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진씨 4세조 한림학사 매호공 휘 화, 7세조 창양부원군 휘 사문 향사를 갖다.
지난 2025년 11월 23일(일) 오전 11시, 경기도 용인시 남사읍 원암리 38번지 선영에서 여양진씨 4세조 한림학사 우사간 매호공 휘 화, 7세조 금좌광록대부 단성익조공신 보문각 대제학 도첨의참리 창양부원군 휘 사문 향사가 있었다. 향사에는 진재환 여양진씨 대종회장을 비롯하여 각 지방 종친회, 매호공 후손 각파 문중에서 100여 명의 자손들이 참석하여 매호공과 창양부원군 선조의 높은 뜻을 기리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향사는 식전 행사로 먼 곳에서 찾아온 일가분들을 소개하는 시간과 용선 창양군종회장 인사와 재환 대종회장 인사, 영은 대종회 수보위원장의 수보편찬 관련 안내와 인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영업 대종회 도유사의 집례로 시제를 올렸다. 4세조 한림학사 매호공 분정은 초헌관 영은 대종회 수보위원장, 아헌관 보은 대종회 수석부회장, 종헌관 강석 안성 복거문중 회장, 집례 영업 대종회 도유사, 축관 영필 반곡문중 회장, 진설 기범 원암문중, 집사 문범, 창범 원암문중 회장이 맡아 진행했다. 매호공 시제 후 곧이어 7세조 창양부원군 시제가 있었는데 분정은 다음과 같다. 초헌관 용선 창양군종회 회장, 아헌관 일두 여주 지평공파 회장, 종헌관 명창 용인 용천문중 회장, 집례 영업 대종회 도유사, 축관 영필 반곡문중 회장, 진설 기범 원암문중, 집사 문범, 창범 원암문중 회장이 맡아 진행했다.
올해는 윤달로 인해 예년보다 보름쯤 늦춰진 날짜가 시제 날이 되어 원암골 참나무 군락지에는 앙상한 가지만 남아 아침 안개 속에 마치 동양화를 연상케 하는 풍경이었다. 오전 8시가 되어 매호공 묘소 관리동이 있는 원암골 주차장에 미리 맞춰 놓은 차례상과 점심 식사 차량이 도착했다고 연락이 와 서둘러 주차장에 올라갔다. 일해 주실 아주머니 세 분이 분주하게 음식물과 차례 제물들을 나르고 있었다. 관리동에서 접수에 필요한 탁자와 의자를 준비하고, 미리 준비해 놓은 예복을 정리해서 입기 좋게 걸어 놓고, 커피 물을 준비하고 두건을 제자리에 배치하는 등 분주히 움직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수도권을 비롯하여 멀리 부산, 울산, 진주, 대구, 포항, 강원 홍성, 김제, 창원, 고흥, 충주 등지에서 새벽에 출발해서 오실 분들을 생각해 따듯한 차를 드실 수 있도록 큰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았다. 주전자 물이 끓는 동안 주차장에 차량이 한 대 두 대 주차하기 시작했다.
시제 전 묘소 주변을 살펴보고 매호공 묘소 장대석이 여름 장마에 흙이 무너져 눕혀 있는 것을 바로 세우고, 창양부원군 묘소 앞 향로석 위치를 앞으로 끌어 배치하는 등 주차장 주변과 매호공 묘소 가는 길의 낙엽을 미리 청소하는 작업을 했다. 한편, 해마다 묘소를 찾아오는 길이 복잡해 원암리 입구부터 각궁말까지 매호공 묘소 가는 길 안내표지를 부착하여 찾아오기 쉽도록 했다.
해마다 향사를 앞두고 한 달 전부터 향사 준비를 하는데 제일 먼저 우편물 발송하는 일이다. 우편물은 해마다 총 250여 통 발송하는데 이 중 10% 정도는 반송되어 오고 있다. 이는 연로하신 분들이 유고 되어 점점 찾아오는 자손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젊은 세대들은 관심이 줄어들고 나이 드신 분들은 돌아가시는 상황에서 앞으로 매년 모셔 오던 시제의 명맥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가 하는 것이 모두의 큰 숙제로 남겨진 일이다.
다음으로 준비하는 것이 차례상을 준비하는 일이다. 옛날에는 시제 답 농사를 짓는 분이 차례상을 준비했는데 요즘 세태는 그렇지 못하다. 어쩔 수 없이 위탁하여 차례상을 준비하는데 적어도 한 달 전에는 예약 주문을 해야 한다. 차례상과 함께 야외에서 드실 점심 식사까지 100여 명분을 준비하려니 식당업체에서도 설 듯 나서질 않아 어려움이 따르는 실정이다.
다음으로 예복을 준비하고 식사 외에 드실 수 있는 음료수와 술, 물 등을 농협 마트에서 미리 장을 보아 놓았다.
한편, 매호공, 창양부원군 축문, 산신제 축문, 홀기, 분정기, 향촉금 수단지, 봉투, 싸인펜, 접수대장과 식전 행사 식순을 미리 정리해 놓았다.
어느덧 향사 올릴 시간이 되니 많은 분들이 관리동에 삼삼오오 모여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고 덕담을 나누며 그동안 소식을 묻고 하는데 이 시간에 헌관 분정을 짜야 하는데 가장 몸이 다는 시간이다. 일반적으로는 전날 이미 분정이 짜여 있어야 하지만 묘제에서는 여러 가지 변동상황이 많으므로 그렇게 하지를 못한다. 그동안 대게 헌관 분정은 당해 연도에 의미있는 분이 맞게 되며, 대종회장이나 멀리서 오신 후손에게 헌관을 맞게 하는 것이 관례였다. 올해도 그런 나름의 관례에 따라 분정을 했다.
도유사님의 낭랑한 목소리에 따라 집례를 주관하여 따듯한 햇살이 묘역을 비추는 때에 시제를 올리는 시간에는 주변 나무들도 숨을 죽이고 바람도 잠시 쉬어가고 산새 소리도 멈추었다. 모두 엄숙하고 숙연한 마음으로 초헌관이 강신례 올리고 참신례에 이어 초헌례, 아헌례, 종헌례을 올리고 예필로 시제를 마쳤다. 시제에 가장 중요한 것이 음복하는 행위이다. 이는 조상님과 내가 서로 교감하는 일로 아무리 시제를 잘 모셨다 하더라도 음복을 하지 않으면 헛차례가 되는 것이다. 음복은 꼭 음복주를 마시는 것만이 아니다. 차례상에 밤, 대추, 과일 등 먹음으로써 조상님과 교감하는 일인 것이다. 매호공 시제를 마치고 곧바로 창양부원군 묘소로 이동하여 차례를 지냈다. 두 분의 차례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이 됐다. 아주머니들이 미리 준비해 놓은 점심 식사를 하는데 야외에서 식사를 준비하다 보니 부족한 것이 많아 오신 분들에게 풍족히 대접해 드리지 못해 늘 죄송할 따름이다. 나름 세심하게 살펴보고 준비하지만 늘 놓치는 것들이 많았다. 특히 화장실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점, 음식 반찬을 따듯하게 해드려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 멀리서 오신 분들 여비를 드리지 못한 점, 오신 분들 일일이 소개를 다 못한 점, 이런 사항을 참고하여 내년에는 좀 더 철저히 준비하도록 노력할 것을 다짐해 본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참석한 일가분들이 모두 돌아가고 창양군종회 문중에서는 창양부원군 배위 이신 정경부인 순천박씨 묘역이 4km 거리에 있는 아리실로 향했다. 정경부인 순천박씨 묘역은 풍수에 의하면 금계포란형의 지세로 이곳에 석물을 세우면 봉황이 날아오르지 못한다고 일체 묘역에 석물을 쓰지 않았다. 매호공 묘역 능선 넘어 북쪽을 바라보는 큰 지원이 있는데 그 능선 중심 언덕에 정경부인 할머니 묘소가 자리 잡고 있다. 묘소를 찾아가는 길은 낙엽에 덮여 한 발 한 발 딛기가 힘들었지만 일 년에 한 번 찾아 뵙는 일이기에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준비해 간 음식을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차려 올리고 왔다. 가을 끝자락, 절기로 소설을 막 지난 날씨지만 아직 따듯한 날씨에 차례를 지내기에는 어려움이 없었다. 정경부인 할머니 묘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내려오니 어느덧 해는 뉘엿뉘엿 평택 무봉산 봉우리에 걸쳐 있었다.
매호공 및 창양부원군 향사는 해마다 음력 10월 첫째 주 일요일, 선조 선영에서 갖고 있다.
한편, 매호공은 한평생을 현실 세계의 관인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儒者로서 고려 후기의 문인으로 그의 시를 평하기를 대개 淸麗, 淸新등으로 ‘以淸爲主’의 시와 雄俊, 富麗, 奔放등으로 평가하고 있다. 그의 작품을 1784년 (정조8) 그의 15世孫 厚(후) 가 <동문선> <동인시화> <기아> 등에서 詩 作品을 찾아내어 <매호유고>를 刊行(간행)하였으며 이책은 1973년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에서 간행한 <高麗 明賢集>2에 影印되어 있다.
7세조 창양부원군은 高麗 29대 충목왕(1344-1348). 30대 충정왕(1349-1351). 31대 공민왕(1351-1374)의 3대 왕을 모신 신하로 충정왕 원년(1349년)보문각 대제학(寶文閣 大提學)을 지냈고 같은 해 10월 도첨의참리(都僉議參理)를 지내고 그다음 해(1350년)에 단성익조공신(端城翊祚功臣)이 되어 창양부원군(昌陽府院君)의 작을 받으셨다. 그는 이 시기에 처음 들여온(백이정) 성리학을 깊이 공부하였다.
또한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치며 학문을 몸소 실천하였으며 불교를 유독 배척하였다.
이 시기에 왕의 나이가 어려 왕의 외척(外戚)득세하고 있었다. 나이 어린 왕을 대신해 덕영공주가 모든 정사를 도맡아 하게 되면서 도장을 두고 치성을 올리는 등 재앙을 없앤다고 운수를 점친다는 명목으로 곳곳에 불교사찰을 짓고 도량을 세운다고 백성들을 동원하여 노역을 일삼으며 국고가 탕진하였다. 또한 고려 조정은 간신배 무리들이 극도로 국정을 흔들어 놓고 있었다.
이에 公은 民家를 돌아보고 地方의 여론(與論)을 수집하여 바쁜 농사철에 백성을 동원하여 사찰을 짓는 것을 중단할 것을 狀啓(장계)를 올리게 된다.
그러나 조정에서 올바른 여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권문세가의 농간이 날로 심해져 사리사욕을 탐하는 간신배 무리들이 임금 주위에 항상 들끌어 임금은 이 장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공은 개탄한 나머지 병이 되어, 관직을 사임하고 구성현 도촌장(지금의 용인시 남사면 원암리)남쪽의 천덕산 골짝에 은거하며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그러던 중 밖으로부터의 소식을 들으니 김용의 난이 일어나 공민왕이 흥왕사에서 참변(1363년 윤3월 초하룻날)을 당할 뻔하였다는 소식에 “이제 고려의 기운이 다하는구나”하며 천덕산 꼭대기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식음을 전패하기 십여 일만에 세상을 뜨셨다.
이에 마을 사람들이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이후 이 마을 이름을 원암(寃암 :원통하고 슬프다는 뜻으로)이라고 부르게 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첫댓글 매호공 묘제에 많은 후손들께서 참사하시어
매호공 선조님의 고매하신 삶을 되서기며 추모하였습니다
원암 문중에서 시제준비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