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평 '효석문화제' 그 메밀꽃 필 무렵
나마저 왜 이래야 하는가?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 이효석, 메밀꽃 필 무렵 중에서라고.
가산 이효석을 표현하려면 이렇게 남들이 하는 것처럼 똑같이 쓰기는 정말 싫었다. 그러나 어쩌랴! 효석을 생각하면 아니 메밀꽃을 보고 있노라면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그 많은 문장 중에서 이 한 구절이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니 할 수 없지 않은가?
8월의 끝자락을 부여잡고 비어 있는 가슴을 채우기 위해 홀연히 떠난 곳이 봉평마을이다. 돌아오는 9월 2일부터 11일까지 '제7회 효석문화제'가 개최되는 장소인 까닭으로 꼭 가보고 싶었던 차에 한적한 틈을 타 미리 행사장을 살펴볼 작정이었다. 날씨는 흐릴 듯 말듯 안개가 자욱하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바람은 분명 가을 냄새가 났다.
서해안고속도로를 타고 서안성IC를 빠져나와 여주IC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 장평IC에서 봉평면 창동리까지 약3시간여 소요되었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음은 단 하나 '두근두근' 때문이었다.
우선 북적거림을 싫어하는 나는 그저 한적하고 고요로운 효석의 체취를 느끼기 위해 효석문학관을 찾는다. 전체적으로 붉은빛의 외형이 약간은 낯설게 느껴졌지만, 내부로 들어가니 따뜻한 입김처럼 정감이 갔다. 영상물과 전시 작품들의 고고함에 들뜨기 시작한 짜릿함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고 낭만과 감성의 상징인 축음기가 있는 효석의 작업실 앞에서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지성과 미모가 뛰어 났을 법한 효석의 부인 이경원의 사진 앞에서 흥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273번지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가산 이효석. 현대 단편소설을 대표하는 뛰어난 작가로서 문학뿐 아니라 음악적 능력이 뛰어난 다재다능했던 사람. 그는 시대와 무관한 심미주의자였고, 서구 지향적인 모더니스트였고, 섬세한 감각의 예술가였다. 그와 가장 친했던 유진오를 비롯하여 이무영, 채만식 등은 1930년대 초반 이후 <동반자 작가>로 활동했고, 김기림, 유치진, 정지용 등 9명의 <구인회>는 순수문학을 추구하며 활동한 문학 동인회로 유명하다.
평소 막연한 동경심과 부러움 또는 애절함으로 기억되었던 효석을 찾아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바라 볼수 있음에 또 다른 생각으로 얼마나 감사를 했는지 모른다. 생이 짧든 길든지 간에 누군가 나를 찾아 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것에 대한 깊은 상념에 젖어 본다. 내 영혼은 잠들어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그 향기, 그 아쉬움, 그 사랑은 영원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그래서 많은 사람이 나를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는 설렘이 되어 봤으면.
효석의 나이 36세에 결핵성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나야 했던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린다. 2남 2녀 중 차남과 부인을 잃고 어찌 방황의 나날을 보내지 않을 수 있었으랴. 사랑하는 사람이 나의 곁에 존재치 않는데 삶의 의미가 어디 남아 있었겠으며 그 어느 곳에 마음 붙이며 창작을 위한 고통과 싸울 수가 있었겠는가를 생각하니 그저 가여울밖에. 평양으로 만주로 떠돌아다녀야 했던 젊은 날의 생애를 누가 돌려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의 작품 중 봉평을 배경으로 한 작품 「메밀꽃 필 무렵」과 「산협」,「개살구」에는 실제 고향을 배경으로 한 지명이 실명으로 명시되어 있을 만큼 애정이 가는 알짜배기 소설이다. 그는 가고 없어도 그의 향기가 아직도 남아 있는 듯 온몸으로 다가온다.
효석의 정기를 한 아름 안고 문학관을 빠져나와 생가를 향해 종종걸음으로 달려갔다. 언제나 그렇듯이 생가터라는 것 자체 외에 별 의미 없이 덩그러니 집채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보여주기 위한 복원으로 넉넉함이나 향수는 찾아볼 수 없는 그런 집이었지만 터는 터이므로 의미는 있었다.
생가보다는 차라리 가산 이효석의 생가 뒷산 비탈에 조성된 메밀밭이 더 눈에 띄며 신명이 났다. 역시 봉평에 온 이유는 뭐니 뭐니 해도 메밀꽃을 보며 그 무엇을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곳에서 오래 머무느니 차라리 메밀꽃 필 무렵의 소설 배경이 그대로 전해진다는 추억의 재래시장 봉평 오일장과 소설 속 주인공인 허생원과 성서방네 처녀가 사랑을 나누던 물레방앗간 그리고 동이 같은 장돌뱅이들이 즐겨 찾던 술집 '충주집'을 재현해 놓은 곳으로 빨리 가고 싶어졌다.
효석문화제의 주 행사장인 메밀밭에 다다르니 아직 수줍은 새색시처럼 종아리고 있는 하얀 꽃이 펼쳐져 보인다. 아, 저 아름다운 환상의 흰 융단을 보고 '소금을 뿌려 놓은 것 같다'고 표현하였구나! 하얀 메밀꽃을 표현하기에 소금 말고 다른 건 뭐 없을까 하면서 입속으로 종알종알해본다. 싸락눈, 떡가루, 진주 구슬, 비눗방울, 새하얀 아기 손, 하얗게 핀 곰팡이, 꽃구름. 아이, 아무리 뇌까려보아도 소금만큼 마땅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음에 조금은 짜증이 났다.
그 옆에는 소설 속 상징적인 장소 물레방앗간을 재현해 놓고 메밀을 직접 빻아 가루를 판매할 수 있도록 했고 그 내부에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을 천천히 걸으며, 야생화를 감상하며 읽을 수 있도록 조성해 놓았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정성을 다한 흔적이 보였는데 아기자기하고도 분위기 있는 연출에 박수를 보낸다. 작은 원두막 앞에서 기념촬영을 할 수 있도록 작은 공간을 배려한 것도 아름다운 마음이리라. 나도 누군가를 위해 자그마한 빈 의자 하나 마련해 놓고 기다리는 것을 배워야겠다고 다짐을 해 본다.
글을 쓴다는 것, 나를 표현한다는 것, 무엇을 만들어 낸다는 것, 그 어떤 것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내야 하는가? 누가 나를 알아줄 것인가? 메밀꽃 필 무렵 봉평에 효석은 오지 않는다. 다만 많은 사람의 기억으로 그를 맞이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 서산에는 왜 이렇다 할 문학관이나 문학제가 존재하지 않는 걸까? 내가 사는 서산에도 효석에게 뒤지지 않을 시인과 수필가의 고향인 생가가 있다.
<청춘예찬>으로 유명한 수필가 '우보 민태원' 과 <나비>로 이름이 널리 알려진 시인 '윤곤강'이 바로 그들이다. 그들의 후손이 알아서 하길 바라기보다는 지역의 문인들이 나서야 하지 않겠는가. 다른 지역으로 문학기행을 갈 때마다 느끼고 통탄을 금치 못하는 것도 거기에 있다. 내 지역의 훌륭한 문학인이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조차 기리지 못하고 있는 무능함이여!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이 있을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할지, 그렇다면 언제가 좋을지, 또 그렇게 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아픔은 없을는지. 이런저런 생각 주머니를 하나하나 꺼내어 펼쳐 보이다 보니 그저 마음만 심란해질 뿐이었다. 누군가에게 막연한 바람과 기대로 상처를 받느니보다는 내 안의 구름을 걷어내고 속 찬 열매를 가득 맺어 몸소 실천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키워내야 하리니.
갈 때의 어스름한 날씨와는 반대로 올 때의 화사한 햇살은 나에게 희망을 주는 듯했고 아직 화들짝 봉오리를 펼치지 않은 메밀꽃에서 나의 나약함을 살포시 감싸주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여유가 된다면야 하룻밤을 묵어가면서 달빛 고요한 무르익음으로 메밀 꽃술 한잔에 농익은 시 한 수 읊으며 밤새 흥얼흥얼 취하고 싶으련만 그저 까슬까슬한 안타까움만 남겨 놓는다. 아직도 혀끝에 동글동글 말리며 녹아드는 메밀국수와 상큼하고 담백한 맛의 메밀묵 사발은 잊히지 않고.
나 이렇게 새벽 동이 트도록 골똘한 생각으로 쥐어짜는 이유는 돌다리와 나무다리, 섶다리를 건너고 싶은 흥정천 개울이 눈에 밟히도록 아른거리기 때문이다. 너를 사랑 하고 싶다.
작성일: 2005/0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