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守令)이란 지방관을 일컫는 말로써, 옛날 이야기에서는 사또라 부르지요. 통일 신라와 고려에서는 군과 현에 지방관을 파견하였으나, 잘 아다시피 모든 군현에 지방관을 다 파견하지는 못했지요.
(고려에서는 지방관을 파견하지 못한 군현을 속군, 속현이라 하지요.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식입니다. 고려의 중앙집권체제에는 한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실이지요.)
조선에서는 8도 밑에 부, 목, 군, 현이 있는데 모든 부목군현에 지방관이 파견되었지요. 부, 목, 군, 현은 수직적인 지방 행정 구역이 아니고 모두 독립적인 지방 행정 구역인데, 호구 수, 경지 면적에서 부 > 목 > 군 > 현의 순이고 부사, 목사, 군수, 현령 모두는 관찰사(혹은 감사)의 지휘, 감독을 받았습니다.
문과와 무과 합격자가 대체로 수령을 맡는데, 당연히 국경 근처에는 무과 출신 수령이 맡았겠지요. 또한 문음(=음서) 출신이 하급 수령직에 임명되기도 합니다.
수령의 업무를 표현하는 말로 수령7사(守令七事)라는 것이 있는데,
첫째, 농상(=농삿일과 뽕나무 까꾸기)을 성하게 할 것
둘째, 호구(戶口)를 증식시킬 것
셋째, 학교를 일으킬 것
넷째, 군정(軍政)을 바르게 할 것
다섯째, 부역을 균등히 할 것
여섯째, 사송(= 민사 소송의 처리)를 바르게 할 것
일곱째, 간교하고 교활한 자를 없앨 것
입니다. 첫째, 둘째, 셋째, 다섯째가 모두 수취 원천의 증대 및 세금 행정의 바른 처리와 관련된 것입니다. 즉, 수령의 가장 중요한 업무가 수취 원천을 늘리고 세금을 제때에 무리없이 거두는 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섯째에서 전근대 시대에는 사법권이 지방관에게 있음을 알 수 있지요. 즉, 사법과 행정이 지방관에게 통합되어 있었던 2권 통합 체제 인 것이지요.(1894년 갑오개혁 때 재판소가 설립되면서 지방관으로부터 사법권이 분리됩니다.)
2. 향리
관청에 딸린 하급 관리를 아전(衙前)이라 하는데, 이는 이들의 근무 장소가 관아(=관청) 앞 쪽에 배치되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아전은 이서(吏胥) 혹은 이속(吏屬)이라고도 하며, 중앙 관청의 아전을 경아전이라 하고 지방 관청의 아전을 외아전이라 하는데, 외아전은 대체로 그 지방 출신자로서 대대로 세습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향리(鄕吏)>라 부르는 것입니다. 고려, 조선 모두 신분제도 상 중류층, 중인에 해당합니다.
고려 성종 때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신라 말 이래의 호족이 호장, 부호장 등의 향리로 편제됩니다.(물론 호족 가운데 상당수는 과거를 통하여 중앙 관리로 발돋음하면서 문벌 귀족이 되지요. 지방에 주질러 앉아 있는 호족은 성종 때 향리가 되는 것입니다.) 고려에서는 지방관이 파견되지 않은 속군과 속현을 향리가 자치했고 귀족은 수도인 개경에 집결되어 살았기 때문에, 향리가 향촌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습니다.(그러나 조선에서는 사족 혹은 양반이 향촌 사회의 지배자이지요.)그러나 고려 말기부터 국가에서 지방 세력을 억제하고자 향리를 억압하여 지방 관청의 실무자로 고정되면서 사회적 지위가 크게 하락합니다.
조선에서는 부정부패를 막고자 수령을 연고지에 임명하지 않는 상피제(相避制)를 실시하였기 때문에 수령이 지방 실정에 어두워서 아전 혹은 향리의 부정과 횡포가 심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에서 향리에게 녹봉을 지급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속된 말로 "알아서 해 처먹어라" 라는 말일까요? 그러니 향리의 부정은 당연한 것이지요.
조선에서는 중앙의 6조와 마찬가지로 지방 관청에 6방(이, 호, 예, 병, 형, 공방)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향리는 이 6방으로 나누어지지요.