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수원지기학교 원문보기 글쓴이: 인미혜(미약스)
러시아 연해주지역 항일독립운동 유적지 탐방 3
우수리스크로 가는 날,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있는 숙소 아지무트 호텔에서 9시 출발해서 10시 40분 쯤 우수리스크에 도착하였다.
우스리스크는 ‘늪지대’라는 뜻에서 기원하였다고 한다. 과거 말갈의 땅이었고 고구려 유민이 중심이 되어 발해가 세워지자 발해의 영토에 편입되었다. 발해의 5경 12부 중의 한 부인 솔빈부가 있었다고 전해지며 발해가 멸망한 후 중국의 땅이 되었다. 1860년 베이징 조약 체결 후 러시아 영토가 된 후 점차 고려인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1870년 지신허로 이주해 온 조선인들 가운데 96명이 청나라 배 3척에 나누어 타고 오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이르러 암초에 부딪혀 22명이 사망하고 생존자들은 하루에 10여리를 걸어 8일 만에 이곳에 도착하였다. 러시아 병사들이 지냈던 굴에서 거주하며 이 지역 개척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 후 많은 조선인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으며, 항일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 되기도 하였다. 특히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 최재형 선생이 말년에 살던 곳으로 알려졌다.
우수리스크 수이픈강 언저리에 있는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지에 도착했다. 여름이면 수이푼강이 범람하여 비석의 중간까지 물이 찬다고 가이드쌤은 안타까워서 계속 다른 곳으로 옮겨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고 러시아 당국에서 조치를 취해한다고 오덕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출발 전 책읽기를 하면서 독립된 조국을 보지 못하고 시신을 화장해 수이푼 강에 뿌려 달라고 하던 보재 이상설 선생님의 애통한 심정을 느껴보련다. 수이픈 강가 유허비를 보니 그 마음이 더 가깝게 와 닿는 듯하다. 이상설 선생님 뵙는 자리에 딱 맞는 날씨다. 쌀쌀한 바람이 서러움을 함께 하는 듯 매섭게 뺨과 손을 스치고 지나간다.
서경문화유산포럼 신영주 회장이 술을 따르고 이상설 선생님의 후학이신 성균관 교육부 박평선 박사님이 술잔을 올리며 대표로 절을 하도록 기회를 드렸다. 잠시 후 우리 일행은 모두 묵념을 하며 마음속으로 100여 년 전 조국 독립을 위해 애쓰던 선생의 희생을 마음속 깊이 간직하였다. 이때 박평선 박사님의 구슬픈 오카리나 연주가 마음에 콕 박혀 울컥해 무심결에 흐른 눈물을 바람결에 날려 보냈다. 수이푼 강은 오늘도 얼음 아래로 조용히 흐르고 있다.
충북 진천 출생인 보재 이상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약의 무효를 상소하고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6년 이동녕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하였다. 다시 용정으로 간 선생은 민족학교인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민족교육과 항일 정신 고취에 힘을 쏟았다. 고종의 밀서를 들고 1907년 이준, 이위종과 네덜란드 헤이그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참여하여 일본의 침략행위를 전 세계에 알리려한 애국지사다. 1914년 이동휘, 이동녕 동지들을 규합하여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임시정부라 할 수 있는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워 독립을 위해 노력 하였다. 또한 러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성명회, 13도의군, 권업회 등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독립운동에 헌신한 이상설 선생은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17년 3월 2일 48세의 나이로 우수리스크에서 돌아가셨다. 임종이 가까워지자 유언을 남겼다.
“동지들은 합심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광복을 못보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남김없이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버리고, 제사도 지내지 말라.”
임종을 지킨 이동녕, 백순, 조완구, 이민복 등은 그의 유언에 따라 수이푼강에서 화장하여 재를 강물에 뿌렸다. 이때 그의 유품도 함께 거두어 불태웠다. 이러한 이유로 수이푼 강가에 보재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세워졌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많은 발걸음이 끊이질 않는 다고 한다.
수이푼의 어원은 발해의 ‘솔빈부’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하고, ‘슬픈강’에서 비롯되었다고도 한다. 그 강물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아무르만으로 흘러 동해에 다다라 광복을 맞이한 조국 땅에 머물렀을 것이다. 3년 전 만주 용정에 갔을 때 명동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벌판이 서전서숙 자리라고만 듣고는 잠시 잊었다가 오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에 와 있다. 숭고한 희생정신으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재산과 목숨을 바치신 분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은 잊지 않고 찾아오고 이름을 기억하는 일들일 것이다. 그것이 뭐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마음 깊이 새긴다.
수이푼 강가에 세워진 선생의 유허비에는 한글과 러시아어로 이런 글이 기록되어 있다.
이상설 선생 유허지
보재 이상설 선생은 1870년 한국 충청북도 진천에서 탄생하여 1917년 연해주 우수리스크에서 서거한 한국독립운동의 지도자이다. 1907년 7월에는 광무 황제의 밀지를 받고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 등을 대동하고 사행하여 한국독립을 주장하다. 이어 연해주에서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조국독립운동에 헌신 중 순국하다. 그 유언에 따라 화장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물에 뿌리다.
러시아정부의 협조를 얻어 이 비를 세우다.
광복회와 고려학술문화재단에 의해 2001년 10월 18일 3미터 높이로 세워진 기념비 옆으로 소나무가 울타리 쳐져 있다.
호기심 대장 한옥협동조합 장대표님께서 질문하신다. 나무를 보면 항상 궁금하신가 보다.
“이 옆에 심어진 소나무는 누가 언제 심었을까요? 국내에서 가져 간 걸까요?”
그러나 가이드 쌤은 “글쎄요” 로 답을 하신다.
김니콜라이 우수리스크 고려인협회장이 개인 재산을 들여 소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4월 참변당시 최재형이 체포되었던 마지막 거주지, 우수리스크 보로다르스코 38번지
현재는 독립운동가 최재형 고택이 기념관으로 재탄생되어 관람객을 맞이하고 있다.
페치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최재형, 페치카는 러시아어로 난로라는 뜻이다. 시베리아 항일운동의 대부였던 최재형의 동포를 향한 따뜻한 마음을 알 수 있는 애칭이다. 최재형의 가옥에 남아 있던 페치카를 복원하여 전시관 입구에 전시하여 관람객을 맨 처음 맞이한다. 최재형이란 이름은 3년 전 동북3성 답사하면서 봉오동전투 기념비에서 들었다. 항일독립운동도 돈이 있어야 할 수 있다고, 돈으로 먹을거리도 사고, 무기도 사야만이 무장독립투쟁을 지속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 때 새로운 시각으로 다가온 독립운동가 중 한사람이었다.
최재형은 러시아식 이름은 최 표트르 셰묘노비치다. 함경도 경원에서 노비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1869년 9살 때 아버지 손에 이끌려 조선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던 러시아 지신허로 갔다. 어린 최재형은 형수의 구박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가출하여 작은 항구에서 잠들었다가 선원들에게 발견되어 그들의 배를 타고 러시아를 비롯하여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의 남부 해안 등을 항해하며 근대문명을 배우게 된다.
1887년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최재형은 무역업을 하면서 사업가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러시아에 귀화한 뒤 그 지역의 자산가로 성장하여 한인사회를 이끈 대표적인 지도자였다. 그의 재산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거나 한인 학교 설립에 투자하였다.
1900년대에는 이범윤과 함께 러시아지역의 대표적인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만들어 총재가 되어 의병활동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1910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민족 언론인 대동공보와 대양보의 사장으로서 일제를 규탄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대 초반에는 권업회의 총재, 1919년 3.1운동 이후에는 대한국민의회의 명예회장으로 활약하는 등 190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러시아지역에서 조직된 주요 단체의 책임자로 일하였다.
이토히로부미를 암살하려다가 체포된 안중근 의사가 배후인물 추궁에 끝까지 입을 다물고 침묵했는데 그 배후 인물이 바로 최재형이라 한다.
우수리스크는 의병운동에 아낌없이 지원했던 최재형이 총살당한 곳이다. 1920년 4월 4일 밤부터 5일 새벽, 연해주 지방과 연흑룡강 지방에 두둔한 일본군이 극동공화국을 기습했다. 일본인들은 24시간 동안 블라디보스토크, 우수리스크, 스파스크, 하바로브스크 등 연해주 지방 지역에서 군사행동을 개시했는데 이는 철저한 사전 계획에 따라 수행된 것이다. 이때에 우수리스크에서 연해주지방과 연흑룡강 지방 노동자들의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 도시를 점령한 일본군은 회의에 참석한 많은 대표위원들을 체포하여 총살시켰다.
일행 중 한사람이 질문을 하였다.
‘최재형 선생의 묘소는 어디 있나요?“
“글쎄요, 묘소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만 최재형 선생이 말년에 살던 집만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4월 참변 당시 일본군에게 체포될 때까지 거주하던 집은 당시의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붉은색과 흰색으로 칠해진 벽돌집을 안의 구조물을 다 허물고 통으로 뚫어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2010년 한러수교 20주년을 맞이하여 이 집에 동판을 부착하였다.
문화재지킴이 운동, 해외로 전파되다
이번 답사는 서경문화유산포럼에서 ‘문화재지킴이 운동 해외로 전파되다’ 보도 자료도 내고 해외에서 활동하고 있는 NGO단체들과 교류하면서 서로 협력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러시아 연해주지역에서 활동하시는 크라스키노포럼 연해주 지부 이황휘지부장을 만나고 더 활기차게 진행되었다. 이황휘 지부장의 안내를 받아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찾고 싶었던 유적지도 찾아보고 앞으로는 더 나아가 이동휘 선생 집터 동판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고려인문화센터에서 크라스키노포럼 연해주 지부 이황휘 지부장과 서경문화유산포럼 신영주 회장의 약식 MOU 체결을 하였다. 문화재지킴이 활동이 해외로 전파되는 그날까지~화이팅!
고려학술문화재단 장치혁 회장이 기증한 연해주 고려인 재생기금 건물과 고려인들을 위한 문화 공간 고려문화센터도 있다. 고려문화센터 1층에는 고려인역사관이 있다. 한인의 러시아 이주, 독립운동, 중앙아시아로의 강제이주, 연해주로의 재이주 등 사진과 자료 등을 중심으로 정리되어 있다.
한인들의 슬픈 역사가 깃든 블라디보스토크역
블라디보스토크역은 혁명전에 지어진 건축물 중 가장 아름답다고 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종착역으로 총길이 9,288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곳에서 시작된 철길에 한인들의 슬프고도 애달픈 사연이 배어 있다. 1937년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때 수많은 한인들이 이곳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척박한 중앙아시아에 버려졌다. 아무것도 모른 채 불안과 공포에 떨고 있을 당시의 한인들의 한을 느껴보려 한다.
코노발로프가 설계해 1907년~1912년에 건설된 블라디보스토크역의 외관은 러시아의 전통 예술 양식으로 장식한 석조건물이다. 이 역은 모스크바의 야로슬라프스키역과 똑같이 모방했다고 한다. 역사로 들어가려면 공항처럼 검색대를 거쳐야 한다. 오덕만 대표님과 함께 들어가 봤다. 동판에 ‘블라디보스토크역 - 부산역’ 이란 글씨가 있다. 부산까지 이어진다는 것일까?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까지는 일주일 걸린다고 한다. 이것은 젊어서나 낭만적으로 할 여행인 것 같다.
자유시참변 이후 러시아 한인은 주로 적위군 편에 가담하여 일본군이 마지막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철수하는 1922년 10월까지 연해주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치렀다. 러시아 한인은 극동지역의 소비에트 건설에 많은 피를 흘리며 기여를 했다. 또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에 참여하여 생산량 증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사회에 적응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연해주 한인은 소비에트체제에서 소수민족으로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아왔다. 1937년 스탈린 정권에 의해 자행된 중앙아시아 강제이주가 그 증거이다. 소련 정부는 이 참극의 명목상 이유는 극동지방에 일본 정보원이 침투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러나 강제이주의 궁극적인 의도는 한인들을 연해주에서 완전히 추방, 차단하려는 것이었다. 1937년 9월~10월 동안에 연해주 전 지역에 걸쳐 한인 23만 명이 시베리아횡단철도 화물차량에 실려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으로 강제 이주 당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인사회의자도자나 지식인 2,500여 명이 숙청되거나 처형되었다. 이로써 1860년대 이래 대규모의 한인사회가 자리 잡았던 연해주에서는 한인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슬프고도 끔찍한 역사의 끝을 보여줬다. 예전에 읽었던 그림책이 생각난다. 아프리카사람들을 아메리카 사람들이 노예로 팔아먹기 위해 배에다 실고 가는 모습이 떠오른다. 닭장처럼 생긴 화물칸에 누워서 몇 날 며 칠를 간다. 똥, 오줌도 그 자리에서 해결 하도록 하니 위생이나 인권 등 생명존중이 없는 아주 끔직한 한 장면이 떠오르며 오래전 시베리아횡단열차에 실려 가던 그들이 겹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