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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2:12-24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세상은 선해지는가? 악해지는가? 우리가 사는 이 땅은 좋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빠지고 있는가? 단순한 질문 같지만, 선뜻 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마지막 때인 말세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고통당하는 것이 당연하며 세상은 악해진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또 다르게 보자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하였고, 복음이 점점 전파되어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기에 이 땅은 점점 더 선해져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나라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한국을 헬조선, 헬반도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옥과 같이 어렵고 희망이 없는 곳이라는 뜻일 것입니다. 이 땅을 지옥이라고 표현한다는 것이 참 씁쓸하지만, 청년층이 느끼는 박탈감과 절망감이 특히 심하고 출산율이 그렇게 낮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유엔에 가입된 193개 나라 중에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어느 나라에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은 말할 것도 없고, 상당히 많은 국가가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극단적인 정치 갈등과 극심한 경제 위기로 기본생활이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을 위시한 선진국들의 형편도 잘 아실 것입니다. 과연 어느 나라, 어느 체제 아래에서 우리는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또 우리나라의 현재와 100년 전, 아니 불과 50년 전을 비교한다면 과연 얼마나 많은 분이 그때가 더 나았다고 하시겠습니까? 우리나라를 비롯해 인류 전체의 도덕 및 정치, 경제의 수준은 비약적으로 높아졌고, 의료와 농업 기술의 발전으로 평균 수명도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세계 인구는 80억 명을 돌파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인류는 더 나은 삶을 살고 있습니다. 더 나은 먹거리와 더 나은 누릴 거리를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더 잘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더 못살고 있습니까? 이 세상은 더 나아진 것입니까? 아니면 더 나빠진 것입니까? 우리는 지옥을 살아가야 합니까? 천국을 살아갈 수 있기는 한 것입니까? 오늘 말씀은 이러한 상반되는 요소가 중첩된 긴장 관계를 다룹니다. 본문을 통해 우리 자신과 역사와 만물을 경영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경륜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르호보암의 어리석은 답변 (12-15)
(12) 삼 일 만에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르호보암에게 나아왔으니 이는 왕이 명령하여 이르기를 삼 일 만에 내게로 다시 오라 하였음이라
르호보암은 삼 일 동안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었습니다. 그리고 노인과 동료들의 의견을 듣고서 답변을 준비했습니다. 이제 백성들은 큰 기대를 품고 그 앞에 나옵니다. 힘든 노역과 무거운 과세를 덜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주장에는 이미 모순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와 같이 신속하게 침략에 맞서고 대응하여 자신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왕을 요구했습니다. 사무엘상 8장 20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우리도 다른 나라들 같이 되어 우리의 왕이 우리를 다스리며 우리 앞에 나가서 우리의 싸움을 싸워야 할 것이니이다 하는지라.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왕정에서 그들의 소원은 이미 이뤄졌습니다. 솔로몬 시대에 나라는 태평성대를 이뤘고 다른 민족의 침략을 걱정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에 못지않게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드디어 깨달은 것입니다. 그것도 사무엘이 이미 예고한 그대로였습니다. 사무엘은 너희가 왕을 원하지만, 너희는 결국 그의 종이 될 것이라고 선포했습니다(삼상 8:17). 이제 말 그대로 그들은 국가와 왕의 종이 되었습니다. 즉 나라가 그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나라를 위해 존재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좋아진 것입니까? 나빠진 것입니까? 세상은 진보한 것입니까? 퇴보한 것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차차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3-14)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내 아버지는 채찍으로 너희를 징계하였으나 나는 전갈 채찍으로 너희를 징치하리라 하니라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르호보암은 가혹하게 답합니다. 즉 국가 권력을 강화하여 더욱 철저하게 수탈하겠다고 선포한 것입니다. 열왕기상 3장 8절 9절에서 솔로몬은 자신이 주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다고 고백하며,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렇듯 솔로몬은 백성을 두려워하고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 앞에서 행하겠다고 맹세했지만, 그의 마음은 타락하여 백성을 그저 권력을 유지하는 도구로 삼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아들 르호보암 역시 아버지의 기조를 그대로 따릅니다. 어떤 구조나 체제라도 일단 발생하면 그 유지 자체를 목적으로 삼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기득권자가 자신의 권한을 제한하는 일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게 이 땅의 멍에는 점점 더 무거워집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 내 안에서 쉬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이 우리 멍에와 짐을 같이 지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어떤 단체나 사람이 우리의 짐을 대신 지고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리라 믿고 찾아가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대는 환상인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의지도 없고 능력도 없습니다. 죽기까지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안식을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15) 왕이 이같이 백성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이 일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여호와께서 전에 실로 사람 아히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에게 하신 말씀을 이루게 하심이더라
하지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는 점입니다. 아히야를 통해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지점은 항상 우리를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만드는 부분입니다. 르호보암이 자신의 악한 뜻대로 판단하고 결정한 일이 어떻게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난 것이냐는 의문입니다. 즉 왜 하나님이 악한 일, 또는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도록 하시느냐는 물음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는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마치 아이에게 주사를 놓으면, 그 자체는 아이에게 고통을 주는 나쁜 일로 보일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건강하게 만드는 일인 것과 같습니다. 이 점도 이후에 더 살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변절(16-20)
(16-17)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이스라엘은 왕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않자 돌아섭니다. 자신들은 다윗과 관계가 없고 받을 유산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새의 아들이라고 다윗을 폄하하며, 받을 유산이 없으니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왕과 백성이 서로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 그들은 서로에게 종이 되라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7절 말씀에서 노인들이 자문합니다.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은 영원히 종이 되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스라엘 민족에게 영원한 종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인식부터 문제입니다.
그리고 좀 더 살펴보면 교만함과 자기 중심성이 보입니다. 즉 당신이 내 말을 먼저 들어줘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네가 먼저 나를 섬겨야 나도 너를 섬기겠다. 네가 먼저 나의 종이 되어야 내가 너의 종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즉 내게 이익이 있어야만 네게 이익을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야말로 뿌리 깊은 인간의 죄성입니다. 왕이든 백성이든 서로를 섬기라고 요구하고 있을 뿐, 상대를 섬기겠다는 의지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갈등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족 간에, 친지 간에, 친구 간에, 동료 간에, 그리고 단체 간에, 지역 간에, 국가 간에 다툼과 갈등이 있는 이유는 타락한 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과 악을 아는 열매도 자신을 섬기기 위한 도구로 삼았고, 이는 결국 하나님도 자신을 섬겨야 한다고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의 근원은 하나님을 섬길 대상으로 보지 않음으로 비롯한, 해묵은 자기애, 자기 중심주의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마태복음 20장 25-28절은 이렇게 증거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집권자들이 임의로 주관하고 권세를 부리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이자 원리입니다. 힘이 있는 자가 힘없는 자를 괴롭히는 것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너를 죽이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내가 먼저 종이 되어 섬기겠고, 내 목숨을 먼저 바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에게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영과 마음이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자신의 이익을 잘 챙기고, 자기 것을 잘 누리고,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부리면 지혜롭고 성공하고 훌륭하다고 말하는 세상에서 도리어 섬기고, 종이 되고, 자기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합니다. 우리가 승리 비결이라고 믿고 있는 세속적인 방식이 실제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패배의 방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들은 이제 다윗의 자손과는 상관이 없다며 자기 장막으로 돌아가 버립니다. 이스라엘의 태도 역시 비판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들은 다윗왕의 언약을 알았고, 신실해야 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눈앞의 이익 때문에 모든 약속을 저버리고 돌아가 버립니다. 120년에 걸쳐 이어져 왔던 단일 국가가 갈라지는 순간입니다.
(18-21) 르호보암 왕이 역꾼의 감독 아도람을 보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를 돌로 쳐죽인지라 르호보암 왕이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하였더라 이에 이스라엘이 다윗의 집을 배반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더라 온 이스라엘이 여로보암이 돌아왔다 함을 듣고 사람을 보내 그를 공회로 청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았으니 유다 지파 외에는 다윗의 집을 따르는 자가 없으니라 르호보암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유다 온 족속과 베냐민 지파를 모으니 택한 용사가 십팔만 명이라 이스라엘 족속과 싸워 나라를 회복하여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돌리려 하더니
르호보암 왕은 강제노동 감독관인 아도람을 보내 그들을 제어해 보려고 했으나 오히려 돌에 맞아 죽고 맙니다. 이제 왕권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르호보암 왕은 급히 수레에 올라 예루살렘으로 도망합니다. 참 애처로운 일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다윗의 집을 배신했고 여로보암을 왕으로 삼습니다. 르호보암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총동원하여 십팔만 명의 군대를 징집합니다. 나라를 회복하겠다는 비장한 결의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일을 막으십니다. 분단 국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민족을 왜 분열되게 하셨는가? 왜 그 끔찍한 전쟁을 겪게 하셨는가? 우리는 다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일을 허락하시거나 막으실 때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이유가 있음을 겸손히 고백하며 순종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22-24)
(22-24)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사람 스마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솔로몬의 아들 유다 왕 르호보암과 유다와 베냐민 온 족속과 또 그 남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여호와의 말씀이 너희는 올라가지 말라 너희 형제 이스라엘 자손과 싸우지 말고 각기 집으로 돌아가라 이 일이 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 하셨다 하라 하신지라 그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따라 돌아갔더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올라가 형제와 싸우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시며, 이 모든 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사실을 재차 알리십니다. 그리고 본문은 자세한 설명 없이 그들이 그저 말씀을 따라서 돌아갔다고 증거하며 마무리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릅니다. 하지만 먼저 이 세상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확인합니다. 이스라엘은 외면적으로 더 나은 삶을 누렸지만, 그 내면은 썩어 문드러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분열에 이르고 맙니다. 다윗과 솔로몬으로 이어지는 그 황금기도 실상은 인간을 더욱 수탈하고 괴롭게 만드는 시기였음을 봅니다. 그리고 남북이 분열되는 사건을 초래합니다. 이렇게 보자면 오늘 사건은 비극입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아 되시는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촉구하는 과정이 됩니다. 세상 나라는 흥왕하다가 망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는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이와 비슷한 모습에 좌절하시는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선포되며 믿는 자가 많아지는데도 왜 이 사회는 아직도 악한가 질문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천지에 새 하늘과 새 땅을 덧입혀 주실 것을 믿는 존재입니다. 이 나라는 망해도 하나님의 나라는 실패하지 않음을 믿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러한 실존적 긴장 관계를 잘 표현하는 말이 있습니다. 바로 선지자적 비관주의라는 어구입니다. 즉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였지만 이 땅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이 땅을 보며 절망에 빠지지 않고 우리에게 맡겨주신 최선을 다해 이 땅을 고치도록 부르짖고 우리의 삶을 헌신하는 태도입니다. 선지자들은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듣든, 듣지 않든 외친 것처럼 우리도 이 땅의 부정의와 잘못을 바로 보고 선포하며 고치는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하나님께 있음을 마음 깊이 신뢰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해도 낙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고, 실패하는 것이 정상이기 때문이고, 나는 실패하고 사람은 실패해도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긴장 관계를 살아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고 늙어집니다. 하지만 속사람은 날마다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며 새로워집니다. 이것이 환난 당하지만 세상을 이기며 평안함을 누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오늘도 악해지는 세상에서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신뢰하여 맡은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악한 세상을 보며 한탄하고 한숨 쉬는 우리를 아십니다. 인간의 계획이 어그러지고 망가질 때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나타내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나라와 이 땅의 나라, 영생과 육체의 생명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믿음으로 또 하루를 살아낼 수 있도록, 승리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세상은 악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선해진다고 생각하십니까?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2. 하나님께서 우리를 분단 국가 되게 하신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선지자적 비관주의’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자신의 자리에서 어떻게 실천할 수 있습니까?
(작성: 이대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