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구간(원주-인제)-둘째 날(8월2일 토요일. 가끔 비)
내가 홍천을 도보여행의 코스로 잡은 이유는 홍천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홍천은 나에게 제 2의 고향인 셈이다. 어제 밤에는 너무 늦어서 홍천을 돌아볼 기회가 없었다. 오늘은 여유있게 홍천을 한 번 돌아보아야겠다. 저녁에 다시 오마고 금호장을 나서니 오늘은 토요일이라서 미리 예약하지 않으면 방이 없을지도 모른단다. 그것도 평소보다 비싼 값이다. 하는 수 없이 방을 예약하고 박제건이와 함께 해장국을 먹으러 나섰다. 공교롭게도 내가 살던 집이 바로 해장국 집이다. 그러니까 과거의 우리 집에서 아침을 먹은 꼴이 되었다(시외버스터미널 앞 ‘가보자’ 토종 순대 집). 박제건이 어제 만났던 횡성읍 공근면 창봉리로 데려다 주고 저는 제 고향으로 갔다. 나는 거기서부터 다시 홍천으로 들어가야 한다. 8시 30분, 시루봉 휴게소를 지나 9시 10분, 시동 입구의 S-oil 주유소에서 커피를 마셨다. 건너편에 3대 봉춘 막국수 집 간판이 보인다. 얼마나 잘 하면 3대째 막국수 집을 할까. 배가 출출하다면 한 그릇 먹어보면 좋겠다.
9시 50분, 삼마치 터널을 피해서 오른 쪽 구도로를 걷는다. 구도로로 가는 방향은 아무런 표지가 없어서 지도가 없다면 도저히 찾아갈 수 없게 되어있다. 그야말로 버려진 도로다. 이렇게 훌륭한 도로를 그냥 방치하다니 참으로 안타깝다. 그래도 가끔 차 한 두 대가 터널을 피해 구도로를 지나간다. 아마도 지리를 잘 아는 사람들인가 보다. 비는 아침부터 오락가락한다. 우비를 입었다 벗었다 하려니 아주 귀찮다. 모처럼 길섶에 딸기가 빨갛게 익었다. 몇 개를 따서 입에 무니 새콤한 단맛이 향기롭다. 다음에 올 사람을 위해서 조금은 남겨놓아야지. 삼마치 고개의 정상은 오옴산이란다. 사실 나는 중고등학교를 여기서 다녔어도 오옴산은 처음 알았다.
10시 20분, 용변을 보려고 삼마치 LPG 충전소에 들렸다. 60대의 아주머니 혼자 지키고 있다가 갑자기 나타난 나를 경계하는 빛으로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나도 화장실을 쓰고 싶다고 말하기가 민망하다. 그러나 어쩌랴. 사정이 급한데….하여간 화장실에 다녀오니 그 동안 아주머니의 표정이 많이 누그러져 있다. 아마도 내게 지나치게 경계한 것이 조금은 미안했던 모양이다. 비가 오는데 어디까지 가느냐며 커피를 준다. 역시 강원도 인심이다. 11시 10분, ‘하늘정원쉼터’에 들렸다. 30대 중반의 젊은 여인에게 맥주를 청했다. 우비를 벗고 맥주를 마시며 쉰다. 맥주만 시켰는데 작은 접시에 땅콩과 마른안주를 내온다. 안주 값을 따로 받으려나? 그러나 내 생각은 기우였다. 얼마냐고 물으니 놀랍게도 2천원이란다. 아니 다른 식당에서는 맥주 한 병에 3천원인데 안주까지 주고 2천원이라니…. 처음엔 귀를 의심했지만 분명히 2천원이란다. 참으로 놀랍다. 또 내가 요즈음 고야가 나느냐고 했더니 이미 철이 지났다며 자기네가 따다놓은 것을 한 봉지나 덜어준다. 참 인심도 좋다. 이래서 세상사는 맛이 난다. (고야=오얏, 자두의 토종으로 아주 작고 맛이 새콤하다.)
12시 10분, 장전평 버스정거장에서 길게 드러눕는다. 박제건은 서울로 갔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니 궁금해진다. 비가 그치고 해가 반짝 난다. 1시 10분. 5번과 44번 국도의 분기점에 도착했다. 이제부터는 교통량이 좀 뜸하겠지. 박제건과 다시 연락이 됐다. 연봉 삼거리에서 1시 45분에 만나서 함께 점심이나 먹고 헤어지자. 우리가 들어 간 ‘만수네 영양탕(033-435-5913)’은 아주 좋았다. 안주가 좋은데 그냥 넘길 수야 없지. 둘이서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고 또 즐겁다. 만수네 아주머니는 내가 홍천 농업 고등학교 9회 졸업생이라고 해도 별로 놀라는 눈치가 아니다. 거 참, 이상하다고 했더니 박제건이 ‘홍천에서 홍천 농고 나온 것이 무슨 놀랄 일이냐’고 핀잔이다. 그렇구나. 나 혼자 흥분하고 나 혼자 감상에 빠졌었구나. 박제건이 날 홍천농업고등학교로 데려가서 사진을 찍어주었다. 교장실에 가서 9회 졸업생이 오셨으니 버선발로 달려 나와 맞으라고 해야 한단다. 하긴 1963년에 졸업했으니 45년이 지났다. 교장도 우리 보다 젊을 게다. 그리고 박제건은 서울로 올라갔다. 참 너무 고맙다. 어떻게 신세를 갚지?
오늘 걸은 길 : 횡성군 공근면 창봉리-5번 국도-44번 국도-홍천읍. 21.5킬로미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