴신장(屈身葬), 부신장(俯身葬), 좌장(坐葬)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6. 葬具
장구는 시체를 매장하는데 필요한 도구, 즉 수의(壽衣), 관(棺), 곽(槨), 실(室) 등을 말한다. 수의는 면 혹은 견직물로 되어있어 후세에 잘 남아 있지 않다. 관은 목관(木棺), 석관(石棺), 옹관(甕棺), 호관(壺棺), 도관(陶棺)으로 나누어지며, 곽 역시 목곽(木槨), 석곽(石槨), 전곽(磚槨), 점토곽(粘土槨), 요곽(窯槨)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Ⅱ. 古墳의 種類
일반서민들의 무덤은 시대를 막론하고 토광묘를 기본으로 하는 간단한 것이지만, 왕족이나 귀족은 생전의 권력을 과시하고 그 영화를 내세에까지 연장시키기 위해서 크고 복잡한 무덤을 만들고 무덤 안에는 많은 부장품(副葬品)을 격납하였다. 그래서 이 상류계급의 무덤은 그 시대의 신앙․사상뿐 아니라 기술․미술․기타 물질문화의 최고수준을 보여주기 때문에 고고학에서는 귀중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으며, 또한 고분에서의 출토품은 제작연대가 모두 비슷하기 때문에 연대연구에는 다시없는 자료로 되어 있는 것이다. 또, 이러한 세력자 무덤의 경우에는 내세에서 주인에게 봉사하기 위한 부하나 하인이 순장(旬葬)이나 또는 딸려 묻는(副葬)일도 많았다. 토광묘는 단순한 구덩이에 불과하지만 구덩이 안에 기둥을 세우고 나무로 네 벽과 천장을 짜면 목곽분(木槨墓)이 된다. 곽(槨)이란 원래 바깥 널(外棺)이라는 뜻이며 곽이 커져서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정도이고 출입구가 생기면 방(室)이라고 부르게 된다. 한편, 구덩이의 네 벽을 4매의 석재로 짜 돌리면 석관묘(石棺墓)가 된다. 그리고 시체를 위에서 넣는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와 석곽분(石槨墳)의 세 벽만을 쌓고 시체나 널을 옆으로 넣은 다음 마지막 벽을 쌓는 식을 횡구식석곽묘(橫口式石槨墓) 라고 부른다. 그리고 돌곽의 너비와 높이가 모두 커져서 사람이 서서 드나들 수 있고 입구와 널길(挻道,羡道)이 딸리면 횡혈식석실묘(橫穴式石槨墓)이라고 부른다. 한편, 널이 들어가는 널방(玄室 또는 主室)에는 부장품(副葬品)을 넣기 위해 딸린 방(副室) 또는 딸린 곽(副槨)이 설치되는 경우가 있고, 중국에서는 피장자의 약력을 돌에 새긴 지석(誌石)을 넣는 것이 보통이다.
무덤은 그 형태나 재료에 따라 여러 가지 종류로 갈라지는데 이것을 유형별로 분류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① 봉분의 형태에 따른 분류 : 방형분(方形墳)․원형분․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 ② 봉분의 재료에 따른 분류 : 토장묘(土葬墓)․지석묘(支石墓)․적석총(積石塚)․석총․토총․전축분(磚築墳), ③ 유구(遺構)의 재료에 따른 분류 : 석관묘․석곽묘(石槨墓)․옹관묘․도관묘(陶棺墓) 등과 같이 세 가지 유형에 15가지 정도의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
1. 적석총(積石塚)
주검을 넣은 석곽 위를 돌만으로 쌓아 올린 무덤이다. 청동기시대의 것으로는 춘천 천전리에서 자연석으로 짠 석곽분 몇 개가 방형․원형․타원형의 적석으로 덮여 있는 돌무지무덤(積石塚)이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적석총(積石塚)에서 석관이 차츰 지상으로 솟아올라 이른바 심촌형(沈村形) 고인돌로 되고 거기서 다시 북방식․남방식으로 독립된다. 한편, 1978년 압록강 북안 집안 오도령(集安五道岭)에서 발견된 서기전 3세기경의 적석총은 막돌로 쌓은 방형 평면이면서 지면이 얕은 앞쪽은 3단으로 단을 이루고 있어 이러한 적석총은 그 뒤 고구려 적석총의 선구가 된 것이 분명하다.
2. 석관묘(石棺墓)
각 벽을 한 장의 판석으로 짠것이며 석상분(石箱墳)이라고도 불린다.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 청동기시대에 유행한 묘제이지만, 요동지방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연대는 대략 서기전 9, 8세기에서 4, 3세기로 추정되고 있다. 석관은 처음에 장방형의 상자형이다가 뒤에는 2m 정도의 길이로 커지면서 머리 쪽의 너비가 발 쪽보다 약간 크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남방식 고인돌(대구 대봉동)의 지하 매장시설로도 쓰이고 있다. 석관묘(石棺墓)는 원삼국시대를 거쳐 삼국시대 초기까지 계속되며, 김해 예안리에서는 처음에는 석관식 이었다가 나중에는 석관과 막돌을 섞어 짠 석곽무덤에로의 과도기적인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3. 석곽묘(石槨墓)
석관의 벽을 형성하는 판석이 한 장이 아니고 여러 장으로 이어졌거나 판석과 막돌이 섞여 쓰였거나 또는 막돌만이 쓰여졌을 때는 석곽무덤이 된다. 이러한 막돌 석곽무덤은 요령성․길림성의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 주민 사이에 널리 퍼지고 있었으며, 석관묘(石棺墓)와 함께 예맥족에 의하여 우리나라로 들어온 것이다. 대전 괴정동, 아산 남성리의 청동기무덤들은 모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청동기시대의 석곽무덤이며, 대구 대봉동의 남방식 고인돌에서도 이러한 석곽과 석관이 함께 발견되었으며, 이 청동기시대 석곽무덤이 원삼국시대를 거쳐 삼국시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4. 고인돌(支石墓)
고인돌은 우리 나라의 가장 독특하고 전통적인 무덤형식이다. 그 구조는 지상에 커다란 돌을 괴어 올려놓은 것인데 분구를 따로 만들지 않으므로 우리의 무덤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고인돌의 분포는 함경북도의 일부지역과 울릉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과 연근해의 섬에 이르기까지 고루 퍼져 있다. 지석묘는 탁자형(卓子形)․기반형(碁盤形)․변형의 세 가지 형태가 있다. 탁자형은 지상에 장방형의 네 벽을 세우고 그 위에 큰돌을 얹어놓은 형식으로 매장주체시설이 지상 석실에 해당되는데, 규모가 큰 것은 석실을 여러 개의 작은 방으로 나누어 다수의 사체를 합장한 것도 있다. 기반형은 바둑판모양으로 몇 개의 돌을 괴고 그 위에 윗돌을 올려놓은 형식으로 매장주체시설은 지하에 마련된다. 북방식 고인돌(탁자형)은 북은 요동반도, 남은 전라북도에서까지 발견되고 있으나 중심지는 대동강과 북한강 사이 이며, 남방식 고인돌(기반형)은 몇 개의 작은 받침돌(支石), 또는 그것 없이 큰 바위를 땅에 놓고 지하에는 따로 매장시설을 둔 것이며, 매장시설에는 석관․석곽․토광 등 여러 종류가 있고 대구 대봉동처럼 다곽식적석총(多槨式積石冢)을 지하구조로 하고 있는 것도 있다. 개석식 고인돌(변형)은 큰 판석을 받침돌 없이 놓고 그것이 땅 밑에 만들어진 돌곽의 뚜껑을 겸하고 있는 것과, 돌곽이 독립된 것의 두 종류가 있다.
5. 독무덤(甕棺墓)
전세계에서 널리 쓰이고 있는 매장방법으로, 특히 어린이나 나쁜 병으로 죽은 시체, 또는 신분이 낮은 사람의 딸려 묻음으로 쓰이는 경향이 있다. 중국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옹관 군집묘(群集墓)가 알려지고 있으나 역사시대로 들어오면서 소멸된 것으로 보이며, 『송서』(宋書)에는 ‘동호(東胡)의 풍습’이라고 적혀 있다. 요령성 요양지방(遼陽地方)에서 발견된 어린이 독무덤터는 서기전 3, 2세기경의 예맥족의 것이라고 생각되며, 우리나라 강서 태성리, 신천 명사리, 공주 남산리, 광산 신창리, 김해패총․동래패총의 초기철기시대의 옹관묘들은 모두 토기제작의 발달과 연관되는 민무늬토기 단계의 예맥족의 새 묘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옹관묘들은 두 개의 항아리를 맞 덮은 것으로, 경우에 따라서는 두 항아리 사이에 바닥 없는 항아리를 끼워서 길이를 연장하기도 한다.
6. 목곽분(木槨墳)
널무덤(土壙墓)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원래 곽이 있었기 때문에 목곽분(木槨墳), 또는 목곽묘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은나라 이후로 유행하였으며, 이 중국계통의 목곽분(木槨墳)이 고조선 말기에 우리나라로 들어와 위만조선의 붕괴, 낙랑군의 설치를 계기로 남한에도 퍼진 것이라고 생각된다. 화순 대곡리, 영천 어은리, 월성 입실리․구정리 등에서 발견된 청동기 출토 무덤들은 모두 이러한 목곽분(木槨墳)이었다고 생각된다. 북한에서는 강서 태성리, 봉산 송산리, 은율 운성리 등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또, 이러한 나무곽은 두 개 나란히 만들어 부부묘로 한 것도 있다. 송산리의 목곽분(木槨墳)은 지름8~9m의 통나무로 바닥과 벽을 만들고 천장에는 판자를 덮고 있다. 목곽분(木槨墳)은 다음 원삼국시대에도 호족의 무덤으로 계속 축조되었으며, 김해 양동리 무덤에서는 1세기경의 한경(漢鏡)․철겸․철모․청동칼자루 끝 장식 등이 나왔고, 경주 조양동의 목곽분(木槨墳)에서도 한경․청동칼자루․철검․말종방울․와질토기 등이 발견되었다. 특히, 여기 목곽분(木槨墳)에서는 나무기둥구멍들이 남아 있었고, 딸린 나무곽을 가진 예도 있어 경주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발생의 배경을 알 수 있다.
Ⅲ. 大邱의 古墳群
대구사회는 국가구조로 발전하기 전 단계로서 소국의 연합단계(連合段階)가 있었고, 이것이 발전해서 신라의 국가조직에 편입된다. 대구의 고분은 국가사회로 들어서는 시기에 이곳 지역의 거사(渠師) 및 이에 준하는 유력자가 조성하게 되는 분묘이다. 대구시역에는 고분군이 여러 곳에 분포한다. 대체로 금호강으로 유입되는 지류의 유역으로, 충적평야를 배경으로 한 인접 구릉에 조성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지류의 小河川(소하천) 유역이 하나의 거사사회(渠師社會)의 단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대구시역에서 발굴된 고분을 보면 지류가 지역단위가 되듯이 부장품(副葬品)의 내용에 있어서도 지류의 단위와 같이 조금씩 달리함을 볼 수 있다. 이는 대구시역이 신라국에 편입되기까지는 개성을 갖는 몇몇 비슷한 수준의 세력집단이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기는 4세기 후반에는 6세기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구시역에서 발굴된 고분을 보면 중요한 것으로 내당동(內唐洞)고분군․비산동(飛山洞)고분군, 대명동(大明洞)고분군, 불로동(不老洞)고분군, 구암동(鳩岩洞)고분군 등이 있다.
〈1〉 대구의 고분유적 분포
번호 유 적 명 소 재 지 비 고
1 巴 洞 고분군 수성구 파동 수급 조사
2 斗山洞 고분군 수성구 두산동 소형분, 파괴심함
3 大明洞 고분군 남두 대명동 1938년 조선고적조사보고
4 飛山洞?內唐洞 고분군 서구 비산동?내당동 1923년 조선고적조사보고
5 伏賢洞 고분군 북구 복현동 1975 발굴
6 月城洞 고분 달서구 상인동 대부분 파괴
7 上仁洞 고분군 달서구 상인동 대부분 파괴
9 孤 山 고분군 수성구 성동 토성?와요지
11 旭水洞 고분군 수성구 욱수동 영남대학교박물관 조사
12 佳川洞 고분군 수성구 가천동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조사
13 時至洞 고분군 수성구 시지동 소형석곽, 영남대학교박물관 조사
14 槐田洞 고분군(Ⅰ) 동구 괴전동 2기, 개석노출
15 槐田洞 고분군(Ⅱ) 동구 괴전동 수급 조사
16 龍水洞 고분군 동구 용수동 50여기
17 屯山洞 고분군 동구 둔산동 20여기, 횡구식, 국립대구박물관 조사
18 道 洞 고분군 동구 도동 산성과 세트를 이룸
19 鳳舞洞 고분군 동구 봉무동 소형분
20 不老洞 고분군 동구 불로동 해안고분군, 경북대학교박물관 조사
22 西邊洞 고분군 북구 서변동 영남매장문화재연구원 조사
23 鳩岩洞 고분군 북구 구암동 산성과 세트, 영남대학교박물관 조사
24 琴湖洞 고분군 북구 금호동 발굴조사
Ⅳ. 不老洞古墳群 槪要
대구광역시 동구 불로동에 위치하는 삼국시대 고분군으로 사적 제262호로 지정되어있다. 고분군은 불로동과 입석동의 구릉 서남사면에 분포하고 있는데, 8․15광복 이전에는 행정구역상 경상북도 달성군 해안면 불로동과 입석동에 속하여 있었다. 이 지역의 고분군은 서로 30m 거리를 두고 위치하는데, 1938년 11월 조사때 입석동 쪽 고분 2기를 조사하여 학계에는 ‘해안면고분’으로 보고되었다.
그 뒤 1963년 12월과 1964년 1월 두 차례에 걸쳐 경북대학교 박물관에서 불로동 고분 2기를 조사한 뒤 다시 입석동고분을 포함하여 ‘대구불로동고분군’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조사하게 된 연유는 발굴작업 전, 약 1개월 전에 이 지역의 고분이 마구 도굴되고 있다는 학생으로부터의 신고를 받은 데 있었다. 큰 고분은 거의 대부분이 봉분 측면에 도굴에 의해 내부구조가 노출되어있는 지경이었다. 이러한 실정을 당시의 경상북도 문화과에 보고함과 동시에 이 기회에 손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을 조사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막상 조사대상의 고분을 선정하려니 경비부족 등으로 한정된 계획 하에 마쳐야 한다는 조건이 붙게 되어 결국 작업량이 작은 것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파괴고분(破壞古墳) 가운데서도 봉토가 없는 것을 2기(基) 택하였다. 그중 1기는 수년전 개간으로 말미암아 일부 파괴된 것으로서 봉토의 전부와 석실 동편 쪽이 일부 파괴되어 있었다. 위치는 1938년도에 조사된 바 있는 해안면(解顔面) 제1호분에서 서쪽으로 30m 지점에 위치한다. 다른 1기는 제1호분에서 서북쪽 30m 지점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도굴에 의해 역시 일부 파손된 것이다. 이후부터 앞의 고분을 갑(甲)호분, 뒤의 고분을 을(乙)호분이라 명명하였다.
당시 정리작업기간이 작업활동에 아주 불리한 동절기라는 것과 파괴고분이라는 불완전한 대상 이였기에 정상적인 발굴과정(發掘過程)에 수반하는 구조와 유물배열 관계 등의 실측을 생략하고 다만 발굴된 유물만을 위주로 보고하였다. 조사일정은 1963년 12월 27일과 28일 그리고 1964년 1월 5일부터 11일까지의 9일간이었다. 갑호분은 12월 27일과 28일의 양일에 마쳤고, 을호분은 7일간 진행되었다.
이들 조사된 고분에 대하여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解顔面 1號墳
봉분의 크기는 남북 28m, 동서 62m, 높이 7m인데 서쪽에 다른 봉분과 접해있어 표주박 모양을 하고 있다. 석실의 크기는 길이 8.05m, 폭 1.2m, 높이 2.2m 이며, 석실의 중앙에 폭 40cm의 간벽(間壁)을 만들어 2실로 이루어져 있다. 벽면의 축조에는 길이 44cm, 폭 12cm 내외의 산석(山石)을 이용하였는데 석재의 짧은 면이 벽면이 되도록 쌓았다. 석실은 전실의 경우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렸으나, 후실은 위로 갈수록 내경(內傾)하고 있다. 천장에는 5매의 큰 개석을 덮었다. 유물은 후실에서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토기 중에는 사행상(蛇行狀)문양의 고배도 있다. 그리고 금동제 운주(雲珠)편도 출토되었다.
2. 解顔面 2號墳
1호분에서 동남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봉분의 크기는 직경 21m, 높이 4m 정도인데, 산석의 쇄편(碎片)으로 쌓아 올려서 적석분(積石墳)의 형태를 띠고 있다. 석실의 구조는 1호분과 마찬가지로 전후실의 형태이며, 크기는 길이 5.5m, 폭 1.2m, 높이 1.9m 이다. 천장에는 6매의 개석(蓋石)을 덮었다. 4벽을 폭 34cm, 두께 8cm 가량의 산석을 이용하여 장방형으로 쌓았으며 중간에는 폭 40cm의 간벽(間壁)을 쌓았다. 전실은 붕괴되었으며, 후실에서만 유물이 출토되었다.
3. 不老洞 甲號墳
해안면(解顔面) 1호분에서 서쪽 30m 지점에 위치한다. 봉토는 완전히 잃어버려 평탄하게 되어 있다. 외형상의 규모는 전혀 찾아 볼 수가 없고 잔존하는 개석(蓋石)은 지표 아래 30㎝ 정도에 묻혀 있었다.
개석은 현지 암반에서 채취할 수 있는 점판암(粘板岩)을 사용했으나 편평한 판석이 아니고 모두 길쭉한 부정형의 괴석 따위를 횡가(橫架)시켜 천장으로 삼고 있었다. 그리고 석실 측벽은 사면이 모두 조잡한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쌓았으며 실내 또한 반듯한 규격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현 잔존 부분을 통해서 석실 내의 규격을 추측해 보면 높이가 1m 내외, 길이가 4.5m, 폭이 70㎝ 내외가 되었다. 바닥은 원 토광(土壙)을 그대로 아무런 시설 없이 사용하였다. 장축의 방향은 정 동서 선상에 놓여있다. 부정형의 천장석, 측벽 석재, 거기에다 조잡한 축조로 말미암아 실내는 토사가 유입 충만하여 천장 가까이 까지 메우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완전한 구조파악은 할 수 없으나 잔존한 유구를 통해 추측한다면 장방형의 토광을 파서 사면에 할석을 쌓아올려 그 위에다 개석을 횡가한 소위 수혈식계(竪穴式系)의 석실고분이다. 석실 동편 바닥에 있었던 유물은 이미 개간당시 반출되어 버렸고, 현존유물에 있어서도 개석 벽석의 낙하로 모두 파편화 되어 버렸다. 거기에다 교란 당하여 개별적 정 위치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대략적인 배열을 보면 석실 중앙부의 양 측벽 아래에 고배(高杯)류가 산재하고 석실 서편 일대에 고배류와 더불어 호류(壺類)들이 집합되어 있었다. 중앙부 한가운데와 동편은 교란 또는 반출한 뒤라 원 상태는 알 수 없다. 당시 지역주민들의 이야기로서는 동편 일대에서도 많은 토기류가 출토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석실의 전체적인 부장상태는 동서 양단(兩端)에 토기류를 대량 집중시켜 부장하고 장 측벽에 접해서 고배류를 길게 놓아 둔 것으로 본다. 피장자의 위치는 중앙인 듯 하나 방향은 전혀 알 길이 없다.
4. 不老洞 乙號墳
이 고분은 해안면 1호분에서 서북방향으로 30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외형은 경작에 의해 사방에서 깎여 방형의 나지막한 봉분만 남아있었다. 잔존 봉토 내부는 잡석 등이 전혀 없는 양질의 적갈색 점토로 석실을 덮고 있다.
석실 개석은 현 봉토 정상에서 2.9m 아래에 거의 수평으로 위치하고 있었다. 개석은 5매로 구성되어 있었고, 석재는 갑(甲)호분처럼 가까이 에서 구할 수 있는 점판암(粘板岩)이었다. 형태는 부정형이며, 비교적 큰 판석을 사용했다.
석실의 사면 측벽은 조잡한 방형 괴석류를 사용했다. 석실 바닥면의 장축은 동북으로 향하고, 그 길이는 4.8m, 폭은 중앙이 95㎝이고 양단이 각각 85㎝로서 좁아져 있다. 바닥은 아무런 시설을 가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
피장자는 직접 원토광(原土壙)의 바닥을 이용해서 안치한 것으로 본다. 석실구조는 갑호분과 마찬가지로 수혈식 장방형 석실고분이다.
유물 출토상태는 석실 동북쪽에 토기류(土器類)와 마구류(馬具類) 철물이 대량 매장되어 있고, 중앙부 가까이는 소형토기, 특히 고배류(高杯類)가 있었다. 그리고 서남쪽에 편재해서 인골의 흔적이 보였다.
이상, 해안면 1․2호분과 불로동 갑․을호분의 개별적인 고분의 구조와 양식, 출토유물을 살펴보았다. 이들을 종합하여 고찰해 보면 다음과 같다.
확인 봉토의 지름은 21~28m 내외이고 높이는 4~7m 정도가 보통이나, 해안면 1호분의 경우 서쪽에 같은 규모의 또 다른 봉토가 접하여 있어서 외형이 마치 표형분(瓢形墳)처럼 보이는데 조사는 동쪽 봉토에서만 행하여져서 돌방이 확인되었다.
봉토는 깬 자갈로 형성하고 표면만 흙을 덮어서 마치 돌무지무덤(積石塚)과 같은 형상을 하였다. 이 1호분은 동서 62m, 남북 28m, 높이 7m의 크기이고 돌방은 장축이 정동서(正東西) 방향을 취하고 있다. 1호․2호, 갑(甲)․을(乙)호 등 4기 모두가 같다. 그리고 1․2호의 경우는 돌방이 봉토 중심의 지면에 올라와 있어 대구지방고분과 다른 양상을 나타낸다.
또 다른 특징으로는 평면이 세장(細長)하고 천장이 높은 것을 지적할 수 있는데, 특히 1호의 경우는 너비에 대한 길이, 또는 높이의 비가 대단히 커서 돌방의 형태로서는 특이한 모습을 나타낸다. 1호와 2호는 돌방의 중간에 계벽(界壁)을 쌓아 앞방(前室)과 뒷방(後室)을 구분하였다. 벽체는 얄팍한 할석으로 길이모쌓기를 하였는데, 마치 벽돌을 쌓아올린 듯 벽면이 정연하다. 바닥은 생토 위에 모래를 깔고 그 위에 바로 시체를 올려놓은 듯하며 철제꺾쇠가 30여개 발견된 것을 보면 이곳에서는 다른 목재의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뚜껑돌(蓋石)로는 판상석(板狀石)을 가로 덮었는데, 바깥면에 점토를 두껍게 바르고 그 위에 자갈을 덮었다. 계벽이 설치된 1․2호분에서는 앞방에 시체를 안치하고 뒷방에는 부장품만을 격납(隔納)하였다.
2호분의 부장품으로는 서쪽 단벽 가까이 에서 토기와 철도끼(鐵斧)가 나왔고 중앙부에 철제꺾쇠가 흩어져 있었다. 딸린 방(副室)에는 전면에 유물이 배치되었는데, 대형항아리 6점을 중앙에 두 줄로 배열하고 그 사이사이에 소형 토기들을 겹쳐놓았다. 을호(乙號)에서는 말띠드리개(杏葉) 3점과 말재갈 등 말갖춤(馬具)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도굴을 면한 1호의 뒷방에서 철제품 또는 말갖춤이 발견되지 않은 것을 보면 토기 외의 이러한 유물은 시체와 함께 앞방에 배치한 듯하다.
유물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흑색의 뾰족밑단지(尖底壺)인데 보통의 둥근밑(圓低)중심에 뾰족한 다리를 하나 붙인 형태로서 몸체에도 두 개의 뾰족한 귀가 붙어 있다. 이러한 토기는 2호와 갑․을호에서 각각 1점씩 출토되었으며, 그 크기는 아가리지름(口徑) 13.6㎝, 높이 13.3㎝ 정도이다. 그 밖의 토기로는 굽다리접시(高杯)․긴목단지(長頸壺)․둥근밑단지(圓底壺)․그릇받침(器臺)․뚜껑접시(蓋杯) 등이 있는데 모두 신라토기 형식이다.
말띠드리개는 심엽형(心葉形)으로 철심금도금(鐵心金鍍金)이며 십자(十字)모양을 부착시켜다. 꺾쇠는 두가지의 형태가 보이는데, 하나는 통상적인 꺾쇠로 冖형이고 또 하나는 ◇형으로 목관용으로는 적당하지 않아 별도의 용도를 가진 철물인지 모르겠다.
대체로 불로동고분군과 같이 세장한 돌방을 가지고 있는 고분은 구덩식돌덧널무덤(豎穴式石槨墓)으로 판단되어왔으나 1․2호분을 자세히 관찰하면 구덩식이라기보다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墓)으로 판단할 수 있는 몇 가지 자료가 발견된다. 즉, 돌방 깊이가 2m 정도로 깊고, 계벽이 받침목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종합적으로 볼 때 불로동고분군은 위치가 구릉이라는 점, 봉토 내부가 돌무지무덤과 비슷하게 할석으로 축조한 점, 그리고 돌방이 지나치게 세장한 점 등은 구암동돌방무덤과 구체적으로 유사하고 전체적인 분위기는 내당동고분군과 같은 계통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점들은 낙동강 중류지역의 일반적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그러나 불로동의 토기 등 유물은 형태와 질이 오로지 경주지방과 통하고 있어서 색다르다.
이 고분군내의 조영순서를 살펴보면 갑․을호와 1․2호간에 차이가 있는 듯하다. 즉, 구조상에서 1․2호가 갑․을호 보다 축조상태가 세련되고 계벽을 설치한 점, 1․2호 출토토기의 기형(器形)과 문양에서 발전적인 면이 나타나 있는 점 등으로 보아 갑․을호가 1․2호보다 앞서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전체고분군의 시기는 5, 6세기에 걸치는 것으로 추정된다.
參 考 文 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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