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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코스는 석굴암이다.
아내는 중학교때 수학여행을 이곳 경주로 왔다가 석굴암 미륵불상의 신비스럽도록 온화한 미소를 보고는 얼마나 감명을 받았었는지 그 후에도 늘 다시 보고 싶다 생각만 하다가 오늘 드디어 그 소원을 푸는 날이 되었던 거다.
불상 앞에 다가갈 수 없도록 커다란 유리벽을 세워놓아 운치가 한결 덜 했지만 예의 그 잔잔한 미소는 사람의 감정을 순화시키는 특별한 마력이 있었다.
검정 유니폼의 경비원 한 사람이 쪽문을 열고 불상 저 안쪽으로 들어가 시주함에서 돈을 꺼내 포대에 담아가지고 나온다.
절의 회계직원? 입구에는 스님 한분과 보살님 한분이 있었지.
*석굴암은
신라의 예술과 과학, 문학의 결정체로서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석굴사원으로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만들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 석굴암을 창건하였다고 한다.
입장료 2인 8,000원
주차비 2,000원
석굴암 주차장에 차 세우고 부지런히 걸어들어가려는데 바로 옆 통일대종각에서 관광객들이 주욱 줄 서있는 걸 보았다.
[불우이웃돕기 및 소년소녀가장돕기 타종1회1000원]
석굴암 보고나올 때 우리도 종 한 번씩 치기로 마음 먹었었는데 어랏~ 타종은 아무때나 하는 게 아니고 정해진 시간대가 있는 모양인지 줄 선 사람도 지키는 사람도 없이 완전 폐점이네.
돈만 내면 아무때나 치는 게 아니라면?
어차피 종 칠 시간에 스님들이 쳐야 할 종을 대신 관람객들에게 치도록 하면서 한 번 때리는데 돈 1000원씩 받는 거였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받는다더니....그런 거야?
그런 거였어?ㅎ
저녁 먹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으므로
오늘 마지막 코스로 첨성대를 보러간다.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이다.
화강석을 가공하여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정자형으로 축조하여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던 곳이다.
첨성대 옆 넓은 터에 야생화단지가 만들어져 있다.
26종의 야생화를 섹터를 정해 심어 왼쪽 사진과 같이 전체가 하나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루도록 계획적으로 식재를 한 곳이다.
5~6월경에 왔더라면 작약과 모란(함박꽃) 등 대부분의 꽃을 모두 다 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절기가 9월 하순이다보니
가을꽃 몇 가지만 볼 수 있었다.
보라색 층꽃, 노란색 마타리(왠 가을에 유채꽃? 했더니 역시),
마타리-함박꽃(작약)-구절초-모란-도라지-벌개미취-참나리-붓꽃-배초향-수선화,무릇-접시꽃-기린초-백양꽃,땅나리-노랑꽃창포-꽃범의 꼬리-범부채-노랑줄무늬비비추-자주꿩의 비름-솔나물-수국-감국-꽃무릇,송엽국-층꽃
오늘 저녁식사할 집 찾는데도 어제만큼은 애를 먹었다.
첨성대 옆 문 닫은 음식점 빈 주차공간에 운좋게도 차를 안전하게 잘 세웠던 김에 근처 식당에서 저녁까지 미리 먹고 움직이기로 하는데...간판은 켜져 있어도 거의 문을 닫았다.
[화림정 한식당 영업중]! 간판을 보고 골목길 돌고돌아 겨우 찾아들어가 앉으니 우리 뒤로 사람들이 연신 밀려들어온다.
가능한 메뉴는 딱 두 가지! 떡갈비와 한정식.
떡갈비는 엊저녁에 조금 질려서
명절에 문열어준 것만도 고맙지..
오늘은 한정식 2인분 20,000 이다. 국물이 좋았는데, 생선구이 큼직한 걸 한참 나중에 준다. 덤인가? 늦은건가?
[스위스로젠]! 참 맘에 드는 호텔에서 2박째 하고
오늘은 안동하회마을과 도산서원을 들러 울진백암까지 가는 일정이라 아침식사 방에서 마친 후 조금 일찍 나선다.
[보문정]을 꼭 들러야 하는 이유!
오리모양을 닮아 '오리연못;이라 이름 붙여진 연못과 함께
고즈넉한 한국의 미를 느끼게 해, CNN방송 지역소개 인터넷사이트인 CNN GO에서 '한국에서 꼭 가봐야 할 아름다운 장소'11위로 선정됐다는 기사를 읽었기 때문이다.
내비에 찍고 찾아나서는데 왔다갔다하기를 두 차례나 헤매도 목적지종료!지만 음식점 '보문정'만 눈에 띌뿐!? 설마?
그때 아내가 음식점 옆 안쪽으로 정자 비슷한 게 보인다 했다.
아! 찾았다.
이곳에서 평생 다시 보지 못할 연꽃의 절정을 보았다.
안압지(임해전) 연꽃은 시들어서 비교란 말 꺼내기 부끄럽고,
양동마을 연꽃이 제법 훌륭했지만 그것 역시 여기와는 비교불가!
가지가지 연꽃을 두루 감상한다.
그것도 9월이란 절기에? 생각도 못할만큼 완전한 상태로!
꽃색깔도 예쁘고, 잎도 모두 싱싱하다.
아내가 너무너무 좋아한 건 말할 것 없고...수채화소재 여러 장 건진다.
다음 분황사는 예기치 않게 가는 길옆에 푯말이 나타나길래 잠시 들러가기로 한 것인데 횡재했다. 언제부터 보고싶었던 다듬은 벽돌석탑이 눈 앞에 척 나타난다.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신라 선덕여왕 3년에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 올린 모전석탑이다. 1층 몸체돌의 사방에는 쌍여닫이 돌문으로 된 불상을 모시는 감실이 있고, 감실 양쪽으로 불법을 지키는 인왕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자연석으로 된 기단 위에는 네 마리의 석사자를 배치하였다. 기단의 규모나 탑의 형태로 보아 7층이나 9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이곳 입장료는 2인 2,600원, 주차비?
마침 주차장에 경비원이 없었던 것 같아 안받은 것 같다.
석굴암에서 못친 종을 이곳에서 쳐 본다.
[종 상태가 안 좋으니 세게 치지 마시오]라고 써있었던 것 같았다.
[종한번 치는데 천원]이라고 써있어서 치긴 했는데,
이곳 역시 지키는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종치는 시각은
정해져 있었던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나중에 들면서
참선 중이었을지도 모를 스님들께 미안한 생각 들었다.
분황사터가 참 인상적이다. 건물들이 소실되기 전엔 다소 비좁았을 듯 싶기도 하지만 절터가 너무 크지 않아 적당하며 아침이라 관광객이 거의 없어서 조용하고 말할 수 없이 아늑하다.
아담하고 마음에 쏙 드는 절터였다.
대웅전 같은 건 없고, 자그마한 불상 모신 전각이 한 채 있었다. 그 뒤로 스님들 기거하는 대중방과 요사채 같은 건물이 있고, [종무소] 팻말 보이는 쪽 절터 뒤편을 기웃거려 보니 왠 가건물이 한 채 덩그머니 세워져 있었다.
보통 절과는 분위기가 색다르다.
분황사를 나서자 바로 옆에 황룡사터가 펼쳐져 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큰 절터를 보니 정말로 건물이 소실되기 전에는 얼마나 웅장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신라시대에 불교가 얼마나 융성했었을지를 짐작으로 느껴볼 뿐이다.
지금은 이 넓은 터 전체에 오직 코스모스만 가득 심어져 있는데, 관리가 어려운지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아 약간 아쉬웠다.
하긴 코스모스에서 무슨 수확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관광객들 눈요기만을 위해서 이 넓은 들을 사람 두어서 관리한다는 게 쉽지는 않을 터.
예전에 외국어대학교가 지금처럼 용인캠퍼스 없이 석관동 캠퍼스 뿐일 때 외대생들이 듣기 싫어했던 말이 있었다.
바로 옆 경희대가 너무 넓고 건물도 웅장해서 외대를 경희대 화장실이라고 농담삼아 부르곤 했다는 것인데, 그건 경희대생들입장이고...
여기서보니 황룡사터와 나란히 앉은 분황사를 보니
꼭 그 시절 생각 난다. 외대 일년 다녀봐서 그 느낌 알지!
두 절이 동시대에 나란히 있었다 생각하니 문득....ㅋㅋ
황룔사가 하도 커서 말이다.
그렇다 해도 나는 여전히 분황사터가 더 좋다.
아담하고 호젓하고 고요하고 차분하고 훨씬 더...
며칠 뒤면 추분 절기인데,
김명인 시인의 "추분의 코스모스를 노래함" 생각난다.
길섶에 뿌려놓은 코스모스/여름내내 초록줄기를 뻗더니
길가에 추분의 꽃대들을 잔뜩 세웠다
아침나절 내려놓는 햇살 /제법 선선해 졌지만
아직도 한 무더기 무더위가 짓누르는 한낮
코스모스가 이룩한 생산은
수백수천의 꽃송이를 일시에 피워낸 것인데
오늘은 우주의 깃털바람 그 꽃밭에다
하늘하늘 투명한 햇살의 율동 가득 풀어놓고 있다
알맞게 온 색색의 꽃잎들이 결을 맞춘다
새털보다 가벼워진 지구가/ 코스모스 잎잎 위에서
저마다의 이륙을 준비하고 있다
다음엔 하회마을로 갔다.
경상북도 안동시 풍천면 하회리.
이 마을은 낙동강이 태극모양으로 돌아 흐르므로 하회(하회)마을이라 한다.
풍수지리상으로 태극형, 연화부수형, 다리미형이라 하는 천혜의 길지이며 외침을 한번도 받지 않아 우리 조상들의 생활양식과 문화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조선초 공조전서를 역임한 류종혜공이 풍산에서 이곳으로 옮겨와 터를 잡은 후 600여년을 풍산류씨가 세거해 왔으며,
후에 조선 중기의 유학자인 겸암 류운룡(1539~1601)선생과
임진왜란 때 영의정으로 국난극복에 큰 공을 세운
서애 류성룡(1542~1607)선생 형제 등
많은 인물을 배출함으로써 영남의 대표적인 반촌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마을에는 국보 2점(징비록, 하회탈, 병산탈),보물 4점 등
22점의 문화재가 있고 충효당내 영모각에는 서애 선생의 유물 100여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하회별신굿탈놀이와 선유줄불놀이 등 유무형의 양반문화와 서민문화가 조화를 이루어 전승되고 있다.
1999년 4월 21일 가장 한국적인 고장을 찾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 마을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2010년 7월 31일 유네스코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점심식사는 하회마을 입구 어느집이었다.
오늘 점심식사 역시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린 늘 버글거리는 집을 피하되 나름 우리들 기준의 운치가 있는 집을 고르곤 한다.
이집도 우리 들어갈 땐 텅 비었었지만 우리가 들어가 앉아 식사를 하기 시작하자 그 뒤로 사람들이 차츰 차츰 들어오더니 나중엔 단체손님까지 왕창 들어와서 가득 찼다.
주인장이 우리한테 특별히 고마워해야 하는 건데....ㅋㅋ
간고등어구이정식 2인분 2만원,
동동주 5천원.
현지에서 가장 특색있는 음식으로 먹었는데,
그동안 집에서 먹던 간고등어와는 달리 전혀 짜지 않아 좋았다
여기 동동주 정말 일품이다.
쌀알이 동동 뜨는 것이 서울쪽에선 보기 드문 상품이었다.
전화번호 적힌 걸 얼핏 보긴 했는데, 휴대폰에 찍어둘 걸 뒤늦게 아쉬움이 남는다.
아내와 둘이서 작은 보시기?로 다섯 잔 마시니 땡~바닥이다.
대낮만 아니면 한 병 더해도 좋겠는데....
우리 밥 먹기 시작할 땐 분명 이집 전체에 우리 둘 뿐이었다.
그러다 우리 뒤로 두 사람이 들어오면서 떡국 되요? 했다.
일인분은 안되는데요....두 분이세요? 그럼 끓여드릴게요....
했었다. 그러더니 우리 밥 다 먹을 무렵엔 꽉 차 버리는 거였다.
우리가 어디가서 밥 먹을 땐 대체로 그랬었다.
그러니 우릴 특별히 더 잘 모셔야 하는 건데....내 입으로 소문을 낼 수도 없고...이거야 원~
잘난 척하기는......
안동 간고등어정식!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싹삭 비워낸 빈 그릇을 일부러 찍어보았다.
엘리자베스여왕이 안동 방문했을 때의 영광스러움!을 오래 남기기 위해 기록관을 지어 자료보관 중이었다.
아내의 수채화소재 삼을 사진 찍기에 바빠서
집안 구경은 소홀하다보니 서애 류성룡선생 사시던 집이 어디쯤이었던가?
보물 [징비록]이 어디에 있었을텐데....
흙벽돌집 옆엔 예쁜 꽃이 피어있다.
자세히 보면 흙집의 형태도 여러가지이다.
돌과 흙을 섞어 쌓은 흙돌집, 흙으로 벽돌을 만들어 쌓아올린 흙벽돌집, 나무줄기 사이로 흙을 채운 흙나무집 등...
이곳의 흙집은 흙벽돌에 해당한다.
동동주 취기가 알딸딸한 채
이집저집 기웃거리며 담장을 사진에 담기도 하고,
담장아래 꽃들을 담기도 하고.....
사진 찍는 아내를 담기도 하고....
그렇게 마을을 돌아 널찍한 송림에 다다르니
서정주 시에 붙여
송창식이 부른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 진다.
푸르른 날 -서정주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저기 저기 저 가을 꽃자리
초록이 짙어 단풍 드는데
눈이 나리면 어이 하리야
봄이 또 오면 어이 하리야
내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에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 하자
하회탈춤 놀이 재현장.
하회탈은 한국인의 얼굴로 칭송될만큼 조형예술의 가치가 뛰어나다. 한반도에서 나타난 탈의 경우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들어 오래 보존되지 않거나 현재까지 파악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하회탈은 드문 형태의 목조탈이기에 형태를 유지해 지금까지 알려질 수 있었으며 분장 도구로서 뛰어난 작품임을 표현한다.
하회탈은 별신굿 놀이에서 빠질 수 없는 도구로서 양반사회를 비판하고 꾸짖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일반 평민을 대상으로 하여 크게 성행했다.
하회탈은 11가지 종류가 있다.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등이 있다. 이름에 맞춰 탈이 표현하는 행위도 달라진다. 주지라는 것은 탈놀이 본연의 목적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악귀를 쫓는 부적과 같은 역할을 한다. 총각 등 4종류의 탈이 더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 유실되어 파악이 불가능하다. 할미는 한평생 고단히 살아온 자신의 한을 풀려는 몸짓을 베틀로 대신하며 부네는 가는 눈썹과 오똑한 코, 조그마한 입으로 전통 사회의 미인상을 새겨놓았다. 대개 첩으로 나타난다. 양반, 선비는 대개 자신을 과시하거나 학문을 뽐내려는 캐릭터로서 이를 풍자하고 해학을 주는 탈이 초랭이이다. 이매는 턱이 없는 가면으로서 길고 가늘게 축 쳐진 눈웃음이 인상적인 탈이다. 바보같은 선비의 하인 역을 한다.
다음엔 도산서원으로 간다.
도산서원은 해동주자라 일컫는 퇴계 이황 선생이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도산서당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문인과 유림들은 퇴계선생 사후 조선 선조 7년(1574)에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여 상덕사(尙德祠:보물 제211호)란 사묘를 짓고, 전교당(典敎堂:보물 제210호)과 동,서재를 지어 도산서원을 완성하였다.
선조8년(1575)에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영남유학의 총 본산이 되었다.
도산서원을 끝으로 경주안동 탐방은 마치고,
울진 금강송과 백암온천으로 향했는데,
영양 청량산을 관통하고 검마산을 관통하고 일월산 옆을 지나치며 울진쪽으로 달리는 길이었다.
금강송은 차를 타고 꼬불탕길을 아슬아슬 달리는 내내 실컷 보았다.
강원도에서 못보던 소나무를 경북 울진에서 보는구나..감탄사를 연신 내뱉으며 달렸다.
사진은 한 컷도 찍지 못했다. 위험해서였다.
백암온천은 호텔잡기는 경주와 달리 실패였다.
기억에서 지우고싶어 일부러 사진 한 컷도 남기질 않는다.
이곳 역시 아고다닷컴에서 예약을 했었지만 온천장의 장급여관 수준이다. 로비에서 이것저것 시설에 대해 묻자 그냥 여인숙 수준으로 생각하면 되요~ 했다. 주인?이 그렇게 얘기할 정도였으니...볼일 다 봤다. 아내에게 너무 미안했다.
바닷가까지 직선거리로는 10km조금 더 달리면 후포항이라길래 기분전환 삼아 나섰는데, 해가 완전히 지고나니 가로등도 없이 오직 헤드라이트에만 의존해서 산길 달리니 무섭기까지 했다. 아무튼 칠흙같은 어둠 속에 후포항에 닿았고, 우럭 한 마리+도다리 한 마리 작은 걸로 해서 2만원에 회뜨는덴 성공했다.백암으로 되돌아오는 길엔 가로등 한 개 못보고 내비에만 의지해서 아슬아슬하게 돌아왔다. 뒷목이 다 뻐근하다.
마지막 밤이 어서 지나가기를 고대했다.
아침 일찍 도망치듯 백암을 벗어나 금강송 우거진 산길을 달리면서 차츰 우리들의 기분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울진-영양-봉화-영주 풍기-중앙(아니면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신나게 타다가 여주 도착할 즈음부터서 조금씩 막히기 시작했다. 벌써?
망설이고 망설이다 결심했다. 여주인터체인지에서 국도로 벗어난다. 경충로였던 것같다. 이천까지 잘 달린다.
이천을 지날 무렵 예전 다니던 이천쌀밥집을 찾을까 하다가 도로가 틀릴까 염려되던 차에 눈에 띄인 곳이 막국수집이었는데. 아주 좋았다. 다음에 다시 찾아가고 싶을 만큼.
여주에서 고속도로를 벗어나 국도로 나서길 정말 잘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그다지 늦지 않았다.
이렇게 이번 촬영여행을 마무리한다~
첫댓글 경북 지역을 제대로 느끼고 오셨군요.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는 여행 한 건 건졌습니다. 갔다 온지 며칠 됐다고 벌써 경주 한 번 더 가자고 조르니 말입니다.
석굴암.첨성대.읽기만하여도 아련이소녀시절이 절로나는문구 사범님덕분에 감상할수있는행운을 !!! 순간추억에젖어 행복했읍니다 사범님은행복충전소&~~~
고맙고 반갑습니다,꽃내음자매님!늘 행복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