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첩장
카톡에 청첩장이 떴다. 성락이의 딸 결혼 소식이었다. '가봐야겠다'라고 결연한 결심을 했다. 한 번의 기회에 정말 오랫동안 보지 못한 그 집 오남매 형제자매들을 모두 볼 수 있고, 초등 친구들을 한꺼번에 많이 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기 때문이다. 성락이는 서울지역 동창 회장을 한다고 들었었기 때문이다.
이만한 나이에 이르러보니 내 인생의 한때를 함께한 이들이 그립고, 아직 팔다리 성성할 때 한 번쯤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공동체 안에 큰 일정이 잡혀 있었지만 아침으로 마무리한다기에 휴가로 하루를 뺐다. 공동체엔 유난한 수도승修道僧 비칠까 싶어 ‘집안 일’이라고 했다.
성락이는 달천에서 나고 자란 한 동네 친구이다. 커서 생각하니 형제 같은 고마운 친구다. 어머니들이 괴산 추점리에서 나고 자라셔서 충주 달천 같은 동네로 시집을 오셨다. 친구 아버지는 우리 가족에게 그애 어머니보다 더 살뜰하게 챙기고 대해 주신 인정 많은 분이셨다. 맨 위로 오빠끼리 동갑, 언니끼리 동갑, 각자의 여동생이 친구, 나와 성락이가 동갑이며 초등학교 동창이다.
‘새매기’라는 첩첩산중 산촌으로 이사했다가 다시 고향 달천으로 귀향하여 나는 단월 국민 2학년 2반에 전학하였다. 산골짝 촌티를 잔뜩 묻힌 나를 반 동무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집적거렸다. 텃세였다. 그때마다 어머니의 이종사촌 5학년 생도인 상구 아재에게 달려가 원조를 청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우리 반 주먹 서열 3위인 성락이도 알게 모르게 구원자가 되곤 했다. 어린 시절 남녀유별 이상 정서와 문화가 만연할 때라 고향을 뜨도록 말을 섞지는 않아 모르는척했지만, 더 커서 생각하니 얼마나 고맙던지.
예식 전후, 예상했던 대로 성락이 형제자매들을 모두 만났다. 맨 위 오빠와 언니는 고향을 떠나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참으로 감개무량했다. 살아있고 아직은 다닐 수 있는 건강이 허락하는 재회라 기쁘고 감사했다. 아마도 세상에서 다시 만나기는 어려울 듯 싶다. 나도 심신의 행동반경을 좁히고 있음을 완연히 감지한다.
초등학교 친구들도 많이 온 것 같았다. 충주, 서울, 여러 지방에서.... 육십 대 중반을 넘어 칠십의 나이를 향해가는 모습들에 세월이 서리서리 내려앉아 있었고, 너무 오랜만이라 바로 알아볼 수 없었지만, 반과 이름을 알려주면 이내 기억이 되었다. 번개 불 보듯 그저 ‘이름?, 아하...! ...건강해?’ 이것이 전부였다. 그것도 주변에 있었던 친구들 한계로만. '그래도 이게 어디?' 사람 많은 북새통 뷔페 식당, 식사를 같이 해준 윤명이의 배려도 고마웠다. 지나쳐 편안함을 선택할 수도 있었을 텐데도. 친구들은 인근 호텔에서 2차 모임을 한다지만, 거기까지 열정 왕림을 하기엔 내 모습과 처지가 쑥스러워 귀원을 결정했다. 또 좋은 기회를 홀연히 기대하면서....돌아오는 길, 그나마 옥련이를 따로 만날 수 있었고 오붓하게 둘 만의 안부를 나눌 수 있어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