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과 홍랑(洪娘) 사랑 이야기.
동서고금(東西古今)을 통하여 남녀 사랑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아름답고 슬프다.
그래서 가끔은 기적을 낳기도 하지만 또 불후의 명작을 남기기도 한다.
사랑의 힘이란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렵지만 분명 위대한 힘은 있는 것 같다.
요즘처럼 남녀 평등 개념이 없었던 철저한 신분제도 시대 사랑이야기는 더욱더 애틋하다.
오래전에 ebs TV에서 역사드라마로도 방영되었던
조선시대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1539~1583)과 홍랑(洪娘)의 사랑이야기도 그중 한 예다.
신분제도나 나이 사회 편견 심지어 죽음까지도 갈라놓지 못했던 그들의 사랑이야기.
함경도 홍원에서 태어난 홍랑(洪娘)이란 기생이 있었다.
어려서부터 미모와 시재詩才가 뛰어나 남다른 이목을 끌었다.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와 살았는데 어머니가 병환에 눕자
약을 구하러 꼬박 사흘을 걸어 80리 떨어진 곳의 명의를 찾아 나선 효녀였다.
행색이 초라한 12세 소녀의 효성에 감탄한 의원은 자신의 나귀에 홍랑을 태우고
함께 그의 집에 도착했으나 홍랑의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홍랑은 슬픔과 절망 속에 상(喪)을 치르고 석 달간을 어머니 무덤에서 시묘를 한다.
그런 홍랑의 지극한 효심이 소문이 퍼져 의원의 귀에 들어가자
이에 감격한 의원은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수양딸로 삼고
시문(詩文)과 가무(歌舞)는 물론이고 예의범절을 가르쳐 곱게 키운다.
(후에 황진이 이매창과 함께 조선의 3대 여류시인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음)
홍랑은 절세가인이 되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늘 어머니의 임종을 보지 못한 한을 떨칠 수가 없었다.
몇 날을 고심 끝에 홍랑은 중대 결심을 한다.
어느 날 홍랑은 자기를 금이야 옥이야 키워주신 의원님께 작별의 문안 인사를 드린다.
의원은 애석했다.
근자에 주변에서 좋은 혼사 이야기가 오가던 터라 평탄한 앞날이 보장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네의 효심이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살다가 어려운 일이 있을 시 언제든지 찾아오너라."
의원은 약간의 생활비를 챙겨주며 아쉬운 이별을 한다.
자기를 키워주신 의원님께 배신을 하는 심정이라 홍랑은 마음이 몹시 아팠다.
몇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홍랑은 잡초에 묻힌 어머니의 무덤을 보며 대성통곡을 한다.
이렇게 해서 홍랑은 어머니의 묘 옆에 운 막을 짓고 시묘살이에 들어간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어머니께 시묘를 하던 홍랑은 몸이 지쳐간다.
의원과 작별할 때 받아온 금전도 다 떨어졌고 그렇다고 도움을 받을만한 가족도 없었다.
홍랑은 고심 끝에 생계의 방편으로 기적(妓籍)에 이름을 올리고 경성 관아 관기(官妓)가 된다.
이즈음 한양에서는 과거시험이 열렸는데 전라도 영암에서 올라온 젊은 청년
(후에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림) 고죽 최경창(孤竹崔慶昌 1539~1583)이 문과에 급제한다.
경복궁에 입성한 젊은 청년 "고죽 최경창"은 어느 날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1573년(선조 6) 가을에 부임을 하게 된다.
어느 날 부임 연회에 자연스럽게 참석한 경성 관기 홍랑은 고죽(孤竹)과 사랑에 눈을 뜨게 된다.
평소에 고죽의 명성을 알고 있는 터라 홍랑은 가슴이 뛰었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즈음 "고죽"은 바람이나 쉴 겸 뜰을 걷던 중
꽃나무 아래 앉아있는 홍랑을 보게 된다.
고죽은 홍랑의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가을 뜰에 두 송이 꽃이 피었으니/
한 송이는 땅에서 나온 줄 알겠는데/
또 한 송이는 어디에서 왔던고? "
홍랑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반쯤 숙이고 이렇게 화답한다
"길고 긴 언덕에는 버들도 많은데/
멀리 있는 조각배에서는 처용가를 부르네/
붉은 꽃 떨어지니 가을바람 일어/
날 저문 나룻가엔 흰 물결 일렁이네/ "
아버지를 못 보고 자란 홍랑은 글과 무예가 뛰어난 고죽의 준수한 외모에
부정(父情)까지 느껴 첫사랑의 불을 지피게 된다.
고죽도 홍랑의 거침없는 시심에 감탄을 한다.
이렇게 두 사람의 사랑은 시심(詩心)으로부터 싹이 트기 시작한다.
최경창은 전장에 나아가 오랑캐와 싸우는 변방 군막(軍幕)에까지 그녀를 동행시켰고
홍랑도 고죽 선생의 부름에는 단 한 번의 거절함도 없었다.
홍랑은 고죽의 부름에 거절하지 않은 이유는 양반으로서 그의 행동거지가 한치의 흔들림이
없었고 그의 인품이 너무나 존경스러웠기 때문이었다.
고죽 또한 홍랑의 기품 있는 몸가짐과 또 시심까지 겸비해 언제든 대화가 되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은 1년여 동안 농밀한 사랑을 불태울 즈음
홍랑으로 하여금 일생을 바친 "순애보"의 전주곡이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 봄 고죽(孤竹)은 임기를 마치고 한양으로 떠나게 되자
홍랑은 함관령(咸關嶺)까지 천리 길을 따라나서며 마지막 석별의 정을 나눈다.
하나 고죽은 국법인 "양계 금(兩界禁)을 어길 수는 없었다.
함관령에서 두 사람은 이별의 슬픔을 감내해야만 했다.
주변에는 산새들도 울어 외고 꽃 수술이 맺힌 산 버들도 그들의 아쉬움에 산들거린다.
홍랑은 격한 슬픔을 삼키면서 산 버들가지를 꺾어 고죽에게 건네며 이렇게 읊는다.
<홍랑의 시조. 원본>
"산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의 손에
주무시는 창밖에 심어두고 보옵소서
밤비에 새잎 나거든 나인가도 여기소서"
고죽은 홍랑의 시를 받아들고 몹씨 애석해 하며 자신도 유란(幽蘭)이란 시로 홍랑을 위로한다.
(相看脈脈贈幽蘭.상간맥맥증유난) 말없이 마주보며 유란을 주노라
(此去天涯幾日還.차거천애기일환) 이제 멀리 떠나면 어느날 다시 오려나.
(莫唱咸關舊時曲.막창함관구시곡) 함관령에 올라서서 옛 노래를 부르지마시게
(至今雲雨暗靑山.지금운우암청산) 지금도 비구름에 청산은 어둑허이.
이별의 아픔은 홍랑에겐 단장이 끊어지는 슬픔 이었다.
고죽의 속아림도 홍랑보다 덜하지 않았다.
홍랑이 지은 시조는 제목이 없었던 터라
후에 고죽(孤竹)은 이 시조를 번방곡(飜方曲)이란 한시로 번역하였다.
이처럼 두 사람은 그들의 짧은 만남과 긴 이별을 가슴져미는 詩로 나누었다.
<飜方曲>
(折楊柳寄與千里人.절양류기여천리인) 버들가지 가려 꺾어 천리 가시는 임에게 드리오니
(爲我試向庭前種.위아시향정전종) 나를 위해 뜰 앞에 심어 두고 보소서.
(須知一夜生新葉.수지일야생신엽) 행여 하룻밤 지나 새 잎 돋아 나거든
(憔悴愁眉是妾身.초췌수미시첩신) 초췌하고 수심어린 눈섭 첩의 몸이라 여기소서.
한양으로 돌아온 고죽은 이듬해 초부터 시름시름 병석에 앓아눕고 만다.
홍랑과 이별이 너무 가슴 아팠던 것일까?
알 수 없는 병에 걸려 자리에 누운 그는 겨울까지 일어나지 못하자,
이 소식이 머나먼 함경도 홍원에 있는 홍랑에게 전해지게 된다.
가슴 찢어진 이별 후에 오매불망 다시 만날 날을 학수고대하던 홍랑에게 고죽의 병환 소식이 날아든다.
홍랑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급기야 홍랑은 짐을 꾸려 한양을 향해 천리길을 나선다.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밤낮으로 걸어 7일 만에 한양에 도착한 홍랑은 고죽과 감격적인 재회를 한다.
그리고 그녀의 지극정성 병 수발에 고죽은 건강을 되찾는다.
홍랑에 대한 상사병이었을까? 이때가 1575(을해)년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은 재회의 기쁨이 무르익을 즈음 또다시 하늘에는 먹구름이 일기 시작했다.
고죽이 홍랑을 첩으로 삼아 [양계의 금]을 어겼다는 상소가 사헌부에 올랐다
"고죽 최경창은 식견이 있는 문관으로서 몸가짐을 삼가지 않아 북방(北方)의
관비(官婢)를 한양까지 데리고 와서 버젓이 살고 있으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파직을 명 하소서".라는 대신들의 상소문이 왕에게 올라온다.
(조선왕조실록 선조 9년(1576년) 5월 사헌부에 기록되어있음)
이때는 명종의 비(妃) 인순왕후가 죽은 지 1년이 안된 국상 기간 중이었다.
관기가 근무지를 이탈하여 "양계의 금령"을 어겼다는 동인들의 탄핵을 받은 것이다.
이로 인해 서인인 최경창은 파직을 당했고, 홍랑도 함경도 홍원으로 쫓겨 갈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헤어지는 두 사람은 가슴이 지져졌다.
고죽은 침통하고 애절했던 당시 마음을 한 편의 시를 지어 떠나는 홍랑에게 준다.
<송별.送別>
(玉頰雙啼出鳳城.옥협쌍제출봉성) 고운 두 뺨에 눈물지며 한양을 떠날 때
(曉鶯千囀爲離情.효앵천전위이정) 새벽 꾀꼬리 슬피 우는것은 이별의 정 때문이겠지.
(羅衫寶馬河關外.나삼보마하관외) 비단적삼 날리며 명마 타고 하관 밖에서
(草色迢迢送獨行.초색초초송독행) 풀빛 희미한데 멀리 홀로 떠남을 전송하노라.
세월이 흘러 1582년 봄 최경창은 특별히 종성 부사(鍾城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북평사의 참소로 선조(宣祖)에게 미움을 받아 성균관 직강으로 좌천되어
한양으로 상경하던 도중 함경도 경성의 객관에서 세상을 떠난다.
1583년 3월, 그의 나이 45세였다.
최경창과 이별한 후 오매불망 사랑하는 사람을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내던 홍랑에게 찾아온 소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부음 비보였다.
다시는 사랑하는 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비통함에 그녀는 목 놓아 울었다.
허나 사랑하는 님의 주검 앞에서 언제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었다.
홍랑은 곧장 경성의 객관을 찾아가 굿은 일을 돕고,
먼발치에서 영구를 따라 임이 묻힐 장지 경기도 파주까지 따라나선다.
삶이 허망한 일이었다.
고죽의 장례가 치러지고 사모제가 끝난 후 홍랑은 무덤 앞에 움막을 지어 시묘에 들어간다.
젊은 절세가인의 시묘가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묘령의 젊은 여인이 외딴곳에서 홀로 산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지자
흑심을 품은 사내들이 야밤에 까지 눈독을 들였다.
<요즘이야 파주 지역도 아파트 건립이 한창이지만 당대는 오지였을 것이다>
생각다 못한 홍랑은 스스로 얼굴에 상처를 내어 흉터를 만들었다.
몸을 씻지도 않으며 치장도 하지 않았다.
또한 숯덩이를 많이 삼켜서 벙어리가 되려고도 했다.
(숯을 많이 갈아 마시면 벙어리가 된다는 설이 있음)
거지꼴의 미친 사람이 돼야 남성들의 눈길을 피해 3년간의 시묘를 무사히 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3년이 지났어도 그녀는 묘소를 떠나질 않았다.
몸이 상할 대로 상한 홍랑은 갈 데도 마땅찮아 님의 영혼을 따라 명을 다 하고자 했다.
그렇게 7년여를 시묘하던 차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났다.
전 국토와 백성이 유린당하는 전란 중에 가족들마저
고죽의 서책이나 유품들을 챙길 여유가 없음을 알고 홍랑은 생각을 바꾼다.
자신이 죽기 전에 임이 남긴 주옥같은 서책과 유품들을 수거하여 보존하는 일이었다.
서둘러 시묘를 마치고 고죽의 유품들을 챙겨서 함경도 고향으로 피신한다.
7년간의 전쟁 속에서 님의 소중했던 유물들을 온전히 지켜냈던
홍랑은 그 고초 또한 시묘 살이 못지않은 고난의 나날이었다.
이윽고 1599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그녀는 고죽의 유품들을 안고
해주 최씨 문중을 찾아간다.
유품들을 건네받은 문중 사람들은 문중에 남아있던 유품과 합하여 문집을 만든다.
그렇게 17년을 지켜낸 고죽의 유품들은 후에 "고죽 집(孤竹集)이라는
문집으로 남아 현재까지 우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고 있으니
오직 홍랑의 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의 결과이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홍랑은 얼굴마저 흉터 투성이라 기녀로 산다는 것도 어려웠다.
세월이 흘러 이 마을 저 마을 주막을 전전하다 결국 어느 오지 주막에서 홍랑은 생을 마감한다.
홍랑이 죽자 소문을 전해 들은 해주 최씨 문중은 그녀를 집안의 한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산 102-2번지 해주 최씨의 문중 산이다.
<위 묘가 고죽의 묘 / 아래 홍랑의 묘. 고죽과 홍랑의 詩碑> 주변이 개발 될 예정이라 가옥들이 철거중이다.
신분제도가 철저했던 조선시대 양반 가문에서 하찮은 기적(妓籍)의 여자를
문중 족보에 올린다는 것은 당시 세태로는 파격적이며 홍랑이 유일무이하다.
홍랑은 비록 기녀였지만 첫사랑 고죽 최경창을 향한 사랑과 헌신으로
일생을 바친 고결한 여인이었다.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충신 불사이군 열녀 불경이부)라 했던가.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라는
"명심보감" 구절도 있지만 열녀는 조강지처 적실에게만 해당되는 말이지
기녀인 홍랑에게는 가당찮은 말이다.
홍랑은 함경도 홍원 기생으로 애절(愛節) (사랑의 절개)란 이름의 여인으로
해주 최씨 후손들에 의해 족보에 등재되었고 매년 가을이 되면 시제로 추앙받는다.
살아서는 천민 기생이었으나 죽어서 양반이 된 여자. 이 또한 홍랑이 유일하다.
"기생도 늘그막에 한 남편을 따르면 한 평생의 분 냄새가 사라지고,
열녀가 머리가 쉰 뒤라도 정조(貞操)를 잃으면 반평생의 절개가 물거품이 된다"
옛말에 "사람을 보려거든 그 후반생을 보라" 하였다.
홍랑과 최경창의 사랑이야기를 소상히 적고 있는 <회은집>에 따르면
유일자(有一子), 즉 아들 한 명을 두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고죽(孤竹)의 서자 "최즙"이란 후손이 대를 이은 삶이 현재까지 전해진다.
서른네 살의 최경창이 홍랑을 만나 함께 지낸 것은 불과 1년 남짓.
짧은 사랑이었지만 그 뜨거움은 400년의 세월에도 식지 않았고
지금도 많은 이들이 그의 무덤을 찾는 이유는 고죽에 대한 그의 사랑이
가슴속에 애잔한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고죽의 번방곡 詩 碑 / 뒤 면에는 홍랑의 시가 새겨져있다>
홍랑(洪娘)을 사랑의 노예로 사로잡은 고죽(孤竹)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문신이자 천재 시인이다.
강원도 관찰사를 역임한 청백리 최만리의 5대손으로
평안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한 최수인의 아들이다.
학문과 문장에 능하고 시와 글씨에 뛰어나 "이이, 송익필, 최립. 이산해, 정철, 서익, 등과
시를 주고받는 등 8문 장가로 일컬어졌고,
당시(唐詩)에 뛰어나 백광훈(白光勳) 이달(李達)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후엔 왕명으로 이조판서에 추증됐고 청백리로 녹선 되었으며.
강진에 있는 서봉서원(瑞峯書院)에 배향되어 오늘에 이른다.
=============
이 글은 지난 1월 어느 날 주말에 파주 봉서리 모 부대에 근무하는 아들을 면회하고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길가에 세 예사롭지 않은 무덤이 있어 확인해 본 결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터라 그들의 한시를 작품으로 써서 이야기를 재구성해 보았다.
오래전에 ebs TV에서 역사드라마로 방영된 바도 있다는데 나는 아직....
=============
[양계의 금 兩界禁] 평안 함경도 백성들이 경계를 넘어 타 지역으로 넘지 못하게 만든 법.
어기면 곧 극형에 처한다.
까닭은 척박한 환경에다 오랑캐의 침입이 많아
방치할 경우 인구감소로 폐허가 되는 걸 막기 위한 당시 국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