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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6:1-13
찬송가: 484장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욥, 까닭을 묻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3장에서 욥이 자신의 출생을 저주하며 죽음을 갈망하던 욥의 심정에 대해 ‘욥은 마치 미친년처럼 씨불이고, 청소년기 아이들처럼 욕지거리를 해 댄다.’라고 욥의 심정을 대신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욥의 그런 말을 들었던 친구들 가운데 데만 사람 엘리바스가 4장과 5장에서 욥에게 억지로라도 통회자복하라고 말했습니다. 또 엘리바스는 욥이 그렇게 하도록 심하게 질책하기도 하였었습니다. 그러자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린다.’는 말이 있듯이 엘이바스의 말을 들었던 욥이 오늘 본문을 통해 엘리바스의 말로 인한 괴로움을 쏟아냅니다.
괴로움을 쏟아내는 욥(1-7)
(1-7) 욥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괴로움을 달아 보며 나의 파멸을 저울 위에 모두 놓을 수 있다면 바다의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나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 들나귀가 풀이 있으면 어찌 울겠으며 소가 꼴이 있으면 어찌 울겠느냐 싱거운 것이 소금 없이 먹히겠느냐 닭의 알 흰자위가 맛이 있겠느냐 내 마음이 이런 것을 만지기도 싫어하나니 꺼리는 음식물 같이 여김이니라
1절부터 3절에서 욥은 자신의 괴로움과 파멸감을 저울에 달아본다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앞 장들에서 엘리바스가 했던 비난의 말들에 대한 응답입니다. 욥의 이 말들 속에는 욥이 겪고 있는 고난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지를 짐작하게 합니다. 또 그렇게라도 말하지 않으면 속에서 울화가 치미는 심사를 조금도 헤아려 주지 못하는 친구 때문에 욥의 언어는 거칠어 집니다. 우리도 욥처럼 어려운 일들을 만나게 되고 또 그런 고난과 역경의 시간들을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과정 속에서 나의 고난이 어느 정도 일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보다는 이 고난과 역경의 시간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이 당한 모든 고통을 합쳐서 저울에 달아보면 바다의 모래보다 무거울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 정도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울 만큼 버겁다는 것을 조금 과장해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욥은 그렇게 말한 뒤에 자신이 3장에서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 말했던 것과 바로 앞 2절과 3절 상반절에서 했던 말들이 조금은 과장되었다고 느꼈엇는지 “그러므로 나의 말이 경솔하였구”라고 3절 하반절에서 말합니다. 이 말은 “내가 실수했다, 하지 말았어야 했을 말을 했다”는 것이 아니라 “내 말들이 내 감정에 의해 삼켜져서 거칠게 나왔다”는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3장과 본문 2절과 3절 상반절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했던 말들이 고난의 과정속에 있다 보니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서 말하기 보다는 복받친 감정을 따라서 얘기를 해서 격양된 표현들이 나왔다고 말한 것입니다.
자신의 감정을 추스린 욥은 4절에서 “전능자의 화살이 내게 박히매 나의 영이 그 독을 마셨나니 하나님의 두려움이 나를 엄습하여 치는구나”라고 자신이 겪고 있는 고난이 정확하게 하나님이 가하신 신적 타격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 욥은, 살아갈 힘을 공급해 주는 먹이가 없기 때문에 울고 있는 짐승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자신의 처지를 말합니다. 계속해서 소금 간이 되지 않은 싱거운 음식, 계란 흰자위 같은 맛없는 음식을 보고 식욕을 느끼지 못하듯이 자신이 이렇게 짐슴처럼 울부짓는 이유는 자신의 원통한 고통 때문이고 또 이 고통은 간이 맞지 않아 회피하고 싶은 음식을 놓고 먹어야 하는 사람처럼 자신은 생의 의욕을 모두 상실했다고 7절을 통해 현재 자신의 모습을 한탄합니다.
만약 우리도 억울하게 고난을 당하게 되면 욥처럼 밥맛이 없다고 말할 것이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매우 힘들다 할 것입니다. 또 주변에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 주는 것 같았지만 그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안타까움을 표현하는 것이었을뿐 진정한 이해를 통해 욥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또 그런 상황 속에서 어쩌면 욥은 극심한 고립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를 읽고 있노라면 ‘내가 저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해야하지?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이 들며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특별히 욥기는 지혜서라고 하는 분류의 한 부분입니다. 욥기를 읽으면 인생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어서 지혜서로 분류하지 않았나 싶지만 사실 지혜서를 기록한 성경기자들은 지혜에도 한계가 있으며 지혜를 교조적으로 절대화하거나 지혜를 터득하면 만사형통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게르하르트 폰라드는 ‘구약 성경의 지혜신앙의 가장 큰 특징은 지혜의 한계를 인정하는데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욥의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이런 비슷한 상황에 처하면 이러한 방법으로 이런 상황들을 돌파해 나갈 수 있겠다는 것을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숭실대 김회권교수는 ‘욥은 인내를 가르치는 책, 고난을 견디고 마침내 의의 면류관을 얻는데 자극과 통찰을 주는 책’이라고 말했었습니다. 즉 욥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 어떻게 이런 상황들을 모면해 나갈 수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이런 고난속에서 버텨내야 함을 배우는 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혹 교우님들 가운데 고난과 고통의 과정 가운데 있다면 그 고난과 고통의 문제들이 속히 해결되는 것만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고난과 고통 가운데서 주님만 붙잡고 버텨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간구하여서 그 시간들이 다 지나간 뒤에 주님께서 주실 의의 면류관을 기쁨으로 얻게 되길 소망합니다.
죽기를 생각하는 욥 (8-13)
앞선 7절까지의 내용에서 자신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향해 쏜 화살을 맞고 고통에 빠진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망시키려 하신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8절 이하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멸망시킬 기세로 자신을 내동댕이 치는 기막힌 현실을 원통해합니다.
(8-13) 나의 간구를 누가 들어 줄 것이며 나의 소원을 하나님이 허락하시랴 이는 곧 나를 멸하시기를 기뻐하사 하나님이 그의 손을 들어 나를 끊어 버리실 것이라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내가 무슨 기력이 있기에 기다리겠느냐 내 마지막이 어떠하겠기에 그저 참겠느냐 나의 기력이 어찌 돌의 기력이겠느냐 나의 살이 어찌 놋쇠겠느냐 나의 도움이 내 속에 없지 아니하냐 나의 능력이 내게서 쫓겨나지 아니하였느냐
8-9절에서 욥은 하나님께서 멸망시킬 기세로 자신을 내동댕이치시는 것 같은 처량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탄식합니다. 자신의 간구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것 같은 현실도 극한 고통이지만, 이보다 더 답답한 것은 죽기를 바라는 자신의 소원조차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 않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욥은 극심한 고통으로 인해 차라리 죽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욥의 생각은 전통적인 유대교 신앙이 지향하는 바를 뒤집는 것입니다. 삶이 너무나도 고통스럽다며 탄식의 노래를 부르는 시편의 성경기자들은 하나님께서 도와주셔서 그들이 죽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끊어 주시길 바란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고통이 하나님의 징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확신하는 시편의 성경기자들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짓누르는 손을 속히 거두어주시기를 기도하는데 욥은 오히려 하나님의 손이 자신을 완전히 끝내주셨으면 좋겠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욥은 왜 이렇게 자신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을까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서 였습니다. 10절을 보면 욥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할지라도 내가 오히려 위로를 받고 그칠 줄 모르는 고통 가운데서도 기뻐하는 것은 내가 거룩하신 이의 말씀을 거역하지 아니하였음이라’
욥의 이 말은 이 때까지는 섭섭한 마음이 들었어도 어떻게든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버텨왔는데, 이제는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한계 상황이 조금만 더 지속이 된다면 하나님께 범죄할 수도 있으니, 그런 일이 있기 전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거두어가시길 원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또 욥은 혹독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1장 21절에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욥은 계속해서 겪고 있는 일들이 그동안 알고 의지해왔던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넘어서서 혼돈 가운데 빠지게 하고 있기에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 생을 마감하고 싶다는 표현도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욥이 당장 죽고자 하는 다른 이유가 11절과 12, 13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11절과 12절에서 욥은 자신의 기력이 돌처럼 강하지도 않고, 또 육신이 놋쇠처럼 단단하지도 않아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는데 이젠 마지막에 회복될 것이라는 소망도 사라져서 차라리 죽고자 한다라고 말합니다. 또 13절에서는 자신을 지탱시킬 도움, 능력이 이미 다 바닥났기 때문이라고도 말합니다.
인생을 사노라면 우리들도 욥과 비슷한 상황에 직면할 때가 있습니다. 무언가 짚고 일어날 수 있는 것이 보이거나 가지고 있다면 그래도 희망을 걸어 볼 만하지만 어떤 도움도 없는 것 같으면 속절 없이 무너져 내리고 이내 포기하게 됩니다. 또 주변의 가까운 누군가가 다가와 무엇인가 잘못한게 있어서 지금의 고난을 당하는 것일 수 있을거라고 말한다면 아마도 더 죽음을 떠올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욥기서 말씀을 묵상하면서 성동의 두 가지 자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욥과 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 것인가?’입니다. 둘째는 ‘욥과 같은 처지에 우리가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입니다. 우리 주변에 욥과 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가 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다가가야 하겠습니까? 로마서 12장 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로마서 12장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웃들과 또 이방인 이웃들과 더불어 일상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는 내용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15절은 즐거워하는 사람과 함께 즐거워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해 주고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과 동일한 마음을 가지고 그 사람과 함께 그 시간들을 보내주라는 것입니다. 한 마음이 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와 한 마음이 되어 주셔서 우리의 아픔과 우리의 슬픔, 우리의 필요를 알아주셔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힘과 용기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욥과 같은 처지에 있는 누군가가 우리 주변에 있다면 우리는 엘리바스처럼 울어주면서도 옳은 것 같은 말을 하며 회개할 것을 권면하기보다 함께 그저 묵묵히 아픔과 슬픔,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동행해 줌으로써 고통 가운데 있는 누군가가 우리로 인해 주님의 은혜를 다시 경험하고,우리가 만났던 주님을 만나고 경험할 수 있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혹시 우리가 욥과 같은 처지에 직면하게 될 때 로마서 8장 26절의 말씀을 기억하십시다. 로마서 8장 26절 말씀입니다.
(롬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고 또 우리가 고난당함으로 인해 미처 기도하지 못할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심을 잊지마십시다. 본문의 욥처럼 받을 도움이 없다 생각하여 삶을 포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님을 기억하고 의지함으로 고난을 버텨내어 결국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이 이루어짐을 경험하는 우리가 되길 소원합니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욥이 당하는 것과 비슷한 고난을 당하면 과연 욥처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욥이 한 만큼만 한다면 하나님께 칭찬받지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욥만큼 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럴지라도 고난과 아픔의 상황들을 만나게 될 때, 욥처럼 하는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창문을 열고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특별히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고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주님께서 씌워 주시는 은혜의 우산 속에서 고난과 아픔의 폭풍이 지나길 기다리면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하나님, 우리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경험되는 오늘을 살아가는 저와 교우님들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하나님, 때때로 우리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떻게 그들을 위로해야 할지 알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욥의 친구들이 보여준 잘못된 위로가 아닌, 진정으로 함께 울고 아픔을 나눌 수 있는 지혜와 사랑을 저희에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아픔 가운데 있는 이들과 함께하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 되어줄 수 저희가 되도록 이끌어 주시길 원합니다.
또한, 우리 자신이 욥과 같은 어려움을 겪을 때,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성령님을 의지하여 포기하지 않고 고난을 견뎌내게 하옵소서.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시는 성령님을 신뢰하며, 모든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욥이 고백했던 것처럼,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찬송하는 저희가 되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주님만 찬양하며 하루를 살아가도록 은총을 더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위한 질문
1. 친구 엘리바스는 욥에게 통회하고 회개할 것을 권면했습니다. 이러한 친구의 반응이 진정한 위로였을까요?나라면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2. 욥은 자신의 고통을 바다의 모래보다 무겁다고 비유하며 매우 과장된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욥이 이렇게 과장된 표현을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욥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어떤 점인가요?
3. 욥은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런 욥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떤 신앙의 자세를 배울 수 있을까요?
4. 욥과 같은 고통에 처한 사람을 돕기 위해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욥의 친구들이 보여준 모습과 비교하여, 어떤 점이 중요할까요?
(작성 : 성포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