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한국의 기도 도량 / 남원 만복사지
만 가지 복 간직한 ‘쌍둥이 부처님’
서로 등 맞대고 서서 중생을 기다리다.
고려 때 창건…정유재란에 소실
10m 불상과 수백명 스님 머물러
김시습의 ‘만복사저포기’ 무대
10년간 비구니 홀로 복원 발원
▲임진왜란 후 왜군이 다시 조선을 침략했다.
수백명 스님들이 수행하며 기도했던 만복사가 화마에 휩싸였다.
그곳에서 살아남아, 눈과 비바람 견디며 천년을 서 있었다.
‘석조 여래입상’이라 불리는 만복사지 부처님, 흘러내린 눈물이 무릎을 적셨다.
목탁소리가 사라졌다. 향 사르던 냄새도 자취를 감췄다.
쉼 없는 정진을 당부하던 풍경도 입 닫고 자리를 떠났다.
수백명 스님들이 포행하던 길도 알 수가 없다.
대웅전 문 턱 닳도록 드나들었을 기도객의 신심 역시 몸을 숨겼다.
절터에는 과거를 짐작케 하는 유물 몇 점만 덩그러니 남았다.
남원 만복사지(萬福寺址, 사적 제349호)는 단정했으나 초라했다.
정성스럽게 발굴한 만복사 옛 자리에 초록 잔디 깔고 야트막한 보호 담장도 쳐놨지만 허전했다.
절터 앞으로 뻗은 국도엔 심심치 않게 차들이 내달렸다.
‘석조여래입상(보물 제43호)’은 외로웠다.
1979년 세워진 보호각 하나 덜렁 뒤집어쓰고 버텼지만 찾아오는 이 드물었다.
본디 자신이 있었던 전각에 감돌던 수행자의 향기도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다만 ‘만복사지오층석탑(보물 제30호)’과 ‘만복사지 석인상’, ‘석조대좌(보물 제31호)’,
‘당간지주(보물 제32호)’, ‘석등대석’만이 오래 두고 사귄 도반처럼 곁을 지키고 있었다.
▲정병에 든 물은 누구를 위한 감로수일까.
‘석조여래입상’ 등 뒤 약사여래는 손가락으로 정병을 붙들었다.
왜란을 겪고 몸과 마음에 상처만 남은 민초들을 위한 감로수이리라.
탐욕 높은 마음은 여래의 표정을 친견할 수 없다. 탐욕, 무릎 꿇어야 했다.
석인상에게 말을 붙였다. 금강역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본래 당간지주에서 남쪽으로 4m 떨어진 곳에 제 짝과 함께 있었단다.
도로변에 노출돼 사고 위험이 높아 보호 담장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분노를 표출하는 돌출된 눈은 매서웠다.
일말의 번뇌도 도량으로 들여보내지 않겠다는 위엄이 서렸다.
그러하나 짝 두고 홀로 선 그는 쓸쓸해 보였다.
몸과 목 사이엔 이어붙인 흔적도 남아 있었다.
객 시선이 그곳에 닿자 아찔했던 과거를 떠올리기 싫은 모양인지 눈길을 외면했다.
석인상이 인고의 긴 수행을 감내하듯
땅에 몸을 생매장하고 도로변에 머리만 내밀고 있었을 때였다.
새벽 2시경이었다. 불빛이 번쩍하더니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몸에서 분리된 머리가 뒹굴고 있었다. 1톤 화물트럭이 들이받았던 것이다.
목에 난 상처는 특수접착체로 달랬다. 사고 난 뒤에야 보호 담장 안에 터를 잡았단다.
석인상의 수모를 당간지주도 알았다. 바로 지척에서 일어난 일이었으니….
당간지주는 빛바랜 옛 위용을 몸에 새기고 있었다.
절에서 행사를 열 때 문 앞에 깃발을 내걸기 위해 세웠던 버팀기둥이 당간지주다.
흙에 묻힌 받침부를 고려하면 높이가 5m에 이르렀다.
규모만 봐도 옛날 웅장했던 만복사 모습이 그려졌다.
말 없는 당간지주는 안내판에 적힌 글로 자신의 존재가치를 설명했다.
그는 꾸밈없었다. 큰 돌이 거칠게 다듬어져 육중했지만 소박한 멋을 풍겼다.
부처님을 떠 받쳤던 석조대좌는 주인을 잃었다.
아랫부분 각 측면에 꽃장식을 담은 코끼리 눈 모양을 새기고
그 위엔 연꽃을 조각하는 등 부처님을 모시기 위한 몸단장이 애처로웠다.
금이 간 몸뚱이는
부처님에게 끝없이 마음을 의지했던 기도객들 신심을 대변하는 듯 안타까웠다.
석조여래 곁 오층석탑도 머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높은 받침부 위에 5층 몸체와 지붕을 얹었지만 머리는 없었다. 5.75m의 키가 무색했다.
층마다 몸체와 지붕은 각각 다른 돌로 만들었는데 지붕마다 귀퉁이 아래를 약간 치켜 올렸다.
▲ 머리를 잃어버린 오층석탑.
그 옛날 찬란했던 만복사는 역사의 뒤안길에서나 찾을 수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기록에 따르면 만복사는 문종 재위 시기인 1046~1083년에 모습을 드러냈다.
동쪽에 5층 높이 전각과 서쪽엔 2층의 전각이 있었다.
전각 안에는 길이가 35척(약 10m)의 청동불이 모셔져 있었단다.
당시엔 대웅전을 비롯한 많은 건물들과 수백명 스님들이 머물렀던 대찰이었다.
조선시대 숙종 때 간행된 ‘용성지’에는
“만복사 내에는 대웅전, 약사전, 장육전, 영산전, 보응전, 종각, 천불전,
나한전, 명부전 등 불전이 있었다”고 적고 있다.
남원부사 정동설은 방 2개를 중창해
스님들이 머무르면서 도량을 수호하도록 규칙을 만들기도 했단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 다시 조선을 침략한 왜구들이
1597년 정유재란을 일으켜 남원성을 함락, 도량에 불을 놨다.
만복사는 화마에 녹아내렸고 한 줌 잿더미가 됐다.
잿더미에서 되찾은 만복사는 터로만 남아있지 않았다.
화마를 이겨냈던 유물들이 “예 만복사 있었노라”며 온몸으로 표현했다.
전북대 박물관에서 1979~1985년 만복사지를 발굴했던 것이다.
보고서에 의하면 만복사는 중앙에 목탑을 두고 동, 서, 북쪽에 각각 법당을 배치한
일탑삼금당식 가람배치인 ‘品’자형으로 밝혀졌다.
대표적 유물로 고려시대 향로가 나왔으며 쌍조문, 귀면문, 인동문, 일후문, 범자문
그리고 명문이 새겨진 암막새, 연화문 수막새 등이 출토됐다.
▲만복사지 전경. 석인상과 석조대좌, 오층석탑, 보호각이 처연하다.
만복사는 고려시대 남원 지역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곳이었다.
지리산 실상사와 함께 명찰로서 그 이름이 높았다.
지금도 만복사지 부근에는 ‘백들’, ‘썩은 밥배미’, ‘중상골’ 등
당시 사찰 규모를 짐작케 하는 지명이 남아있다.
‘백들’은 만복사지 앞 제방을 말하는 데
스님들이 널어놓은 빨래로 제방 주변이 온통 하얗게 됐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썩은 밥배미’는 절에서 나온 음식 찌거기를 처리하던 장소다.
그래서일까. 만복사는
조선시대 김시습(1434~1493)이 썼던 ‘금오신화’의 ‘만복사저포기’ 무대로 쓰일 정도였다.
‘만복사저포기’는 만복사서 살던 남원 총각 양생이 부처님과 저포놀이로 내기를 해
죽은 여인과 사랑을 나눈 뒤 윤회를 끊으라는 여인의 당부에
훗날 지리산에 들어가 약초를 캐며 살았다는 얘기다.
석조여래는 그리웠다.
수행자의 목탁과 염불소리, 기도객의 발걸음 끊긴 도량은 화석에 불과했다.
애환이 밀물처럼 몰려왔다. 화마에 휩싸였던 곳에서 살아남아,
눈과 비바람 견디며 천년을 서 있었다.
문짝 하나 없는 처량한 보호각을 방패삼았지만 눈비는 아랑곳 않고 그를 때렸다.
눈물이 흘러내려 무릎까지 적셨다.
보호각 안에선 담배를 피거나 술을 마시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누군가는 축구공으로 벽을 차며 놀았다. 축구공 자국이란 상처는 고스란히 벽에 남았다.
석조여래와 등을 맞대고 선 약사여래도 그 마음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약사여래의 정병에 든 물은 누구를 위한 감로수일까.
석조여래 등 뒤에 새겨진 약사여래는 손가락으로 정병을 붙들었다.
왜란을 겪고 몸과 마음에 상처만 남은 민초들을 위한 감로수이리라.
혹여 이곳을 찾아올 기도객의 메마른 신심을 적실 감로수 아닐까.
서로 등 맞대고 선 ‘석조 여래입상’과 약사여래, 중생을 위한 그 마음이 꼭 같다. 쌍둥이다.
탐욕 높은 마음은 약사여래의 표정을 친견할 수 없었다.
무릎을 꿇어야만 상호를 볼 수 있었다. 탐욕, 무릎 꿇어야 했다.
석조여래의 기약 없는 기다림에 목탁소리가 돌아왔다.
고운 향냄새도 부처님 곁을 맴돌았다. 염불도 이어졌다. 고작 10년 전 일이다.
아니 10년씩이나 한 비구니스님이
임실 토굴서 2시간이 걸려 매일 같이 만복사로 달려와 종일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향 피우고 몇시간 씩 목탁 두드리며 염불했다.
토굴서 현몽한 부처님이 “제자야 너무 춥구나”하며 무심 스님을 만복사로 이끌었다.
그렇게 스님은 서로 등 맞대고 선 석조여래와 약사여래,
이 ‘쌍둥이 부처님’과 함께 겨울이면 찬바람과 눈을 맞았고 여름이면 비바람을 견뎠다.
‘쌍둥이 부처님’은 기도객을 보살폈다. 손발은 동상 걸리기 일쑤였으나 기도하며 치유했다.
스님이 기도하는 동안 다녀갔던 50대 중년 남성은 간이 안 좋았다.
한 달에 20일 이상 부처님 앞에서 두 손 모았고, 천일기도도 했단다.
다행이었다. 간은 80% 정도 회복됐다.
▲지난 10년간 만복사지 부처님께 기도를 드렸다.
무심(無心) 스님 마음에 욕심이 인다.
합장한 손엔 부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여법한 공간을 염원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완주 송광사 도영 스님이 무심 스님을 격려했다.
그러나 스님은 걱정이다. “부처님이 춥다”며 눈물지었다.
7월2일 남원시장을 만나 보호각에 문짝을 만들기로 합의하고서야 마음이 좀 놓였다.
그래도 삼가야 했건만. 무심(無心) 스님 마음에 작은 욕심이 인다.
합장한 손엔 부처님께 기도드릴 수 있는 여법한 공간을 염원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계절은 여름이건만 우리네 마음속 부처님도 추위에 떨고 있지 않을까.
마음 한 구석에 부처님을 내팽개쳐둔 채 잊지는 않았나.
찾는 걸 게을리 할 수 없는 노릇이다.
씨앗 뿌리지 않고 수시로 잡초를 뽑지 않은 논밭에 풍년 들리 없다.
신심 뿌린 마음밭에 탐욕 뽑지 않으면 풍년은 없다.
만복사 ‘쌍둥이 부처님’이 흘린 눈물로 그의 무릎이 시리다.
2013. 07. 22
최호승 기자
법보 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