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目 次
Ⅰ. 序論 ………………………………………………2
Ⅱ. 本論
제 1장 민족, 민족주의의 개념과 기원……………3
1. 민족의 개념 ………………………………… 3
2. 민족주의이론 ……………………………… 5
3. 한국민족주의의 기원과 시기구분 ……… 7
제 2장 한국근대민족운동의 전개………………… 9
1. 개항기에서 1910년까지의 시기…………… 9
2. 일제식민통치시기……………………………15
제 3장 한국근대민족운동에 대한 평가 ………… 20
Ⅲ. 結論……………………………………………… 21
Ⅳ.參考文獻……………………………………………24
Ⅰ. 序論
民族主義나 民族主義運動과 民族國家의 형성문제를 近代化 過程에 어떻게 위치시킬 것인가? 이 과정은 동시에 두 가지의 변화를 수반하는데 첫째, 封建的 생산체제에서 資本主義 體制로의 이행과정이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近代 民族國家를 형성하는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民族運動은 피억압민족이 억압에 저항하여 民族獨立과 民族的 統一을 실현하려고 할 때 발생되는 문제를 말하고 民族이 정치적으로 자립하고 자립적인 政治, 經濟的 共同體를 세우려 하는 政治的 要求이다. 民族이 실행해야 할 목적을 가지고 실천적 개념으로 집단 행동화되는 것이다.
民族主義는 무엇보다 政治的 單位와 國家單位가 일치해야 한다. 民族主義는 여러 경험과 과정을 거듭하면서 역사적 전개를 이룩해 냈다.
우리 나라에서의 民族이란 사실 西歐의 그것과 歷史的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西歐에서의 民族이 近代 市民革命 이후 資本主義의 發興과 더불어 ‘宗敎’가 하나의 이념적 힘을 잃은 가운데 생성된 이데올로적 성격을 띄어 온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資本主義의 到來가 위로부터의 受動的 革命의 성격을 띄었고 이러한 이유로 우리나라에게서 民族의 槪念을 近代的 意味에서 찾으려는 것은 무리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民族槪念의 生成起源을 어디서 부터 찾을 것인가 논하는 것은 너무나도 애매한 문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부인할 수 없는 것은 世界史的 맥락에서 볼 때 19세기 말의 帝國主義的 질서 속에서 우리의 民族 槪念은 그 正體性을 보다 확고히 해 나간다는 것이다. 즉, 우리에게서 民族의 槪念은 비록 아래로 부터의 市民革命에 기반한 것은 아닐지라도 서구 資本主義의 帝國主義化에 따라 상대적으로 생성된 부분이 큰 것이다.
그리고 19세기 말 부터 생성된 그러한 의미에서의 民族主義는 지금 20세기 말을 살아가는 우리에게까지 正體性의 형성에 영향을 주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韓國近代史는 帝國主義의 수탈로 인해 얼룩진 과거로 남아있고 그로 인해 현재까지 分斷이라는 현실 앞에 놓여있다. 開港을 되고 西歐 帝國主義 列强의 政治的ㆍ經濟的 浸透로 인해 확실한 近代國家樹立을 이루지 못하게 되었으며 日帝로부터 解放을 위해 社會 各界各層에서 民族運動이 일어났고 그 思想的 基盤이나 主導勢力의 性向에 따라 다른 양상을 띠고 있는데 다음 글에서는 開港期에서부터의 韓國近代民族主義 運動의 다양한 흐름과 展開過程에 대해 살펴보고 韓國近代民族主義의 意義와 現在的 課題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Ⅱ. 本論
第 1章 民族, 民族主義의 槪念과 起源
1. 民族의 개념
民族1)이란 개념은 다양하고 복잡하다. 民族이라는 말자체가 여러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학자에 따라서 인종(人種)만을 강조하고 지역에 관계없이 언어와 종교를 중심으로 民族을 규정하고 또는 공통의 衣食과 感情으로 民族을 찾으려 하는 경향이 있다. 民族(nation)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 혈통이나 출생을 의미하는 라틴어 natio에서 나왔으며 民族을 비롯해 國家, 人種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간단히 말한다면 일정한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共同生活을 함으로써 言語, 風習, 宗敎, 政治, 經濟 등 각종 文化內容을 공유하고 集團歸屬感情에 따라 결합된 人間集團의 最大單位로서의 文化共同體를 가리키는 말이다.2) 몇가지 前提를 갖고 살펴보기로 한다
① 民族이란 일정한 文化領域을 가진 人間結合의 특징을 말하는 總合槪念이다. 오늘날 文化의 공통된 同質性이 民族이라는 基礎集團의 基盤이 된다고 보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文化共同體이다. 同一한 文化의 客觀的 條件은 共通의 地域, 風俗, 經濟的 條件, 種族, 慣習, 言語, 政治를 바탕으로 하는 生活의 共同體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理念形일뿐 現實的인 것은 아니다. 모든 人間은 物質的, 文化的으로 他民族과 접하며 관련을 맺고 살아간다,.
② 民族의 기반을 人間의 意識, 즉 主觀的 條件의 共通性에서 찾으려 하는 立場이다. 民族性員이 同一集團에 소속되어 있다는 一體感과 거기에 소속되기를 바라는 歸屬意識에서 存立의 意味를 찾으려 한다. 한 民族이 公同의 生活과 同質을 가지면서 共同生活을 해왔지만 自己民族에 대한 강한 意識을 自覺하는 것이다.
③ 民族은 人種의 問題, 階級의 問題에 깊이 關係되며 近代國家 및 資本主義 體制下에서 民族利益과 관련된다. 人種의 문제는 現代에 와서 이미 血緣的, 地域的 區劃이 무너지고 意味가 많이 변하고 있다.
④ 民族은 제각기 다른 歷史的 經驗을 가지고 있다.
위의 理論을 바탕으로 結論을 類推해 볼 수 있는데 民族이란 血緣과 地緣 위에 성립되며 政治, 經濟, 文化 등 생활의 公同과 역사적 운명의 공동 그리고 거기에 따른 공통의 의식을 특징으로 하는 포괄적인 기초집단이다.
한스 콘(Hans Kohn)에 의하면 민족이란 사회의 歷史的 發展의 産物이고 항
상 변동하며 고정되지 않는다는 관점하에서 객관전 유대들이 사회적 집단의 한계를 분면히 할 때 民族이 드러난다고 한다.그 중 가장 보편적인 속성은 공
통의 血統, 言語, 領土, 慣習, 傳統, 宗敎라고 제시하고 있다. 특히 언어의 공통은 공통된 風俗, 慣習, 생활신조, 價値體系의 公有를 가능케 하며 국가에 의한 정치 및 교육은 위로부터 民族의 等質化를 가져오게 하며 역사상의 운명과 문화를 함께하는 民族性을 싹트게 한다.
스미드(Antony D.Smith)는 民族을 다음과 같이 정의 내리고 있다. <모든민족은 특이한 성격을 갖고 있다.모든 사람은 자연적인 면에서 民族으로 구분된다. 모든 정치적인 힘의 근원은 전체적인 집단체의 민족에 근거한다.ㆍㆍㆍ> 이렇듯, 民族은 자연 그대로의 생활공동체이다. 民族은 公同의 社會的 經驗, 生活樣式 등과 함께 오래된 역사적 과정 속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民族의 心理와 그 精神의 소산임을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民族의 개념은 ‘民族의 精神’이 그 心理的 基調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民族은 社會的 所産이며, 서로 이해를 달리하는 人間들의 상호접촉과 투쟁을 통해서 공통의 그 무언가를 발견하고 그 토대위에서 하나의 연대를 가졌을때 주어지는 것이다.
經濟的 意味에서 이같은 공통의 연대 또는 상호접촉을 가능케한 것은 ‘국민적 시장권’의 형성이다. 여기서 국민적 시장권이란 자본주의가 대규모 상품생산을 기초로 해서 보다 큰 시장에 대한 요구를 통해 국지적 분업을 해체시키고 그 국지적 분업내의 시장을 통합하여 형성한 자본주의적 발전의 산물이다. 이러한 의미로 볼때 민족이란 근대 자본주의 이후의 소산으로서 물질적 정신적 공동성을 바탕으로 구성된 인간공동체이다.
민족의 전제조건으로는 언어, 지역의공통성, 공동의 시장을 같이 갖는 경제생활의 공동성, 상대적으로 독자적이면서 장기적으로 남아있는 민족문화의 특성으로 주어지는 심리적 성격의 공통성을 들 수 있다3). 이러한 의미로 볼때 민족이란 근대자본주의 이후의 소산으로서 물질적 공통성 즉 경제생활과 지역,언어의 공통성, 그리고 정신적 심리적 공통성의 상호작용을 기초로 장기적인 역사가운데 구성된 극히 강건한 인간공동체라 할 수 있다.
근대자본주의는 지역주민을 안으로 수렴시키려는 경향과는 반대로 그것을 바탕으로 자기를 외연적으로 확장시키려는 말하자면 국제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선진자본주의국가에 의한 제국주의적 국제화 경향은 식민지 종속국 민족과의 ‘민족문제’를 발생시킨다. 민족간의 모순은 바로 한 사회의 모순관계를 첨예화시키고, 내부적 모순을 다른 발전단계로 이끌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한 사회내부의 모순관계를 기초로 각기 대립관계에 있는 사람들의 외부모순을 받아들이는 태도는 같을 수 없다. 한 민족구성원내에서 민족적 경향이 하나의 통합된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계급구성에 따라 이들의 대응양식이 각기 다르게 나타난다. 이러한 의미에서 民族主義는 民族的인 것의 階級的 프리즘을 통한 자기표현양식이라 할 수 있다. 民族主義는 각기 상이한 階級的 理解를 반영한다는 점에서, 어느 일정한 歷史的 段階에서 어느 집단이 강한 요구를 등장시키며 그것이 민족의 이해와 합치해서 더 많은 사람들의 요구를 수렴할 수 있을때 한 시대를 대표하는 한시대의 民族主義가 될 수 있는 것이다.
2. 民族主義
民族主義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時代와 歷史的 狀況에 따라 見解가 다르고 보는 視覺에 따라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民族이라는 槪念이 완벽하지 못한것처럼 民族主義도 극도로 복잡하고 學者마다 主張이 다르다.
우리는 民族主義라는 말을 빈번하게,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 近代民族主義를 論議하기 전에 프랑스 혁면 이전의 民族主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다. 고대 그리스는 종족중심적이었다. 그들의 社會的, 文化的 特性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자부심은 야만인과의 구별에 잘 드러난다. 폴리스를 理想的이라 생각하고 폴리스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였다. 紐帶意識은 文化的 次元에 限定되었고 대규모 政治的 次元에서는 발견되지 않았다.
로마에서는 民族主義보다 普遍主義였다. 普遍主義는 中世로 이어지는데 로마에서는 帝國이 中世에서는 敎會였지만 초점은 人類의 團合이었다. 로마의 普遍主義는 政治的, 軍事的, 世俗的이었고 中世의 普遍主義는 宗敎的, 精神的, 超世俗的이었으며 황제와 교황이 文明의 象徵이었다. 宗敎改革과 르네상스는 民族主義와는 정반대로 종교든 예술이던간에 個人主義가 중심이 되었다. 특히 르네상스시대의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자기표현을 강조하여 {군주론}에서 마키아벨리(Machiavelli)가 통일에 대해 외친 것은 별의미가 없었다. 16ㆍ17세기에 영국, 프랑스 등지에서 강력한 국가가 출현하였지만 民族主義와는 달랐다.
18세기에 이르러서야 民族主義라는 표현이 나타나는데 浪漫主義運動이다. 民族主義는 浪漫主義의 政治的 表現이었다. 民族主義의 發展에 루소(Rousseau)는 중요한 공헌을 하였는데 民族國家의 예언자로 看做되었다. 루소는 人間을 道德的이고 無限한 善의 가능성을 갖고 있는 存在로 보고 個人이 集團없이는 無意味하며 그 안에서 완전해질 수 있다고 보았다. 루소의 理想은 個人과 全體의 感情一體化에 의해 완전통합되는 共同體였다. 重要影響을 미친 또 다른 사람은 헤겔(G.W.F.Hegel)인데 그는 國家를 尊嚴한 創造物로 보고 普遍主義의 漸進的인 自己實現을 表現한다는 것이다. 民族主義가 科學的인 用語로 使用되게 된 것은 1789년 독일의 법학자 바이스 하우프트(Adma Weishaubt)에서 부터며 프랑스혁명 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民族主義는 한 民族이나 國民이 다른 民族에 대해 스스로의 一體感이나 自主性, 正統性을 主張, 과시하는 感情이나 思想, 이데올로기운동을 포함함으로써 성립되었으며 近代民族國家形成과 긴밀히 관련되고 있다. 民族主義 外形을 최초로 體系化한 학자는 미국의 헤이즈이다.
어떤 民族이든 그들 나름대로의 歷史的 背景과 社會, 文化的 經驗, 現實的 課題를 안고 있다. 하나의 民族은 一體性과 獨自性을 가지면서 다른 國家와 區別되며 自己民族이 다른 民族보다 優秀하다는 일종의 優越感에 사로잡히는 감정이다. 民族主義란 어떻게 規定해야 할 것인가?
한스 콘의 의하면 무엇보다도 하나의 精神狀態요, 意識的인 行動으로서 프랑스혁명 이후 전 인류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고 한다.
그는 민족주의를 정신적인 상태에 초점을 맞추어 민족의 客觀的 要素인 言語, 領土같은 共同體의 心理가 변함에 다라 가치기준도 달라진다고 보았다.
즉, 자기의 의식을 새로운 思想과 感情으로 채우고 행동으로 바꾸게 하는 하나의 理念, 관념의 힘으로 보고 民族國家 대다수 國民의 충성심을 집중시킨다고 보았다. 칼턴헤이즈는 民族主義를 愛國과 民族意識과의 融合體라고 보고 있다.
그는 民族의 基礎로서 言語와 歷史的 傳統을 重要시하여 言語야말로 貧富나 善惡 또는 賢愚를 막론하고 특정국가내의 사람들이 공유하며 그들을 다른 民族과 구별해주는 독특한 現像으로 보고 言語가 있음으로 해서 過去와 現代를 이어주고 한 民族의 凝集力을 結集시킨다고 보았다. 民族歷史的 傳統을 重要要因으로 보고 한 民族의 宗敎的, 領土的, 政治的 過去 등이 民族文化의 기초를 이룬다고 보았다.
그는 言語와 歷史的 傳統을 특히 중요시하여 政治的 통일 없이도 民族은 존재한다고 보고 이 모든 것을 소유한 民族이 政治的 統一과 主權의 獨立을 獲得한다면 民族國家로 출발한다고 보았다.
한편 愛國心이 나라에 대한 사랑으로 보고 愛國心의 對象이 民族國家로 될 때 民族主義가 發生한다고 보았다. 결국 民族意識과 愛國心의 融合體를 民族主義라고 보았다.
매크리디스(R.C.Macridis)는 民族主義를 說明함에 있어 民族性, 民族國家를 먼저 說明했는데 民族性은 人種的, 文化的인 一體性으로 看做하고 民族國家는 國家와 民族性을 함께 지녔을 때 존재한다고 보았다.
즉, 民族主義는 어떤 特定民族의 國家形成權을 主張하는 이데올로기이며 그것을 獲得하기 위한 政治運動으로 보았다.
칼 도이취(K.W.Deutsch)도 ‘民族國家가 政治權力을 獨自的으로 행사하는 것’을 民族主義라 하였다.
거드(H.Gerth)와 밀즈(C.Wright Mills)는 ‘民族國家 또는 國家를 形成코자 하는 민족의 이데올로기’라 規定하였고 실버트는 ‘人類의 事業의 非人格的 中心으로서의 國家를 認定하는 것’이라 하였고 윌슨은(D. H. Wilson) ‘民族國家를 위하여 個人의 最高의 忠誠이 發揮되는 知性의 狀態’ 라고 規定하였다. 이들의 主張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어떤 時代의 固定된 觀念이나 思想이 아니라 항상 變化할 수 있는 力動的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3. 韓國民族主義의 起源과 時期區分
첫번째는 우리 韓國的인 立場이나 제3세계의 立場에서 볼때 西勢東占의 시기에 거기에 대한 一次的인 抵抗運動이 상당한 特徵을 이룬다. 우리의 경우 爲正斥邪運動이니 義兵運動이니 하는 것은 대체로 朝鮮 傳統社會의 엘리트들이 자신의 體制를 守護하기 위해서 抵抗했던 것으로서 우리 최초의 民族正體性, 民族의 意識이 최초로 發見될 수 있는 시기이다.
두번째로는 19세기나 20세기초에 民衆運動이나 宗敎運動 같은 이를테면 東學이라든가 증산교라든가 이런 것에서 우리는 民衆性을 가지는 民族主義 運動의 어떤 理念性을 발견할 수 있다.
그 다음 세번째는 日帝 植民地 統治下에서 資本主義가 점점 從屬的인 상태로 수행되는 가운데 여러 資本主義的 都市들이 형성되고 새로운 近代敎育이 이루어 지고 運動의 양상이 階級的으로도 勞動者, 農民으로 옮겨간다든가 도시의 쁘띠 부르주아에게 옮겨간다든가 하는 양상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視覺에서 韓國의 民族主義를 볼 때 시기적인 內容이 變化하는 것, 民族主義 意識이 변화하고 그 의식을 담당하는 主體가 質的으로 달라지는 側面이 중요하다.
民族主義의 類型에 대해서 帝國主義的-侵略的 民族主義와 帝國主義에 대해서 자기 民族의 解放과 獨立을 위해 싸우는 民族主義의 두 가지로 대별(大別)하고 있다. 이러한 區分을 따를 때 韓國의 民族主義는 그 萌芽와 起源에서부터 외세로부터의 자기 民族의 解放과 獨立과 自主的 發展을 추구해 왔을 뿐 조금도 다른 나라와 民族을 侵略하려는 思想은 없었다. 그리고 民族主義라는 단어 앞에 특별히 '근대(近代)'라는 수사(修辭)를 붙이는 이유는, 한국 民族과 같이 이미 전근대(前近代) 시대에 민족을 형성한 나라에서는 前近代的 民族主義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이와는 구별되는 개념을 사용하기 위함이다.
한국 近代民族主義의 起源은 實學者들이, 中國中心의 世界觀과 세계질서였던 화이사상(華夷思想)을 깨뜨리고 朝鮮의 獨自性, 獨立性, 中心性을 自覺한 곳에서부터 萌芽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은 실학자들로 하여금 中國 中心的 世界觀을 革罷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홍대용과 정약용은 지원설(地圓說)과 지전설(地轉說)을 주장하면서 자연과학에 기초하여 화이사상을 분쇄하였고, 박지원은 학문의 높고 낮음에 관계없이 선진적인 것은 모두 배워들여 이용후생(利用厚生)에 힘써야 한다는 북학론(北學論)을 주장하였다. 게다가 박지원은 우리나라 고대사의 역사무대를 압록강 이북의 요동과 만주까지 넓혀서 사고하였는데, 이는 훗날 개화기의 신채호에게 계승되어 근대민족주의역사학을 창건하는데 모태가 되었다. 또한 이규경은 과학적이고 쓰기 편한 국문의 연구와 보급을 강력히 주장하였고,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울릉도와 독도에 대한 상세한 고증을 통하여 이들이 조선 고유의 영토임을 변증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조선은 두 개의 방향으로부터 커다란 도전을 받게 되었다. 하나는 외적(外的) 도전으로서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침입이요, 다른 하나는 내적(內的) 도전으로서 농민층으로 중심으로 하는 민중세력에 의한 반봉건(半封建) 투쟁이었다. 특히 후자의 내적 도전을 지배계급이 제대로 수용해내지 못하게 되면, 선진자본주의 열강의 심각한 도전 앞에서 민족사회가 분열하게 되어 자칫 식민지 . 半식민지 상태로 전락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면 이러한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어떠한 민족주의 사상들이 대두되었을까?
① 사상적 기원
19세기 중엽에 한국 민족이 만든 사상은 기본적으로 위정척사사상(衛正斥邪思想), 개화사상(開化思想), 동학사상(東學思想)의 세 가지 사조가 있었다. 이 중 위정척사사상은 구래(舊來)의 양반신분제도를 옹호하는 전근대적 민족주의의 범주에 해당한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먼저 등장한 개화사상의 역사적 기원은 18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인 출신의 중국어 역관(譯官)이었던 오경석은 1953-58년의 기간에 북경에 4차례 다녀 오면서 서양 열강들의 실체에 대해서 조금씩 눈뜨기 시작했고, 특히 1960년 영-불연합군의 북경점령사건 이후에는 조선의 민족적 위기를 절감하여 유홍기와 박규수의 지원을 받아 양반층의 영민한 자제들을 모아 개화사상 교육을 시작하였다. 3인의 개화사상의 비조들의 교육을 받은 김윤식, 김홍집, 김옥균, 박영교, 홍영식, 박영효, 서광범, 유길준 등은 1974년 경부터 김옥균을 중심으로 정치적 결사체인 개화파를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이들은 양반신분제도를 폐지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고, 서양 선진과학기술, 공장제도 등을 자주적 입장에서 수용하여 부강한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개화사상은 후에 갑신정변, 독립협회, 애국계몽운동 등으로 이어졌다.
동학사상은 서자(庶子) 출신의 최제우에 의해서 1860년 경부터 포교되기 사작한 민족적 종교사상이었다. 최제우는 서양 열강의 힘의 원천을 서학(西學)에 있다고 보고 서학에 대항하는 민족종교를 만들어 포교함으로써 이에 응전하려고 하였다. 또한 동학사상은 종래의 천인합일(天人合一)사상을 새로이 창조적으로 발전시켜 시천주(侍天主) 사상과 인시천(人是天) 사상을 정립하였으며, 독특한 평등사상으로써 양반신분제도를 철폐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東學思想에는 近代 民族主義 思想뿐만 아니라 農民的 民主主義 思想이 강력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東學思想은 후에 갑오농민전쟁, 천도교로 발전하여 결국 宗敎에 歸結되었다.
위정척사사상은 정통파 주자학(朱子學) 사상으로 굳게 단결하여 구제도를 강화함으로써만 서양 열강의 침략을 막아낼 수 있다는 사상이었다.
그 중심 신봉자들인 양반유생들은 서양의 과학기술을 기기음교(奇技淫巧)라고 규정하여 그 선진성을 부인하였다. 또한 그들은 세계(歲計)인 조선의 농산물로써 일계(日計)인 서양의 공산물과 교역하면 필연적으로 조선이 빈곤하게 될 것이라며 통상을 완강히 거부하였다.
위정척사사상은 정사(正邪)의 기준을 주자학에만 둔 주관주의적 사고방식이었으며, 당시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를 외면한 전근대적 민족주의였다.4)
위정척사사상은 후에 병인양요, 신미양요를 경과하면서 을미의병운동으로 전개되었고, 국권을 상실한 후에는 항일의병무장투쟁으로 이어졌다.
② 사건을 통한 기원
韓國民族主義 運動의 起源을 어디에서부터 찾을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학자에 따라서 그 주장하는 바가 매우 다르다. 한국 민족운동의 기원은 적어도 19세기말을 전후한 20년 동안의 어느시점이 되리라는 데에 대해서는 별로 異見이 없다.
다만 韓國 民族運動의 起點을 甲午農民戰爭에서 찾을 것이냐 아니면 3ㆍ1 運動에서 찾을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갑오농민전쟁에 포함된 民族主義的 性格을 인정하면서도 이것을 기원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포함된 民族主義的 强度에 대한 懷疑와 그의 성취도가 낮았다는 사실, 즉 民族運動이란 民族保存과 近代指向을 함께 갖추어야 하며 그 중에 하나만이라도 결여되어 있으면 民族主義의 계보에 넣을 수 없는데 甲午農民戰爭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는 사실과 民族運動으로서의 甲午農民戰爭은 실패했다고 하는 사실에 논거를 두고 있는 듯 보인다.
㉠투쟁목표의 다양성
1894년 6월에 이르러 日本軍이 대궐을 유린하고 한반도에서 韓國의 이해관계와 관계가 없는 淸日戰爭이 일어나 고부민란이 民族主義的 路線으로 轉向하게 되면서 동학의 民族主義가 합류됨으로써 대규모적인 反日戰爭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농민군의 내정개혁 요구가 안고있는 문제점은 그것이 근왕사상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 공화정의 요구도 제기되지 못했다.
㉡계급적 갈등 = 상하의 수직적 통합을 제공할 이데올로기가 부재했다. 갑오농민전쟁의 경우에 이러한 성격은 농민군에 대한 지주의 私刑이나 지주에 의한 혁명군의 응징에서 잘 나타나 있다. 신분제의 질곡? 애당초 삼남에서 농민전쟁이 일어났을때 儒林들은 두려움에 쌓여 있었고 실제로 농민군이 그들을 공격하는 사례가 발생하게 되자 유생들은 밤거리를 다니면서도 호위병을 거느리는 일이 많았다.
혁명군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유생들은 격문을 돌리어 ‘亂臣賊子’를 타도하자고 외쳤고, 실제로 의병이라는 이름으로 반혁명군을 조직하여 동학도를 처단하는 일도 있었다.
㉢지도세력의 미숙
㉣종교적 색채
결론적으로 호국신앙으로서의 동학사상에 포함된 민족주의가 韓末의 시대상황속에서 민란을 주맥으로 하는 민중운동에 접맥됨으로써 갑오농민전쟁으로 승화된 것이다.
第 2章 한국민족주의운동의 전개과정
民族主義運動은 그것이 역사에서 갖는 중요한 의미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됨으로써 많은 혼미를 낳고 있다. 한국 民族運動의 형성계기는 내재적인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의한 부르조와의 階級으로서의 대두에 의해서가 아니라 資本主義 發展의 植民地 종속형적 성격을 반영하여 밖으로부터의 침략의 위협이라는 민족적 위기에서 주어졌다. 이것은 韓國 民族主義의 최초의 담당자가 부르조아지가 아니라 民族的 危機를 階級的으로 自覺한 前近代的인 제 階級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意味한다.
1. 개항기에서 1910년까지의 시기
外勢의 侵略에 대한 對應에서 韓末 韓國社會는 內部的 矛盾을 尖銳化시키면서 사회구성에 따른 서로 다른 反應을 낳았다. 그것은 둘로 나누어지는데 첫째는 保守的 斥邪爲正的 對應과 近代化指向的인 開化派的 對應으로 나뉘어 지는 위로부터의 대응이며, 둘째는 농민을 중심으로한 아래로부터의 대응이라 할 수 있다.
가. 斥邪爲正運動
開港에 直面해서 最初로 民族的 危機를 느낀 階層은 舊支配階級이었고, 그들의 논리는 斥邪爲政的인 양이론(攘夷論)이었다. 이는 봉건적 재편성을 시도하고자한 것이며, 保守的, 地主的 性向을 지니고 있었다.(척사위정론은 민족적 위기를 극복하려는 것에 불과하고 그것을 통해서 당시 사회를 근대화하려는 것도 아니였으며, 또한 봉건제의 재편성과 강화를 위해 나라의 위기를 논하고 그럼으로써 백성을 억눌러 자기를 따르게 하려는 것이었다.)
강만길은 外勢에 저항하기만 하면 모두 民族主義的인 것은 아니다고 主張하고, 그것이 民族主義的이려면 사회를 개혁하려는 생각이 함께 있어야 한다고 主張하며 斥邪爲正論은 民族主義로 보기 어렵다고 主張했다5). 그에 논지대로라면 半封建的 改革的 指向은 강했으나 日本 依存的 性格이 강했던 開化派 운동의 성격규정도 어려워 진다. 斥邪爲正論이 民族主義가 아니라면 그럼 무엇인가?
보편적으로 民族主義는 야누스의 두얼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진보의 편에 또 어느 때는 보수의 편에 서기도 한다.
民族主義가 그 자체만으로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드물다. 그것은 특정한 時期에 특정한 이데올로기와 결합하여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의미에서 民族主義는 副次的인 이데올로기 즉 Secondary Ideology이다. 구한말 民族主義가 굳이 進步的, 改革的일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民族主義가 특정 시기에 어떤 背景에서 어떤 세력에 의해 어떤 사회 이데올로기와 結合하여 힘을 발휘하는지를 규명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이들 保守的 地主的 民族主義는 先進資本主義의 侵掠에 대해서 힘으로 맞섰고 그것을 위한 論理를 定立해 나갔다. 제네랄 셔먼호 사건, 병인양요(1866년), 신미양요(1871년), 斥和碑의 건립(1872년),척 사위정론의 전개(1860년대의 이항로, 개항기 1881년의 辛已斥邪運動, 1895-6년 斥邪衛正論) 그리고 1, 2차에 걸친 의병봉기(제1차 1895년,제2차 1905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와 같은 保守的 地主的 民族主義는 體制維持的인 保守的 限界를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니나 北方據點論에 의한 國境地方의 獨立運動, 國內의 獨立運動으로 轉移함으로서 나름대로의 意義를 가지게 되었다.
나. 의병운동
反日 義兵運動은 日帝의 侵掠이 적극화한 상태에서 한국민중의 장기간에 걸친 반침략적 무력투쟁이었다. 한국 민족에게는 의병의 전통이 있었다. 근대에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려 하자 한국 국민들은 그 전통 위에서 자발적으로 민군으로서의 의병을 일으켜 국권 회복을 위한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근대의 항일 의병운동은 을미의병의 단계, 을사 5조약때까지 재봉기의 단계, 을사조약 후 군대해산까지 확대기의 단계, 군대해산 후 고양기의 단계, 1909년 11월 이후 퇴조와 독립군으로의 전환 단계 등 5단계에 걸쳐 일어났다.
1단계는 을미의병의 단계로서 1895년 10월 민비시해 사건과 1876년 1월의 단발령에 분노하여 유생들이 일으킨 의병운동이었다. 을미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는 국모의 원수를 갚고 친일 개화 정권을 타도하려 한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는데 인적 구성은 의병장은 모두 위정척사파 유생이었고 병사는 유생들과 농민들이었다. 을미의병의지도 이념은 위정척사사상으로서 소중화 의식, 고유 의관의 보전 등을 주장했다. 갑오경장 개화파 정부는 각지의 의병을 진압하기 위해 친위대를 파견하였고 그 틈을 탄 친러파들이 아관파천을 일으켰다. 국왕의 설득으로 의병은 모두 해산하였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러일 전쟁을 도발하고 제 1차 한일 의정서를 체결한 다음 단계적으로 한국을 침략하기 시작하자 이에 대항하여 1904년 7월 전후로 의병운동이 재봉기했다. 재봉기는 허위, 이상천의 통문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2단계 의병운동의 특징은 1차 한일 의정서를 일제의 본격적인 한국 침략의 시작으로 보고 이의 파기와 일본군의 내정간섭 중지, 일본군의 철병을 주장한 것이다. 제 3단계 확대기의 의병운동은 을사 조약의 강제체결에 의하여 외교권 등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고 일제가 통감 정치를 자행하자 이에 항거하여 봉기한 것이다. 민종식의 의병 부대가 봉기 하여 흥주성을 점령했으나 일본군에 패퇴했고 이후 최익현 신돌석 등이 봉기했다. 이 시기 의병 부대 구성의 특징은 의병장들이 신돌석을 제외하고 모두 양반 유생들이었고 병사들은 대부분이 농민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시기 의병운동의 지도 이념은 이전처럼 위정척사사상이었다.
일제는 1907년 고종을 강제 양위시키고 정미 7조약을 강제 체결하였으며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한국군은 이에 복종하지 않고 봉기하기 시작하여 서울과 지방에서 의병전쟁을 전개하였다. 직업군인들이 의병부대에 합류함에 따라 의병운동은 高揚期에 들어섰다.
이 시기 의병부대의 특징은 일본군경에 대한 직접적 항전, 義兵 및 義兵長 구성에 있어서 군인 출신과 평민출신의 의병장 증가, 의병부대의 전투성․조직성․기동성․지속성의 증가 등을 들 수 있다.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부대들은 부대별로 의병전쟁을 전개하면서 상호간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이인영 의병부대와 허위 부대가 중심이 되어 연합의병운동을 추진하다가 1907년 11월에 경기도 양주에 각지의 의병부대들이 모여 십삼도창의대진소(十三道倡義大陣所)를 성립시켰다. 연합의병부대의 궁극적인 목적은 서울 탈환이었기 때문에 서울로 진입하기 위하여 일본군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연합의병부대는 대오가 갖추어지자 1차 서울 탈환 작전을 시작하여 선동대가 동대문 밖 30리 지점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후속부대가 도착하지 않아 격전 끝에 퇴거하였다가 본대가 도착하여 다시 집결하였다. 이 때 총대장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하여 작전이 일단 중지되었다. 이는 오는 도중에 무기가 고갈되었기 때문에 의병의 희생을 줄이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연합의병부대는 2차 서울 탈환 작전을 전개했다. 서울 근방에서 각도 의병부대들과 일본군 수비대 간의 전투가 치열해지자 일제는 본국에서 병력을 증파하여 본격적인 공격을 시작하였다. 2차 작전은 화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했으나 전국의 의병운동을 크게 고양시키고 소규모 의병부대들의 대동 단결과 상호 연대를 강화시키는 등의 효과를 가져왔다. 십삼도창의대진소 의병연합부대는 1908년 5월 중순에 30개조의 의병측 요구조건을 일제 통감부에통보하고 서울 시민들에게 알렸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 30개 조항이 종래의 위정척사사상을 극복하고 개화사상과 통합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변화는 의병들의 활동 속에서도 나타났다. 이 사실들은 고양기의 의병운동의 지도 이념이 위정척사사상과 개화사상이 합류, 결합한 형태의 민족주의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낸다. 이러한 변화는 병사와 의병장 구성의 변화에 관련된 것이었다. 1908년 6, 7월 이후에 의병장들이 많이 전사했으나 1909년에도 의병운동은 계속되어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 일본군은 1909년 9월부터 2개월간 남한대토벌 작전을 실시하여 의병들이 많이 죽거나 체포당하였다. 이 후 의병운동은 급속히 퇴조하여 독립군으로의 전환기에 들어갔다. 의병무장투쟁은 화력의 고갈로 퇴조하였으나 남은 의병들의 항일 무장투쟁은 일제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그리고 국내에서의 의병운동이 불가능해지자 의병장들은 만주와 노령으로 망명하여 의병을 독립군으로 전환시켰다. 5단계 의병운동에서는 특히 황해도, 경기도 일대 의병부대들의 활약이 컸다. 1914년 5월에 한말 의병무장투쟁은 종언을 고한다.
한말 의병운동은 1만 6700여명이 순국한 위대한 애국 운동이었다. 이 운동이 실패한 원인은 무기의 열악함과 군사 훈련 부족, 통일적인 현대적 군사전략 부족, 일본군의 야수적 토벌 작전, 국내 조건과 국제 조건의 불리함 등이었다. 의병운동은 애국주의를 높이 고양하고, 반침략 민족운동을 전민족적․전국적 무장 투쟁으로 발전시켰으며 식민지화를 3년간 지연시켰고 애국계몽운동을 보위했을 뿐 아니라 위정척사사상과 개화사상의 대립을 처음으로 해소, 결합하였고 독립군 무장투쟁의 원류가 되었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다. 개화운동
① 갑신정변
한국근대민족주의의 형성과 전개 과정에서 먼저 하나의 산맥을 형성한 것은 초기 개화파의 자주적 개화운동과 갑신정변이었다.
초기 개화운동과 갑신정변의 지도자는 바로 金玉均이다. 김옥균은 박규수,오경석,유홍기 등의 지도를 받으며 개화사상을 선전,교육하고 양반출신 친우들을 동지로 규합하였다. 1874년경부터 정치적 결사로서의 초기개화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개화파에서도 급진파를 開化黨이라 부를 수 있는데 이들은 청국의 속방화 정책과 그에 애합한 민비수구파 정권을 타도하기위해 1883년 봄부터 정변을 꿈꾸기 시작했다. 김옥균은 척국세력을 몰아내고 수구고식배를 소제하여 大更張改革을 단행하는 방법으로 武力行事를 택했다. 이는 국왕의 밀의에 의탁하면서 무력으로 정변이나 혁명을 일으켜 먼저 정권을 장악한 다음 급진적으로 개혁사업을 신속히 단행하는 방법이었는데 당시의 상황에서는 상당히 합리적인 방법이라고 할 수 있었다.
개화당은 결국 1884년 12월 4일 저녁 홍영식이 총판으로 있는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을 계기로 정변을 일으켰지만 三日天下로 끝나고 만다. 이 실패의 원인을 두고 많은 논쟁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요인은 누가 뭐래도 外勢에 있었다. 청군이 군사적 공격을 자행하여 불법적 犯闕을 해서 개화당의 신정부를 붕괴시킨 것이나, 개화당이 청군을 견제하여 막으려고 주한 일본공사관의 일본군 무력을 이용하여 이를 개화당 무력의 보충무력으로 정변에 끌어들였다가 일본군이 철병하자 신정부의호위무력이 급격히 약화되어 정변이 와해되는 등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들은 단연 외세에 있었던 것이다. 이는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도 외국의 힘을 빌어서 하면 실패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남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은 한국역사에서 최초로 근대국가와 시민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최초의 과감한 민족주의 개혁운동이었다. 그리고 3일밖에 지속되지 못했지만 갑신정변의 신정부는 한국 최초의 근대적 정권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을 두고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비판을 통해 민중과 유리된 개혁이었다고들 하지만 사실 단기간에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위로부터의 자주근대화’는 세계사에서 늦게 근대화를 시작한 나라 들 중에 성공한 나라들이 모두 단기간에 위로부터의 근대화를 수행한 나라들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갑신정변은 당시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갑신정변의 실패로 한국민족은 적절한 시기에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설립하여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가장 선각적이고 영민한 인재들을 잃음으로써 이 후의 역사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는 작지 않다. 우선 갑신정변은 한국민족이 개혁을 통해 자주부강한 근대국가를 형성하려한 첫 번째 자주근대화운동이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뿐만 아니라 갑신정변은 한국근대사에서 개화운동의 방향을 정립해 주었고 반침략 독립운동에서도 하나의 기원을 정립했다. 한 마디로 갑신정변은 한국의 근대민족주의 형성과 발전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운동으로서 이 후의 모든 민족운동은 갑신정변을 계승하여 그것을 반성하고 발전시켰다고 볼 수 있다.
② 애국계몽운동
우리 나라의 역사에 있어서 愛國啓蒙運動은 1905년 11월 을사5조약에 의해 일본제국주의에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기 전후 開化自强派가 중심이 되어 완전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전개한 1905년~1910년 사이의 民力啓發과 민족독립역량 양성운동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계몽운동은 1905년 이전이나 1910년 이후에도 있었지만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애국계몽운동은 1905~1910년사이의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개화자강파가 전개한 운동만을 한정해서 얘기한다.
한국 민족은 1905년 11월 을사5조약에 의해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게 되자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을 광범위하게 전개했다. 이 때의 국권회복운동은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의 양방향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의 내용에는 신교육구국운동, 언론계몽운동, 실업구국운동(민족산업진흥운동), 국채보상운동, 신문화ㆍ신문학 운동, 국학운동, 민족종교운동, 해외 독립군 기지 창건운동 등이 포함된다.
대한자강회와 신민회를 비롯한 다수의 애국계몽운동가들과 애국계몽운동단체와 민중들은 일제의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국내외에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헌신적으로 전개하였다.
물론 애국계몽운동은 1910년 한일합방을 막는 데는 실패하였다. 그러나 애국계몽운동의 민족주의는 몇가지 측면에서 그 후의 한국민족과 그 독립운동에 중요한 영향과 공헌을 주었다.
우선 애국계몽운동은 국민의 사상과 지식을 발전시키고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화되는 최후의 5년을 ‘민족대각성의 시대’,‘민족역량증강의 시대’로 활용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은 새로운 근대적 민족문화를 창조하였다.
그 외에도 애국계몽운동이 공헌한 점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애국계몽운동은 근대적 민족교육의 창조와 발전에 공헌하였고 3.1운동의 직접적인 원동력을 공급하기도 했다. 또한 의병운동과 함께 독립군 무장항쟁을 탄생시키는데 일조하기도 했다. 한 마디로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민족주의는 한국민족의 새로운 근대민족문화를 창조하고 자기 민족과 사회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3.1운동과 독립군 무장투쟁을 비롯한 독립운동의 직접적인 원류를 이루기도 했다.
2. 일제 식민통치 시기
민족운동을 규정하는 내부적 제요인으로로 한 사회의 사회구성체적 성격문제를 들 수 있다. 이른바 “사회구성체론”!. 박현채는 사회구성체에 대해서 설명하기를 사회구성체는 단순한 경제적 관계뿐만 아니라 경제적 운동과정에서 경제외적 밑받침으로도 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개념은 여러 경제제도 가운데 한 사회구성체에 알맞은 상부구조를 가지게 되었을때 지배적인 경제제도로 되면서 성립한다. 박현채는 일제식민지통치하의 한국사회를 그 구체성에서 식민지반봉건사회로 성격 규정하나, 그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사회이며 그것을 규정하는 부차적 성격 내지 특수한 성격으로서의 식민지 반봉건사회를 상정했다. 그것은 식민지 자본주의와 지주-소작관계에 기초한 반봉건적 토지소유라는 두 큰 지주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 초과이윤 수탈의 원천이 이미 독점단계에 들어선 식민지자본주의와 반봉건적 토지소유에 기초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이 한국지배를 나섰을 당시 일본 자본주의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국은 자본주의 경제 확립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동반되는 민주적 개혁이 주어지지 않았다. 일본자본주의가 한국에 요구한 것은 낙후한 일본농업을 수량적으로 보완하려는 데 있었다. 만약 한국이 일본과 같은 후발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영국, 프랑스와 같은 선발선진자본주의국가에 의해 예속되었더라면 마르크스가 『영국의 인도지배』에서 예견한 것처럼 제국주의 식민화의 나름대로의의 진보적 역할을 기대할 수 있었으나, 한국을 낙후한 일본농업을 수량적으로 보완하기 위해서 지배한 일본 제국주의의 성격은 자본주의 이식과정이 동반하는 민주적 성격을 사상시킨채, 파행적 종속적 왜곡적 경제구조를 가져오게 만들었다.
식민지 종속이후 한국에 있어서 일본자본의 운동양식에 따른 단계는 다음과 같이 설정된다. (1)자본의 원시적 축적기(1905-1918),(2)산업자본 단계(1919-1929),(3)금융자본 단계(1930-1945)이다. 식민지 수탈의 첫째단계에서는 총독부 권력에 의한 경제외적 수탈이 주된 것이 되고 계급분화와 분해는 농민층 이외에는 크게 진행되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식민지화에 따른 민족적 위기의식은 사회적 인종 공동체인 민족의 위기를 일차적인 것으로 만들었으므로 사회적 모순은 식민지 권력에 의한 경제외적 수탈을 둘러싼 관계에서 주어지게 된다. 3.1운동이 비록 안으로 지주-소작관계를 둘러싼 계급적 모순을 내포하면서도 계급적 모순에 매개됨이 없이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전민족적 저항으로 된 것은 이와 같은 사정의 반영이다. 식민지지배의 제2단계에 이르면 자본운동의 산업자본단계로 이행에 따라 생산자 혹은 노동자로서의 한국민은 구체적인 경제관계에 있어서 상호관계를 갖기에 이른다. 부분적인 공업화 과정은 식민지자본주의하 자본 임노동 관계를 식민지하 한국사회이 기본모순으로 대두시키면서, 노동자계급을 민족주의 운동의 주류로 등장시킨다. 식민지 지배의 제3단계에서 주어진 식민지 한국경제의 급격한 공업화는 자본 임노동관계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 시기의 인간간의 사회적 관계에서 주된 것으로 만들었다. 전시통제하의 경제통제는 경제외적 수탈을 식민지 초과이윤의 원천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전민중적=전민족적인 요구가 민주주의적 변혁과 민족해방이라는 민족주의적 요구로 되는 논리가 주어진다. 곧 민족주의적 지향이 계급적 이해관계와의 일치속에서 하나로 된 것이다.
가. 3ㆍ1운동
1919년의 3․1운동은 한국의 민족주의가 그것에 앞서는 역사적 시기의 여러 운동을 포괄하면서 사회경제적 조건에 귀결되어 민족문제의 해결을 추상화된 민족적 요구로 시도한 최초의 운동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적 모순이 계급적 모순에 의해 매개되지 않았다는 데서 그 한계를 지닌다. 이 시기의 일본 독점자본의 식민지 초과이윤의 원천은 총독부 권력을 매개로 한 경제외적 수탈에 있었다. 토지에 대한 약취인 토지조사사업과 임야조사사업으로 농민층은 토지를 잃고 재생산의 기반이 약화 되었을 뿐만아니라, 도시에서는 일본자본의 진출에 의한 자본 임노동 관계의 생성으로 근대적 노동자 계급이 생성된다. 이와같은 사회 경제적 상황에서 추상적 민족 요구를 대중투쟁으로 승화시킨 것은 지난날의 애국계몽운동의 소산인 민족지식인이었다. 이들은 식민지 억압과 수탈의 첨병이었던 총독부 권력애 대한 민족적 모순을 전민족적 힘으로 전화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3․1운동은 근대적 민족형성의 용광로가 되고 우리 역사에서 추상적인 민족적 요구의 최초의 표현으로 된다. 3‧1 운동은 일제하 한국민족의 독립운동의 대분수령으로서 그 후에 일어난 여러 갈래의 독립운동의 모체가 되었다.
① 3‧1 운동과 民族自決主義 : 한말 한국민족주의의 獨立사상은 “自主富强한 근대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완전독립론>,<절대독립론> 이었다.
사상면에서 3‧1 운동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 이전까지 한국민족주의의 독립사상과 독립역량이 국민속에 축적되어 폭팔한 것이었다. 한말 애국계몽운동의 전술의 하나로서 ‘機會論’은 먼저 독립을 쟁취할 실력을 양성했다가 국제정세의 변동을 기민하게 포착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하여 성과를 획득한다는 것이다. 3‧1 운동의 지도부는 처음부터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한계를 알고 있었으며, 오직 이것을 ‘기회’로 기민하게 포착하여 독립운동에 활용하려 했다. “민족자결주의는 모든 식민지문제를 벌집 쑤셔놓는 것을 의미한다는 우려가 프랑스와 영국에서 표명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명백히 그런 의도는 아니다.그것은 분명히 전쟁으로 야기된 식민지의 권리에 적용된다. 그것은 전쟁의 결과로 국제적인 고려대상이 된 독일 식민지 및 기타식민지를 뜻한다.”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3‧1 운동에 참가한 2백2만명 이상의 절대다수 민중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으며, 전적으로 국내의 독립운동의 발전의 연속선상에서 3‧1 운동을 자발적으로 일으켰다는 점이다.
② 3‧1 운동의 方法과 暴力 非暴力 : 당시의 독립운동의 객관적 조건을 일제의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역량과 관련시켜 보면, 일제는 정규군,헌병경찰,조선총독부 행정조직의 3중의 탄압역량을 준비하여 배치. 당시 독립운동의 주체적 조건을 보면 일제의 극단적인 식민지 무단통치의 강압속에서 한국인들은 ‘완전무장해제’를 당하여 국내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폭력의 준비는 커녕 일제에 대항한 최소한의 무기도 갖지 못했다.
③ 民族代表 33人과 民衆 : 3‧1 운동은 <初期組織段階>와 <民衆運動段階>로 구분할 수 있다. 민족대표 33인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初期組織段階>이고, 민중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民衆運動段階>에서이다.
④ 社會階層別 참가와 知識人 農民層 : 3‧1 운동은 <全民族的> <擧族的> 독립운동이다. 3‧1 운동에는 민족을 구성하는 각계각층의 모든 민족성들이 계급적 이익이 아니라 <독립>의 쟁취라고 하는 민족적 이익과 민족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전민족적>으로 참가했다. 先導層-主力層-參與層!! 선도층? 운동의 전체를 각 수준에서 먼저 앞장서서 조직하고 주동한 집단을 의미한다. 주력층? 실제의 시위운동의 주력을 담당하고 운동의 中心戰力과 基本戰力과 主要戰力을 형성하여 활동한 집단을 의미한다. 참여층? 실제의 시위운동에 주력층과 마찬가지로 열정적으로 참여했으나 그 전력이 전체 운동에서 중심이 되기에는 미흡한 집단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때, 선도층의 역할은 지식인층이 수행했고, 주력층의 역할은 농민층이 수행했다. 사회계층별 활동의 특징을 보면 첫째, 지식인층 둘째, 시민층 商人層의 撤市. 셋째,노동자층 당시 국내의 한국인 노동자는 약 4만9천명이었다. 이 중의 326명이 수감되었다. 1919년 노동자의 파업건수는 84件 (1918년 50件, 1920년 82件) 넷째, 농민층 일제의 식민지배로 가장 가혹한 수탈을 받은 계급이었다. 농민들은 가장 전투적이었다.
⑤ 3‧1 운동의 成功과 失敗
梶村秀樹6) : 부르주아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광범위한 대중의 지향을 결집하는 정치중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식민지화에 반대하는 애국계몽운동에서 국권회복운동으로 그리고 3․1운동의 말단까지는 그러하였다. 총독부 관헌의 탄압의 안목도 그들에게 향하고 있었다. 3․1운동에 있어서 그 동기를 만든 33인의 성명에서는 일체의 정치적 결사가 비합법화 되어있는 조건아래서 종교인과 최남선 등의 문필가가 표면에 섰다.
그러나 모두 그들로서 대표되는 저명한 특히 1920년대 이후 부르주아 민족주의 지도자의 총독부 관헌에의 懇願(간원)의 자세는 피를 흘리며 관헌과 대결한 무조직의 대중에 의해서 운동과정에서 뛰어 넘어가고 있다. 3․1운동이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사이에는 비타협적인 독립투쟁에 대한 회의가 점차 확대되어 가고 20년대 전반을 과도기로 하여 민족해방투쟁의 주체는 부르주아에서 노동자 농민과 사회주의자에게로 이행되어 갔다. 3․1운동에서 이룩된 한국 민족주의의 추상적 민족 요구에의 단일화는 바로 동시에 그 분열의 시작이었다.
(1)상해 임정과 독립군 투쟁에서 표현되는 보수적 지주적 민족주의의 흐름 (2)부르주아적 민족주의의 갈래
(3)민족부르주아지와 결합된 소시민적 민족주의의 갈래
(4)노농운동으로 되는 민족주의의 흐름등이다.
나. 3ㆍ1운동 이후의 민족운동
①민족해방운동의 분화
㉠부르조와운동의 분화: 3ㆍ1운동 이후 민족운동에는 절대독립론, 독립전쟁론이 지속되는 한편 독립준비론, 실력양성론, 외교독립론 등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일제의 강점 이후 의병전쟁의 계열을 계승하며 만주, 연해주 등지에서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해 가면서 무력항쟁을 전개하는 계열들은 독립전쟁론을 견지하였다.7) 홍범도, 김좌진 등은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이런 전승에 힘입어 만주의 군소독립운동단체들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로 통합되었고 이 3부는 만주의 조선이민을 기반으로 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쟁기지를 한층 발전시켰다. 3ㆍ1운동에서 선언했던 독립의지를 구체적 정부형태로 결실을 맺은 상해임시정부는 연통제와 외교활동에 주력하였지만 효과를 얻는데는 실패하였다. 이런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난하면서 독립운동의 방향전환을 위해 상해, 만주, 노령 지방의 민족운동단체가 1923년 1월 국민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의견이 팽팽히 맞서게 되고 통합정부라기 보다 하나의 개별적인 독립운동단체로 침체되어 갔다.
민족주의계열은 분열해 가는 한편 친일적 노선도 등장하였다. 이들은 민족개량, 실력양성, 자치를 지향하고 언론, 출판기관을 통해 계몽활동을 하고 민족개량주의운동을 펼쳐 갔는데 이는 일제의 민족분열정책의 효과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부르조와 민족운동이 분열, 분화해 가는 과정에서 항일운동의 전선을 통일시키기 위해 사회주의자와 연대를 노력하였다. 이런 결실로 1927년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가 결성되었다.
㉡사회주의운동과 조선공산당: 민족해방을 위한 새로운 이념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보급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과 부르조와 민족운동의 한계 등이 용이한 조건을 만들어 주었다. 사회주의 운동은 1920년대 이후 심화되는 식민지하의 민족모순, 계급모순의 해결을 지향하는 민족해방운동의 노선으로 사회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조선공산당이 막을 내린 이후에도 사회주의운동노선을 지향하는 운동들이 노동, 농민, 청년운동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 노동, 농민운동의 성장: 일제의 경제적, 정치적 지배가 강화되는 조건하에서 반일민족해방운동의 주체로서 진출이 두드러졌다. 노동운동을 보면, 일본의 자본유입과 식민지산업의 발전에 따라 노동자의 수는 증가하는 반면 노동조건은 악화되어 노동쟁의가 증가하고 있었다.1924년부터 노동조합이 늘어나고 조선노농총동맹 등의 중앙의 노농단체가 설립되고 노동운동이 조직적으로 추진되었다. 농민운동은 소작쟁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처음에는 면단위의 농민단체에서 시작되어 점차 합법적 대중조직으로 강화되었고 조선노동공제회에 의해 소작쟁의가 지도되었다. 이후 농민총동맹은 1927년 32개 산하 농민단체와 2만 4천명을 회원으로 하는 전국 농민운동의 총본산으로 발전했다. 1920년대의 노농운동은 민족해방운동이 대중적인 차원으로 확산, 발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른 정치, 학생운동과 긴밀한 연결을 맺고 일제에 투항하였다.
㉣ 신간회운동: 1920년대에는 다양한 抗日運動이 展開되었고 理念的으로 부르조와 운동계열과 사회주의계열로 대별되고 있었다. 1927년 2월에 결성된 신간회는 兩 系列의 運動이 최초의 연대를 보여준 民族聯合戰線이었다.
신간회는 1927년 2월 창립된 일본제국주의 통치하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 단체였다. 따라서 신간회는 3ㆍ1운동 이후 갖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던 民族運動을 전체적으로 파악할수 있는 좋은 연구대상이다. 더욱이 신간회는 청년, 여성, 형평, 노동, 농민, 사상운동 등과 조직적으로 연계되어 전개되었으므로 신간회 연구를 통하여 그 운동들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킬수 있다. 부르조와 민족주의자들이 자치운동을 전개하자 이에 반대하는 民族主義者들은 사회주의와의 연대를 통해 항일운동을 공고히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滿洲, 中國에서는 국민대표자회의가 실패한 후 분열된 독립운동단체들을 통합하려는 民族唯一堂運動이 일어났다. 이런 배경 하에 신간회가 창립되었고 활발한 활동을 하였지만 일제의 탄압과 내부의 모순심화로 분열되어 해체되었다.(1931.5) 신간회는 1920년대의 식민지상황에서 민족해방운동의 하나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하였으나 식민지하 문제점들으로 해체되었다.
②민중운동의 활성화와 항일무장투쟁의 발전
㉠ 노동, 농민운동의 발전: 1930년대에 와서 일제의 파쇼적 억압과 수탈에 저항하여 더욱 치열하게 발전하였다. 새로운 방향으로 공개적 합법활동에서 비합적 활동으로 파업투쟁이나 폭동화의 양상을 띠게 되었다. 노동쟁의는 산업합리화라는 명목으로 자행된 임금인화,노동강화,부담금의 강제징수에서 일어난 것이 많았다. 평안도, 함경도 등에서 자주 발생하였고 동맹파업이 일어났고 비합법적 형태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노동쟁의는 규모나 횟수면 에서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농민운동도 새로운 양상을 보였는데 1937년에는 소작쟁의가 36,799건에 달했다. 주로 일본인 대농장을 중심으로 폭동적인 형태의 쟁의가 발생하였다.1930년대 이후 치열하게 전개되던 노농운동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는 시점에서 줄어들었다. 그러나 쇠퇴를 의미한 것은 아니고 항쟁이 계속되었다. 해방 직후 발생한 노농운동은 식민지말기의 역사적 경험과 무관하지 않다.
㉡ 항일무장투쟁의 발전: 무장투쟁의 경험은 의병전쟁이나 1910,20년대의 독립군활동을 통해 축적되어 있었다. 대표적인 단체로는 만주를 중심으로 한 동북항일연군 및 조선광복회, 중국화북지방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동맹, 중경으로 중심으로 한 臨時政府 및 光復軍의 활동이 있었다. 만주지역은 조선인유민들이 한말부터 이주해 살던 지역으로 많은 朝鮮人이 살고 있었다. 3ㆍ1운동 이후 민족주의의 무장투쟁단체들은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로 나누어 활동하였다.
이 3부는 合作을 시도했으나 한족총연합회, 혁신의회, 국민부로 개편되었다. 한족총연합회는 1930년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고 만주사변 후 한국독립군을 편성하여 일제에 저항하였다. 滿洲事變 이후 中國人의 抗日意識도 높아져 연대투쟁도 고양되었다. 그리고 滿洲에서 이 지역 朝鮮人의 抗日統一 全線體인 在滿韓人祖國光復會가 結成되었다.
한편 中國 華北의 沿岸지역에서도 據點이 마련되어 1932년 上海에서 義烈團과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등 滿洲에서 後退한 武裝勢力을 中心으로 組織되었던 한국민족혁명당은 1937년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당명을 바꾸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光復軍의 活動은 上海臨時政府가 中京으로 옮긴 후 始作되었고 1940년 광복군을 결성하며 시작되었고 조선의용대가 들어옴에 따라 군대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들은 뚜렷한 활동을 하지 못하고 日帝가 무조건 降伏을 함에 따라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第 3章 韓國民族主義의 評價
韓國의 近代 民族主義는 朝鮮 後期 實學思想에서 萌芽가 形成되고 뒤이어 西洋 資本主義 列强의 도전으로 말미암아 造成된 民族的 危機와 中世社會의 해체과정에서 造成된 封建的 危機 속에서 그에 應戰하여 外勢를 물리치고 民族을 구제하는 思想으로 形成된 것이었다. 그 내용으로는 開化思想이 市民的 民族主義의 類型으로 形成되었고, 東學思想이 農民的 民族主義의 內容으로 形成되었으며, 이 두 類型의 民族主義가 韓國 近代民族主義의 두 개의 큰 흐름을 形成하였다.
반면에 爲正斥邪思想은 外勢의 侵入을 封建的 舊體制를 强化하여 물리치려 함으로써 前近代的 民族主義의 特性을 갖게 되었다.
韓國 近代社會思想史를 보면 밖으로 外勢의 侵略에 대항하는 問題가 절실할 때에는 近代民族主義로서의 開化思想과 東學思想은 물론이요, 前近代的 民族主義로서의 爲正斥邪思想도 運動에 있어서 연합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안으로 개혁의 문제가 대두할 때에는 近代民族主義 內部의 開化思想과 東學思想도 葛藤과 衝突을 일으켰을 뿐만아니라, 前近代民族主義인 爲正斥邪思想과는 革命과 反革命의 極限的 對決과 相好鬪爭이 展開되는 일이 많았다. 1884년 甲申政變과 1894년과 1895년의 민비구체제정권, 甲午農民戰爭, 甲午改革, 乙未義兵運動 등은 이러한 葛藤과 鬪爭의 典型的인 경우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市民的 近代民族主義 흐름으로서의 開化思想은 初期開化思想->甲申政變->獨立協會->愛國啓蒙思想으로 크게 發展하였고, 農民的 近代民族主義 思想으로서의 東學思想은 初期東學思想->甲午農民戰爭->天道敎로 발전하여 결국 宗敎에 귀결되었다.
반면에 前近代的 民族主義 흐름으로서의 위정척사사상은 丙寅洋擾->辛未洋擾->乙未義兵運動을 거쳐 1905년 國權을 빼앗긴 이후에는 各界各層의 抗日義兵武將鬪爭에 主導的으로 聯合하였다. 두 개의 흐름의 韓國近代民族主義와 한개의 흐름의 前近代 民族主義는 서로 葛藤을 일으키면서 1919년 3ㆍ1運動에 이르러 韓國近代民族主義의 發展에 한 단원을 이루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Ⅲ. 結論
民族主義는 원래 民族의 單位와 國家의 單位를 一致시키려는 政治原理이며 民族國家의 形成과 發展을 꾀하려는 이데올로기와 運動이다. 朝鮮 後期 外勢의 侵略과 國內의 政治混亂으로 危機意識이 팽배해 있어 이를 극복할 救國方案으로 爲正斥邪派, 開化派 등이 있었으며 차이는 있더라도 外勢로부터 主權을 守護하여 民族의 保存을 꾀한다는 점에서는 一致하고 있다.
開港期의 韓國民族史의 客觀的 要請은 獨立과 發展, 自主와 進步가 不可不利의 關係로 統合된 것이었으며, 自主的 近代化를 實現하지 않으면 나라의 獨立도 지킬 수 없는 그러한 性格의 도전에 직면한 것이었다. 1905년 日帝가 韓國을 半植民地화하고 1910년에는 완전히 强占하였다.
民族獨立運動은 단순한 獨立運動에 局限되는 것이 아니라 反封建鬪爭과 反帝國主義鬪爭이 병행되었다. 넓은 의미에서 民族運動은 歷史運動이며 때로는 이데올로기의 表現이고 하나의 大衆運動이며 民族運動의 主體는 個體民族이다.
따라서 民族主義의 바람직한 방향은 어느 小數集團의 힘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國民大衆 속에서 그 힘이 나온다. 그러므로 民族主義와 民族運動은 不可分의 關係이다.
또한 民族主義는 本質的인 思想의 要素를 가지고 있는 民族成員의 感情的인 性格이 강하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政治體制와 接合해서 民族政治化, 民族經濟靴, 民族文化를 달성하는 경우가 있게된다. 韓國近代史의 基本的 側面은 韓國人 스스로 解放을 위해 展開한 主體的 變革의 움직임이었다.
韓國의 近代 民族運動은 外勢의 侵略에 抵抗하는 가운데 武力反亂-文化的 啓蒙運動-政治的 獨立運動의 課程을 밟으면서 成長했고, 러시아 혁명 후에는 점차 左右로 分裂된 民族運動이 民族意識과 階級意識의 葛藤속에서 左右合作의 모색과 그 挫折을 맛보아 오다가 解放을 맞이했다. 日帝가 붕괴하자 韓國에서는 가히 市民社會의 폭발이라 할만큼 政治 社會團體의 突出現像이 나타났다.
그러나 解放은 주체적인 民族獨立鬪爭의 直接的인 歸結이 아니라 聯合國의 戰後處理方式의 산물이었다. 그것이 낳은 最大의 悲劇은 美ㆍ蘇 兩國軍의 進走에 따른 韓半島 分割占領이었다. 自主的인 近代民族國家를 建設하려는 韓民族의 한결같은 念願은 당초부터 그 實現이 美蘇의 對立과 그 政策의 歸趨에 따라 크게 조건지어질 수 밖에 없었다.
世界史적인 흐름은 시급한 民族國家의 形成을 요구했지만, 한국은 이에 실패하고 國權을 日帝에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韓國의 近代民族主義는 發展되어 갔고, 日帝 强占期 내내 民族的 正體性을 잃지 않고 日帝에 대한 끊임없는 鬪爭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긴긴 植民地 기간동안 우리 民族이 正體性을 잃지 않고 유지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해 民族運動은 얼마나 影響을 주었을까? 민족적 정체성의 유지에는 한민족이 5년천 동안 單一民族國家를 形成해 왔다는 잇점이 많이 작용한 것이 아니었을까? 해방 직후 보였던 民族의 分裂 樣相은 과연 우리에게 통합 이데올로기로서의 民族主義가 과연 形成되어 있기나 했던 것일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우리에게 近代史는 계속되고 있다. 한국 근대사의 역사적 성격은 통일된 근대 民族國家의 樹立이라는 前提 아래 分斷이 극복되고, 統一國家가 수립하는 데 있다고 생각된다.
開港이후 近代史를 展開해온 우리의 一貫된 要求은 '近代 民族國家의 樹立'이었다. 民族主義는 이와같은 우리의 一貫된 要求를 政治理念化한 이데올로기이자 運動이었다. 開港期, 植民地 時代, 分斷, 그리고 南北韓의 歷史를 통틀어 보았을때 民族主義는 항상 歷史의 중심에 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쟁취해야 할 '統一'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간 韓國 民族主義에 관해서는 수많은 硏究들이 있었다. 이 過程에서 韓國 民族主義의 硏究를 위한 많은 時事點이 提示되었다.
하지만 기존 연구는 두가지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 民族主義는 近代이후에 全世界에서 전개된 普遍的인 이데올로기이자 運動이다. 이는 韓國民族主義 硏究에서 外國의 理論의 無分別한 수용이나 또 다른 偏向인 極端的인 韓國的 特殊性의 强調로 나타났다. 한국 民族主義라는 것을 단순하게 서구 歷史學者와 기타 社會科學者들이 마련해 놓은 槪念과 分析틀, 그리고 전형에다 우리 歷史 속의 特定思想과 民族運動을 機械的으로 꿰어 맞추려 한 痕迹이 두르러진다.
韓國近代民族主義는 그 發生 初期부터 必然的으로 여러 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하나의 聯合團體로 구성되어 解放에 기여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封建的 立場의 固守와 開化思想의 흡수라는 서로 다른 思想的 基盤이 있었지만 半植民地화라는 共通的 課題를 안고 民族獨立運動을 展開해 나갔다. 韓國民族主義는 韓民族에 의한 완전한 의미의 民族國家 樹立을 指向한다. 그것은 스미스의 “民族主義의 諸原則”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民族主義는 각 民族이 기본적인 民族國家를 形成해야 한다는 基本的 義務를 前提原則으로 하고 있는 것과 일치한다.
이런 觀點에서 볼 때 韓國民族主義는 民族國家形成의 課題를 아직까지 實現하지 못하고 있다. 韓國民族主義가 民族의 統一ㆍ獨立ㆍ自由ㆍ發展을 推進하려는 이데올로기로서의 性格과 運動을 띠고 있었다는 점에서는 다른 民族主義와 다를 바 없다. 그러나 自主的인 意識이나 力量을 가지기도 전에 外壓에 의한 충격에서 성립되었기 때문에 그 主導勢力은 貴族, 내지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처음부터 西歐처럼 市民들의 支持를 기대할 수 없었고 그 결과 의식은 前近代的인 位置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하여 韓國民族主義는 性格과 運動面에서 理論的인 背理狀況에 빠질 수밖에 없었고 理論的인 一貫性을 維持하지도 못했다.
韓國民族主義와 民族運動은 단지 ‘말’이 아닌 ‘실체’로 기능할 때 그 本然의 任務를 完遂할 수 있으며 기능적인 役割을 遂行할 때 바람직한 方向으로 나타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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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원광대학교 사학과(http://mahan.wonkw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