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글을 3부로 끝내려 했는데, 결국 또 4부까지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시작은 간단하게 쓰자 하다가, 막상 쓰게되면 이것저것을 쓰게 되어 결국 글이 길어지게 되네요. 그냥 쉽게 다룰만한 정원이 아니여서 그런 것 같습니다. 이번에는 그 유명한 긴카쿠지와 난젠지입니다. 모두 고찰이고 정원도 최고수준이니 그냥 몇마디 하고 끝낼 수가 없었네요. 이해해 주세요^^
원래 글을 이렇게 잘게 자르면 뒤에는 정작 시들해지는데, 그게 걱정입니다.
2부에서도 그렇지만 3부에서도 첫화면을 벚꽃으로 올렸습니다. 길기만 했던 겨울도 이제는 그 힘을 잃은 듯 하면서 3개월정도면 벚꽃의 계절이 다가올 것입니다. 요즘들어 우울한 소식만 들려오는데, 제발 그때에는 좋은 일만 있기를 바라네요. 벚꽃을 마음편히 즐길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8. 긴카쿠지 (銀閣寺)
교토 서쪽에 금각이 있다면 동쪽에는 은각이 있습니다. 정말 대비되는 이름이지만, 금으로 빛나는 금각사와는 대조적으로 은각사는 말만 은각일 뿐 검은 관음전(觀音殿)만 서 있을 뿐입니다.
일단 여기에서 속았다, 요즘말로 낚였다^^라고 하게 되는데, 어떤 가이드책이나 현지가이드는 원래 은으로 칠하려 했는데 돈이 부족해져서 미완성인채로 남았다. 뭐 이런 식으로 기술해놓은 것이 많습니다.
은각사를 지은 무로마치 8대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가 은각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은을 덮을 계획이었다는 건 허구이고, 은각은 원래의 의도대로 완성된 것은 확실합니다. 다만 후세에 금각과 대비시켜 임의로 은각으로 별칭을 붙인 것에 불과합니다.
은각사를 처음 들어올때 상당히 당황하게 됩니다. 대문을 통과하자마자 동백나무등을 직각으로 깍아 만든 담이 양옆으로 늘어서 있습니다. 자연과는 대치되는 인공적인 통로가 역시 직각으로 꺽이며 은각사로 이르게합니다.
담의 높이도 상당해서 터널을 지나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이는 외부세계와 단절시키고 새로운 세상으로 이끄는 역활을 하게 됩니다.
문을 지나 바로 정원이 펼쳐지는 것보다 이렇게 어느정도 단절의 공간을 조성하여 정원으로 다가가는 참배객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역활을 하려 한 것은 아닐까 합니다.
은각사 자체가 자연적인 것과 인공적인 것의 조화를 이룬 정원으로 유명하고 이 참배로 또한 자연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구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배로를 벗어났다고 바로 정원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또한번의 장벽을 둘러칩니다. 소나무가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곳은 은각사가 절이라는 걸 상기시키는 건물군, 즉 방장, 서원등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정면의 가라몬(唐門)을 통해 드디어 정원으로 다가설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도 문을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것도 아니고 앞의 창문을 통해 일단 걸러진 풍경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정원 어프로치에 대한 장치는 창건당시가 아니 후대-에도시대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대단한 기술로 참배객을 더욱 기대와 흥분을 끌어올리게 합니다.
통칭 은각으로 부르는 관음전입니다. 금각에 비하면 너무 소박해 보이고 층수도 2층에 불과합니다. 전혀 단청도 들어가지 않은 검은 색과 흰색의 무채색으로만 된 소박하다고 할 수도 있는 건물입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가 죽기 직전까지 완성을 하려 했고 마지막까지 내부장식까지 꼼꼼히 지시했다는 건물치고는 너무 단조롭죠. 처음에 방문했을 때 저도 크게 실망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이건 요시마사가 추구하려 했던 이상이 무엇인지를 알면 다르게 보이게 됩니다.
아시카가 요시마사! 일본역사에 있어 그의 이전과 이후를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만든 인물입니다. 그것도 좋은 의미에서의 분기점이 아니라 최악의 의미에서 말이죠.
너무 역사이야기로 흐르는 것 같지만, 은각사 정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것입니다. 물론 개별적인 정원양식이 극락정토를 모방한 정토식정원이다, 에도시대에 달구경의 명소였다 뭐 이런 것 보다는 이 정원의 형성이유를 아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암튼 그는 어린나이에 장군직에 올라 일본을 나락으로 떨어뜨리죠. 그 유명한 오닌의 난을 일으키게 해 교토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고, 사람들이 기아에 허덕이게 합니다. 그 전란을 일으키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그의 후계를 두고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그의 처와 동생사이에서 후계자를 두고 싸우게 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막부는 쇠퇴하고 전국에서 무사들이 군웅할거하는 전국시대를 열게 되는데 지대한 공^^을 남깁니다. 덕분에 우리도 임진왜란을 겪게 되는 것이고요.. 전국시대가 아니면 하층민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장군이 결코 되지는 않았겠죠.
잠시 이야기는 멈추고 위의 모래를 높이 원뿔모양으로 쌓아 만든 건 코게츠다이(向月臺)이고, 넓게 깔린 것은 긴샤단(銀沙灘)으로 400년전의 작품으로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모던한 양식을 보여줍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달빛을 받으면 모래가 은빛으로 빛난다고 합니다.
이런 구조물을 지금 세운다고 해도 난리가 날텐데, 400년전 황폐해진 은각사를 복구할 때 연못을 메운 모래를 파내서 이런 정원장식을 만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궁금해 지기까지 합니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와서 교토가 불바다가 되고 사방이 기아로 죽어가는 사람으로 넘칠때 한 국가의 실권자인 요시마사는 처자식과 천황까지 버리고 이곳으로 은거해서 정원건축에 몰두합니다. 보통의 권력자라면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이지만, 그는 권력이라는 무거운 짐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나약한 인간이었습니다.
이 정원을 위해서 전란중에 그는 특별세를 걷고 사원에서 인원을 동원하고 교토에서 얼마 남지 않던 정원석과 정원수, 건물들을 약탈해가면서 무엇에 쫓기는 사람처럼 건축에만 매달립니다. 저의 권력기반이 무너지고, 그가 장군직을 물려준 자식이 전장에서 죽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한곳에 보며 달려가는 그를 보면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은각위에 올라간 저 봉황을 보면 그의 목적이 보이는 듯 합니다. 그는 죽음을 맞이할 곳을 마련하기 위해 정렬적으로 이곳을 세운 것 같습니다. 극락정토.. 그를 세상의 모든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줄 그곳!
은각사 자체가 묘지를 깡그리 밀고 지은 것입니다. 화장장도 있었고, 온갖 사원들의 묘지들이 모여있던 곳이죠. 다른 사람이 볼때는 버려진 곳인데, 그는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정원을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럭저럭 달성된 것 같습니다. 은각은 완성시키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눈을 감았으니 말이죠. 당시 건물로 남은 것이 앞의 은각과 위의 사진에서 살짝 보이는 토구도(東求堂)뿐이지만, 정원자체는 대부분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끼로 덮인 바위틈에서 작은 물줄기가 떨어집니다. 은각사는 이끼로도 유명합니다. 은각사자체가 1부에서 다룬 무소국사의 정원 사이호지를 최대한 재현하려했고, 사이호지가 이끼절의 별칭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이끼로 유명하니 은각사또한 이끼를 최대한 이용한 정원을 만들었습니다.
뒷산에 올라 바라본 은각입니다. 때가 가을이라서 단풍이 간간히 보이네요.
요시마사가 죽어라 세운 이 정원도 그의 사후 유언에 따라 사원이 되고, 그가 죽기만을 기다렸다듯이 약탈당했던 사원에서 정원수, 정원석을 뽑아가고 유력자들이 건물을 헐어가는 등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얼마남지 않은 건물도 주변에서 두번의 전쟁으로 타버리고 은각과 동구당만 남게 됩니다.
9. 난젠지 (南禪寺)
난젠지. 그 이름만 들어도 전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교토 동부의 최대의 사찰이자 최고의 정원을 4개씩이나 지니고 있는 고찰입니다.
교토를 찾는 관광객에게 모든 것을 보여주는 일본사찰의 테마파크같은 존재입니다. 넓은 부지에 들어서 거대한 불전들, 중심사찰을 호위하듯이 에워싸고 있는 부속사찰들, 교토에서는 드물게 삼문(三門)에 올라 경치를 감상할 수 있고, 거의 모든 부속사찰을 관람할 수 있으며, 교토가 재건을 위해 대형 프로젝트로 건설한 운하와 수로각(로마의 수로교와 비슷한)을 보면서 근대건축을 음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봄에는 근처 철학에 길에서 이어지는 사쿠라가 경내를 덮고, 가을에는 발군의 단풍으로 물들게 되는 명찰입니다.
이 난젠지에서 정원은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또 이 정원도 모두 명정(名庭)으로 이름높은 작품들이죠.
일단 주건물인 대방장(大方丈)에 조성된 정원입니다. 맨위의 사진이 대방장 앞에 조성된 중심정원으로 이름도 대방장정원입니다. 아래사진은 곳곳에 배치된 조그만 정원들중에 하나이고요. 난젠지가 아니였으면 이것도 명정에 오를 수 있을 정도의 수준입니다.
방안에서 바라보이는 정원의 모습입니다. 이 방이 자세히 어떤 용도였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현대적인 모습입니다.
음식점이 아닌 이상 사원에서 이렇게 의자와 탁자가 있는 곳은 거의 없습니다. 즉 이곳이 역사적으로 기념할 만한 일이 진행되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난젠지는 어찌보면 정치적인 성격이 강했던 절입니다. 이미 그 시작을 천황의 이궁이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역대 정권과 결탁을 하게 됩니다. 천황에 붙었다가 이후 무로마치 정권과도 밀월관계를 세워 교토 5대 사찰을 칭하는 오산(五山)중에 최고상위를 차지하게 되죠. 이후 오닌의 난으로 소실되었다가 이번에는 도쿠카와 이에야스에게 착 붙어서 그가 불교를 통제하는데 일조하게 됩니다.
그 덕분에 에도시대 난젠지는 광활한 사역과 토지를 하사받게 되고 최고의 정원을 조성할 수 있는 재력을 자랑하게 됩니다. 정원이라는 것이 결국 돈으로 이루어지는 사치품^^이기 때문에 재력과 권력에 따라 그 크기와 완성도가 결정되는 것이죠..
이랬던 난젠지도 결국 메이지유신이후 불교대탄압으로 철퇴를 맞게 되고 사역(寺域)도 크게 줄어들고, 부속사원도 줄고, 지금은 멋있다고 좋아하지만, 경내를 관통하는 수로각과 운하가 놓이게 됩니다. 권력이 있었을 때 감히 당시 사람이 보기에는 흉물인 수로각이 놓일 수 있었겠나요? 더구나!!! 난젠지 전체가 정신병원등의 요양시설로 쓰이게 됩니다. 에도막부에 충성한 난젠지가 천황파에게 제거 1순위 였을 겁니다. 이렇게까지 모욕을 주었지만, 지금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난젠지입니다.
앞에서 보았던 대방장정원입니다. 이 정원은 거의 고보리엔슈가 작정했다는 설이 정설로 굳어져 있습니다.
역시 과감한 그의 작풍이 느껴지는 것이 정원의 모든 요소를 담장쪽으로 밀어버리고 앞쪽에 광활한 바다를 나타내는 백사의 넓게 배치했습니다. 이는 방장에 앉아 감상해보면 그의 의도를 조금이나마 읽을 수 있습니다.
정원석과 나무를 한쪽 구석으로 몰아 공간을 좀더 넓게 확장시키고 있고 뒤의 히가시야마를 차경으로 사용하여 정원을 확대시킵니다. 더구나 정원석과 나무가 왼쪽에서 오르쪽으로 대,중,소로 배치하여 원근감을 느끼게 합니다. 이는 서양의 원근법이 인용된 것으로 좀더 공간을 확대시키는 역활을 합니다. 그의 상투적^^ 표현법이죠.
또한 바위의 배치법도 재미있습니다. 뒤쪽 담에 붙여서 거석을 대중소로 배치하고 이 앞에 작은 바위로 대중소로 배치하여, 호랑이가 그 자식을 데리고 강을 건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사진은 봄이어서 약간 부족한 면이 있지만, 늦봄에는 철쭉이 피고, 가을에는 단풍으로 물들어 뒤쪽의 히가시야먀의 단풍과 좋은 조화를 보여줍니다.
대방장을 나오면 다시 소방장정원이 나타납니다. 이곳은 백사와 검은 바위 몇개, 맨 뒤쪽의 소나무만을 가지고 작정을 했습니다.
정원의 이름은 如心庭입니다. 마음과 같은 정원이라는 의미인데, 정원석 5개로 구성된 이곳을 어느 방향으로 보아도 한자 心자가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전 마음의 수련이 덜 되었는지 잘 보이지 않네요^^ 바위의 주변을 모래가 파문을 그리며 있는 모습이 섬이 띄엄띄엄있는 바다를 생각나게 합니다.
날이 어두어서 빛을 받지 못해 백사가 어두운 색을 띄고는 있지만, 맑은 날에 보았다면 눈이 부셨을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매일 승려가 정원 모래무늬를 다시 새긴다고 들었는데, 그것도 마음의 수양이 될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하는 것을 보았는데, 꽤나 번거롭고 힘든 일인 것 같아 보였습니다.
대방장, 소방장 뒤로도 많은 정원들이 존재하고 위의 사진은 육도정이라는 곳입니다. 중앙에 보이는 긴 회랑을 따라 주변에 배치된 정원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곳곳에 석등과 정원석, 이끼와 나무들이 배치되어 눈을 즐겁게 해 줍니다.
다실도 마련되어 있어 이곳으로 이르는 돌이 깔린 길또한 멋있습니다. 이것도 정원의 한 양식이 로지(露地)입니다. 일본의 다도가 발달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 다도를 즐기기 위한 다실또한 문화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그 다실로 이르는 길을 꾸미는 로지또한 정원한 한 형식으로 당당히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모여서 다도라는 큰 문화를 이루는 것이죠.
일본의 다도는 도요토미시대에 와서 거의 완성을 이루게 되는데, 당시 유명한 다도가인 千利休(센노리큐)가 도요토미의 막대한 지원하에 다도의 지존이 됩니다. 다도라는 것이 무사들을 순화시키는 역활을 한 뿐더러, 미천한 히데요시에게는 자신의 무사의 문화인 다도를 완성한다는 공명심도 있었습니다.
또한 재미있는 사실은 도요토미가 그렇게 좋아하던 다도의 다실이 사실 조선의 민가에서 차용한 것이고, 그 다실에서 조선출병의 결정을 하게됩니다. 역사의 아이러니죠. 물론 그들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다기(도자기)도 조선의 막사발이었으니...
방장을 나서다가 문뜩 돌아보니 뒤쪽에 폭포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전혀 기대를 하지 않던 곳에서 이런 광경을 보니 감탄사가 절로 나오더군요. 폭포의 규모도 적은 것은 아니고, 그 옆에 조경된 정원수들도 대단한 것들 뿐이라서 놀랐지만, 이곳이 전혀 안내책자나 사진집에는 거론조차 되지 않은 것도 놀라웠습니다.
일단 봄에 가본 방장정원입니다.
난젠지는 아직도 갈 곳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 제가 제대로 사진을 찍은 난젠인(南禪院)을 알아보겠습니다.
난젠인은 제가 처음 난젠지를 찾았을때 배관료가 비싸다는 이유로 수로각과 산문만 올라가고 방장정원과 모든 부속사원은 무시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러고 한국와서 땅을 쳤죠.. 다음 봄에 가서는 방장정원만 보았고, 그 가을에는 교토서쪽에 올인해서 못 보았습니다. 그다음해에서야 이곳을 방문할 수 있었습니다. 아주 목표를 이곳으로 하고 작정하고 간 것이죠.
가을의 난젠인은 환상 그 자체입니다. 제가 워낙 환상이라는 말을 잘 쓰지만, 이곳은 그것보다도 더한 단어를 쓰고싶은 정도입니다.
일단 시작은 조용합니다. 방장건물을 통과해서 보이는 정원이 기대를 더하게 합니다.
건물을 돌아서 정면의 정원으로 향하면 카메라를 어디를 향해야할지 고민할 정도로 모든것이 절경입니다. 표주박모양의 연못을 중심으로 섬들이 점재하고 있고 그 주변을 여러 단풍나무들이 늘어서있습니다. 연못의 이름은 앞의 텐류지정원의 연못과 같은 이름인 소겐치(曹源池)입니다. 이는 바른 근원에서 흘러드는 진실의 선(禪)이라는 의미입니다. 정원을 바라보면서 깨닿음의 경지를 느끼자 뭐 이런 뜻인데, 그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가을의 이 정원은 너무 화려합니다. 화려한 기모노를 입은 게이샤와 같이...
위의 사진 오른쪽 섬(학섬-츠루지마)에는 봉래산을 상징하는 바위가 서 있습니다. 결국 이 정원도 불교의 이상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면 됩니다. 정원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이런 불교사상과 도교사상이죠. 봉래산이 수미산이 되는 거죠.
이곳의 단풍나무들은 연못으로 떨어질 듯 불안정하게 드리워져 있습니다. 그래서 더욱 운치를 더하고는 있는데, 보기에는 참 불안해 보입니다.
교토의 가을 이미지는 결코 붉고 노란 단풍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녹음의 가운데에 있는 단풍입니다. 이것이 우리와는 좀 다른 모습일 것입니다.
교토에는 이렇게 이끼가 풍부하기 때문에 정원에 이끼가 깔리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합니다. 그 위에 서있는 단풍나무와 이끼에 떨어진 단풍잎! 이것이 교토의 사람들이 느끼는 가을이미지라고 합니다.
위의 사진은 그것을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카메야마 천황의 분골소(分骨所)에 드리운 단풍의 모습입니다. 이 난젠인은 카메야마 천황의 이궁이 있던 곳에 세워진 것이고 이것이 난젠지의 기원이 됩니다.
그래서 난젠인정원에서는 화려한 귀족문화를 엿볼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이 세워진 것이 가마쿠라 막부 말기로 거의 아라시아먀 텐류지와 비슷합니다. 이궁을 사원으로 개조한 것도 비슷하고, 연못의 이름도 동일하기때문에 무소국사가 작정에 관여한 것이 아닐까하는 설도 있습니다.
하여간 에도시기에는 웬만한 정원은 고보리엔슈, 무로마치초기에는 무소소세키가 작정, 관여했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그들이 직접 하지는 않았어도 그 뜻을 이어받은 제자나 작정가가 모방이라도 했을 터이니...
정원을 돌아 약간 언덕진 곳으로 가서 방장쪽을 보면 단풍을 즐기고 있는 관광객의 모습이 보입니다. 정원 자체가 거닐며 보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방장에 앉아 즐기는 것이 원래 목적이었기 때문에 방장쪽에서 바라보는 것이 정석입니다.
뒷쪽에는 심산유곡에서 흘러내리는 폭포를 형상화했습니다. 기암을 절묘하게 배치하여 상당히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 합니다.
암튼 이 난젠인정원은 교토의 3대 명정입니다. 텐류지, 사이호지와 함께 선정된 것이죠. 앞의 둘은 무소국사가 작정한 것이고, 난젠인도 그의 작정으로 추정되는 곳이니.. 치센카이유 정원에서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죠.
그의 이후에는 카레산스이 정원이 대세를 이루다가 에도시대 각지의 다이묘들에 의해 연못정원이 부활을 하게 되죠. 그것도 매우 규모가 큰 정원들이죠. 도쿄나 히메지, 나고야등지에 성안에 조성된 보통 니노마루정원이 그것입니다.
난젠지에는 이 난젠인뿐만 아니라 텐쥬안(天授庵), 콘치인(金地院)도 훌륭한 정원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콘치인은 고보리엔슈가 도쿠카와 가문의 무궁한 영광과 번영을 주제로 만든 어용^^정원으로 유명합니다. 그래서 그 내부에 도쿠카와 가의 위패를 모신 동조궁도 있습니다. 그래도 그 정원은 카레산스이 정원의 수작입니다. 이것을 교과서로 이용해서 후기 작정이 이루어지기도 할 정도입니다. 물빼고 일본정원의 모든 요소가 한군데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번엔 이곳을 꼭 가봐야 하는데... 하는 마음뿐입니다.
다음편은 마지막(진짜^^)으로 고다이지와 뵤도인입니다. 고다이지는 정원사에서 큰 의미는 없지만, 그대도 한때의 로망스를 느낄 수 있는 곳이고, 뵤도인은 망해가는 귀족사회가 부처에 의지해 부질없는 꿈을 꾸던 곳입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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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일본 교토 이야기 원문보기 글쓴이: Meryam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