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없으면 대폿집에서 빈대떡이나 부쳐 먹지
한 푼 없는 건달이 요릿집이 무어냐 기생집이 무어냐
1940년대를 풍미했던 한복남의 빈대떡 신사 노랫말이다.
6~70년대
연예계에 문희, 남정임, 윤정희 트로이카시대가 있었다면
요정계에 삼청각, 청운각, 대원각이 있었다.
기생이야 조선시대에도 있었고 일제 강점기에도 있었지만
이즈음 요정은 정치를 위한 요정이었는지
요정을 위한 정치였는지 모를만큼 요정정치 전성시대였다.
4~50년대가 광풍의 폭력시대라면
6~70년대는 은밀함의 시대였다.
요정에서 만나면 안되는 일이 없었고
되는 일도 안되게 하는 마법의 장소였다.
삼청각. 지붕선이 임금님의 침전 경복궁 강녕전을 닮았다
삼청공원을 지나 삼청터널을 빠져나가면
왼쪽에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다.
삼청각이다.
이곳이 한일회담 막후 협상장소로 이용되었으며
1972년 남북회담이 열렸던 곳이다.
서빙고에 있던 보안사가 주축이 된 전두환시대.
그들이 즉석 ss가 가능한 강남 룸싸롱으로 발길을 돌리면서
삼청각도 사양길에 들어섰다.
90년대 중반 예향으로 간판을 바꿔달고 한정식집으로 거듭났지만
대세를 거스르지 못하고 1999년 12월 문을 닫았다.
현재는 문화시설로 지정되어 전통문화 공연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자하문터널 입구에 있던 청운각은
청운동의 쌍입지가 세운 전설적인 요정이다.
청운동 사람들은 말한다.
동쪽 북악산 아래 조차임이 살았고
서쪽 인왕산 아래 정주영이 살았다고. . .
그래서 그들이 청운동의 전설이 되었다고.
강원도 통천군 아산리 두메산골에서 태어난 정주영이
맨손으로 현대라는 거대 기업을 일군 입지전적인 인물이라면
청운각을 세운 조차임 역시 맨손으로 성취한 여걸이었다.
경북 경산에서 태어난 조차임은
30대 젊은 나이에 홀로되자 무작정 상경하여
남의집 식모살이를 하는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종자돈을 마련한 조차임은 우미관 옆에 국밥집을 열었다.
종로를 주름잡던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아지트가 있던 우미관이다.
여기에서 식당장사의 묘미를 터득한 조차임은
종로통에 큰 식당을 열어 돈을 모았다.
여기에서 멈출 조차임이 아니었다.
초대부통령을 지낸 이시영의 사저를 입수하여 청운각을 열었다.
궁정동 안가가 지어지기 이전.
청와대와 가까운 이곳은 박정희가 은밀히 찾는 비밀의 장소가 되었다.
권력의 그늘 아래 사업은 승승장구 했다.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이 이곳에서 맺어졌다.
삼청각과 대원각은 청운각이 사양한 손님들을 받는 요정으로 전락했다.
전성기도 한때이련가.
조차임이 암에 걸리자 그녀는 자산을 정리해서
'우산육영회'란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그리고 요정업계에서 청운각이 사라졌다.
대원각
대원각은 김영한이 세운 요릿집이다.
그 자리에 오늘날 길상사가 있다.
대원각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시인 백석과 법정스님이다.
김영한은 기생출신이다.
기명(妓名)도 있다.
진향(眞香)이다.
이것뿐이랴.
독실한 불자였던 그녀는 법명(法名)도 있다.
길상화(吉祥華)다.
그래서 절 이름이 길상사가 되었다.
대원각 주인 김영한의 기생시절
17세 때, 조선권번 정악전습소 학감을 지낸
하규일의 넷째 양녀로 들어가 가무를 배웠다.
춤에도 소질이 두드러져 <무산향>과 <검무>를 잘했다.
특히 <춘앵무>는 그녀를 능가할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삼천리』잡지에 수필을 발표하여
'문학 기생'으로도 명성을 날렸다.
문학소녀였던 그녀가 백석의 연인이 된 동기다.
백석은 그녀를 <자야>라 불렀고
김영한은 백석을 <내 사랑 백석>이라 존경했다.
그들은 아름다운 사랑을 했다.
그러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서양에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고
우리에게 이몽룡과 성춘향이 있듯이
그들의 사랑은 비련의 사랑이었다.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오듯이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려도 진달래는 핀다.
김영한의 웃음처럼 진달래가 피면 그곳에 가고 싶다.
길/상/사.
가져온 글 https://cafe.daum.net/isbobyb/JK3y/15449?svc=cafeap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