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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한국 성서 한림원(Korea Bible Academy) 원문보기 글쓴이: 에스라
이름 | 한자 | 당시 나이 | 직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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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도원 | 徐道源 | 53 | 전 대구매일신문 기자 |
김용원 | 金鏞元 | 41 | 경기여고 교사 |
이수병 | 李銖秉 | 40 | 일어학원 강사 |
우홍선 | 禹洪善 | 46 | 한국골든스템프사 상무 |
송상진 | 宋相振 | 48 | 양봉업 |
여정남 | 呂正男 | 32 | 전 경북대 학생회장 |
하재완 | 河在琓 | 44 | 건축업 |
도예종 | 都禮鍾 | 52 | 삼화토건 회장 |
그 외의 형량은 다음과 같다.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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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징역 | 이태환, 유진곤, 전창일, 이성재, 김한덕, 라경일, 강창덕 |
징역 20년 | 정만진, 이재형, 조만호, 김종대 |
징역 15년 |
전재권, 황현승, 이창복, 임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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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4월 8일 이들에게 사형을 판결한 대법원 판사들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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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복기 | 閔復基 | 대법원장 |
민문기 | 閔文基 | 대법원 판사 |
안병수 | 安秉洙 | 대법원 판사 |
양병호 | 梁炳皓 | 대법원 판사 |
한환진 | 韓桓鎭 | 대법원 판사 |
주재황 | 朱宰璜 | 대법원 판사 |
임항준 | 任恒準 | 대법원 판사 |
이일규* | 李一珪 | 대법원 판사 |
박정희의 딸인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2004년 8월 29일, 인혁당사건 관련 사과요구에 대해서 '(사형판결은) 법적으로 결론난 사항들'이라서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박 대표는 연찬회에서 작심한 듯 40분 가량의 시간을 할애해, 당 안팎의 과거사관련 논란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박 대표는 우선 사과 문제에 대해 “과거의 잘못을 사과할 만큼 충분히 사과했다”는 태도를 보였다. 그리고는 이어지는 사과요구에 대해 “순수한 의도가 아니라, 헐뜯기”라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그는 유신시대도 적극 ‘옹호’하고 나섰다. 인권탄압과 조작 의혹이 제기된 인혁당 사건 등에 대해 “법적으로 전부 결론난 사항들”이라고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박 대표는 또 유신시대에 대한 평가는 “역사학자와 국민의 몫”이라고 주장했다.
– “딸의 눈에 흐려진 ‘과거 청산’”, 《한겨레신문》, 2004년 8월 30일 작성.
2005년 12월 8일에는 국가정보원의 인혁당 관련 발표에 대해 가치가 없고 모함이며 진실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혁당사건이 재심에서 무죄판결이 나온 날에는 입장표명 없이 침묵했다.[9]
- 국정원 과거사 진실위에서 인혁당, 민청학련 사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개입, 주도했다고 했다.
-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 "국정원 과거사진실위에서 발표하는 내용들은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이다. 첫번째 김형욱 사건도 박 전 대통령이 구체적으로 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가 살해를 지시했다고 둔갑했다. 두번째 정수장학회도 제대로 된 서류 있는데 진실위에서 날짜 위조하면서 강탈했다고 했다. 인혁당 문제도 증거는 없지만 정황이 이렇다는 식이다. 국정원 진실위 주장은 정당성이 없다.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다. 돈 들여 과거사위원회 만들었는데 왜 법적 근거도 없이 별도로 (국정원이) 따로 하느냐."
– “단독인터뷰: 박근혜 “국정원 과거사 규명은 가치없는 모함” 강력 비난”, 《국민일보》, 2005년 12월 8일 작성.
또, 2012년 9월 10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과 다음날 국회 본회의에 출석하면서 기자들 앞에서는 '인혁당 사건에는 두가지 판결이 존재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반복했다.[10] [11]
"인혁당 사건 유족들에게 사과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는 대법원 판결이 두 가지로 나왔다" "그 부분에 대해서도 또 앞으로의 판단에 맡겨야 하지 않겠냐고 답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대법원에서 상반된 판결도 있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에도 여러 증언을 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런 것까지 다 감안해서 역사의 판단에 맡겨야 되지 않겠는가"
안병직 교수는 2011년 5월 26일에 출간한 책 《보수가 이끌다-한국 민주주의 기원과 미래》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안 교수는 1964년 8월 수사기관이 발표한 1차 인민혁명당 사건을 4·19 이후 최초의 좌익운동으로 평가했다. 안 교수는 1962년 대학원에 진학해 빨치산 출신의 인혁당 가담자인 박현채를 만나 교육을 받았다. 마르크스, 레닌, 마오쩌둥의 저술을 탐독했고 한용운과 신채호의 사상에 따라 결국은 민족주의를 중심축으로 하는 사회주의자가 됐다. 인혁당의 조직 목적은 당시 활발하게 전개되던 학생운동을 지도하는 것이었는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그는 평가했다. 당시 학생운동은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는데, 인혁당이 박범진 전 의원 등을 중심으로 이들 운동단체에 하부조직을 심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안 교수는 지난해 박 전 의원이 인혁당의 실재에 대해 증언한 것을 상기시키며 인혁당은 남한에서 자발적으로 생긴 공산혁명을 위한 조직이었다고 증언했다.
– “안병직 교수 증언록을 통해 본 '5대 시국사건'”, 《동아일보》, 2011년 5월 25일 작성.
제1차 인혁당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범진 전 국회의원은 ‘당시 인혁당의 강령 내용은 민족 자주적인 정권을 수립해서 북한과의 협상으로 통일을 시도한다는 것이었다’고 밝히며, ‘위에서 아래로 관리하는 지하당’이었다고 주장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의 발표처럼 지하당이 아닌 이념서클이었다면 구성원을 비밀로 할 필요가 있었겠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12]
다만, 소위 전향하였음을 근거로 인혁당의 실체를 주장하는 이들이 말하는 그 실체는 제1차 사건의 인혁당을 말하는 것이고, 제1차 사건과 제2차 사건 판결의 정당성이나 제2차 사건의 실체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박근혜와는 그 주장의 궤를 달리 함은 분명하다.
첫댓글 인혁당 사건정리가 잘 되었네요... 역사를 모르면 그릇된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