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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유설교(93)
어찌 그러한 일이 ....
본문 : 요 3:9-13
<마중물 이야기>
어느 뜨겁고 힘든 황량하기 그지없는
황야를 지나가던 한 나그네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황야를 지나던 중 길을 잃어 한참을
헤매게 되었습니다.
마침 물도 떨어져 극심한 갈증을 겪고 있었고,
몸도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히 한 오두막을 발견했습니다.
그 오두막은 아무도 살지 않는
낡은 오두막이었습니다.
혹시 물이나 먹을 것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오두막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황야에 있는 버려진 오두막이라
그런지 먹을 것은 도저히
찾아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오두막 뒷켠에 낡은 수동펌프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수동펌프 옆에는
작은 항아리가 있었는데...
항아리에는 썩은 물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리고 항아리에는 작은 쪽지가
붙어 있었습니다.
"이 항아리의 물을 펌프에 넣고
펌프질을 하시오.
그럼 물이 나옵니다."
나그네는 항아리 앞에 서서
한참을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물이 안 나오면 어쩌지?
그냥 이 썩은 물이라도 마실까?"
"어차피 썩은 물인데 쪽지에 적힌대로
속는 셈 치고 한번 그대로 해볼까?"
한참을 고민하던 나그네는
결국 쪽지에 적힌대로 썩은 물을 넣고
펌프질을 해보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반신반의 하며 나그네는 썩은 물을
펌프에 넣고 열심히 펌프질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압력이 생겨 땅 속 깊은 곳에서
물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결국 펌프에서 시원하고 깨끗한 물이
콸콸 흘러나오기 시작하였습니다.
나그네는 갈증도 해소하고,
물통도 채우고, 온 몸을 시원한 물로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길을 떠나기 전 나그네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고
그 옆에 작은 쪽지를 하나 다시 써 붙였습니다.
“이 물을 마시지 말고 꼭
펌프에 넣고 펌프질을 하시오.
그러면 물은 꼭 나옵니다!!!
그리고 다음 사람을 위하여
이 항아리에 물을 채워두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많은 가정에서 지하수를 끌어올려
사용하는 펌프라는 게 있었습니다.
지렛대 같은 손잡이를 위아래로
계속 움직여야만 땅 속의 물을
퍼 올릴 수 있는 기구입니다.
그러나 그냥 펌프질을 하면
물을 끌어올릴 수 없습니다.
물을 한 바가지쯤 부어야
관 속에 압력이 생겨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힘이 작동하여....
물이 나오게 되는 원리입니다.
그 한 바가지의 물을 ‘마중물’이라고 합니다.
손님을 '마중한다' 할 때의
바로 그 마중을 뜻하는 것입니다.
물을 얻기 위해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필요하듯.....
우리 인생도 무엇인가를 원한다면
마중물을 부어야 합니다.
‘지그 지글러’라는 사람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인생에서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뭔가를 집어넣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인생이라는
난로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난로야 날 따뜻하게 해다오
그러면 장작을 더 넣어줄게.'
직원은 회사에 말한다.
'월급을 올려 주세요.
그러면 더 열심히 할게요.'”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 육신의 삶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헌신하는
‘마중물’이 있어야합니다.
저는 영적인 면에서도
이 ‘마중물의 원리’는
그대로 적용된다고 생각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예수님은 밤중에 자신을 찾아와
나름 자신의 신앙(표적신앙)을 고백하는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황한 니고데모는 순간
초등학생 같은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습니까.”....
이에 예수님은 어떻게 거듭날 수 있는지를
다시 설명하셨습니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물은 요한의 물세례를 의미합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적극적인 결단이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영적인 ‘마중물’입니다.
영적 ‘마중물’이 없으면
영원한 ‘생수’를 얻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마19장) 한번은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라며 칭찬 들을 것을 기대하며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의 약점을 찌르는
한 마디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
그러자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 앞에 나왔지만
‘마중물’을 부을 결단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예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 받았던
베드로와 안드레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우리가 물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예수님 앞에 자신을 드리는
적극적인 결단이 꼭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
우리의 결단과 우리의 의지만으로는
결코 거듭난 삶을 지속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외적 변화는 가능할지언정 본질적으로
거듭난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만에 하나 그것이 가능하다면....,
우리에게 구원자가 필요할 까닭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떤 사람들은 물세례 받은 것으로
거듭남이 끝난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의 특징은 자기 의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자기주장이 강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자기 의지와 결단으로
쟁취한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래서 물만이 아닌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본래 ‘거듭나다’는 말의 헬라어의 본뜻은
‘위로부터 난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힘입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
성령 받으면 자신의 죄임 됨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죄 많고
연약한 존재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능력을
경험한 후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였습니다.
바울도 성령 충만할 때
“내가 죄인 중의 괴수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성령님을 받으면 자아가 죽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다시 사는
거듭남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아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는”,....
즉 생각과 삶의 목적, 삶의 방식과 수단이
완전히 새로워지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나 성령이 언제 어떻게 임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통해서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알 수 있을 뿐입니다.
8절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거듭남은 신비스러운 사건입니다.
마치 바람이 언제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 것처럼 ....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합니다.
마치 씨가 땅속에 심어졌지만
어떻게 싹이 나는지 알지 못하듯이....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합니다.
카피라이터로 뒤늦은 나이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거듭남을 경험한 이만재라는 분이
이런 글을 썼습니다.
“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참 별 희한한 일도 다 있다.
내 나이 머지않아 지천명을 바라보는
나이에 아무리 생각해도 별일은 별일이다.
세상에 나처럼 한 평생 엉덩이 뿔을
높이 달고 휘저어 대며 오로지
술과 벗과 객기를.....
인생의 낙인 양 믿고 살던 사람이 ....
어느 날 갑자기 참으로
갑자기 그 좋던 술벗들 대신에
예수님 사랑해요 어쩌고를 응얼거리며
이미 이 세상의 호적이 존재하지
아니하는 까닭에.....
일찍이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먼 나라 목수간 집네 털보 아들을
은근히 혼자서 속으로 짝사랑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저도 희한한 경험입니다.
“왜 나를 위해 살지 않고
예수를 위해 살기로 했을까?”
우리가 예수 믿고 죄사함 받고
성령을 선물로 받으면......
언제 어떤 일이 성도님 안에서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하시는
신비한 사역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성령님을 인정하고 내 마음에 영접하고 ...
그 분의 나를 주장하도록
내어드리는 것뿐입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성령의 열매들이
내 삶을 통해 아름답게 맺어져가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보고
바람이 지나는 것을 알듯이 .....
우리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성령님의 역사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어찌 그러한 일이>......
예수님께서 바람을 예를 들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설명하자,.....
자타가 공인하는 소위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니고데모였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9절 “니고데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 .....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우리는 또 다시 앞에서
언급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상기하게 됩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이다'라는
말씀 말입니다.
'뭐 눈에는 뭐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육으로는 육밖에 이해할 수 없습니다.
육으로 영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영의 사람에게는 영의 문제가 보입니다.
그러나 육의 사람에게는
영의 문제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것은 그 사람의 교육정도나
지위고하와 무관한 일입니다.
니고데모는 육의 학식은 갖추고 있었지만
영적인 안목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였던
것입니다.
답답하신 예수님은 니고데모를
책망하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0절 “예수께서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의 선생으로서
이러한 것들을 알지 못하느냐.”
예수님은 당시의 니고데모를 비롯한
율법교사들의 한계를 분명히 짚어주고 계십니다.
사실 니고데모와 같은 바리새인들은
하나의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 있었습니다.
즉 그들은 혈통상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창17:1-8)....
자연히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생각하였음으로......
거듭남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을
지극히 생소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나아가 자신의 가르침이 ..
하늘에서 보고 경험한 참 진리의
말씀임을 강조합니다.
<본문 11-12절 읽어라>
11절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
12절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예수님은 중요한 것을 말할 때
버릇처럼 반드시 쓰는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가 바로 그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의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
벌써 이 말이 세 번째 등장합니다.
그만큼 이 대화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는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언하노라
그러나 너희가 우리의 증언을
받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또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늘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13절에서 자신이 하늘에서
온 자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13절 “하늘에서 내려온 자
곧 인자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자신이 보고 경험한 것을
확신 있게 증거하십니다.
문제는 아무리 확신 있게 증언한다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이해하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의 바탕 위에서 이해되는 것만 수용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12)고 하십니다.
언제 어느 기독교 신문에 보니
미국의 메릴랜드 북부에 위치한 한 교회가 .....
1월 26일부터 매달 마지막 주일을
‘개들을 위한 예배’로 드릴 예정이라는
기사가 났습니다.
이는 애완견을 자신의 가족처럼 생각하는
예배자들을 위한 노력의 일환이랍니다.
알 딜(Al Deal) 목사는
“애완동물, 특히 애완견을 집에 두고
다니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에게 자신의 애완동물과 함께
따뜻하게 환영과 위로를 받는 장소를
제공한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든 교인들을 교회로 불러
모으려는 노력이 가상합니다.
그러면 거기에 모인 개들은
목사가 전하는 설교를 이해할까 ?
설사 개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다 하더라도
구원의 복음의 메시지를 이해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인식의 구조와 능력 자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깨닫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늘에 속한 일, 성령에 속한 일은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이해(인식체계) 밖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문제입니다.
주님은 “눈에 보이는 땅의 일을 말해도
믿지 않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일을
어떻게 믿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믿지 않을 사람은
무엇을 보여주고 말해주어도
결국 믿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님들 !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거나,...
미워하셨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소홀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성도님들 !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설 때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서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마다 그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진리의 말씀이요
생명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만 구원받습니다.
믿음으로 받지 않으면,
아무리 수십 년 성경을 읽어도
니고데모처럼 ...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나이까'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믿음으로 아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그 구원의 능력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해의 대상이기
이전에 믿음의 대상입니다.
주님과의 모든 관계는 바로 이 믿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금산교회 성도님들이 !
우리가 믿는 바를 굳게 잡고, 거듭난 사람답게
성령의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금산교회 김화준목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