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무 살 어머니 (정채봉 프란치스코)
회사에 여고를 갓 졸업한 신입사원이 들어왔다. 키도 작고 얼굴도 복숭아처럼 보송보송하다. 어쩌다 사원들끼리 우스갯소리라도 하면 뺨에 먼저 꽃물이 번진다. 한 번은 실수한 일이 있어서 나무랐더니 금방 눈물을 방울방울 떨어뜨렸다. “우유를 더 좀 먹어야겠군.” 혼잣말을 하면서 돌아서다 말고 물어 보았다.
“올해 몇 살이지?”
그러자 신입 사원은 손수건으로 눈 밑을 누르면서 가만가만히 대답하였다.
“스무 살이예요.”
소녀에서 성인으로 턱걸이를 하는 저 나이, 무엇이거나 그저 우습고 부끄럽기만 한 저 시절, 나는 문득 돌아가신 어머니가 생각키웠다. 우리 어머니가 하늘의 별로 돌아가신 나이가 바로 저 스무 살이었던 것이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열여덟에 나를 낳고 꽃다운 스무 살에 이 세상살이를 마치신 우리 어머니, 그렇기 때문에 나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 얼굴은 기억하지 못해도 어머니의 내음은 때때로 떠오르곤 한다.
바닷바람에 묻어오는 해송 타는 내음. 고향의 그 내음이 어머니의 모습을 아련히 보이게 한 날을 기억한다. 유년시절, 눈발이 희끗희끗 날리던 날이었다. 이웃 민주네 할아버지한테서 장화홍련전을 들었다. 이야기가 끝나서 나오니 저녁밥 짓는 연기가 골목을 자욱이 덮고 있었다.
먼 바다 쪽으로부터 물새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으로 어머니가 보고 싶었다. 돌을 차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는 할머니가 군불을 때고 있었다. 부엌 문설주에 기대 서 있는데 해송 타는 연기가 자꾸 나한테로만 몰려들었다. 그때 기침을 하면서 눈을 비비며 서 있는 내 앞에 막연히 어머니의 모습이 다가오다가는 사라졌다. 해송 타는 연기와 함께.
그 뒤부터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해송 타는 내음이 생각키웠다. 해송 타는 내음을 만날 때면 어머니가 조용히 떠올랐다.
중학생이 되고 2학기가 시작된 9월 어느 날이었다. 들녘에 나가서 토끼풀을 뜯어 가지고 돌아오니 이불 홑청을 깁고 있던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너 없는 사이에 너그 담임선생님이 다녀가셨다. 작문 시간에 ‘어머니 냄새’라는 제목으로 글을 지었다면서?”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바늘귀에 실을 꿸 양으로 계속 거기만 주시하면서 말을 이었다.
“이상한 일이다. 해송 타는 냄새에 네 어미가 떠오르다니.”
허긴 너의 외가 가는 길이 솔밭길이긴 하다. 솔띠재라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꽉 찬 고개를 넘어야 했거든. 너를 업고 네 어미가 친정을 몇 번 다녔으니 그 솔 냄새가 너의 모자한테 은연중에 배었을 지도 모를 일이지… 네 어미 얼굴을 보여주랴?
할머니는 일어나서 장롱 위에 부담을 끌어 내렸다. 그때 할머니가 뚜껑을 열어 보여준 그 부담 속에는 여러 벌의 여자 옷이 있었다. 남치마며 인조 저고리며 단속곳이며, 그리고 색이 바래지 않은 흉배도 있었고 나막신도 있었다. 나는 부담 위 맨 아래에서 한지로 싸여있는 사진을 보았다. 그 사진 속의 어머니는 내게 참으로, 참으로 여리다는 느낌을 주는 얼굴이었다. 둥근 턱에 솔순 같은 눈, 바람받이에 있는 해송 같은 낮은 코에 작은 입, 정말 명이 든 데라곤 어디 하나 보이지 않는, 하얀 박속같은 여인이었다.
“네 에미는 너한테서 엄마라는 말도 한 번 들어 보지 못하고 죽었다.”
“세 살이었다면서 내가 그렇게 말이 늦었던가요?”
“아니지, 너의 삼촌들이 형수라고 부르니까 너도 덩달아서 형수라고 했어. 형수 젖, 형수 물 하고….” 나는 피식 웃었다. 그러나 그것은 울음보다도 짙은 회한의 것이었다.
그때 문득 내 앞에 환상의 지구역(地球驛)이 떠올랐다. 순간마다 무수한 사람들이 떠나가고 대신 어린 아기들이 내려오는 곳. 떠나는 늙은 분들 틈에 끼어 앉았을 스무 살의 우리 어머니…. 쪽찐 머리를 보고 혹시 남겨놓고 가는 아이가 없느냐고 물어서 울린 사람은 없었을까.
서른한 살 때 나는 아이 하나를 얻었다. 아이는 우리가 낯선 듯 처음엔 울고 보채기만 하더니 예닐곱 달이 되면서부터는 이쁜 짓을 하기 시작했다. 우스운 일이 하나 없는데도 괜히 저 혼자 방글거리곤 했다. 나는 아이가 그러는 아이가 귀여워서 입을 맞추다 말고 해송 타는 내음을 느꼈다. 언젠가 고모가 한 말이 환청처럼 살아났다.
“네 어미처럼 무심한 여자는 드물 것이다. 네가 배고파서 울어도 좀체 젖 줄 생각을 안 하는 거야. 보다 못해 우리가 재촉하면 그때서야 일손을 놓고 가서 젖 한 모금 찔끔 주고 금방 돌아오곤 했단다.”
그제야 비로소 스무 살 우리 어머니의 깊은 마음을 짚었다. 아이 우는 소리에 차지 않을 어머니 속이 어디 있을까. 그러나 달려오고 싶은 마음보다도 시누이들한테 눈치 보일까봐 자리를 얼른 뜨지 못했을 우리 어머니. 아무리 울보라고 소문난 나였대도 때로는 어머니 품에서 웃어 보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볼까 봐 내 어린 뺨에 볼 한 번 비비는 것도 우리 어머니는 참 어려웠으리라.
어머니는 하얀 박속같은 스무 살 우리 어머니는 그 앳됨 그대로를 지니고 사진틀 속에서 당신보다 더 늙어가는 아들을 말없이 내려다보고 계신다.
풋콩에서와 같은 비린내 나는 부름이 들릴 듯도 한데….
그러나 이제는 해송 타는 내음마저도 점점 엷어져 가는 것 같아 나는 참 가슴이 아프다.
............................................................
하늘나라에 가 계시는
엄마가
하루 휴가를 얻어 오신다면
아니 아니 아니 아니
반나절 반시간도 안 된다면
단 5분
그래, 5분만 온대도, 나는
원이 없겠다.
얼른 어마 품속에 들어가
엄마와 눈맞춤을 하고
젖가슴을 만지고
그리고 한번만이라도
엄마! 하고 소리 내어 불러보고
숨겨놓은 세상사 중
딱 한 가지 억울했던 그 일을 일러바치고
엉엉 울겠다.
........................
스무 살 어머니 2(정채봉 프란치스코)
엄마. 남들은 아기 적 입이 열리면서부터 부른다는 이 말을 저는 이제 마흔을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이렇게 엄마를 불러 보지 않으면 영영 내 혀는 '엄마'를 모르게 될까 봐 글로 써 놓고 소리내어 불러 보네요. '엄마'라고.
엄마. 열일곱 살에 시집와서 열여덟 살에 나를 낳고, 스무 살에 돌아가신 엄마에 대한 사실이 하나 둘 알려지자 철없는 사람들은 저한테 묻곤 하였지요.
"그게 사실이냐?"
"엄마에 대한 기억이 정말 냄새밖에 없느냐?"
"정말 엄마를 형수라고 불렀느냐?"
그때마다 저는 말머리를 다른 방향으로 돌리곤 하였지요. 소리내버리면 그나마의 기억조차도 날아가 버릴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에요. 시아버지, 시어머니에, 시동생 넷에. 손님 또한 그칠 날이 없었다고 했는데 샘길은 멀고…. 당숙모께선 말이 없던 열일곱 살 외꽃 같은 새댁 생각이 지금도 난다고 하십니다.
엄마. 여기에서 고백하자면 저한테는 엄마에 대한 가슴 아픈 기억이 딱 둘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의 어슴푸레한 일입니다. 불안한 기운이 잠을 달아나게 해서 눈을 떴더니, 엄마와 아빠가 다투고 있었지요. 이내 아빠가 엄마 뺨을 철썩 올려붙이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리고 엄마의 흐느껴 우는 소리도 들렸습니다. 나는 무서워서 엄마 아빠 방을 나와서 할머니 방으로 도망갔지요. 할머니는 나를 끌어안고 자자며 등을 다독이었고요. 그 다음 일은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그냥 그대로 잠들었겠지요. 지금 생각해 보니 뺨 맞은 엄마를 두고 도망 나와 버린 것이나 할머니 손을 끌고 가서 말려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가슴에 걸려 있습니다.
또 하나, 가슴 아픈 기억은 할머니가 이런 사실을 알려 주셨을 때입니다.
"너가 네 엄마한테 꼭 한 번 맞고 와서 운 적이 있다. 내가 네 엄마한테 물심부름을 시켰더니 빈 대접을 든 채로 돌아와서 울더라. 왜 우느냐 했더니 '형수, 형수, 물 줘 하니까 엄마라 부르라며 때려' 하더라."
요즘 여자들 같으면 젊은 엄마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데 자식으로부터 엄마 소리를 듣고 싶어 하셨으나 듣지 못하고 가신 스무 살 엄마. 정말 죄송합니다.
엄마. 엄마께 죄송한 일 또 하나는 아직껏 아버지와 합장을 못 시켜 드린 일이지요. 올 윤사월에 그 일을 하려고 하였는데, 뜻밖에 숙부께서 병환에 드신 관계로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합장은 아버지 유해를 일본에서 모셔 왔을 때 했어야 했다고 숙부께서는 두고두고 말씀하십니다만, 제 가슴속에는 이러한 응어리가 있었습니다.
일본에 아버지 유해를 모시러 가니 그쪽 어머니께서 굉장히 슬퍼하시더군요. 지금도 아버지 유해를 인수받던 새벽이 떠오릅니다. 유해는 왔던 길을 되짚어가는 것이 순리라고 해서 시모노세키에서 부산으로 출항하는 배를 타기 위해서는 새벽길을 나서야 했어요. 오사카에 머물고 있던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고속도로 입구로 와까야마에서 유해를 모시고 나오기로 한 동생을 맞으러 나갔지요.
그날 아침에는 안개가 가득 끼었어요. 숙부와 둘이서 기다리고 있는데 비상 라이트를 켠 차가 다가왔어요. 그쪽 어머니와 동생이 그 차에서 내렸지요. 동생은 하얀 끈으로 목걸이를 해서 가슴에 안은 아버지 유해를 나한테로 넘겨주었어요. 그 때 그쪽 어머니가 막 우셨습니다. 동생도 저도 울었습니다만, 제 가슴속에는 솔직히 이젠 됐다는 안도감 같은 것이 드는 것이었어요. 그리하여 아버지 유해를 모시고 돌아오는 배에서 보니 어쩌면 그리도 달이 밝던지요? 동행한 나한테 넌지시 물었습니다.
"네 어머니와 합장을 했으면 좋겠는데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때까지만 해도 제 가슴속의 아버지에 대한 응어리가 덜 풀렸던 듯 싶습니다. 단호히 고개를 저었으니까요. 그러나 이제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두 분을 함께 모시려고 합니다.
엄마. 엄마가 이 땅에 계시지 않는 동안 저희 남매를 키우느라 할머니 고생이 참 많으셨습니다. 특히 제가 간혹 심통을 부려서 할머니를 힘들게 하였지요. 그럴 때마다 할머니는 팔을 베어 버리고 천 리나 만 리나 도망을 가 버리겠다고 하였지요. 그런 밤이면 저는 팔베개를 내 준 할머니가 팔을 베어 버리고 도망가실까 봐 할머니 속적삼 옷고름을 손가락에 묶어 두고 잠들곤 하였습니다.
커서는 또 밥을 굶기가 일쑤였지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제 말을 들어주지 않을 때는 단식 투쟁을 벌였던 것인데 일부러 가지고 가지 않은 손자의 도시락을 들고 와서 학교 담 밑에 우두커니 서 있던 할머니의 모습이 간혹 떠오릅니다.
엄마. 오늘이 엄마 제일 전날 밤이라서 생각납니다. 소년소녀 가장 수기 심사 때였어요. 국민학교 5학년짜리 글이었는데 제 엄마 제사가 돌아오니까 산으로 고사리를 끊으러 다녔다고 했어요. 그래서 콩나물도 사고, 조기도 두 마리 사고, 쌀도 사 와서 일곱 살짜리 동생과 둘이 앉아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었는데요.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화장실을 몇 번이고 들락거렸습니다.
엄마. 엄마께 한 가지 감사드릴 일이 있어요. 그것은 하얀 눈이 소복소복이 내리는 음력 동짓달에 저를 낳아 주신 것입니다. 엄마, 하느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제가 엄마를 만나러 그쪽 별로 가는 때도 눈 내리는 달이었으면 하고 바라고 있습니다.
엄마. 끝으로 하나 고백할게요. 엄마가 못 견디게 그리울 때는 해질 무렵이라는 것입니다. 엄마 나이 스물에 돌아가신 산소 앞에 가서 마흔이 넘은 나이로 가서 울고 온 적도 있으니까요. 엄마, 그쪽도 지금 낙엽 지는 가을인가요? 안녕히...
정채봉 프란치스코(1946-2001)
한국의 안데르센이라 불린 대표적인 동화 작가 수필가
샘터사 편집장으로 오래 활동하였다.
1946년 전라남도 승주(현 순천)에서 태어나 동국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으로 작가 활동 시작
1980년 천주교에 입문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
1998년 간암 판정을 받고 일시 회복하였으나 재발하여 2001년 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순천 용수동 천주교 묘지, 할머니 어머니*아버지 곁에 묻혔있다.
*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 정채봉 문학관에 적으나마 작가의 흔적이 있다.
“엄마 끝으로 고백하나 할께요. 엄마가 못 견디게 그리울 때는 해질무렵이라는 것입니다. 엄마 나이 스물에 돌아가신 산소 앞에 가서, 마흔이 넘은 나이로 가서 울고 온 적도 있으니까요. 엄마, 그쪽도 지금 낙엽지는 가을인가요?” 스무살 어머니 중

첫댓글 그리운 정채봉 프란치스코님, 웃고 계신 모습이 너무 선하신 분, 그저 쉰 살 넘기시기 바쁘게 너무 일찍 가셨어요. 하늘나라 어머니께서 좋아하셨을지 슬퍼하셨을지, .....'스무살 어머니' 이 글 전에도 읽었건만 다시 읽어도 가슴이 먹먹하게 아프고, 덩달아 내 부모도 그리워지는 귀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