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행 |
土 |
金 |
水 |
木 |
火 |
강약 |
육친 |
일주 |
식상 |
재성 |
관살 |
인수 |
470 / 430 |
수리 |
320 |
30 |
200 |
200 |
150 |
혜능 선사는 범양 사람으로 부친을 일찍 여의고 고아로 과부인 어머니와 광동 해남에 옮겨 살았다.
어려서 나무를 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서 어렵게 생활하였는데 하루는 주점에서 스님의 독경소리를 듣고 마음속에 開悟(개오) 되어 도를 터득하였다.
그 때 黃梅縣(황매현)에 있는 東禪寺(동선사)의 五祖(오조)이신 弘忍大師(홍인대사)를 모시고 출가하였다.
24세 辛酉년에
得傳衣法(득전의법) 스승으로부터 옷을 물려받았다.
39세 丙午년에
일가를 이루어 37년간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였다.
육조 혜능대사의 등신불상
그의 법신은 지금 광동성 廣州 남화선사에 법신에 漆이 된 채 영구히 모셔져 있다.
戊土 일주가 寅월에 출생하여 寅午戌 삼합 火국을 이루어 살인상생이 되고 사주가 순양으로 격국이 웅대하다.
戊土 일주가 지지에 삼합 火 국을 이루어 인수가 국을 이루어 신앙심이 강하다.
감명요결에 이르길
208 |
旺 |
印 |
土 |
體 |
(왕인토체) |
火가많은 |
戊己일생 |
信 |
仰 |
之 |
家 |
(신앙지가) |
신앙인이 |
분명하다 |
216 |
土 |
日 |
乾 |
宮 |
(토일건궁) |
戊己일생 |
戌,亥보면 |
情 |
通 |
神 |
佛 |
(정통신불) |
불교,예수 |
믿음깊다 | |
217 |
命 |
逢 |
天 |
門 |
(명봉천문) |
月혹日時 |
戌,亥보면 |
神 |
前 |
奉 |
香 |
(신전봉향) |
신전 봉향 |
지극 정성 |
389 |
子 |
丑 |
寅 |
生 |
(자축인생) |
천개어子 |
지벽어丑 |
靈 |
通 |
仙 |
傅 |
(영규선부) |
인생어寅 |
영통선부 |
戊土 일주가 인수가 왕하여 신앙심이 강하고, 土 일주가 지지에 戌 천문성을 놓아 불교에 믿음이 강하고 신전에 나가 향불을 사른다.
시주에 壬水 편재가 공망에 임하고 연주에 비견이 강하여 일찍 부친과 인연이 박하다.
인수와 양인으로 용신이 되어 명예는 매우 높으나 財富(재부)는 실속이 없다.
火, 土, 金을 보면 길하고 水와 木은 흉하다.
칠살이 천간에 나타나고 인수가 암장 되어 실질적이고 문장이 높아 지혜를 안에 들어있다.
乙卯(3세~12세) 대운에
乙卯 정관이 대운에 임하여 관살이 혼잡 되어 시주 壬水 편재의 기를 설기하고 부친 壬水가 대운 지 卯에 사궁이 임하여 부친의 기가 무력하다.
3세 庚子년에
乙庚 합으로 庚金 식신을 합거하고 庚金 식신이 子에 사가 되어 壬水의 기가 단절 되었다.
子,卯,午가 子卯 형, 子午 충으로 형,충하여 부친이 일찍 세상을 하직하였다.
乙卯 정관과 甲寅 칠살이 관살 혼잡 되어 일주를 극하여 고아로 홀어머니를 모시고 어렵게 살아간다.
丙辰(13세~22세) 대운에
丙火가 火생土하고 운지 辰이 연지 戌을 辰戌 충하여 비겁이 발동하여 대흉하다.
13세에서 22세 사이에 대한 전기가 전해지는 것이 없어 확인할 길은 없으나 이때 홀어머니를 모시고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 나무를 하여 시장에 내다 팔아 어렵게 살았다.
혜능(慧能: 638~713)의 본관은 범양(范陽: 지금의 河北省 啄縣)이며 속성은 노(盧)이다. 가세에 따라 영남 신주(新州: 지금 廣東省 新興縣)로 이주했다. 부친을 여읜 후 홀로 된 어머니를 봉양하며 나무를 팔아 생계를 꾸려나갔다.
辰운 말에 시장에 나무를 팔러갔다가 客棧(객잔)에서 스님의 금강경 독경소리를 듣고 頓悟(돈오)하여 도를 터득하였다.
시장에서 땔나무를 팔 때 우연히 불교신자인 스님이 금강경을 독송하는 경문을 듣게 되었다. 독경 소리를 듣고(一聞經語) 깨달은 바가 있었다고 (心卽開悟). 신회어록은 육조 혜능의 전기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독경소리를 듣고 있다가 홀연히 도를 터득하여 頓悟(돈오)의 경지에 들어 미소 짓고 있는 그를 유심히 바라보던 선비가 묻기를
"그대는 스님이 읽는 경문의 뜻은 아는 것인가?"
혜능이 경문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자 나그네가 감탄하여 도를 가르쳐 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여 은 10량을 혜능에게 주었다. 이 돈이면 늙은 모친의 잘 모실 수 있는 돈이었다.
나그네로부터 은 10양을 증정 받아 모친을 편안하게 모시고 자신은 집을 떠나 동선사에 계신 오조 홍인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기 위하여 찾아 출가 하였다.
22세에 庚申 년에
월주 甲寅과 甲庚 충, 寅申 충하여 모친을 떠나 기주 황매산으로 들어가 5조 홍인을 참문한 후 사람은 남북이 있지만, 불성은 남북이 없다고 하는 홍인과의 문답으로 입실하게 되었다."
혜능이 간파한 불성평등사상(인간불교사상)은 “사람이 곧 부처(卽人是佛)”라는 조사선으로 발전한다.
혜능은 홍인의 문하에서 8개월간 방앗간에서의 잡무와 수행을 병행하며 고된 생활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홍인대사가 설파하는 금강경의 해설을 듣게 된다.
아무런 저의 없이 순수하게(應無所住), 자신의 마음을 움직여라(而生其心)고 하는 말끝에 여래지견(如來知見)을 깨닫고 초기선종의 6조로 부촉을 받게 된다. 혜능이 홍인의 말 한 마디에 깨달았다[言下大悟]는 이 내용이 남종(南宗)이 제창한 돈오선(頓悟禪)의 수증방법이 된다.
돈황본 단경에는 “불성은 항상 깨끗하다(佛性常淸淨)”거나, 훗날 수정본의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는 게송의 구절은 “때때로 부지런히 털고 닦으라(時時勤拂拭)”는 신수의 게송(偈訟)에 대응해서 창안된 것이다.
혜능이 후원에서 나무를 패고 방아를 찧었다. 약 8개월이 지난 후에 하루는 오조이신 홍인대사가 혜능을 보고 악인을 만나 위해를 당할 가 걱정이라고 하고 혜능과는 담화를 하지 않았다.
뒤에 오조께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아 놓고 말씀하시기를
"本心 般若의 本性으로 게偈를 지어라. 만일 크게 깨달음이 있는 자는 내가 탁발 할 때 입던 의복을 주고 육조로 삼겠다."
당시에 혜능의 대운이 丁巳 대운이 들어왔다.
홍인의 법맥을 놓고 대사형격인 신수(神秀)와 벌인 게송(偈頌) 싸움도 선계(禪界)의 고전이다.
身是菩薩樹 心與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
신수가 ‘몸은 보리수요/마음은 밝은 거울이다/때때로 털고 닦아/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고 쓰자
글을 몰랐던 행자 혜능은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부탁해
혜능이 게를 지어
菩薩本無樹 明鏡亦非臺
本來無一物 何處惹塵埃
‘몸은 보리수가 아니요/마음 거울도 경대가 아니다/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끼랴’라고 응수했다.
불교의 정수(精髓)인 ‘공(空)’의 원리를 단박에 깨친 혜능을 알아본 홍인 선사는 그를 자정에 동굴로 불러 법의(法衣)를 전달하고 다른 제자의 시기를 우려해 피신시켰다.
오조 홍인대사 게를 판단하기를 신수의 게는
"문밖에 도달은 하였으나 문 안으로 들어오지는 못하였다.신수는 더욱 정진하여 다음에 다시 게를 지어 올리도록 하여라.
혜능의 게를 평하기를
"역시 見性를 하였다."
자아관념을 새로이 알게 된 상태를 가리켜 깨쳤다고 하거나 혹은 견성(見性)라고 하는 것이다.
혜능이 홍인의 문하에 들어 온지 여덟 달 밖에 되지 않은 행자의 신분으로 어떻게 교수사(敎授師)인 신수(神秀)를 능가할 수 있는 글을 지을 수 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무식한 나무꾼으로서 날마다 잡무에 허덕였던 혜능이 어떻게 박학다식한 신수를 능가할 수 있었으며 신수보다 먼저 견성(見性)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만일 혜능이 신수보다 먼저 홍인의 불법을 체득했다면 그것은 수정주의적(修定 主義的)인 명상의 수행과는 전혀 이질적인 색다른 선(禪)이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하면 혜능의 선은 신수의 선과 전혀 다른 선이었음을 시사한다.
혜능의 선이 신수의 선과 다른 선이었다면 그것은 결국 홍인의 선과도 다를 것은 물론이며 초기 선종의 보리달마 혜가 승찬 도신 홍인이 추구했던 수정주의적 명상과 전혀 다른 선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혜능의 선은 초기 선종에서 추구했던 좌선방편(坐禪方便)의 수정주의(修定 主義)에서 탈피하여 자성(自性)을 깨닫는 견성선(見性禪)으로 전환되고 있음을 간파해야 한다. 혜능에 이르러 초기선종의 능가주의를 버리고 반야주의로 일전했다는 것은 당조(堂祖)의 사조(思潮)가 귀족적인 사조에서 서민적인 사조로 전환(轉換)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중국불교에 있어서 선(禪)의 개념이 눈 밝은 신회(神會)에 의해서 반전되었다는 것을 인지하야 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견성선(見性禪)의 돈오사상(頓悟思想)을 제창함으로 해서 삼학일체(三學一體)의 전 불교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신회(神會)의 깊은 의도를 감지해야 한다.
초기선종에서는 능가주의와 이입사행을 중심개념으로 하는 좌선방편의 선을 정립시켰다면 혜능의 선종에서는 금강경을 중심으로 한 반야주의의 실천을 근간으로 하여 선의 개념을 정립시켰다고 보아야 옳다. 이것은 결국 혜능의 선은 초기선종의 선과 궤를 달리한다는 사실이다.
돈황본 육조단경의 내용 중에서 혜능이 나무를 팔려고 갔다가 금강경의 독송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기록은 하나의 복선으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왜 하고많은 경전 중에서 금강경의 일구에 눈이 열리느냐는 것이다. 당시에 선문에서 유행했던 경전은 능가경 이었을 것인데 왜 금강경의 일구를 등장시켰으며, 각계각층의 인재들이 수두룩할 텐데 왜 무식한 나무장수를 주인공으로 선발했는지 알 수 없다. 이것은 기존의 유식하고 귀족적인 선불교에서 탈피하여 대단히 서민적이며 일상적인 직무를 수행하는 일반계층으로 선을 확대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해야 옳다.
육조단경의 서두에 혜능이 금강경을 대하는 순간 심기의 변화를 느끼고 홍인의 문하로 들어가 여덟 달이나 잡무에 투여되었다는 것은 앞으로의 선의 개념이 일전되리라는 것을 시사하고 있다.
신회는 혜능의 선이 신수의 선과 다르리라는 것을 미리 예시하기 위해서 반야주의의 예봉에 해당되는 금강경을 등장했다고 보아야 옳다.
신회는 반야주의의 선사상을 구현할 실행자로서의 전형적 인물을 혜능으로 선택했다. 일상의 노동생활을 통해서 불법의 진수를 깨닫고 스스로의 육신을 움직여서 불법의 대의를 발현하여 진보적인 새로운 시대의 선불교를 제창하고 싶어 했다. 신수는 반야주의 선사상을 구현할 수 있는 선구자를 선택하여 대중들 앞에 내세우고자 했다. 신수가 선도하는 도회중심의 귀족불교 보다는 디딜방아를 찢는 노동생활을 통해서 불법의 진수를 체득한 혜능을 남종(南宗)의 조(祖) 육조(六祖)로 삼았다는 것은 당시의 시대상이 또한 그러했음을 엿볼 수 있다.
혜능이 스승으로부터 가사와 발우를 받을 때가
丁巳(23세~32세)대운
24세 辛酉년 이었다.
戊土 일주가 지지에 寅午戌 삼합 火국을 이루고 丁巳 대운에 丁火가 천간에 투출하여 월주 천간 甲木을 통관하여 살인상생이 되고 戊土가 강한 인수의 생을 받아 일주가 유력하다.
24세 辛酉년에
강한 일주의 기를 辛酉 순金으로 설기하여 총명하고 영리한 기능이 금과 같이 빛나는 게송을 지어 깨달음을 얻어 스승으로부터 대대로 비전으로 내려오는 가사와 발우를 하사 받고 육조로 인정을 받게 된다.
조계종의 선종은 달마 존자로부터 창시 되었다.
28) 보리달마존자 禪初祖
29) 혜가대사 二祖
30) 승찬대사 三祖
31) 도신대사 四祖
32) 흥인대사 五祖
33) 혜능대사 六祖
달마대사가 하남성 숭산 소림사에 거처하면서 9년간 면벽참선을 하였다는 달마동은 옛 치우동 치우사당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달마는 스리랑카 왕국의 왕자로 전해진다. 털이 많고 눈이 부리부리하며 얼굴이 검은 전형적인 남방 인으로 알려졌다.
그가 동쪽으로 온 까닭은? 선문답의 공안중 하나이다. 그는 부처의 가사와 발우(스님의 밥그릇세트)를 가지고 4세기 梁 무제의 초청으로 양나라로 왔다.
그 후 불교번성에 대한 자신의 공적을 묻는 양무제에게 <無 !> 라고 일갈한 후 梁 나라를 떠난다. 행방은 묘연하고 숭산으로 왔다는 전설만 전해진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는 신회어록(神會語錄)의 혜능전(惠能傳)을 인용하여 혜능의 근기와 행적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여덟 달 동안 디딜방아를 밟은 혜능의 근기는 대단히 수승했다는 것과 달마소전(達摩所傳)의 가사를 홍인으로부터 수여받고 즉시 그곳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
삼경에 방으로 들어오라고 하여 가사와 발우를 하사하였다. 다른 사람이 보지 않도록 하고 金剛經(금강경)설하였다.
혜능이 마음으로 금강경의 진수를 터득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스승과 뜻이 같았다. 혜능이 일체의 만법을 다 깨우쳐 자기 본성에서 떠나지 않았다.
혜능이 삼경에 스승 홍인대사로부터 법을 전부 받은 것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랐다.
오조 흥인대사로 부터 頓敎(돈교)와 이때 선조이신 달마대사가 가지고 다녔던 부처님의 가사와 발우가 대대로 <혜능>에게까지 역 1,000 여 년 동안 내려와 이때 6조 혜능으로 부터 가사와 발우를 전수 받았다.
당시 오조께서 혜능에 말하길 이 가사와 발우는 너에게 만 전하는 것이니 다음에는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마라. 나에게서 가사와 발우를 받은 것을 다른 사람이 알면 사람들이 너를 해칠까 두려우니 속히 이곳을 떠나거라.
「逢懷則止 遇會則藏」
오조께서 손수 혜능을 구강역 까지 배웅을 하셨다. 홍인으로부터 대법과 가사를 받은 혜능은 양자강을 건너 소주(韶州)의 조계(曹溪)에 돌아왔다고만 기록되어 있다. 혜능이 스승 오조를 떠나 남쪽으로 남행하여 두어 달이 지나 大庾嶺(대유령)에 이르렀다.
혜능이 도주하는 중에 수백 명의 괴한들이 가사와 발우를 빼앗기 위하여 쫓아 왔다.
뒤에 曹溪(조계)에 이르러 악인으로 부터 피습을 당하였으나 악인을 쫒아 버리고 네 명의 수렵 대를 만나 위난으로부터 벗어나 이곳에서 15년을 정진한 후에 사냥꾼들에게 설법을 하고 「肉邊菜(육변채)」를 먹으며 지냈다.
혜능은 조계에 있을 때 그물을 지키라고 하면 그물에 있는 짐승을 풀어주고 고기를 삶는 그릇에 야채를 삶아 먹으면서 정진에 정진을 하였다.
39세 丙子년에
광주의 法性寺에서 삭발 한 후에 宗師의 印을 받고 보리수 아래에서 東山法門을 열고 만 백성을 위하여 37년 동안 설법을 하였다.
■ 火, 土, 金운에 설법하였다.
조계에 돌아온 혜능은 40년을 금강경(金剛經)에 의거하여 여래의 지견을 열어 대중 교화에 진력했다. 소주의 조계야말로 혜능의 행화지(行化地)로 널리 알려진 고장임에 다름없다.
혜능이 조계에 돌아간 시기는 법성사(제지사)에서 수계한 직후인 의봉원년(儀鳳元年:676)으로서 그의 나이 39세 무렵이다.
67세로 입적(입적)할 때까지 38년 동안 조계를 근거지로해서 교화활동을 전개했다고 언급할 수 있다.
22세에 출가한 후 17년 동안 묻혀 살았음을 상기해 보면 혜능의 개당설법 시기는 39세가 된다.
혜능은 남해(南海)의 제지사(制止寺)에 이르러 열반경(涅槃經)을 강의하는 인종법사(印宗法師:627~713)와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유명한 풍번(風幡)의 이야기다.
역대법보기에 기록된 <풍번의 이야기>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연히 남해의 제지사에 이르러 인종법사의 <열반경>을 강의하는 회상을 만났다. 혜능(惠能)은 인종법사의 강의를 경청했다.
인종법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모두 바람이 깃발을 흔들고 있음을 보게! 윗 쪽에 깃발이 움직이고 있지 않는가?"
대중이 말했다.
"움직이고 있다."
어떤 한 사람이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고 있다."
다른 또 한 사람이 말했다.
"깃발이 움직이고 있다."
다른 사람이 또 말했다.
"이것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다."
다양한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며 다툼을 그치지 않았다.
혜능이 앉아 있던 좌석에서 일어나 인종법사에게 대답했다.
"여러분들의 망상심이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이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법(法)에는 동(動)과 부동(不動)이 없다."
인종법사는 혜능의 이 말을 듣고 경악하여 망연자실했다. 인종은 혜능의 말에 무슨 뜻이 담겨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인종법사가 혜능에게 물었다.
"거사는 어디에서 왔소?"
혜능이 답변했다.
"본래 온 것도 아니요 또 가는 것도 아닙니다."
인종법사는 법상(法床)에서 내려와 혜능을 방안으로 안내한 다음 자세하게 물었다.
혜능이 하나하나 상세하게 설명했다. 동산(東山)의 불법과 전신(傳信)의 가사를 부촉 받은 전후사를 설명했다.
인종법사는 혜능의 설명을 듣고 난 후 머리를 숙여 예를 표현한 다음 감탄하여 말했다.
"어찌 기약인들 할 수 있었으랴! 좌하(座下)에 대보살(大菩薩)이 있을 줄을!"
말을 맺은 인종법사는 다시 정례를 표한 다음 혜능을 청하여 스승으로 삼았다. 인종법사는 스스로 혜능의 제자라고 자칭했다.
인종법사는 혜능선사를 위하여 머리를 깎아 출가하게 하고 가사를 입혔다.
"좋은 일이고 반가운 일이다. 황매(黃梅)의 홍인대사(弘忍大師) 불법(佛法)이 영남에 퍼지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이곳에 있는 사실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까?"
모든 대중이 모른다고 말했다.
인종법사가 말했다.
"내가 설한 법문은 기왓장과 같다. 혜능선사가 홍인법사(弘忍法師)의 법을 이었으니 비유하자면 진금(眞金)과 같다. 참으로 심오하고 부사의(不思議)하다고 말해야 옳다."
인종법사는 대중과 함께 혜능선사의 발아래 정례하고 홍인소전(弘忍所傳)의 가사를 보여 줄 것을 간청했다.
인종법사는 혜능선사로부터 직접 보살계를 받았다. 그런 다음 인종법사는 대중과 함께 혜능선사를 전송했다.
혜능선사는 조계(曹溪)에 돌아와 널리 선법을 개연(開演)했다.
천하의 사람들이 한 결같이 조계의 불법은 부사의(不思議)하다고 말했다.
역대법보기(歷代法寶記)에 기록된 <풍번(風幡)의 이야기>는 조계대사전(曹溪大師傳)에 이르러서는 변화를 나타낸다.
전의부법(傳衣付法)의 강조와 함께 열반경(涅槃經)에 의한 문답도 더욱 자세하게 꾸민다.
신회어록(神會語錄)의 육조혜능전(六祖惠能傳)에는 인종과 만난 사례와 법성사(法性寺) 즉 제지사(制止寺) 계단(戒壇)에서의 수계(受戒)에 관한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68세 乙巳년에
神農(신농) 원년 上元(상원)일에 측천무후가 慧眼(혜안) 법사와 神秀(신수) 대사를 궁중에 초청하여 설법을 들으려 하였으나 두 분의 대사가 다 사양하고 혜능 대사를 추천하였다.
생불이라고 자처하는 측천무후가 내시 薛簡(설간)을 시켜 달려가 대사를 정중하게 초청하였다. 청컨대 대사는 속히 상경하여 설법을 해줄 것을 간청하였다. 그러나 대사가 병을 빙자하여 사양하며 조용히 시골에서 죽을 수 있도록 해달라는 간절한 서한을 올렸다.
不二法(불이법)을 설하고, 如來知見(여래지견)주어 위에 상주하였다.
9월 3일에 혜능대사에게 고려가사 1건과 水精鉢(수정발)과 소주자사에게 조칙을 내려 대사가 거주하는 절을 수리하고 國恩寺(국은사)라는 현판을 내렸다.
太極(태극) 元年(원년)
75세 壬子 7월에
문인에게 명하여 新州(신주) 國恩寺(국은사)에 탑을 건립하였다.
공사를 재촉하여 다음해
76세 癸丑년에 여름이 다 갈 때 쯤 탑이 낙성 되었다.
7월 1일에
모든 대중을 모아 8월에 이 세상을 떠날 것을 공표하고 眞假動靜偈(진가동정게)를 지으셨다. 七情(칠정)과 六欲(육욕)으로부터 벋어나 부동심을 확고하게 하는 것이 제일가는 義(의)다.
7월 8일에 문인들로 하여금 나무 얼개로 배를 만들어 新州(신주)로 돌아갈 배를 만들었다.
혜능선사의 고향 신싱샨(新興縣)에 있는 국은사가 있다. 이곳은 혜능선사가 입적한 곳이기도 하다.
절 입구에는 '勅賜國恩寺(칙사국은사)'란 현판이 붙어 있다. 스스로 '생불'이라 칭했던 당나라 측천무후가 내린 글씨다.
그의 국사가 신수화상이었다. 측천무후가 "국사보다 뛰어난 사람이 누구입니까?"라고 묻자 신수화상은 "혜능선사"라고 답했다고 한다.
측천무후는 세 번이나 혜능선사를 불렀으나 거절당했다. 결국 "대사가 못 오면 가사라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다.
절대 권력자였던 측천무후의 명을 거절한 힘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문턱을 넘어선 자리, 혜능선사의 부동심은 거기서 나왔지 싶다.
■ 8월 3일에
國恩寺(국은사)에서 제를 파하고 모든 제자들에게 각각의 자리에 정좌하도록 하고 自性眞佛偈(자성진불게)를 설하시고 게가 끝난 후 삼경이 되도록 정좌하셨다가 문인에게 이르기를
「吾行矣(오행의) 나는 간다.」고
하시고 앉은 채로 홀연히 입적하시니 향기가 온 방안에 가득하고 흰 무지개가 땅에 피어나고, 禽獸(금수) 새와 짐승들이 슬피 울었다.
혜능대사가 입적 할 시는
壬戌운 癸丑년, 庚申월, 甲午일 (혹 乙未일), 丙子시
대운과 유년에 壬,癸 水가 水극火하고 칠살을 생하여 일주를 공격하여 사망하였다.
후에 제자들이 대사의 시신을 等身佛(등신불)로 만들어 겉에는 옻칠을 하여 모시고 있다. 대사의 시신을 보니 지금도 살아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인터넷에서 혜능대사에 대한 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사주 해설에 일부 불교에 대한 해설은 인터넷자료를 인용하였음을 밝혀 둡니다.
혜능대사의 여러 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떤 학자가 불경을 들고 와 혜능 선사에게 물었다.
"이 부분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이 가르침을 주십시오."
혜능은 문자를 모르는 나무꾼 출신이었다.
"나는 글자를 모르니, 자네가 그 부분을 읽어보게. 그럼 내가 가르쳐 주겠네."
학자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니 글자도 읽을 줄 모르면서, 그 뜻은 어찌 아신단 말씀입니까?"
선사는 추운 하늘에 뜬 달을 가리키면서 조용히 말했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은 왜 보누."
여기서 달은 진리, 본래의 진면목을 말한다.
손가락은 그 진리를 담은 경전이니, 이미 달을 본이에게 손가락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어느 날 한 법사의 강론 도중 폭풍우가 일어 깃발(번·幡)이 펄럭였다. 법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그러자 대중 사이에서 ‘바람이다’ ‘깃발이다’ 다툼이 일었고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 이때 행자 혜능이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어느 날 한 여승이 혜능대사에게 물었다.
"글을 모르면서 어찌 그대가 진리를 안단 말이오?" 혜능은 한 마디로 상대를 제압했다.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
" 이것이 선종의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다.
한국 조계종의 명칭은 혜능 선사가 법문을 했던 남화선사의 뒷산인 조계산에서 유래했다.
그만큼 동북아시아 선불교에서 혜능이 차지하는 위치는 독보적이다.
중국의 선승 6대 조사
초조사; 달마선사
2조사; 혜가선사
3조사; 승찬선사
4조사; 도신선사
5조사; 홍인선사
6조사; 혜능선사
조계종을 비롯한 한국 선불교의 중시조는 중국 선맥(禪脈)의 씨를 뿌린 초조 달마(達磨)대사다. 인도 태생인 그는 9년간의 면벽(面壁) 수행을 통해 선(禪) 수행과 돈오(頓悟)의 전통을 세웠고 그의 제자인 2조(祖) 혜가(慧可), 3조 승찬(僧璨), 4조 도신(道信), 5조 홍인(弘忍), 6조 혜능(慧能)에 이르러 ‘선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이 같은 선종은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 전파돼 동북 불교의 기초가 된다.
한국에 조계종은 혜능선사가 머물렀던 중국 광동성 사오관시 조계산 남화선사의 산의 이름을 딴것이다.
당시만 해도 오랑캐 지역 출신으로 5조 홍인(弘忍) 선사의 불목하니에서 수제자가 된,
그래서 남종선을 우뚝 세운 인물이다. 그와 관련된 유명한 선문답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어느 날 한 법사의 강론 도중 폭풍우가 일어 깃발(번·幡)이 펄럭였다. 법사가 대중에게 물었다.
“바람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움직이는가.” 그러자 대중 사이에서 ‘바람이다’ ‘깃발이다’ 다툼이 일었고 아무도 대답을 못 했다. 이때 행자 혜능이 “바람도 깃발도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홍인의 법맥을 놓고 대사형격인 신수(神秀)와 벌인 게송(偈頌) 싸움도 선계(禪界)의 고전이다. 신수가 ‘몸은 보리수요/마음은 밝은 거울이다/때때로 털고 닦아/먼지가 끼지 않게 하라’고 쓰자 글을 몰랐던 행자 혜능은 다른 사람에게 대필을 부탁해 ‘몸은 보리수가 아니요/마음 거울도 경대가 아니다/본래 한 물건도 없거늘/ 어디에 먼지가 끼랴’라고 응수했다.
불교의 정수(精髓)인 ‘공(空)’의 원리를 단박에 깨친 혜능을 알아본 홍인 선사는
그를 자정에 동굴로 불러 법의(法衣)를 전달하고 다른 제자의 시기를 우려해 피신시켰다.
어느 날 한 여승이 혜능대사에게 물었다.
"글을 모르면서 어찌 그대가 진리를 안단 말이오?" 혜능은 한 마디로 상대를 제압했다.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
" 이것이 선종의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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