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을 창당한 해공(海公) 신익희 선생 양택 답사기
도로가 텅 빈 것처럼 한산한 지방도로를 달려와 민족지도자인 신익희(申翼熙)선생의 생가(生家)가 있는 광주시 초월면 서하리(사마루)의 마을입구에 차를 멈춰 세운다. 도로(안내표석은 `해공로` 라 음각 됨)에서 500m 남짓한 마을은 나비눈썹을 닮은 나지막한 산자락을 등에 두고 50여 호 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전형적인 남향 밭 시골말이다.
선생은 1892년 6월 판서를 지낸 신단(申壇)의 다섯 아들 중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본관은 평산(平山)이고, 자는 여구(汝耈), 호는 해공(海公)이다. 윗대조상으로 임진왜란 때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背水陣)을 치고 장렬하게 전사(자결)했던 신립(申砬)장군이 10대조 할아버지다. 선생은 이곳 생가에서 자라면서 10살 때에 이미 사서오경(四書五經)과 삼국지(三國志), 수호지(水許誌) 등을 독파(讀破)하였고, 12세 때는 수 십리나 떨어진 남한산성 보통학교를 뛰어 다니면서 호연지기를 길렀다고 전한다. 이듬해 아버지를 여의고, 3년 상을 마친 뒤 이명재(李明載)의 셋째 딸인 이승희(李承熙)와 결혼한다.
1910년 고향을 떠나 서울의 한성관립 외국어학교를 졸업하고, 1912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정경학부에 입학, 정세봉(鄭世鳳), 안재홍(安在鴻), 문일평(文一平)등을 만나 학지광(學之光)이란 잡지를 발행하면서 재일통일학우회(在日統一學友會)를 결성한다. 1913년 대학을 졸업하고 국내로 들어와 경주에서 동명강습소를 열어 개화지식을 보급하는데 앞장서며 중동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918년 6월 미국의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원칙이 발표되면서 해공은 본격적인 항일 운동에 발을 들어놓는다. 1919년 3․1운동 때는 이승훈, 유치호 등과 해외독립운동원과의 연락임무를 맡았는데, 연락임무 때문에 33인 민족대표자 서명에 빠지기도 하였다. 얼마 후 손병희와 같이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계속하던 중 전도교당 건축비에 충당할 돈을 독립군 군자금에 보태기 위해 국내에 잠입하였으나, 손병희가 이미 체포된 뒤라 3월 19일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상해에서 해공은 제1회 임시 의정의원으로 선출되어 내무분과위원과 외무분과 위원장직을 맡는 동시에 이시영, 조소앙 등과 임시헌장10개조를 제정하여 1922년 의원 부위장및 국무원비서장을 역임한다. 그후 임정 외무총장대리, 문교부장을 역임하고, 1923년 1월 18일 김상옥(金相玉)의사의 의거를 지휘하였으며, 장개석 총통 등 중국정부 요인들을 접촉하면서 독립운동의 지원을 받는다. 1945년 8․15 해방을 맞은 해공은 12월 1일 임정내무총장의 신분자격으로 26년만에 전북 옥구비행장을 통해 귀국한다. 1948년 제헌국회이래 1950년, 1955년 선거에서 고향인 광주에서 출마하여 내리 3선의 영예를 누리며 이승만 초대국회 의장의 뒤를 이어 2대 국회의장에 선출된다. 1953년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2세 대관식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친선사절로 우방각국을 순방하고, 2년 뒤 재야세력을 규합 조병옥, 유진산 등과 민주당을 창당하여 대표 최고위원이 된다.
1956년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선출되어 부통령 후보인 장면과 함께 "못 살겠다, 갈아 보자" 는 구호와 함께 전국적인 유세를 시작한다. 한편 이승만과 이기붕의 자유당은 "구관이 명관이다" 라는 구호로 맞받아 쳤지만, 민심은 점점 신익희 쪽으로 기우는 듯 하였다. 정권 교체를 부르짖는 야당의 슬로건이 국민들의 마음에 신선한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선거를 열흘 앞둔 한강 백사장의 유세 때는 수십만의 군중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곧 권력교체가 될 거라는 여론이 전국적으로 확산 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희망은 얼마 안가서 물거품이 되고 만다. 5월 15일 한강 백사장의 유세를 성공적으로 끝내고, 다음 유세지인 호남지방으로 이동 중인 열차 안에서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뇌일혈을 일으켜 숨을 거두고 만다.
제 1야당의 후보가 고인이 된 상황에서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개표결과 이승만 504만 6천437표, 조봉암 216만 3천808표, 추모(追慕)표인 고(故) 신익희 후보가 185만 표로 집계되었다. 신익희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막판 부정선거의 극치를 보인 이승만은 총 투표수의 80% 이상을 획득할 거라는 당초 예상을 깨고 겨우 52%의 저조한 득표율로 당선된 것이다. 부통령은 민주당의 장면이 이기붕을 누르고 당선됨으로써 자유당은 실질적인 패배를 한 선거였다.
이곳에 도착하기 전, 함께 동행하던 동료로 부터 심신당부가 있었다. 얼마 전 이곳에 들렸는데, 해공의 생가에 불이 나 선생의 손자가 숨지고,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된 30평 규모의 건물이 반소되어 우리가 현장에서 웅성거리거나 하면 문중 사람들이나 동네사람 들에게 눈총받기가 십상이니 언행이나 몸가짐에 각별히 신경을 쓰라는 부탁이었다.
마을로 들어가 일부로 생가로 들어가는 골목을 비껴, 마을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니 생가 뒤쪽 마당으로 연결되는 후문이 나타난다. 그러나 철문은 굳게 잠겨있고, 가시철조망을 두른 울타리 옆에 경기도 문화재 안내표지판만 비스듬히 세워져 있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 134호, 소재지: 경기도광주시 초월면 서하리 160-1
해방전후 시기 대표적인 정치 지도자로서 광복후 제헌국회 부의장, 국회의장을 역임한............(중략)
원래는 지금 위치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지점에 가옥이 있었으나 고종2년(1865) 대홍수로 집이 파손되어 1867년 경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고 전하는데...........(중략)
가옥은 안채와 바깥채로 구성되어 있으며............(중략)
이 집은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19세기 또는 20세기 초 경기지역 중소 지주계층의 가옥형태를 취하고 있다.』
내용은 을축(乙丑)년 대홍수 때 마을 옆으로 흐르는 경안천이 범람하면서 가옥이 유실되고, 이 터로 이주(移住)하여 해공을 낳았다는 내용이다.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생가 뒷마당에는 잔디 정원이 조성되어 자연석과 오석(烏石) 등의 기념비가 즐비하게 세워졌는데, 해공을 기리는 인사들과 명사들의 이름과 공적이 새겨져있다. 또한 미관을 고려한 정원수 등을 산뜻하게 가꾸어 동산처럼 꾸며 놓았다.
주변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렸으나 답사의 핵심인 생가를 전혀 조망할 수가 없다. 이왕 엎질러진 물, 정면 돌파를 감행하기로 하고, 올라왔던 길로 다시 내려간다. 주위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조심스럽게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 조용히 대문을 두들긴다. 그러나, 집안에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이 정적만 흐른다. 할 수 없이 옆집 골목길의 돌담에 바짝 붙어, 고개를 쳐들고 생가 안을 빼꼼히 들어다본다. 기와 목조로 축조 된 본가 대부분이 소실되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아, 화재 당시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상상이 된다. 요행 중 다행인 것은 바깥 사랑채는 더 이상 불길이 번지지 않아 원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돌담에 서서 생가로 들어오는 주맥을 살핀다. 마을을 포옹하는 나지막한 뒷산을 출발한 주룡(主龍)이 곤방(坤方)에서 나와 마을 뒤 오솔길로 크게 낙맥(落脈), 생가 뒤 울타리에 인접한 뒷집 마당을 통과하여 105°가량을 크게 휘어 기념비가 세워진 뒷마당으로 맥을 잇고는 본 채가 있는 해룡(亥龍)으로 접맥(接脈)된다. 해좌사향(亥坐巳向)을 놓은 생가는 도로건너로 웅장하게 솟구친 탐랑 목성(木星)을 안산(案山)으로 삼고 있다.
풍수에서는 탐랑성이 안산이 되면 수직 상승하는 기운으로 학문을 숭상하는 사람들이 많이 배출된다고 본다. 학문을 읽히면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고, 출세를 하게 된다. 그러나 문필봉을 안산으로 두고 출생하였다하여 평생 승승장구하는 것만은 아니다. 풍수에서 말하는 터란 어떤 시공(時空)이 있다. 즉, 생가에 거주하면서는 안산의 영향으로 학문에 정진하였다 하더라도, 터를 떠나 외지에 살면 그곳 지세의 영향력을 받는 것이 풍수에서 말하는 양택론이다.
웅장하리마치 높게 치솟은 안산이 터를 압도(壓倒)하여 해공에게는 일찍부터 학문의 길을 열어주었지만 일찍 생가를 떠나도록 유도하였고, 해공이 없는 지금, 필자의 눈에 비치는 것은 마을의 수호산과 터를 제압하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비쳐지고 자꾸만 눈을 거슬리게 한다. 그것은 대권을 눈앞에 둔 해공을 좌절시킨 주범으로 와 닿기 때문이다.
풍수에서 터를 볼 때는 음택(묘)의 경우는 주산(현무봉)에서 내려온 입수룡이 입수도두처(入首倒頭處)에서 혈장으로 들어와 용진혈적(龍盡穴的)했는가를 우선적으로 보는 것이고, 사람이 사는 양택(陽宅)은 보국(保局)을 이루는 자연경관(山水)과 함께, 경제성(生理), 사회생활(人心)을 판단해야 한다. 즉, 터를 감싸고 있는 뒷산의 현무, 앞의 안산, 좌편의 청룡, 우편의 백호 등이 수려하게 솟아 터를 환포(環抱)하면서 사세(四勢)가 화평한 형세라든가, 또는 대소쿠리처럼 앞이 탁 트이고, 물이 터를 감고 돌아 나가 생기(生氣)가 많이 모이는 터를 이루어야 한다. 또한 교통망의 연계는 활발한지, 동리의 인심은 후한지 등의 일반적인 사항까지도 포함한다.
이 마을은 주변경관이 넓고 수려할 뿐 아니라 배산면수(背山面水)하여 넓은 들판을 끼고 경안천이 흘러 이곳 사람들을 일찍부터 살찌우도록 만들었다. 또한 도로망이 잘 발달되어 동리사람들의 인심이 좋아 인근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였다고 한다.
답사를 마치고 마을 입구로 걸어 나오는데, 옛 명언이 뇌리를 스친다. `군주는 하늘이 내린다` 는 성인의 말씀이...........................
이곳 서하(西霞)라는 지명은, 마을 옆에 있는 경안천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고 있는데, 이 일대에 자주 안개가 낀다하여 `서하` 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러나 필자의 눈에 비치는 것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경안천의 지류(支流)가 두 줄기의 물길로 갈라져 흘러, 마치 새우수염처럼 보이기도 하여, ‘하(霞)’ 란 자의(字義)가 새우와 관련하여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 된다.
또한 사마루(四馬樓)란 지명은 고려말에 충신 4명이 말을 타고 이곳을 지나가다, 마을을 쳐다보니 그 형상이 마치 누각(樓閣)처럼 보여 `사마루` 가 되었다는 설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