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겨운
애환과 추억어린 부산국제시장
1945년
광복이 되자 많은 전시 물자들이 부산
지역으로
유입되었고
국제시장
자리를 장터로 삼으면서 시장이 형성되었다.
국제시장은
도떼기시장이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시장의 규모가 큰
것은 물론
없는
물건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있는
물건을 다
흥정하는
도거리
시장. 혹은 도거리로 떼어 흥정한다는 뜻에서
그렇게
불렀다고 전해진다.
1948년
판자 건물 12채를 지어 상인들이 입주하게
되면서 자유
시장으로
불리게
되었고, 1950년 한국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어
장사하면서
급성장하였다.
특히 미군의 군용 물자와 부산항으로
밀수된 온갖
상품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어 전국으로 공급되는 등 국제적인 상품이
거래된다고
하여 1950년 5월 국제시장으로 개칭되었다.
국제
시장은 전체 6개 공구로 구성된 도·소매 종합 시장이다.
조금 더
자세히는 가방, 문구, 공예품을 판매하는
1공구, 주방
기기,
칠기, 안경
등을 판매하고 있는 2공구, 침구류점,
양품점이
있는 3공구,
포목점,
주단점, 양단점 등이 있는 4공구, 가전제품,
기계 공구
등을
판매하는
5·6공구가 이루어져 있다.
부산광역시
중구 신창동에 있는 재래 상설시장.
광복과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생활근거지로 모여들어
터를 잡고
노점을
차림으로써
시장으로
형성되었다.본래
‘도떼기시장’에서
출발하여
1948년
에는
공식명칭을 ‘자유시장’으로 정하고 단층목조건물
12동을
건립하였다
.
6·25전쟁 중에는 부산으로 몰려든 피난민들로
그야말로
성시를
이루었다.
그때부터
국제시장은 나름대로의 특성을 지닌 채 인근
광복동·남포동의
도심상가와
더불어 유통기능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귀환재일동포와
이북피난민들이
연고가 없는 부산에서 정착하는
과정에서
시장상인으로
등장하였고,
끝내 상권을 장악할 만큼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다.
동란의
혼란 속에서도
국제시장은 활황을
누렸다.
원조물자·구호품·군용품이
절대부족상태의
민간소비
용품과 함께
유통되었고
속칭 ‘양키시장’ 같은 곳에서는
외제품이 판을
쳤다.
서울에서
피난살이로 부산에 내려간 문인·식자들
중에서도
국제시장의
어느 구석에서
호구지책을 마련한 이들이 적지 않다.
따라서 당시의
국제시장은
상거래장소에 그치지 않고 사회와
문화의
용광로이며
정보와 변화의
원천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0년
12월과 1953년 1월의
연이은
두 차례의
대화재는 그것이 가져온
물질적
손실도 컸지만
전시의
엄동설한에 영세상인과 주민에게 준
충격 또한
매우 컸었다.
화재가난 뒤 2층
건물 12개 동이 재건되고
상가의
면모가 일신되었으나,
국제시장은
이미 이전의 활기가 가라앉은
상태였다.휴전과 더불어
피난민
들이 돌아가고
새로운 경제질서가 자리잡히기
시작하자,
국제시장
은 그 동안의
갖가지 애환을 간직한 채 부산권의
일반
도·소매시장으로
탈바꿈하였다.1966년
5월 정부가 시장대지를
상인들에게
불하하기로
약속하였고,
매매계약이 체결되었다.
이어
1968년 1월에는 목조건물
3동을 제외한
9개 동이 철근콘크리트로 개조되었고,
상가대지
2,177평이
불하되어
1,489칸의 점포가 개인별로
등기되었다.1969년
1월 사단법인
국제시장번영회가
설립되어 상공부장관의 인가를 받았고,
1977년에
정식으로 시장개설허가가
나왔다.
현황
1995년
현재 대지면적 7,197㎡,
시장연면적
1만 2095㎡, 점포
수
1,489개
등의 규모이고, 1,700명이
종사하고
있다. 주로 거래되는
상품은 의류를
비롯해 가전제품, 직물,
신발, 가방,
일용잡화 등이다.
지방화의 큰
흐름에 따라 부산의 지역경제가
활성화되고
부산이
금융과
유통의 전국적
중추기능을 가지게 된다면,
국제시장은
제2의
도약을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참고문헌
전국
도·소매업체총람』(대한서울상공회의소,
1995)
『한국유통총람』(한국유통물류정보센터,
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